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캔(jerrycan 또는 jerrican)은 강철을 프레스 공법으로 만든 튼튼한 연료통이다. 제리캔은 히틀러가 내린 비밀 프로젝트
명령으로 독일이 만든 것이다. 독일은 이것을 육군용 철통(Wehrmachtskanister)이라 불렀다.
전쟁이 예상되던 1939년에 독일은 수천개의 제리캔을 비축하고 있었다.
2차대전이 시작될 무렵에, 영국은 간단한 직사각형의 연료통을 갖추고 있었다. 이것은 강철을 프레스 공법으로 만든 2갤런
(9리터)짜리 연료통과, 양철로 만든 4갤런(18리터)짜리 연료통들이었다. 2갤런은 상대적으로 튼튼했지만, 생산단가가 비쌌
고, 4갤런 연료통은 주로 제 3세계에서 만들어져 싸고 많았지만, 매우 약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종이(flimsies)라고
불렀다.
'종이'는 유럽에서 옮기기엔 충분했지만,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싸우는 동안 영국 제 8군에게 심하게 방해가 되는 극도로
불만족스러운 물건이었다. 연료 수송이 험해 연료통에 구멍이 쉽게 나서 기름이 금방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에 자칫하면 연료에서 불이나는 경우가 많아 결과적으로 굉장히 소모가 심했다.
과거, 파울 플이스(Paul Pleiss)라는 미국 기술자가 그의 독일인 동료와 함께 인도에서 여행을 하다가 차를 만들게 되었다.
차를 만들고 나서야 그들은 비상용 물을 싣을 어떤 공간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기술자는 베를린 템플호프 비행장
(Tempelhof Airport)에서 본 비축품 중 세개만 가져왔다. <야전 사령관 괴링이 비행기를 보내 기술자가 집으로 보낼 때까지
그들은 11개 국가를 아무일도 없이 지날 수 있었다. (The engineer had access to the stockpile at Tempelhof Airport, and
just took three. They drove across 11 national borders without incident until Field Marshal Goering sent a plane to
take the engineer home.)>
플이스는 캔의 제조 설명서를 완성해 넘겨줌으로써 독일인 기술자는 그의 반역죄를 벗게 된다. 플이스는 캘커타로 향했고,
그의 차는 저장할 수 있게 되고, 그는 필라델피아로 돌아가게 된다.
플이스는 미국 장성들에게 캔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그들은 그것을 무시했다. 샘플 없이, 그는 성공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결국 뉴욕으로 차를 보냈고, 워싱턴엔 캔을 보냈다. 미 육군성은 1차대전 때 두개의 뚜껑이 달려 렌치와
깔대기가 있어야 열 수 있는 10갤런 짜리 캔 대신 사용하게 된다.
영국군이 처음 독일군 연료통을 보게 된 것은 1940년 노르웨이 침공 때였다. 영국은 즉시 그 뛰어난 디자인의 장점을 보았다.
연료통은 세 개의 손잡이가 달려 있어서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이 쉽게 들 수 있었다. 또한 옆면엔 버킷 릴레이의 줄 모양의
십자가 모양이 있어서 연료를 넣을 때 만재가 되어도 캔이 팽창할 수 있었다. 또한 캔에는 에어포켓으로 공기가 채워져
있어 물위에서도 뜰 수 있었다. 내부는 또한 플라스틱이어서 손상을 입지 않았었다.
거기에 캔의 입구에 용접이 잘되어서 물이 새지도 않았다. 영국은 이 캔을 노획해 사용하면서 'gerry'(german)이라 했다.
이후 'gerrycan' 또는 'jerrycan'라고 하면서 오히려 자국의 것보다 더많이 사용했다.
1940년 말, 플이스는 영국 런던의 장성들에게서 제리캔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플이스는 그의 두번째 제리캔 3개를
만들어 런던으로 보냈다. 미국의 제리캔은 캠프 홀래버드(Holabird)에 보내져 재생산되었다. 그것은 오직 손잡이와 크기,
그리고 형태만 그대로 보존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