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해병대와 북베트남군의 접촉이 점점 증가하기 시작했다.
1월 14일 8명으로 구성된 정찰 소대가 북베트남군의 매복 공격에 걸려
지휘자와 통신병이 전사했고 시신은 나중에야 회수 되었다.
이틀 후 일단의 해병 소총 소대원들이 881N 고지 남서쪽 약 700m지점의 매복 현장을 수색했다.
조밀한 밀림 속에 숨어있던 20여명의 북베트남군이 사격을 가하고 빠져나간 다음
기지로 되돌아 가던 해병들에게 포격을 가했다.
다음날 아침 중대는 다시 산마루를 수색했다.
다른 중대원들이 헬리콥터로 881S 고지로 이동하는 동안
윌리엄 H. 데브니 대위는 3대대 I중대 병력을 881N 고지 정면에 투입하여 수색했다.
짙게 낀 안개 때문에 이동이 더뎠으나 시간이 갈 수록 시계가 좋아지고 있었다.
북베트남군 대대 병력이 작은 언덕에 은신한 것을 포착한 중대는 포격과 무반동총 등으로 제압한 후
항공 지원을 요청하여 네이팜 탄으로 쓸어 버리기는 하였지만
중대장 데브니 대위는 머지 않아 적이 대규모 공격을 실행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1968년 1월 20일 오후, 해병대 전초기지에 백기를 들고 투항해 온 북베트남군 중위가 있었다.
95C연대 5대대 소속인 그의 정보에의하면 그날 밤 대규모 공격이 개시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자신이 소속된 95C연대는 1015고지(동트리)로부터 가까운 거리에있는
950고지의 해병전초기지를 공격 하도록 명령받았다고 한다.
북베트남군 1개 보병연대는 통상 약600명으로 구성된 대대 3개를 합쳐 약 250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4대대가 고지 서쪽의 방어선 을 공격하는 동안 6대대는 861고지를 공격하며
동시에 1개 대대를 더 보유한 101C연대는 동쪽에서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950고지는 제26해병연대 1대대 A중대 2소대 병력 50명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861, 861A 고지는 26연대 3대대 K중대와 2대대 E중대, 그리고 1대대 A중대의 2개 소대(300명)가 배치되어 있었다.
케산 전투 기지(KSCB)의 방어 지역 및 부대는 다음과 같다.
26연대 3대대 I중대와 L중대는 전투 기지와 동쪽 끝단(레드 지역)을 방어하고,
1대대 A중대와 C중대는 방어선 북쪽(블루 지역),
B중대는 동쪽 끝과 남쪽 측면(그레이 지역)을 방어 하였다.
D중대는 기지 중심부에서 대기조로 남았고,
전방작전기지(FOB-3)는 O중대가 제3병합소대와 함께 남쪽 측면에 배치되었다.
20일 밤, 투항한 중위의 제보대로 약300명의 북베트남군이 861고지 북서쪽 K중대를 기습 공격 하였다.
박격포의 지원을 받으며 공병들이 철조망을 파괴하고 재빠르게 고지 방어선까지 근접해왔기 때문에 포병 지원은 불가능했다.
K중대 방어선 대부분이 돌파 당했고 중대장이 부상을 당했다.
궁지에 몰린 해병대가 즉각 역습을 가해 고지 곳곳에서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마이클 스톨 병장은 점거 당한 벙커 들을 뛰어다니며 혼자서 3개의 벙커를 파괴했다.
그리고 자신을 사살하려던 북베트남군 중 2명을 사살하였는데, 소대가 방어선을 탈환했을 때
그는 중기관총좌에서 전사한 채로 발견되어 사후에 해군 수훈장이 수여 되었다.
21일 새벽 5시 30분에 북베트남군이 철수하여 861고지의 치열한 야간 전투는 끝이 났다.
치열한 접전이었지만 K중대는 4명이 전사하고 11명이 부상하는 가벼운 피해를 입었고,
북베트남군 시체는 47구가 발견되었으며 3명이 부상 당한 채 포로로 붙잡혔다.
동시에 실시하기로 계획되어있던 950고지 공격은 861고지 공격 실패 때문에 포기한 것으로 짐작되었다.
북베트남군 제320사단과 270독립연대 47대대는 캠로 지방으로부터 케산을 잇는 9번 도로를 절단 하였으며
325C사단/29C연대는 832고지를 공격 하였다.
304사단/23, 24연대는 후오이 선의 남베트남군 전초 기지를 공격 하였다.
한편, 861고지 점령에 실패하자 고지 아래로 후퇴했던 북베트남군은 케산 기지를 공격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 하였다.
21일 새벽, 케산 전투기지/KSCB(Khe Sanh Combat Base)에 북베트남군의 박격포탄과 로켓이 쏟아졌다.
기지 동쪽에 설치된 1번 탄약고가 명중 당해 1,500톤의 탄약 중 약 1,100톤이 지축을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불타 버렸다.
