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너무 답답하네요.

너구리오총사 작성일 11.02.02 01:4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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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방금까지 좋아하는 사람의 연애 상담을 해주고 왔습니다.

그 사람은 아마 제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겠지요.

눈치챘다면 제게, 한 번 고백해 보라든지, 용기를 내면 될 거라든지 하는 얘기는 하지 않았을 테지요.

그리고 제게 연애 상담을 하지도 않았을 테지요.

 

그 아이는 저보다 6살이 어립니다.

제가 23살, 그 아이가 17살이던 해 여름, 제가 일하는 기관에 봉사활동을 왔던 그 아이를 처음 봤을 때는 그저 여느 다른 여고생을 볼 때와 똑같았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대하는 것이 서툴어서 아주 어린 꼬마가 아닌 이상,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모두 존댓말을 쓰는 저에게 먼저 편하게 얘기하라고 하고,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처럼 가까이 다가와 주었던 그 아이에게 저는 조금씩 마음이 가고 있었습니다.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니었고, 그 아이가 봉사활동을 오는 방학 중에 마주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고등학생 시절, 그 시기를 보내고 있는 그 아이에게 저는 행여나 방해가 돨까 싶어서 쉽사리 연락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그 아이와 연락조차 닿지 않은 채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처음 보는 번호에서 문자가 한 통 왔습니다.

"오빠, 잘 지내?"

한 번도 본 적 없는 번호였지만, 문자를 보는 순간 문득 그 아이가 떠올랐습니다.

설마.. 아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신호가 가고, 잠시 후 들린 목소리는 역시나 그 아이였습니다.

하나도 변하지 않은 그 목소리가 정말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요즘 남자친구와 사이가 좋지 않아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그 아이의 말에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짧으나마 제가 가진 연애지식을 총동원해서 그 아이의 질문에 답변을 해줬고, 그 뒤로도 저와 그 아이의 연락은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틀 전, 문득 저에게 좋아하는 사람 없냐고 물어보는 그 아이에게, 저는 사실 그대로를 말하지는 못했습니다.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아이 자신이라는 사실은 숨겼습니다.

행여나 제 고백 때문에 그 아이와 다시 멀어지고, 불편해지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도 모른 채, "일단 용기내서 고백해 봐. 오빠는 착하니까 분명히 잘될 거야."라며 저를 격려해주는 그 아이를 보며, 약간의 죄책감마저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헤어진 남자친구 때문에 힘들어하는 그 아이에게 저는 또다시 제 마음을 숨긴 채, 그저 좋은 오빠가 되어서 위로해주고 다독여줄 뿐입니다.

지나간 사람은 잊어버리고, 더 행복해지라고.

그 사람에게 너 없이도 잘 살고 있다고 보여주라고, 그 사람 없이도 너무 행복해서 그 사람을 생각할 시간도 없다는 걸 보여주라고 말하면서도 제가 그렇게 해주겠다는 얘기는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제가 너무 답답합니다.

너무 답답하지만,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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