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초..... 미육군 항공단 폭격전술 중 주목할만한 변화가 하나있었다. 즉 종전에는 폭격기 편대가 목표물에 접근하면, 각 폭격기 마다, 자체적으로 조준을 하고, 준비된 폭격기부터 임의로 폭탄투하를 시작했었는데, 이제는 폭격기 중 선두를 맡는 편대장기를 지정해, 이곳에 가장 유능한 폭격조준병을 배치하고, 편대장기가 투하를 시작하면, 밀집한 다른 폭격기들이 무조건 동시에 폭탄을 투하하는 방법..... 이것은 완전히 "모 아니면 도"의 폭격전술이었지만, 전반적으로 폭격의 정확성을 높여 꽤 성과를 거둔 전법이었다.
반면 이 당시 독일은 연합군 폭격기들을 제대로 요리하는데 익숙치 못했다고 해야 할것 같다. 즉 대규모 폭격편대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각 비행대마다 긴밀한 공조가 필요하고, 시간차 공격으로 마치 도미노가 쓰러지듯, 폭격기의 항로를 따라 가장 가까운 비행기지에서 순차적으로 요격기들을 이륙시켜야 했는데, 1943년초만 해도 독일 공군은 이런 씨스템과 조화로운 공격에 서툴렀다. 즉 각 전투기 조종사들의 개인 기량에 의존해, 폭격기를 치려했지, 비행대간의 손발이 잘 맞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 공군도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간의 협력체계가 자리를 잡아갔고, 최초 10 여차례 임무에서 성공적이었던 B-17은 최대의 고비를 맞게 된다. 그때가 1943년 중반...........
사진1 : Fw 190들이 B-17의 대편대를 공격해 들어가는 모습.... 서부전선의 상공은 폭격기들과 요격기들간의 싸움이었다고 정의할 수도 있겠다. 물론 나중엔 호위 전투기가 가세하지만.....
드디어 비행대간 슬슬 손발이 맞기 시작하면서 벼르고 있던 독일 공군의 첫 카운터 펀치가 1943년 4월 작열한다.... 그러니까 4월 17일, 독일 브렌멘의 Fw 190 생산 공장을 폭격하기 위해 무려 115대에 달하는 B-17 폭격기들이 출격했고, 이에 독일 요격기들이 강력한 방어에 나선 것이다. 이날 단 하루의 임무로 16기의 B-17이 격추되고 말았다. 보통 폭격 임무에서 5% 손실률이 성패를 가름하는 수치가 된다. 즉 출격기의 5%이하의 손실을 가지고 폭격을 완수하면 성공이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라는.... 단 5%씩 손실을 계속 본다고 생각해 보면, 약 20회의 임무를 수행하고 나면, 완전히 비행단 전체를 갈아치워야하는 수준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날은 5%는 고사하고 10%가 넘는 손실을 보았으니, 실패했다고 봐야 옳겠다.
이때 독일 요격기들은 일명 " twelve o'clock high " (12시 정면 상방) 전법을 사용했다. 즉 미군 폭격기대 편대의 정면 상방으로 이동해, 헤드온으로 날아 꽂히는 공격전법..... 이 공격법은 일설에 의하면 독일의 에이스 에곤 마이어 (Egon Mayer)에 의해 고안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서부전선 독일 공군 에이스들은 대부분 B-17이 전방이 가장 취약하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2,3 : B-17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G형의 모습.... 가장 많은 생산댓수를 기록했으며, 호위 전투기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독일의 산업기반을 폐허화한 폭격기 버전이다.
이렇게 B-17들의 다수가 독일 요격기들의 헤드온 공격에 나가떨어졌다는 사실은, 전방 방어 화력의 강화가 후속버전의 업그레이드에서 무엇보다 선행되어야할 보완 사항임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B-17G형은 전방 무장 강화에 촛점을 맞춰, 기수 아랫 쪽에 두정의 12.7 mm (50 캘리버) 기관총을 추가 장착한 기관포탑을 추가해, 총 15정의 기관총으로 화력이 강화되었다. (G형 중 후기형에서는 엔진도 개선된 터보차저를 장착한 R-1820-97 엔진을 달아, 고공 운항 능력을 강화했다. G형은 가장 많은 생산양을 기록한 버전으로 총 8680대가 생산되었다.)
사진4 : G형의 가장 큰 특징인 턱밑 수염 같은 기수 기관포탑의 모습.... 폭격수가 운용했다고 한다....
1943년 8월과 9월사이 기수 아래에 턱수염과도 같이 추가 기관포탑을 장착한 B-17 G형들이 영국에 주둔한 미군에 보급되었다. 이젠 절대 독일 요격기의 헤드온 공격에 허무하게 나가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각오를 보여주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