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트 슈트덴트(Kurt Student) - 팔슈름야거 사령관

행동반경1m 작성일 07.05.27 16: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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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트 슈트덴트(Kurt Student) - 팔슈름야거 사령관

 

쿠르트 슈트덴트는 (1890년 5월 12일 - 1978년 7월 1일) 제2차세계대전동안 독일 낙하산부대의 지휘관이었던

 

독일공군의 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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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공수부대의 사령관(German Paratroopers - Fallschrimjager )


  * 팔슈름야거(Fallschirmjager, The German Paratroopers)는 독일의 엘리트 공수부대로

            처음으로 강습작전을 통해 크레타섬을 공중으로부터 점령하였다.
. 1940년 벨기에 "에반에밀"(Eben-Emael) 요새 점령작전(Operation Granit)
. 1941년 크레타섬 점령작전(Operation Mercury - the airborne invasion of Crete)
. 1943년 오크작전(SS지휘관 오토 스코르제니(Otto Skorzeny)와 협동으로

            무쏘리니(Benito Mussolini) 구출작전)
. 1944년 노르망디(Normandy) 방어작전
. 1944년 아른헴에 대한 연합군의 공수작전인 마켓가든(Operation Market Garden) 방어작전
. 1945년 4월29일 베를린 공방전에서 베를린 방어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동부전선에 대한 브리핑을 하다 영국군에 체포됨 (당시 공군상급대장)

 

* 크레타섬에 침투중인 팔슈름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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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트 슈트덴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최초로 독일 공수부대를 창설·모병·조직하고 훈련하며 전투에서 지휘한 4성장군이다. 말하자면 현대 공수부대 조직원리와 공수작전을 창안한 군인인 셈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시대 독일 공군 이름인 루프트와페에서 장군으로 복무하며 다른 공수부대원들이 준수하도록 공수부대 작전 기준과 절차를 표준규칙으로 만들어 제도화했다. 이런 공수부대 표준 작전규칙은 오늘날 각국 공수작전에서 그대로 활용되고 있다.

그는 1890년 5월12일 브란덴부르크 비르크홀츠에서 프러시아 귀족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리히터펠데 사관학교를 거쳐 1909년 독일군 장교로 임관했다. 그는 1913년 공군 조종사훈련을 지원했고 1년 후 제1차 세계대전 때 동부전선에서 조종간을 잡았다.

1915년 슈트덴트는 서부전선에 배치돼 대위 계급장을 달고 야크트슈타펠9 부대를 지휘했다. 그는 이 공중 전투에서 처음 부상했다.

공수부대는 항공기로 수송되고 공격지점 상공에서 낙하산으로 투하돼 전투에 임하는 특수부대다. 공수부대는 낙하산 및 항공기 글라이더 등으로 비행장이나 목표지역에 공중에서 뛰어내려 착륙한다는 점에서 낙하산부대와 구분된다. 낙하산부대는 지상부대와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전략·전술상 목표로 삼은 요지에 투하돼 전체 작전을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해 운용한다.

소련군이 1930년 최초로 낙하산으로 전투원을 적 후방지역에 투하하는 데 사용했다. 소련은 1930년 8월2일 처음으로 모스크바 군관구 연습에 12명의 낙하산병을 강하시키고 병기·탄약을 투하해 전투훈련을 했다. 오늘날에는 모든 나라가 공수부대를 보유하고 있다. 공수부대가 투입된 유명한 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크레타 섬 공수작전과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미·영 연합군이 3개 사단 공수부대를 강하, 착륙시킨 대규모 작전 등이 있다.

슈트덴트는 공중전에서 부상한 후 제1차 세계대전 후 축소된 소규모 독일군에서 10년간 공군장교로 복무했다. 그는 이때 신형 공군기를 이용, 공수작전술을 연구하고 실험했다. 1921년 그는 글라이더가 추락하는 바람에 머리에 중상을 입었지만 치료효과가 좋아 곧 군작전업무에 복귀해 민방위 단체를 조직했다. 이 민방위 조직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존속했다.

슈트덴트는 1928~29년 2년간 보병대대장을 거쳐 공수부대 작전훈련학교 교장직을 맡았다. 그는 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총통 자리에 오른 후 2년 만에 신설된 독일 나치공군에서 대령으로 승진했다.

