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여러 결함에도 불구하고 658 호텔급(Hotel) 전략원잠은 전 세계의 대양에서 작전임무를 수행했다. 호텔급 운영활동을 살펴보면, 소련 해군의 제1세대 전략원잠이 어떠한 것이었는가, 그 승무원들이 미해군과의 파워 밸런스를 유지하기 위해, 어떠한 고난을 거쳐야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중 1번함인 K-19에게 일어난 사건에 관해서는 영화나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지만, 진실은 각색된 이야기보다 더욱 험난하고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1957년 10월 16일, 소련해군 최초의 전략원잠이 해군총사령관의 지시하에 해군 함대에 군적에 편입되었고, 1년후 10월 18일, 세베로드빈스크의 402 조선소에서 기공되었다.
다음해 2월, 제10구역의 격벽에 코르크 접착작업을 하던 놎동자 2명이 화재로 사망했으며, 전략원잠 건조에 있어서 최초의 희생자였다. 다음달에는 탱크 내부에 고무를 부착하던 여성노동자 6명이 접착제에서 발생한 가스로 인해 사망했다. 그해 10월에 이루어진 진수식에선 진수에 사용된 샴페인 병이 깨지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일은 동함에 닥쳐올 비극의 전조였는지도 모른다.
선체 완서 이후, 1960년 7월까지 1차 시험기간중에 원자로의 첫번째 가동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 1차 냉각계의 압력이 계획된 최대치의 2배에 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원래는 원자로의 총 점검이 이루어져야 했지만, 수개월에 달하는 검토작업으로 인해 인도가 지연되는 것을 두려워한 해군 당국은 이 사고를 은폐했다. 다행스럽게 그후 승무원의 조작미스로 인해 핵연료봉이 파손된 외에는 염려할만한 대형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고, 수상시험을 겇 동년 12월 12일부로 국가 원잠인수 관리위원회가 K-19의 수령증에 사인했다.
그러나 그날, 미사일 발사통의 해치가 돌연 낙하하여, 전기기사 1명이 사망했다. 더욱이 6일후엔 조선소의 기사가 낙하사고를 당했고, K-19가 해군에 인도되기 전의 사망자수는 10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1961년 6월 7일 K-19는 북해 함대의 특별원잠여단에 편입되었다. 그후 연내에 훈련을 겸한 양상작전이 3차례 실시되었고, 잠항거리는 5,829해리에 달했다.
최초의 비극은 취역 1개월후, 북해 함대의 훈련에 참가하던 중 일어났다. 덴마크 해협을 통해 북빙양으로 진입하는 가상적의 전략원잠 역할이 K-19에 부여된 임무였고, 동함을 북해함대의 통상동력잠수함 부대가 수색, 추격, 공격한다는 시나리오 였다.
7월 3일 0400시, 우현 원자로의 1차냉각계 수압이 돌연 저하되었다. 배관 어딘가에 균열이 발생해, 냉각수가 누출된 것이 원인이었지만, 당시의 원자로에는 아직 비상시에 대비한 주수장치가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원자로가 자동정지한 K-19가 부상하자, 0650시, 코르치코프 소위가 이끄는 응급반이 원자로 구획에 들어가, 수동으로 노심에 물을 주입하여 냉각을 시도했다.
이때 원자로 내부의 온도는 600도 이상이었고, 방사선 수치는 50렌트겐에 달했다. 0740시, 방사선량은 250렌트겐이상, 실내온도는 60도 이상이었다. 게다가 작업도중에 방사성 가스가 대량으로 분출되어, 방사선량도 500렌트겐 이상이 되어버렸다. 응급반의 결사적인 작업이 효과가 있어, 0920시에는 겨우 원자로의 온도가 기준치까지 떨어졌으나 사령실의 방사선량은 100렌트겐에 달해 있었다. 10시 원자로 온도가 200도로 안정되었다. 하지만 불운은 동시에 일어나는 법인지, 당시 K-19의 무전기도 고장이었고, 예비 무전기로 구난신호를 타전했지만, 전파의 도달거리는 고작 100해리 정도였다. 이 때문에 K-19는 자력으로 귀환하던가 아군 함선과 접촉하지 않우면 안되었다.
자테에프 함장은 북상하여 센마이엔섬 근해에서 자침시키고, 섬으로 피난상륙하자는 정치장교의 제안을 거부하고, 남쪽의 귀환코스를 선택했다. 하지만 기지까지 항해엔 3일이 필요하였고, 방사능에 오염된 K-19는 승무원들에게 바다의 관이 될 공산이 높았다.