이 폭발로 8명의 해병이 전사하였고, 탄약은 2일 동안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며 불탔다.
해병들은 담배 필터로 귀를 막아 고막을 보호했어야할 정도 였다.
탄약고에 저장되었던 최루 가스가 폭발하였으며 해병들은 포 주위에 널려있던 포탄들을 손에 들고 안전 지대로 옮겼다.
사격 지휘 컴퓨터용 발전기도 날아가 버려 수동으로 전환해야 했다.
플라스틱 폭약이 폭발하였을 때에 200m 떨어진 곳의 26해병연대 전투 지휘센터 지붕이 붕괴되어 버렸다.
활주로에서 4대의 헬리콥터가, 861고지 LZ에서 1대가 파괴되어 합계 5대의 헬리콥터를 상실하고 활주로가 훼손 되었다.
건설대원들이 즉시 활주로 복구 공사에 들어가 2천 피트 정도를 복구하여 C-123 수송기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하였다.
그날 밤 C-123는 26톤의 무기들을 공수 하였고, 23일에는 C-130 수송기가 착륙할 수 있을 만큼 복구 되었다.
케산 기지에 연속으로 쏟아진 포탄에 의해 해병 14명 사망, 43명 부상과 함께 많은 시설 들이 파괴 되었다.
케산 기지로부터 남쪽으로 3.5km 떨어진 곳의 케산 마을과 후옹 호아 지구본부는
915지방군 중대와 2개의 소대를 지닌 O중대 병력 170명이 마을을 방어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5명의 미 육군과 20명의 해병대 군사 고문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1월 21일, 케산 기지에 포격이 개시되자 북베트남은 케산 마을을 공격 했다.
북베트남군이 공격해 오자 지방 군사 고문관 브루스 클라크 대위는 즉각 공중 지원을 요청하고,
VT신관 부착 포탄을 발사하여 공중 폭발 시키는 등 끈질기게 저항 했다.
하지만 북베트남군은 짙게 깔린 안개에 몸을 숨긴 채 마을을 공략했다.
마을 대부분이 함락되고 중대들은 거의 포위 당했다.
정오 무렵부터 안개가 조금 씩 걷혀 공중 지원이 가능해 졌으나 북베트남군은 박격포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육군 헬리콥터들이 포위 지점에 약간의 무기를 보급해 줄 수 있었다.
오후부터 본격적인 구출 작전이 시작되었다.
케산 기지에서는 26연대 1대대 D중대를 마을 북쪽의 471고지로 전개 시켰다.
이른 저녁, 282강습헬기중대는 256지방군 중대 병력 50명을 9대의 헬기에 태워 쾅 트리에서 케산 마을로 비행해 들어왔다.
그러나 옛 프랑스 기지를 점령한 북베트남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아 강습작전은 혼란에 빠져 버렸다.
헬기 1대가 추락하고 2대는 케산 기지에, 또 1대는 쾅트리에서 황급히 강착했다.
작전의 참담한 실패로 미군 4명 전사, 2명이 실종하였고 256지방군 중대는 무려 40명을 상실했다.
다음날 해병대는 마을 주민들을 대피 시키고 타격부대를 마을로 보내
정보 가치가 있는 시설들을 파괴하고 주요 문건들을 파기 시켰다.
케산 마을은 북베트남군의 수중에 들어가 버렸다
케산 기지에서 물자를 공수하던 중 추락하여 대파된 CH-53A 씨 스탈리온 헬리콥터 잔해를 살펴보는 제26연대 해병대원들.
한 해병은 기체에서 M60 기관총을 회수하고 있다
1월 22일, C-123수송기가 130톤의 군수 물자를 케산 기지에 공수하는 가운데
헬리콥터들은 부상자와 민간인을 태우고 기지를 이륙 하였다.
케산 기지의 해병들은 파괴된 시설물을 복구하고 참호를 더욱 더 깊게 파고 있었다.
하늘에는 B-52폭격기가 기지 근처 북베트남군 은신지로 의심되는 4개의 표적에 지축이 뒤흔들리는 융단 폭격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북베트남군 포병들은 간헐적인 포격을 가하여 케산 기지 활주로 복구를 더디게 만들어
3,900피트의 활주로 중 2,000피트 만 수리 되었다.
22일 정오 무렵, 제3해병사단 9연대 1대대가 증원 병력으로 케산 기지에 도착하기 시작 하였다.
존 미첼 중령이 지휘하는 9연대 1대대는 후에 시에서 케산 FOB-3까지 헬리콥터로 공수 되었다.
병력을 태운 헬기가 케산에 착륙하자마자 박격포탄과 소화기탄이 맨 먼저 이들을 환영했다.
1대대 병사들은 헬기에서 내리기 무섭게 안전한 곳을 찾아 달려야했고 헬기 조종사도 재빨리 이륙하여 케산을 벗어나야 했다.
