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피아니스트를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던 이 영화는 뛰어난 작품성으로 인해 몇 차례 상을 수상하기도 하였고, ‘애드리안 브로디’라는 배우의 이름을 전 세계로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영화 맨 뒷부분에 나오는 스필만을 구해준 ‘독일 장교’, 즉 ‘빌름 호젠펠트’ 대위에 관해서는 그다지 언급이 없다. 유태인이었던 스필만을 숨겨주고, 먹을 것을 갖다주었던 그는 소련군에게 붙잡히게 된다.
당시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스필만을 구해준 장교로 나오는 배우 토마스 크레슈만. 좋아하는 배우 중 한명..
후에 은인을 구하기 위해 스필만 자신도 찾아내려고 하였지만 소련 측이 포로 수용소를 옮겨가 버리는 바람에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빌름 호젠펠트는 소련의 한 수용소에서 1952년 죽었다.. 라고만 언급이 되어있다.
따라서 스필만에 대해서는 자세한 자료를 찾을 수 있을지 몰라도, 빌름 호젠펠트 대위에 관해서는 좀 찾기가 어렵다.
따라서 본인은 “빌름 호젠펠트” 대위에 관한 포스트를 적기로 하였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빌름 호젠펠트는 평화주의자가 아니었었다. 그는 오히려 나치 당원이었다. 호젠펠트는 히틀러를 존경하였고, 그를 믿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독일인인 것을 상당히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전쟁은 역사적이고, 위대한 순간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는 또한 크리스트 교도이기도 하였다. 그는 곧 ‘군인’과 ‘크리스쳔’이라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되었다. 그는 1939년 10월 폴란드의 한 포로 수용소의 지휘관이 되었다. 이 곳에서 그는 생애 처음으로 ‘구조 활동’을 하였다.
Zofia 라는 한 임신한 여성이 호젠펠트에게 자신의 남편이 수용소에 갇혀있다면서 그를 풀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호젠펠트는 그녀를 딱하게 여겨 3일 내에 Zofia Cieciora의 남편을 석방시켜주었다. 이 것이 그가 한 최초의 구조활동이었다.
그 뒤 1939년 12월 그는 ‘베그로우’에 있는 기차역에 있는 수비대원의 사령관으로 부임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이 곳에서 굉장히 충격적인 경험을 하였다.
그가 부임받은 이 기차역은 폴란드의 유태인들을 ‘게토’로 보내기 위한 기차들이 도착하는 곳이었다. 수많은 유태인들이 짐승처럼 밀려서 기차에 탈 때, 호젠펠트는 한 SS장교가 어린 꼬마를 마구 구타하고 있는 장면을 보고 만 것이다!
호젠펠트는 놀라서 그를 말리려고 하였으나 SS 장교는 화가 난 채 끼어들면 호젠펠트를 같이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였다. 결국 꼬마 아이는 죽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그가 ‘소코로브’의 한 기차역에서 유태인들이 끌려 갈 때 슬픈 어조로 내뱉는 유태인들의 희곡을 들었다.
호젠펠트는 이러한 일들에 굉장히 충격을 받았고,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을 하였다.
“독일사람들이 유태인들을 너무 심하게 대하기 때문에, 나는 이 가난한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바이다.”
1940년 6월 그는 바르샤바로 돌아갔다.
그는 바르샤바 독일군 본부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유태인들을 구조하기도 하였다. 1941년 11월 그는 호젠펠트는 독일군의 명령으로 라제이코스카 거리에 있는 스포츠 센터의 사령관으로 부임이 되었다. 이 곳은 독일 군인들이 운동을 하는 곳이었는데, 그는 이 곳의 사령관이 됨과 동시에 폴란드어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더욱이 유태인들을 구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가짜 증명서를 만들어주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Cieciora집안 사람들 대부분을 구해낼 수 있었다. Antoni Cieciora와 Zofia Cieciora의 매부 등을 게슈타포의 손길을 피하여 구해주었다.
1943년에는 Antoni Cieciora의 형제였던 Koszela를 구해주었다. 또한 호젠펠트는 Cieciora집안 사람들 뿐만 아니라 유태인 교도들도 구원해주었다고 한다. Leon Warm라고 불리우는 한 사람은 트레블링카 수용소로 이송되는 열차에서 호젠펠트의 도움으로 열차에서 뛰어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호젠펠트는 Leon을 자신의 담당하인 스포츠 센터에서 Mr. Warczynski라는 가명을 쓰고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그는 바르샤바에서 벽으로 둘러쌓인 게토 옆을 걸으면서 느낀 심정을 자기 편지에 썼다.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에 저주를 걸었다. 나는 이 거리를 걸어가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
1944년 5월 그는 마지막으로 가족을 방문하였다. 그는 패배를 자각하였는지 바르샤바로 돌아와서 자신이 찍었던 사진들과 편지들을 모두 소포로 가족에게 보내었다.
때마침 바르샤바에서는 봉기가 발생하였다. 호젠펠트에게는 붙잡은 바르샤바 저항세력들을 심문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는 심문을 하는 도중 이 봉기에는 남성들은 물론이고 여성, 그리고 퇴역장교, 청소년까지 가담을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들의 애국심에 놀랐다고 한다.
호젠펠트에 의해서 마지막으로 구원된 자가 바로 영화 피아니스트의 주인공이기도 한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이었다. 1944년 늦은 가을, 그는 우연히 스필만의 은둔처를 발견하였고, 호젠펠트는 그를 숨겨주고 빵과 물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영화에 보면 호젠펠트는 스필만에게 자신이 입던 코트를 벗겨서 주고는 자신도 철수대열에 따라 나간다. 실제로 호젠펠트는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허나 그도 1945년 1월 17일 소련군에 의해 붙잡히고 말았다. 처음에 그는 폴란드 내의 임시수용소에 붙잡혀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민스크의 노동수용소에 감금이 되었다고 한다. 소련은 호젠펠트가 군사기밀을 알 것 이다는 판단하에 호젠펠트를 심문하였고, 와중에 그는 고문을 당하였다고 한다. 결국 고문을 참다못한 그는 자신이 몰래 가지고 있던 자신이 여태까지 도왔던 유태인 인명부를 소련 측에 넘겼다. 물론 스필만의 이름 또한 그 안에 있었다.
하지만 소련 측은 이 명단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던 것은 이러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았던 Cieciora일가가 소련 측에 중재를 요구하였지만 헛수고였다. 그는 강제수용소에서 25년형을 선고 받고는 민스크에서 스탈린그라드 근처의 한 노동수용소에 수용되었다. 하지만 그는 25년 형기를 채우지 못하고 1952년 8월 13일 그 곳에서 사망하고야 말았다.
그가 죽고난 지 몇 십년이 지난 후 1989년 빌름 호젠펠트의 아들인 헬무트 호젠펠트가 소련 측에 요구를 하여 자신의 아버지가 묻힌 무덤에 갈 수 있었다.
비록 독일군이었지만, 자기의 신념대로 위험에 빠진 유태인들을 구해주었던 빌름 호젠펠트. 해외에서는 그에 관한 전기도 나왔다고 한다. 전쟁의 광기에도 불구하고 고귀한 생명을 지켜낸 이 사람이야 말로 진짜 ‘영웅’이라는 칭호가 필요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