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슈름야거 - 독일의 낙하산부대의 역사
독일의 낙하산부대는 세계최초로 하늘을 통한 침투작전으로 크레타섬을 점령하였다.
- 1940년 4월 9일 노르웨이와 덴마크 비행장 점령작전(작전명 베저위붕, Weserubung)
- 1940년 5월 10일 에반에밀 요새 글아이더 공격
- 네덜란드(Holland) 침공작전
- 그리스-코린트 협곡 교량점거 작전
- 1941년 5월 20일 크레타섬 침공작전(Operation Mercury)
* 전사 1,915명, 실종 1,759명, 부상 1,632명
- 1942년 북아프리카 전선-튜니지, 엘 알라메인 전투
- 1943년 9월 12일 이탈리아 Gran Sasso에서의 무솔리니 구출작전.
* SS소속 대위 오토 스코르제니가 히틀러로부터 무솔리니 구출임무를 명령받아
팔슈름야거와함께 구출해냄. 이 작전의 직속상관이 "쿠르트 슈트덴트".
이 작전의 성공으로 스코르제니 대위는 철십자훈장을 수여받음. 영국은 "납치"라는 전술에
충격을 받았고, 1944년 4월 26일, 크레타 섬 근방에서 독일 장군 Heinrich Kreipe을 납치하여
영국으로 데려감.
- 1943년 9월 9일 몬테 로톤도(항복한 이탈리아 진압작전)
- 1943년 9월 17일 엘바섬(Island of Elba) 점령 * 영국군의 기만전술로 엘바섬을 점령한 실패한 작전
- 동부전선
- 1944년 1월에서 5월 몬테카지노(Monte Cassino) 방어
- 노르망디 방어작전(Battles for Normandy)
- 1944년 9월 네덜란드 방어작전- 아른헴에서 영국군의 격퇴
- 1944년 12월 16일 아르덴느 돌파 및 발지전투
- 1945년 베를린 방어작전
팔슈름야거(Fallschirmjager)는 2차세계대전동안 서유럽을 침공할때 글라이더로 강하하여 전략적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역사상 최초의 강하엽병이 되었다.(the first airborne infantry assaults in history)
1년뒤, 1941년 5월에는 지중해에 있는 크레타(Crete)섬을 공수부대에 의하여만 점령하였다. 그들의 희생때문에 히틀러는 다른 큰 공수작전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로인해 독일 낙하산부대는 전쟁의 나머지 기간동안 엘리트 보병부대로만 존재하였다.
공수부대를 낙하산병으로 사용한것은 원래는 소련이었다. 1932년에 러시아는 최초로 공수여단을 만들었고 1935년에는 키에프 근처에서 6천명이 낙하산 강하를 하는 연대급 강하를 통해 점점 큰 규모의 낙하산 부대를 연습하고 있었다. 공군의 낙하산 강하 행사때 몇몇의 외국인 참관자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명이 팔슈름야거의 사령관이 될 독일공군의 대령 "쿠르트 슈트덴트"(Kurt Student)다.
"쿠르트 슈트덴트"는 낙하산병의 잠재력에 흥분했다. 하지만 독일의 군대 재건이 시작된 1935년까지 독일 낙하산부대의 설립은 지연되었다. 그동안 "쿠르트 슈트덴트"는 글라이더 조종의 전문가가 되어있었다.
팔슈름야거는 1936년 1월에 "쿠르트 슈트덴트"가 사령관으로 설립되었다. 그리고 단독부대로써 급속히 성장하여 1938년이후에는 낙하산부대, 글라이더 부대, 엘리트 보병을 포함하는 사단으로까지 성장하였다. 그것은 크고 독립적인 엘리트 병력으로써 선택되어지고 고도로 훈련된 자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새로운 전술과 기술을 개발하여 능력을 키워갔다.
팔슈름야거는 독일공군에 소속되어 있었고 폭격으로 얻을수 없는 적의 전선 너머의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주요 운송수단으로는 융커스52(Junkers 52) 수송기가 사용되었으며 17명을 나를수 있었다. 또한 DFS230 글라이더도 사용되었는데 1톤에 가까운 무기와 장비, 부대를 실을수 있었고 비어있는 Junkers52가 견인을 하여 낙하할 지역의 상공에서 글라이더를 풀어놓았다.
- 1940년 4월 9일 노르웨이와 덴마크 비행장 점령작전(작전명 베저위붕, Weserubung)
1938년이후 팔슈름야거는 체코슬라바키아, 오스트리아, 폴란드 침공을 위해 준비했으나 취소되었다. 최초의 공격은 1940년 4월에 노르웨이와 덴마크에서 추가적인 부대들의 안전한 착륙을 위한 비행장의 확보를 하는 일이었다.
