생김새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각각 다른 것이 사람이라지만 먹고 자고 싸다가 저 세상 가는 인류의 보편적인 특성은 모두가 공유하듯 연애에서도 몇몇 상황들은 누구나 한번쯤 겪어 봤을 정도로 보편적인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서로 마음이 어느 정도 통했고 아무 문제될 것 없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고백을 했더니 어처구니 없게도 "미안해, 오빠 동생으로 지내자"하는 퐝당 시츄에이션일 것입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는데 디테일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어, 내 이야기군' 할 정도로 글로벌 스텐다드한 경험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별 내용은 없고 그냥 재미삼아 끄적거려 봅니다.
대학에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후배가 입학했습니다.
같은 과로요.
전공이 좀 특수해서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저는 복학을 한 상태였고 그 친구는 신입생으로 들어왔지요.
남녀관계가 다 그렇고 그렇듯 예전에 뭔가 이루어질 듯한 썸씽이 좀 있었지만 타이밍이 안 맞았었습니다.
그러다가 학년은 다르지만 같은 학교 같은 과에 함께 다니게 된 것이지요.
한동안 연락 없던 사이였는데 자연스럽게 다시 가까워졌습니다.
저는 제대한지 얼마 안되었기에 굉장히 이성에 굶주렸었고 최악만 아니면 된다....뭐 이런 상태였습니다.
이성적 끌림이 자연스럽게 생겼고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나갔지요.
그 녀석의 친구들과도 함께 억지이긴 했지만 같이 어울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화이트 데이가 다가왔지요.
그 전까지 나쁘지 않았습니다.
조금씩 대놓고 껄떡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름대로 확신이 있었고 고백만 간단하게 해치우면 땡게임끝이다라는 것이 명확해 보였습니다.
오래전 일이라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무튼 누구에게 물어봐도 결정타 한방이면 게임오버라 할만한 그런 상태였지요.
그래서 작전을 짰습니다.
군대에서 미래의 여자친구를 위해 종이접기를 했었습니다. 지금 하라고 하면 돈 줘도 못할 것 같은데 말년 병장 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시간이 안 갈 것 같았거든요. ㅎㅎ
자취방으로 놀러오라고 한 후에 밥을 먹고 그 선물을 줬습니다.
너무나 좋아하더군요.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궂이 특별한 멘트를 날릴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약속이 있다고, 솔로부대 친구들과 저녁 먹기로 했다더군요.
'아니, 이제 나랑 알콩달콩할 일만 남았는데 그 낙오병들 만나서 뭐하게?' 하는 의아함이 있었지만 선약이고 하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그날은 빠이빠이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좀 이상하더군요.
왠지 피하는 것 같고 집에 같이 가려고 기다리면 먼저 가라고 하고....
그러다가 며칠 후, 집에 가는 길에 그 쥐랄같은 말을 하더군요.
'오빠 동생으로 지내자'
조낸 황당했습니다.
그럼 그동안 눈웃음 살살 날리며 했던 행동들은 뭔데?
사람 가지고 장난치나?
다리에 맥이 풀리고 하늘이 노래지는 느낌. 오케이만 해준다면 다리라도 붙잡고 싹싹 빌고 싶었지만 묵묵히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지요.
"네가 그런 생각인 줄은 몰랐다. 나 혼자 오해했나 보다. 네 마음, 인정해주고 존중해주겠다."
그리고 깨끗이 돌아섰습니다.
그 친구를 정말 좋아했냐고요? 그건 별로 의미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본격적으로 연애를 한 것도 아니고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그 친구를 연애 파트너로서 제가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상대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전까지는 사랑이라 이름붙이기 보다는 '끌림'이라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입니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이 마인드 컨트롤인데 보통 답답한 마음과 무너진 자존심 때문에 여자에게 더 매달리게 되고 그러다 보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는 경우가 많은데 저의 경우엔 깨끗이 포기했습니다.
