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기 150기와 맞선 구축함 해드리
- 특공기 23기 격추한 미 해군 구축함의 전투 이야기
1945년 5월11일.
미군의 오키나와 작전은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고 일본의 필사적인
카미카제(神風)의 자살 특공도 극심해질 때였다.
오키나와 상륙 지점을 중심으로 구축함으로 이루어진
레이다 감시선이 부채꼴로 설치되어 있었다.
이들 레이다 감시 전초선인 picket station #15에 섬너 급 구축함
휴 해드리(uss hugh w. hadley→ dd-774)가 배속되어 있었다.
구축함 해드리
구축함 해드리와 다른 구축함 *처 급 에반스, 그리고 서 너 척의
작은 상륙정들과 팀을 만들어서 일본 카미카제 특별 공격기
(이하 -特功機-로 약칭함)가 날아오는 일본 규슈 쪽을 향한
레이다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본 자살 특공기에 대비해서 바다에 구축함이 있었고 하늘에는
초계하는 해병대 콜세어 기들이 있었다.
해드리는 진수한지 일 년도 안 되는 2,200톤짜리 섬너(sumner)급
신예 구축함이었다.
60,000마력으로 추진되고 6문의 5인치 포를 가진 이 구축함은
중무장의 대공화력이 돋보인다.
12문의 40mm, 11문의 20 mm 대공기관포가 함의 요소요소에
설치되어 있었다.
승무원들
함은 그 전 해인 9월에 취역해서 태평양 해역으로 이동 한 뒤인
그 해 일 월(45년 1월)에 새 함장이 취임해왔다.
대령 진급을 앞두고 있는
고참 중령인 baron joseph mullaney중령이었다.
그는 대단히 유능한 함장이었던 듯하다.
부하들을 잘 통솔하였고 훈련도 열심히 시켜서 전투력을
최상의 수준으로 향상시켰다.
한편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단을 열었던 일본은 한때 기세를 올렸던 좋은 시절은 잠깐, 정 반대로 계속 밀려서 일본의 본토에 바짝 아래인 오키나와까지 침공 당하자 일본은 이성을 잃은 수단에 의지한 저항에 부심한다.
카미카제(神風)특공대라는 대규모의 자살 비행 부대를 오키나와에
투입된 것이다.
카미카제
결론으로 이야기 하면 일본군의 해군 조종사 2,525명,육군 조종사
1,383명, 합계 3,908명이 죽고 일본 전투기 2,800기를 소모했다.
어지간한 강대국의 공군 규모가 한 섬의 방어를 위해서 없어진 것이다.
미군도 4,800명이 죽고 4,900명이 부상을 입었다.
선박 침몰이 49척, 파손이 368척이었다.
이렇게 발버둥 쳤지만 3개월 뒤 일본은 항복하고 말았다.
미 해군 피켓 라인에서 일본 카미카제 공격기가 접근하면 제일 먼저
조우하는 가장 외곽에 자리 잡게 된 불운이 해드리와 에반스
양 구축함에게 공격기가 몰려오게 만들었다,
오키나와
15번 전초 구역이 해드리가 싸운 곳이다.
그날 오전 8시경 구축함 해드리에 요란한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동시에 “총원 전투 배치!” 명령이 째지는 목소리를 타고
스피커에서 뛰쳐나왔다.
식사를 하던 수병들까지 포크를 집어 던지고
전투 배치 부서로 급히 달려갔다.
머지않은 북동쪽에서 부주(浮舟- float)가 붙은 일본 수상 전투기가
수면에 바짝 붙어서 해드리에게 접근해오고 있었다.
너무 저공으로 침투했기 때문에 레이다에도 걸리지 않았고
멀리 전방 상공에서 초계비행(cap-combat air patrol )을 하는
미 해병대의 콜세어 기에도 발각되지 않고 침투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해드리의 견시(見視)가 미리 발견하고 경보를 발했던 것이다.
수상 전투기는 해드리를 향해서 똑 바로 달려왔다.
“ 사격 개시! 사격 개시!”
사격 명령이 떨어지자 말자 기관포들은 불을 뿜었다.
수상 전투기는 해드리 바로 옆까지 와서 격추되었다.
일본해군 수상 전투기
약간의 시차를 두고 일본군 전투기들이 점을 이루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금이 저리게 많은 숫자였다.
일본 특공기들은 뒤에서 불을 뿜으며 덤벼드는 콜세어 전투기들에게는 동료 특공기들이 격추되어도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벌써 그 많은 점들이 섬광으로 변해서 바다에 추락하는데도
그들은 편대와 항로를 악착같이 유지하고서 곧바로 해드리와 에반스를
향하여 돌격해 왔다.
해드리는 전속으로 달리며 대공사격을 퍼부었다.
해드리는 첫 열기를 치열한 대공사격으로 격추시켰다.
그러나 교전 한 시간이 지난 오전 9시경 적기를 열 아홉기나
격추하면서 분전하던 에반스는 대파되고 함이 기울며 엔진이
스톱되고 표류하기 시작했다.