다행스럽게 훈련에 참가했던, 디젤잠수함 2척이 동함의 SOS신호를 수신하여, 독자적으로 사고현장에 달려갔기 때문에, 1400시 승무원은 전원 구조하러온 잠수함으로 피난할 수 있었다. 1500시 고심해서 설치했던 주수장치에서 누수가 발생하여 승무원 3명이 K-19로 돌아가 누수부분을 수리했다. 1800시, 잠수함 중 1척이 K-19의 대부분의 승무원을 태우고 현장을 떠나갔고, 끝까지 남아있던 함장이하 6명도 다른 1척으로 피난했다.
그러나 자테에프 함장은 현장에 머무르며, 가상적국의 함선이 K-19에 접근할 경우에 함장 자신의 손으로 K-19를 격침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하지만 이는 기우에 그쳤고, 그 후 북해함대의 구축함과 견인선 2척이 사고현장에 도착하여, K-19를 기지로 견인했다.
귀항 이후 사고조사위원회와 KGB가 사고의 조사를 개시했다. 처음에 자테에프 함장 이하 K-19의 장병은 반역죄로 체포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원자로를 설계한 알렉산드로프 설계관이 이번 원자로가 녹아버리지 않은 것은 방사능의 공포에 굴하지 않고, 원자로의 냉각에 힘쓴 승무원들의 결사적 행동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보고서를 공산당 중앙정치국에 제출했기 때문에 승무원들은 오히려 영웅이 되었다.
소련해군의 사고조사위원회의 공식보고에 따르면, 원자로의 1차냉각수 누출의 원인은 수압계와 순환펌프 주변의 파이프가 파열했기 때문이었다. 수압저하의 신호를 바은 원자로가 자동정지했지만, 노심의 남은 열을 제거하기 위해 물을 공급할 장치가 K-19에 없었다.
또한 원자로 조종규칙에는 [냉각수가 부족하면, 노심융용, 또는 폭발에 이른다]라는 잘못된 기술이 있었다. 이 때문에 승무원들은 냉각수를 보충하려고 다른 계통의 밸브를 열었고, 수압이 높은 1차냉각수가 역류하여, 대량의 누수가 발생, 방사능오염을 일으킴과 동시에, 남은 1차냉각수도 상실하여, 핵연료가 녹았다고 한다. 이 원자로 사고후, 1970년대에 K-19의 승무원 수십명이 방사능증으로 사망했다.
게다가 북해함대는 100렌트겐 이상의 방사선을 쏘인 K-19의 음식물을 기지에서 가까운 만에 계류한 페기선에 보관했는데, 이를 육상부대의 병사가 절취하여 먹어버린 사건까지 발생하여, 그 희생자가 몇 명에 달할지는 아직도 불명이다.
베테랑 승무원의 말에 의하면 당시 K-19의 승무원들은 대부분 방사능 오염으로 사마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선 이 사고의 희생자수가 80명에 달할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러시아 해군은 아직도 숫자에 대해 아무런 발표도 없었으며, 이 사고 이후 K-19는 [히로시마]라고 불리게 되었다.
1962년, K-19 히로시마는 북해함대 제1 원잠함대 제31 전략원잠사단에 편입되었다. 동년 3월부터 다음해 2월에 걸쳐 세베로드빈스크 제402 조선소에서 고장난 원자로 구역을 철거하고 새로운 원자로 구역으로 대체하는 공사가 실시되었고, 고장난 원자로는 카라해의 아보로모시모프만(수심 20m)에 투기되었다. 1964년 3월부터 바렌츠해와 북빙양에 이르는 작전임무가 재개되었고, 이때 R-21 탄도미사일의 수중발사를 처음으로 시험했고, 1967년부터 1968년에 걸쳐, 658M형으로의 개조가 실시되었다.
1969년 11월 15일, 바렌츠해에서 훈련중 미해군 공격원잠 SSN-615 가토(Gato)와 충돌하여 어뢰발사관 등이 손상되었다. 1967년 2월 24일 1020시, 대서양에서 작전임무를 종료하고 잠항하여 귀환하던중, 제9구역의 탄소가스처리장치가 고장나 화재가 발생했다. 그 4일전에 조종타의 유압장치 파이프가 파열하여, 오일 500리터가 유출되는 사고도 있었따. 곧바로 파이프는 수리되었고, 오일도 처리되었지만, 이 화재에 의해 다시 파이프가 손상을 입고, 오일이 누출되어 화재가 급속도로 확대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때의 사고에 관해, 북해 함대의 베테랑 승무원인 모르무리 퇴역 소장은 다음처럼 회상한다. 작은 고장이나 승무원의 부주의가 비참한 사고의 원인이 되는 케이스는 간혹 있지만, 이 때의 사고는 그 전형적인 상황이었다. 화재를 바견한 카바크 수병은 곧바로 화재경보를 울리지 않고 탄소가스 처리장치 담당이었던 바시리에프를 찾으려한 실수를 저질러, 초기 소화에 필요했던 귀중한 시간을 허비해버렸다. 게다가 현장에 달려온 바시리에프는 소화작업중 탄소가스에 인해 사망했고, 화염에 고압공기 파이프가 파열하여, 화재는 순식간에 원자로 구역까지 확대되었다.
