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전함 뱅가드는 제2차대전 당시 급속히 팽창하는 전함의 수요에 비해서 쓸만한 전함은 적은데다가 점점 감소하고 있다는 영국해군 내부의 위기의식 및 기타요인들로 인해 건조된 전함입니다.

이 전함이 기공된 것은 고속전함으로 분류되어도 할 말이 없는 순양전함 후드가 비스마르크와의 전투에서 어이없게 침몰하고 난 시점에서 5개월 가량 흐른 후였으니, 얼마나 영국해군이 고속전함의 보충에 목을 맺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뱅가드의 설계는 라이온 급 미완성전함과 같이 진행되던 15인치포 포격전함의 연장선상에 있는 물건이기도 했습니다. 조지 5세급 전함의 확대 개량형이기도 한 이 설계안은 원래 신형의 15인치포를 탑재하기로 예정은 되어 있었습니다만, 신형포의시험품이 무려 1942년말에나 나온다는 그런 물건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구식 15인치포를 탑재하자는 잠정안도 이 설계안에는 들어가 있었습니다.

뱅가드의 기공이 그토록 신속했던 이유는 바로 미리 연구가 상당히 진척되어 있던 15인치포 가상전함의 설계를 유용하였기 때문이었고, 이것이 뱅가드에게 숨겨진 비밀중 하나가 되겠습니다.

하지만 뱅가드에게 숨겨진 진정한 비밀은 좀 내력이 복잡합니다.

가상의 15인치포 전함에 탑재하자던 잠정안은 당시 영국해군이 보관중이던 커레이저스 급 대형경순이 사용하던 15인치포 포탑 4기를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포탑의 구조물을 신규로 제조할 필요가 없이 창고에 보관중이던 물건을 그대로 사용할 수가 있었습니다만, 문제는 8문의 포신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영국은 심각한 경제적 곤란에 빠지게 되며, 그 곤란을 받는 것에는 영국해군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기존함의 근대화 개장이 여의치 않은 것은 물론-13척에 달하는 15인치포 전함중 신전함의 설계에 준하는 개장을 받은 배가 고작 네 척이었습니다-이고, 훈련에 소모할 포탄의 조달조차 부족한 판이었습니다.

이런 곤궁한 상황하에서 기존에 배치된 전함용 포신의 신규제조도 재정*때문에 여의치 않은 것은 당연했습니다. 따라서 포신교체가 필요할때마다 커레이저스 자매가 사용하던 포신이 전용되었습니다. 즉 뱅가드가 기공되고 의장단계에 들어갔을때, 영국해군의 창고에 남은 커레이저스 급 경순의 15인치포 포신은 글로리어스가 사용하던 것 1문 뿐이었습니다.

여기다가 15인치포 포신을 신규로 제조하려고 해도 이걸 제조할 설비 자체가 남아있지도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자, 그럼 뱅가드는 포신을 어덯게 조달했을까요? 바로 이미 취역한 전함들에게서 포신을 앗아왔던 겁니다.

영국해군은 자신들이 소유한 전함들에 대해서 상세한 조달기록을 남기고 있었고, 여기에는 포신의 내력도 포함됩니다.

이 조달기록에 따르면 뱅가드가 의장단계에서 사용한 15인치 포신의 출처는 아래와 같습니다.

퀸 엘리자베스에서 2문

래밀리즈에서 2문

로열 소브린에서 1문(이건 소련에서 반환받을때 회수)

레졸루션에서 1문

모니터함 에레버스에서 1문

글로리어스에서 1문

뱅가드가 진수된 것이 1944년 말이었고, 상당수의 15인치포 전함들이 반퇴역 혹은 퇴역상태에 들어간 상태였던지라 포신의 전용은 상대적으로 용이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긁어온 포신의 상태도 제각각이어서 고작 50발을 사용한 글로리어스의 것에서 1백발 넘게 사격한 나머지 포신수명을 절반넘게 사용한 래밀리즈의 포신까지 한꺼번에 혼용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다면-가령 어느 일본인이 상정했던 환상의 16인치포 전함 "야마토"와의 결전 같은 난타전-이 벌어질 경우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었습니다만, 뱅가드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취역은 1946년 8월 9일, 전쟁이 끝난지도 1년이 다 되어가던 시점이었습니다. 늦게 태어난 덕분에 목숨을 건 싸움을 피하게 되었고, 문제의 노출가능성도 원천봉쇄가 된 것이었지요.

전함진화의 궁극점이라고 할 수 있다는 배에 숨겨진 비밀이랄까요, 아름답고도 새로운 외관에 숨겨진 오래된 병인(病因)을 한 번 들추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