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을 떨게했던..고구려출신의 명장들...

간달프의첩 작성일 08.01.07 23:22:13
댓글 22조회 6,952추천 7
119971561735725.jpg


이정기 (732~781)

 

 

이정기(李正己) 장군, 그는 동시대를 살았으면서도 고선지나 왕사례와는 달리 뜨거운 민족혼의 숨결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고구려를 멸?쳔?당나라의 중심부에 나라를 세워 손자대에 이르기까지 58년간이나 고구려의 명맥을 이끌어 나간 주인공이다.

732년에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태어난 이정기는 패망한 고구려의 동포들이 당나라 사람들에게 갖은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어려서부터 지켜보았다. 그래서 자연히 옛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웅대한 뜻을 키워 나갔다. 이정기는 타고난 무장(武將)으로의 재능을 인정받아 평로절도사(平爐節度使) 산하에서 비장으로 근무하였다.

755년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켜 화북지역을 장악하자, 장안의 당나라 조정과 요동지역의 평로절도부는 양쪽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정기(李正己)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요동지역의 군사들은 대다수가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정기는 이들을 규합해서 758년에 절도사 왕현지가 죽자 평로절도부를 접수하고 요동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동쪽에는 고구려의 국통을 계승한 발해(渤海)가 있었기 때문에 이정기는 따로 나라를 세우지 않았다. 대신 민족의 원수 당나라를 정벌하여 중원대륙에 또다른 고구려를 세우고자 하였다. 761년 이정기는 고구려 유민들로 편성된 2만여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마침내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상륙하였다. 당나라는 1개 주에 수만의 병력을 배치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이정기가 거느린 2만 군사는 그리 많은 병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산동성 부근에는 고구려 멸망 당시 강제 이주되었던 수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노예처럼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이정기의 군대가 고구려 부흥의 기치를 들고 중국 본토에 진격해왔다는 소식에 크게 고무(鼓舞)되었고 당나라 관헌에 저항하며 일어섰다.

이정기(李正己)의 군대는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두며, 당나라의 10만 대군을 격파하고 순식간에 10개 주를 장악하였다. 서기 777년에 이르러서는 조주, 서주 등 5개 주를 더 확보하여 총 15개 주의 광활한 영토를 차치하게 되었다. 이때 그가 지배한 인구는 평로까지 합쳐 130만여 호에 800여만에 이르렀다. 이 해에 이정기는 당의 수도 장안을 공격하기 위해 치소를 청주에서 운주로 옮겼다.

 

119971562680645.jpg
이정기는 781년에 당군과의 일대접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용교와 와구를 점령하여 당나라의 수송로인 대운하 영제거를 차단하였다. 대운하는 강남(江南)의 풍부한 물자를 낙양(洛陽)과 장안(長安)으로 이동시키는 당나라의 대동맥이었다. 그런데 이 대운하를 이정기의 군대가 점령하자 장안의 당나라 조정은 크게 당황하여 혼란에 빠졌다. 이정기는 10만의 대군을 양성하여 장안으로 총진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천명(天命)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인가? 치청번진(枝城藩鎭)의 고구려군이 변주의 당군 20만명을 무찌르고 성에 고립시킨 후에 낙양으로 진격하려던 순간, 큰 별 하나가 밤하늘을 가르며 떨어졌다. 이정기의 명(命)이 다한 것이다. 당나라의 마지막 거점지인 낙양과 장안을 눈앞에 남겨두고, 고구려 부흥을 위해 정의의 칼을 휘둘렀던 이정기(李正己)는 49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치청번진(枝城藩鎭)의 군사들은 비통함을 무릅쓰고 퇴각하였다. 장안에 이 소식이 알려지자 당나라의 황제 덕종(德宗) 이하 문무관원들은 기쁨에 겨워 3일 동안이나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다음해에 이정기의 아들 이납(李納)은 운주에서 왕위에 올라 국호를 제(齊)로 선포하였다. 그런데 이정기가 죽은 지 한 달도 안되어 그의 사촌인 서주의 이유(李劉), 덕주의 이사진(李師眞), 체주의 이장경(李長慶)이 당에 투항하였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운하를 다시 개통하였다. 대담하고 지혜로운 이납은 아버지가 못다 이룬 대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운하를 끊고 변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황하를 도강하기 위해 만들어둔 3천여척의 선박이 때아닌 가을 장마에 떠내려가 버렸다. 또 한번 중원 정복의 꿈이 좌절된 것이다. 그 후 이납은 꿋꿋이 왕국을 잘 지켜 나갔지만 불과 41세의 나이로 단명하였다.

 

 

 

 

 


119971565273756.jpg

 

고선지 (?~755)

 

 

[요약]고선지의 생

 

고구려가 망하자 아버지 사계를 따라 당나라에 가서 음보로 유격장군에 등용되고, 20세 때 장군에 올랐으며, 안서 절도사부몽영찰의 신임을 얻어 언기진수사가 되었고, 740년경 톈산산맥 서쪽의 달해부를 정벌한 공으로 안서 부도호에 승진하고, 이어 사진도지병마사에 올랐다.