사령실의 지시로 각 수밀해치가 폐쇄되고, 크리바바 함장은 제9구역의 승무원들에게 제8구역으로 피난하도록 지사함과 동시에 부상명령을 내렸다. 이 때, 이미 제9구역과 제8구역 사이의 파이프는 손상되어 탄소가스와 연기가 제8구역과 제7구역까지 번졌지만, 이 구획의 승무원들은 피난하지 않은 채, 원자로와 전력장치의 기능유지를 위하여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이 피난해버린다면, 원자로 등이 정지하여 부상이 불가능해지고, 최악의 경우 원잠이 침몰할 위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최후까지 임무를 다했지만, 그 대가로 28명의 목슴을 잃어야했다. 하지만 부상한 원잠을 맞이한 것은 비정하게도 비스케 만의 폭풍이었다. 제9구역의 화재는 계속되어, 3일후 화물선이 도착했을 때까지 함내조사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화물선에 이어 해군의 함정들도 차례로 도착했고, 84명이 순양함에 수용되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제10구역에 남겨진 12명이었다.
결국 이 12명은 잠수함이 기지로 견인될 때까지 18일간을 함내에 머물러야 했다. 견인선으로부터 공기는 공급되었지만, 그들은 어둠과 추위속에서 비상식량과 소금만으로 굶주림을 견뎌야 했다. 12명 중 한명인 폴랴코프 대위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견인개시로부터 9일후, 참을 수 없어진 몇명이 9구역을 경유해 탈출을 시도했지만, 탄소가스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설득해 만류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해치가 화재로 인해 녹아버려 열리지 않았으므로, 어차피 탈출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리고 제10구역에는 화장실이 없었기 때문에 함내는 참을 수 없는 악취로 가득했다. 기지까지 10일이 남은 3월 8일 다시 화재가 발생했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지금도 믿기질 않는다.]
북해 함대의 함정 27척이 K-19 전략원잠의 구조에 참가했는데, 그 중에 2명이 순직했다. 견인한 거리는 2,160해리였다. 4월 2일 겨우 귀환한 K-19는 기지요원들에게 [히로시마]란 이름을 다시 상기시켰다. 해군은 수리시설의 능력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도 있고, 귀환한 K-19는 최우선적으로 수리가 개시되어, 1973년 1월에 재빠르게 작전임무로 복귀했다.
1973년 후반엔 다시 도크로 들어가 핵연료봉을 교환했고, 1974년 이후, 작전임무와 훈련에 종사한다. 준공이후 17년이 지난 1977년, K-19는 제1선 임무인 전략초계에서 물러나, 탄도미사일의 발사관을 철거한 658S형 통신함으로 개조되었고, 1983년 KS-19로서 현장에 복귀했다.
동함의 임무는 원잠용으로 신규 개발된 통신기재의 시험이었따. 여담이지만, 6년에 걸친 K-19의 개조공사중, 2차례 화재가 발생하여, 승무언 6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후 KS-19는 통신기재의 갱신을 계속하며 1990년까지 현역에 머물렀는데, 1990년 4월 19일 퇴역되어 1992년부터 북해 함대의 아라 만에서 해체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하여 2003년 9월 해체작업이 시작되었는데, K-19의 승무원들 15명이 해체의 연기요청을 했고, 11월엔 러시아 잠수함대 지원기굼이 [K-19 박물관]의 건설기부금 모집을 시작하자 모스크바의 루지코프 시장도 이 계획의 지지를 표명했다. 이리하여 30년에 걸친 33만 2,396해리의 항해를 마친 소련/러시아 해군 잠수함대 창설 100주년이 되는 2006년에 박물관 이란 새로운 임무에 나서게 되었다.
[히로시마], [과부 제조기]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으로 알려진 K-19의 역사를 살펴보면 냉전시대의 소련 해군의 상태를 엿볼 수 있다. 1960년대, 해군은 승무원의 생명을 경시하여, 수많은 희생을 치르며 불완전한 전략원잠을 운용했고, 미국과의 전략밸런스를 유지하려 애썼다. 그결과 역사에 남은 것은, 수많은 영웅들의 이름과 소련 수뇌부의 불명예, 그리고 남겨진 가족들의 슬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