후반기 전투는 해드리 혼자서 담당하여야 했다.
폭탄이나 어뢰를 품은 일본 특공기들은 파도처럼 몰려왔다.
멀리서부터 쫓아오면서 이들 일본 특공기를 격추시키던
콜세어중에 실탄을 다 소비해버린 전투기들도 있었다.
조종사들은 해드리의 대공사격을 두려워하지 않고 수면에 붙어서
공격하는 특공기를 동체로 위에서 부터 간단없이 눌러서 수면과의
충돌을 유지하기도 했고 돌입 직전의 적기의 항로를 방해하기도 했다.
해드리는 한 시간 40분 동안 전속력으로 회피운동을 하면서 벌떼같이 덤벼드는 특공기들에게 쉬지 않고 기관포의 화력을 퍼부었다.
전투 중에 멀래니 함장의 조함 지휘는 대단히 능숙한 것이었다.
항상 특공기의 돌입을 교묘히 피하면서도 전 화력을 적기들에게
집중하도록 유도했다.
구축함의 응전 -40mm 보포르 건
그러나 일본의 특공기들은 집요했다.
단 한 척의 구축함으로는 도저히 감당 할 수 없는 수많은 특공기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돌격해왔다.
특공기 두 기가 함을 들이 받고 폭발해서 사상자를 대량 발생 시켰다.
기관포 사수들은 갑자기 상공에서 특공기보다 훨씬
작고 꼬리에서 불을 뿜으며 해드리에게 돌진해오는
괴 비행체의 출현에 놀랐다.
사수들이 급히 포신을 그 빠른 물체에게 돌렸지만
그 비행체는 스피드가 너무 빨랐다.
이 로케트 갈은 비행 물체는 순식간에 40미리 대공포좌로
돌진해서 폭발해버렸다..
일본 해군의 폭격기 일식 육상 공격기 (一式 陸上 攻擊機 -
줄여서 일식 육공)에서 발진한 로케트 추진 자살 폭탄 오까였다.
속도가 빨라서 사수들이 리드 적용이 힘들어 잘 놓치는 특공기였다
오카 비행 폭탄
오카의 돌격은 모기인 일식 육공기가 쌍발기로 대형기이고 미군 영격기들이 제일 먼저 노리는 목표라서 접근하기 전에 대개 격추되어 성공률은 그렇게 높지가 않았지만 그날은 특공기들을 격추하느라 혼란한 방공망과 구축함 화망의 허점을 뚫고 돌진 해 온듯하다 .
쉬지 않고 쏘아 대던 해드리의 대공 포탄들이 거의 바닥을 보이고
대파된 함의 상태도 나빠져서 더 이상의 항해가 힘들어 질 때
다행이도 파도처럼 몰려오던 일본군 카미카제 특공기들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100 분의 해전에서 해드리가 격추한 일본 특공기는 육안으로
확인 된 것만도 23기였다.
그 외 해드리에게 피격당하고 연기를 끌면서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일본 특공기는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두 번째 특공기가 기관실에 부분의 바로 수면 위의 사람이
서서 들어 갈 만큼 크게 뚫어 놓은 구멍은 치명적이었다.
마치 쇼 윈도 같은 구멍을 통해서 처참한 기관실의 모습이
훤히 드려다 보였다.
부상자도 다수 발생해서 함장은 “총원 퇴함“의 명령을 내렸고
전 수병이 함의 현에 모여 퇴함에 대비 중에도
50명의 부상을 입지 않은 수병들이 단념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대처해서 해드리는 겨우 침몰을 면했다.
만신창이 해드리는 여러 번 견인과 긴급 수선을 되풀이 하면서
미국 샌 프란시스코 해군 수리창으로 돌아갔지만 수리 불능의
선고를 받았다.
전쟁이 끝나고 해드리는 그 해 12월 퇴역했다.
즉 해군의 전투 장비에서 제명된 것이었다.
해드리는 그 상태로 있다가 이년 뒤 1947년 고철로 팔려서
해체 되어 버렸다.
그냥 보존했으면 좋은 전시물이 되었을 것으로 아쉬운 생각이 된다.
이날 전투에서 적기를 23기나 격추한 해드리의 전과는
그 한 달 전 오키나와 특공에 나선 70,000 톤급의
일본 전함 야마토의 전과와 비교된다.
야마토는 내습한 미군기 300기와 주포까지 동원하여
싸웠지만 단지 10기만 격추했을 뿐인 전례가 해드리의 전투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영웅적인 신화를 남기며 분전한 해드리의 수병들은 대통령의 부대 표창을 받았고 함장 멀레니 중령은 한 달 뒤 대령으로 진급하고 구축함 전대 사령관으로 발령 되어서 이임하였다.
23기 격추 기록은 미국 해군 역사의 최고 기록이었다
해드리와 같이 짝을 이루어서 분전한 에반스도 기적적으로
침몰하지 않고 역시 해드리와 같이 예인되어 미국으로 돌아와
해체되었다.
동료 구축함 에반스 ( *처 급)
자료제공 : 야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