융커스52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노르웨이의 비행장에 착륙하여 기습적으로 착륙하여 공항을 확보함으로써 적들을 놀라고 겁에질리게 만들었다.
- 1940년 5월 10일 에반에밀 요새 글아이더 공격
두번째 작전은 알버트 운하에 잇는 에반에밀 요새의 공격이었다. 이 요새는 75mm 포가 16대, 120mm포가 4대인 포대가 있었고 회전포대가 3개가 있고 기관총좌는 수도없이 있었다. 지뢰밭과 철조망, 해자(moat, 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성 주위로 흐르는 물), 지하로 연결된 벙커와 터널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다. 하지만 제6군이 벨기에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세개의 다리가 필요했는데 이 포대의 사정거리에 있었다.
팔슈름야거 1연대의 1대대가 동원되었고 장교11명, 사병427명, 42명의 글라이더 조종수들이었다. 이 요새의 설계를 독일인이 하였으므로 설계도를 구해 나무로 모형을 지어놓고 공격훈련을 하였다.
1940년 5월 10일 새벽에 10대의 글라이더에 나눠탄 78명의 팔슈름야거에 의해 요새를 공격하였다. 그들은 경무기(Light weapons)와 몇개의 폭발물과 화염방사기를 가지고 벙커와 토오치카를 파괴하고 수비부대를 봉쇄하였다. 팔슈름야거의 손실은 6명의 사망자와 12명의 부상자뿐이었다. 하루뒤 팔슈름야거는 독일군과 조우하였고 수백명의 벨기에군인들은 항복하였다.
78명에 불과한 작은 엘리트 부대가 강력한 요새에 웅크리고 있던 당력한 적을 제압한 것이다. 이 성공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강습으로 기록되어진다.
- 롬멜의 제안
사령관인 "쿠르트 슈트덴트"도 네덜란드에서 심각한 머리부상을 입고 치료를 받았으나 살아났다. 몇년후 현직으로 복귀하자 어윈 롬멜(Erwin Rommel)장군은 대형 공습작전을 제안하였다.
- 1941년 5월 20일 크레타섬 침공작전(Operation Mercury)
그들은 연합군이 점령하고 있는 동부 지중해에 있는 크레타(Crete)섬에 전적으로 팔슈름야거 사단(Fallschirmjager division)이 낙하산과 글라이더로 강하하여 점령한다는 계획을 제시했고, 군수품은 하늘과 배로 지원하기로 했다. 앞의 작전의 성공에 감명한 히틀러는 소련에 대한 침공이 시작될 한달후 이전에 작전을 끝낸다는 조건으로 동의하였다. 하지만 이 전쟁은 더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독일군의 전략적 목표는 크레타섬을 차지하여 독일군의 전초기지로 삼는곳이고, 독일공군이 영국을 공격하기 쉽게 해주고, 롬멜에게는 이집트에 있는 영국군을 공격하기 위해 그의 북아프리카군단의 지중해를 통한 군함과 수송선을 영국군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크레타섬은 그리스에 있던 연합군이 증강되어 35,000명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연합군은 당시 비밀리에 가로 챈 에니그마를 이용해서 독일의 통신을 해독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레타 섬 공격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공격자인 독일은 상당히 부정확한 정보에 의존하고 있었고 이것은 막대한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독일군은 유럽 전역에서 작전을 위한 장비와 힘을 끌어모았다.
- 3개의 엘리트 보병 사단(낙하산 사단, 강습 사단, 산악사단)
- 500대의 융커스52수송기와 72대의 글라이더
- 부대를 이동하기 위한 민간 여객선과 경호를 위한 어뢰정
1941년 5월 20일 아침, 폭격기들의 강력한 폭탄투하가 끝나자 그 뒤에는 글라이더를 끌고있는 빽빽한 융커서52수송기의 밀집대형이 따르고 있었다. 11 비행군단은 JU-52 530대와 DFS-230 70대의 경 공격글라이더로 팔쉬름예거 병력을 크레타 섬으로 수송했다. 총 8,000의 팔쉬름예거 대원을 크레타에 떨어트렸다. 1,680명은 말레메에, 2460명을 Chania에, 1,380명을 Rethymno에, 그리고 2,360명을 헤라클리온(Heraklion)에 투하했다. 중요 공격이유는 크레타 섬에 있는 영국군의 비행장이었다.
독일군 수뇌부는 자신들의 작전이 실패할것을 예감했다. 부정확한 정보로 섬의 세 곳에 뛰어내린 병력들은 엄청난 사격과 연합군의 관측에 노출되어 변변히 반격도 못했고 착륙 후에 전사한 병사가 엄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