이 시기 그가 맡은 임무는 훈련 프로그램을 발전시키고 군사작전과 전술 등을 창안, 제도화하는 일이었다. 슈트덴트는 미래 전투에서 대규모 공수부대의 엄청난 역할과 잠재력을 간파하고 최초로 공수작전을 실험한 소련을 방문, 그들의 공수부대 훈련과 실험과정을 면밀히 분석했다.

1937년 그는 공수부대가 새로운 전술역동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독일군 최고지도부를 설득, 그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그는 이 전술을 가리켜 공중으로부터 강하, 적진을 ‘수직포위’ 하는 입체작전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슈트덴트는 슈텐달에 독일 최초의 공수훈련학교를 창설, 공수부대원을 훈련시켰다. 훈련병들은 지원자 중심으로 엄격한 기준에 따라 선발했다. 그가 정한 엄격한 기준은 조국에 대해 절대충성을 바치고 군에 대해서는 절대복종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훈련병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백절불굴의 투지와 공수부대 간 상호 혼을 나누는 전우끼리의 의리가 필수 불가결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 적에게는 무자비성을 요구하고 있다.

슈트덴트는 훈련병을 뽑을 때 이런 선발기준 외에 최고의 신체조건과 더불어 정신적·심리적 시험을 거치도록 했는데 이런 신병 선발 방법은 전쟁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가 신병 선발 때 지원자들에게 이런 엄격한 기준과 조건들을 요구한 이유는 공수부대원들이 적 후방 위험한 공수작전 때 두려움 없이 용감히 싸우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공수부대원들이 작전돌입 때 보통 이상의 정신적 스트레스와 신체적 위험 정도를 견딜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팔슈름야거 모집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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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트덴트는 또 정규보병 전술과 무기체계들은 공수부대원들이 요구하는 작전기준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공수부대가 적 후방 사보타주를 위해 소규모로 병력전개를 해야 할지, 적의 주목표를 타격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전개해야 할지에 대해 수많은 실험을 했다. 슈트덴트는 여러 번의 지루한 병력전개 실험을 통해 적 후방에 기름을 한방울씩 떨어뜨리듯 하는 ‘오일 방울작전’ 개념을 개발했다.

이런 모형의 작전개념에 따라 대규모 공수병력이 한꺼번에 비행기에서 일단 적 후방에 강하한다. 공수부대가 공중 강하로 일단 지상에 도달한 다음 첫 번째 강하지점에서 하나의 소규모 병력단위를 형성, 일차적으로 병력전개의 방위선을 확대하고 이어 전투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다른 부대들과 일제히 합류하는 것이 오일 방울작전의 핵심 개념이다.

그는 이런 공수부대 낙하작전을 위해 경무기 수송을 담당하는 글라이더 공수부대들을 통합, 낙하산 보병을 지원했다.

슈트덴트는 또 공수부대가 낙하할 때 낙하산 끈이 쉽게 풀리는 장치를 개발, 사용했다. 그는 이어서 고도로 적중률이 높은 자동권총을 공수부대원들의 기본장비로 지급하는 한편 장기간의 전투 중 경계심을 지탱하기 위해 비상 레이션(전선 비상식량), 에너지를 북돋우는 알약과 기타 약품들도 공급했다.

슈트덴트는 이런 실험과 심리적·육체적 적응 능력을 검증하는 업무를 하는 동안에도 계급은 대령에 머물렀다. 그러나 상관들은 그가 1938년 7월까지 쌓아올린 이런 공수작전 개발 업적 등을 높이 평가, 소장으로 특진시켰다. 또 슈트덴트의 요청에 따라 독일공군의 특별군으로 제7공수사단 조직을 승인했다.

독일 공수부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첫 폴란드 점령작전에 참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2, 3개의 보병중대급 부대들이 노르웨이·덴마크 작전 때 지원을 맡았다. 슈트덴트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처음으로 주력 공수부대를 투입한 것은 40년 5월로 독일군의 전격전이 서부지역으로 방향을 전환할 때였다.

이때 많은 작전이 성공했는데 그 이유는 40년 5월10일 공수부대가 적시에 연합군의 비행장·교량들,

특히 에벤- 에멜에서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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