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최강의 에이스, 루프트바페의 에리히 하트만!!!

grunt3 작성일 07.01.25 14:4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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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최강이자 ... 역사상 최강의 에이스 Erich Hartmann(에리히 하트만)입니다. 사진으로 보면 알수 있듯이 금발의 상당한 매력남입니다. (훗~ 하고 날리는 뇌살적인 썩소 -ㅅ-) 1942년도에 JG52편대에 소속되었습니다. 당시 JG52편대는 BF109G로 무장하고 있었고 하트만은 이 기종을 전쟁 끝날때까지 조종합니다. (참고로, JG52는 역사상 최강의 편대라고도 일컫어지는 전투기편대입니다. 무려 10000 대의 격추실적을 보유한 무지막지한 편대로 일명 ButcherBird, 육식새로 불리기도 합니다.)

1942년 11월에 최초로 적기를 격추 했고 (IL2) 그 후 그 해에 한 대를 더 격추합니다. 1942년 7월, 일명 시타델 작전이 시작되고 하트만의 실적은 비약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합니다. 43년 7.7, 일곱대의 적기를 격추하고 8월달까지 50여대의 킬을 달성합니다. 8월말까지 킬은 90여대로 늘어나죠. (증가속도가 무지막지합니다.) 하지만, 8.19일날 전투기 손상으로 비상착륙하게되고 결국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히죠. 하지만, 호송도중 갑자기 복통이 났다고 꾀병을 부려 잠시 주의를 흐뜨려뜨린 하트만은 달리는 트럭에서 뛰어내려 결국 탈출에 성공합니다. 그 후 계속 작전을 수행한 하트만은 그 해말에 159대의 킬마크를 달성합니다.

1944년 들어서 하트만의 격추대수 증가율은 오히려 더 올라가고 이런 증가율은 독일 수뇌부에서도 믿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트만의 격추기록은 다른 윙맨들에게 두번이상 체크되게 되죠. 44년 3월경에 202대의 킬마크를 달성합니다. 이 때즘에는 소련 조종사들도 하트만의 콜사인인 '카라야 원' (Karaya One')을 익히 들어왔고 소련 수뇌부에선 하트만에게 막대한 현상금을 내걸었죠. 소련 조종사들은 하트만을 '검은 악마'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하트만은 그해 8월에 300번째 킬마크를 달성합니다. (하루에 11대 격추함) 헤르만 괴링은 하트만이 전사하면 군의 사기에 지장이 있을것을 걱정해 그의 출격을 막으려 했지만 하트만은 결국 수뇌부를 설득해 전투조종사로 돌아가게되죠. 300번째 킬마크후 하트만은 철십자훈장에 다이아몬드를 받게 됩니다. 44년 8월말경에 하트만은 이미 독일 공군 최고의 에이스가 되면서 같은 JG52편대 동료인 게르하트 바크혼을 추월하게 됩니다. 1945년도에는 아돌프 갈라트에게 제트전투기 편대에 참가하라는 요청을 받지만 거절하고 결국 전쟁이 끝난 후 하트만과 그의 동료전투기들은 미군에 항복하게 됩니다.

전쟁기간동안 하트만은 총 825소티를 뛰었고 14대의 전투기를 잃었습니다. (전투기손상으로 인한 비상착륙) 그의 킬에는 총 200여대의 소련 단발 전투기, 80여대의 미군 머스탱, 15대의 Il2 슈트루모빅, 10대의 쌍발 폭격기 등이 포함됩니다. 하트만은 자신의 실적보다 전쟁내내 한번도 윙맨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 제일 자랑스럽다고 얘기하곤 했죠.

하트만의 전술은 꽤 단순한 편이었습니다. 공격할때는 최대한 은밀히 최대한 가깝게 접근한 후에야 짧은 시간에 화력을 퍼부어 적기를 격추시키는 것이 요점이었습니다. (stalk-and-ambush) 예를 들어, 하트만이 즐겨 사용하던 전법중에 하나는 전투기를 적기보다 높은 상공으로 상승한후 순식간에 급강하해 들어가며 공격해 들어가는 전법이었죠. 하트만은 이럭식으로 적편대 전체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하트만은 사실 도그파이팅은 극도로 피하는 타입으로 도그파이팅 자체를 완전한 시간낭비라고 평가한 조정사였습니다.

전쟁후에는 미군이 하트만을 비롯한 많은 독일군인을 소련군에 넘겨줌으로써 소련의 수용소에서 무려 10년이나 지내야만 했습니다. (현상금까지 걸린 인물이니 소련이 곱게 보내줄리가 없죠.) 10년동안 소련은 그를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게 하려고 하기도 했고 동독공군의 요직을 제안하기도 했죠. 거기다, 서독으로 보내줄테니 이중간첩노릇을 하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하트만은 이 모든 것들은 거부하고 10년동안 옥살이를 했습니다. 10년의 기간동안 하트만은 한 번도 보지못한 3살된 그의 아들이 죽기도 했습니다. 1955년 서독으로 풀려났고 전쟁내내 매일 편지를 보냈던 그의 아내와 해후하게 됐습니다. 서독에선 서독공군의 편대장으로 취임하기도 했죠. 에리히 하트만은 1993년 9월 20일, 71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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