747년 토번(티베르)과 사라센이 동맹을 맺고 당을 견제하려고 동진하자, 행영절도사에 발탁되어 군사 1만을 인솔, 파미르고원을 넘어 사라센제국과 동맹을 맺은 72개국의 항복을 받고 사라센제국의 동진을 저지, 그 공으로 홍려경어사중승에 오르고 이어 특진 겸 좌금오대장군동정원이 되었다. 750년 제2차 원정에 나가 사라센과 동맹을 맺으려는 타슈켄트를 토벌하고 국왕을 잡아 장안에 호송한 공로로 개부의동삼사가 되었으나, 장안의 문신들이 포로가 된 타슈켄트 국왕을 참살했기 때문에 이듬해 서역 각국과 사라센이 분기하여 연합국을 편성, 탈라스의 대평원으로 쳐들어왔다.

이를 막기 위해 다시 7만의 정벌군을 편성, 제3차 원정에 나갔다가 크게 패하고 후퇴, 귀국 후 밀운군공에 봉해졌다. 755년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정토군 부원수로 출전, 선발군으로 나가, 패전한 우군을 구원하기 위해 방어 담당지역을 무단이동한 사실에 대하여, 평소 사원을 품고 있던 부관이 과장하여 밀고함으로써, 진중에서 참형되었다.

 

 

 

세계역사는 그를 1200년전 실크로드 일대의 중앙아시아를 평정하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파키스탄까지 장악한 뛰어난 명장으로 기록하고 있다.그러나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고선지가 당나라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의 후손으로 당나라 장수로 활약했다는 이유에서 별다른 연구를 하지 않아왔고 특별한 고선지 전문연구가도 없다.

 

하지만 고선지는 실크로드의 역사를 좌지우지했으며 더 나아가 유럽문명의 성장에 막대한 기여를 했던 인물이었다.

 

200년 전, 죽음의 준령이라 불리는 '파미르고원'을 넘어 서역까지 정복했던 그는 군사들 모두가 두려워 진군하지 못하고, 당황제의 명을 받은 감독관 마저 꺼려했던 원정. 하지만 고선지는 1만 5천명의 군대와 함께 주저없이 출정했다.
그리고 그는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이 원정을 성공으로 이끌었고, 세계사는 그를 실크로드를 지배한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다.

 

고선지의 서역원정이 갖는 3가지 의의

첫 번째로 대당건설에 그가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당은 천산산맥 지역의 소무 9국이 아라비아와 중국 사이에서 양면사대정책을 취하면서 당의 서쪽 변경을 자주 침범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서정을 단행했고, 당시 서역행정을 총괄하고 있던 고선지가 그 선봉에 섰다. 고선지는 5차에 걸친 서정 중 탈라스 전투를 제외하고 1차에서 4차에 걸친 원정에서 모두 승리함으로써 당제국이 중앙아시아에 대한 지배를 계속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두 번째로 탈라스 전투에 의해 제지술이 서양으로 전파되는 등 동·서 문화교류에 커다란 영향을 * 점이다. 그는 1차에서 4차에 걸친 서역원정을 통해서 중앙아시아의 지하자원과 양질의 말 등을 중국으로 들여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했다. 예를 들어 석국 정벌에서 고선지는 양마·보옥·슬슬등 귀중한 보물과 전리품을 노획하였는데 이러한 보물은 처음으로 중국에 알려졌고, 이는 신라에까지 전파되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고선지의 서역원정으로 이슬람 문화권과 한족 문화권간의 상호 이해도가 증진되었다. 파미르고원 중앙아시아에 대한 당의 통제권이 사실상 종식됨으로써 석국·강국을 비롯한 이 지역에 대한 이슬람의 진출이 본격화되어 정착되었다. 이는 결국 송대를 거쳐 원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서북지방 일대의 이슬람화의 전주곡이 되었다. 아랍 제국의 이슬람교가 중앙아시아 국가에 전파되어 송·원대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서쪽 변방지역이 이슬람화되는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고선지는 용맹한 고구려인의 기질을 갖고 망국의 비운을 통감하며 심신을 연마하여 당제국에서 이민족 번장으로서는 드물게 세계의 지붕이라 일컬어지는 파미르고원을 넘나들며 서정을 단행한 고구려 출신 당나라 장군이었다. 중앙아시아를 평정해 대당건설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동-서 문화교류사적으로도 지대한 영향을 * 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나 평가는 동·서양을 통털어 그 존재를 찾기가 힘들다.


또 무의식적인 결과이기는 하지만 탈라스 전투로 인해 중국의 제지술이 이슬람 세계를 거쳐 유럽에 전수된 것은 문화사상 하나의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탈라스 전투 당시 포로로 잡혀간 중국인 제지공에 의해 중국의 발달된 제지술이 아랍 제국을 거쳐 유럽에 전파되어, 당시 문자와 서적이 보급이 보편화되지 못했던 서구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이는 a.d. 15세기 유럽의 르네상스가 일어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듯 고선지는 중세 동·서교섭이나 문화교류에 * 막대한 영향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얼과 자긍심을 높였던 위대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119971569485567.jpg

간단한 요약이네요..정말 대단한 사람이였는듯..

간달프의첩의 최근 게시물

밀리터리 인기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