포기했으나 오빠 동생은 개뿔, 철저하게 쌩깠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줬던 종이접기 다시 토해내라고 했습니다. 뭐라 툴툴거리더군요. 줬던 걸 뺐냐.... 하면서요. 뭐 나랑 한 침대 쓸 사이도 아닌데 뭐라 생각하든 제 알바 아니었고 저는 저를 물먹인 그녀가 제 선물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열통터졌습니다. ㅎㅎ 하여 돌려받은 후엔 가차없이 쓰레기통으로.(재활용하려 했으나 도저히 양심상....)
'오냐, 네가 나를 하대해? 너가 그렇게 잘났어?' 라는 생각으로 이를 갈았습니다만 그 친구를 보면 중심이 흩트러질까 봐 애써 피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여자들이 왜 그런 말같잖은 말로 거절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주위 여자들과 대화해보면 여자라는 종족들은 그것이 상대에 대한 예의라 생각한답니다. 그것도 일견 사실이겠지만 '기본적으로' 일종의 보험 들어놓는 심리와 무관하지 않다고 저는 봅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요.
하여, 철저하게 마인드 컨트롤 하면서 그 친구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습니다.
제가 좀 상냥한 편이라 여자에게 나긋나긋한 편인데 기본적으로 그런 태도는 유지하면서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행동은 피했고 다른 후배와 똑같이 대했습니다.
가끔 얼굴보면 참 이뻐 보이고 어떻게 다시 한번 안될까하는 생각도 들고 졎같은 년이라는 울분도 생기고 했지만 잘 참아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마음도 정리가 되어 대하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았고 요뇬, 어떻게 나오나 어디 한번 보자 하는 느긋함까지 생겼습니다. 보통의 경우엔 서로 얼굴 볼 일도 없었겠지만 같은 과이다 보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러던 어느날 난데없이 밥을 사달라 그러더군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치.
뭐, 그때 실수였다, 나 준비되었으니 우리 찐하게 시작해보자...
이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도도하게 거절한 주제에 지금 다른 후배들과 마찬가지로 오빠 동생하면서 잘 지내는데 뭐 저에게 어쩌라는 겁니까.
다른 오빠 동생보다 더욱 친밀한 오빠 동생하자? 개소리. 내가 시간이 남아 도나? 내 코가 석자인데.
저는 그 상황을 즐겼습니다.
겉으로는 무뚝뚝하게 밥만 먹었지만 속으로는 '어쩌라고 요뇬아' 했습니다.
그러다가 알바간다고 쏙 빠져 나왔지요. 사람 애간장타게 만들게 이뻐 보였던 그녀였지만 솔직히 밥 사주는 돈도 아까웠습니다.
이후로 저는 지금의 여친을 만났고 그게 벌써 7년전 일이군요.
여친과 손잡고 그 친구 앞을 보란듯이 지나갈 때의 쾌감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제가 오늘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겁니다.
당췌 이해 불가능한 여자라는 종족의 18번인 '오빠 동생으로 지내자' 라는 멘트 앞에서 너무 좌절하지 말자.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힘들지만 뒤에서 아껴주는 오빠라도 만족한다?
연애에서 피해야 할 것 중 하나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감당하지도 못할 '숭고한 사랑'이라는 레퍼토리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불쌍한 중생이 주위에 한둘이 아닙니다.
나이 서른 먹고 보니 사랑, 그거 별거 아니더군요.
연애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상대를 찾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엔 결핍이 채워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커져만 가기 때문에 문제이고 그러한 고통을 감내할 정도로 속이 단단하지 않다면 훗날 전혀 아름답지도 않고 숭고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짜증스러운 기억 중 하나로 남을 확률이 높습니다.
돌아서는 것이 상책입니다.
도저히 포기할 수 없으면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다고 생각하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가 온전히 바로 서야 연애를 제대로 할 수 있지만 이런 경우엔 이리 저리 휘둘리기만 할 뿐입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 마음을 비울 수 있다면 마음의 여유도 생기고 훗날 밥 사달라 불러내서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낑낑대는 상대와 대등한 상태에서 연애의 역사를 제대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도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에 그 가능성마저 없애버리면 안되겠죠.
뭐 언제나처럼 이론대로 안되는 것이 문제겠지만....
암튼 힘들 내시고 좋은 경험 많이 하세요.
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