제164해병중형 헬리콥터 대대는 4소티의 비행을 하여 254명의 병력을 실어날랐는데,
북베트남군 저격수들은 헬기에서 내리는 1대대의 장교들만 골라 저격탄을 날렸지만 1명도 저격에 성공하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9연대 1대대는 론스 대령의 지시에 따라 기지 서쪽의 돌산 지역에 배치되어 기지 서쪽 도로 방어에 들어갔다.
산 속 곳곳에 교묘히 위장 배치된 북베트남군 포병들은 케산 기지의 우체국을 날려 버렸고 벙커와 활주로를 손상 시켰다.
또 23일에는 헬리콥터 1대를 격추 시키기도 하였다.
해병대는 반격을 해야했지만 포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를 알지 못해 상당한 양의 탄약만 소비했다.
23일 밤에는 미 공군, 해군, 해병대 전폭기들이 발진하여 기지 주변을 타격해 39명의 북베트남군을 제거했다.
1월 24일 아침, 미국 CIA가 마련한 프로젝트 "엘레판터"에의해 미군을 도와왔던 제33라오스 대대 병력이
PT-76경전차와 북베트남군 보병의 공격을 받고는 라오스 국경에 인접한 랑베이 특수부대 캠프로 도주해 왔다.
이리하여 랑베이 특수부대 캠프에는 약 500명의 병력과 2,200명의 가족, 그리고 케산 주변 마을 난민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옛 미군 특수부대 캠프에서 음식을 제공받은 라오스군은
자신들의 반 후에산 기지가 북베트남군 304, 325사단과 전차의 공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대대장 소우랑 중령은 9번 도로에서 약 15km떨어진 곳에 위치한 기지가 기습 공격을 받아 대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소우랑 중령은 신속한 탈출을위해 미군에게 헬리콥터를 제공해달라고 거듭 요청하였지만
끝내 소식이 없자 9번 도로를 따라 걸어서 랑베이까지 피신해왔다.
공격에 전차가 투입되었다는 주장은 믿기 어려웠으나 그 것은 사실로 밝혀진다.
항공 정찰에 나선 미공군은 7대의 전차를 발견했고, 그 중 1대를 격파 시킴으로써 전차의 존재가 확인 되었다.
사실 1967년 5월 기습 공격 당했을 때에도 북베트남군 전차가 출몰하긴 했으나 캠프로 돌입하지는 않았었다.
박격포 지원을 받으며 캠프를 공격했던 북베트남군은 케산 기지의 포격에 쫓겨 났었다.
하지만 이에 앞서 이미 조종사들의 전차 발견 보고가 몇 건 있었기 때문에
비록 미확인 정보이긴 하나 해병대는 이에 대비하여 180기의 3.5인치 로켓발사기와 32문의 106mm 무반동총을 보급 하였다.
그리고 M48 전차와 10대의 온토스를 증강 배치 하였다.
아무튼 라오스군이 참패를 당하고 쫓겨옴에 따라 케산에 북베트남군 전차가 출몰할지도 모른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했다.
1군단의 남베트남군 사령관 홍 수암 램 중장은 케산에 병력을 증원해달라는
웨스트모얼랜드 사령관의 요청을 받아 들여 제37 레인저 대대를 케산으로 보냈다.
1월 27일 케산에 도착한 레인저 대대는 기지 동쪽 끝에 참호와 벙커를 구축 하였다.
북베트남군 정찰대들은 케산의 방어선까지 잠입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미군은 숲 속에 뿌려진 감지기의 진동을 주시하였고, 해병들은 더 깊게 참호를 팠다.
항공기의 네이팜 공습과 포병 사격에 10명의 북베트남군이 기지 주변에서 전사 하기도 하였다.
적의 정탐은 줄어들었지만 포탄은 여전히 케산 기지 내로 날아들었다.
위 그림은 제26 라오스 대대 병사들이다. 한 병사는 PPSH-41 서브머신건을 들고 있다
드디어 북베트남군이 1968년 1월 30/31일을 기해 구정 공세를 감행하였다.
미공군은 1월 30일 케산 인근에 B-52를 출격시켜 1,125톤의 폭탄을 투하 하였다.
사이공 미 대사관이 공격받았고, 비엔 호아, 탄손 누트 그리고 다낭 비행장에는 포탄이 날아왔다.
고대 도시 후에 등 남베트남 주요 도시가 기습 공격을 받았다.
이때 백악관에서는 핵무기 사용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기 되기도 하였다.
후에가 북베트남군의 수중에 들어가긴 했지만 구정 공세가 모든 도시에서 성공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공세와 동시에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였던 남베트남 민중의 봉기는 발생하지 않았다.
다낭을 공격했던 북베트남군 제2사단은 운이 좋지 않은 부대 중 하나였다.
다낭 남서쪽에서 도시로 진격하는 북베트남군을 발견한 제1해병사단 정찰대가 포격과 공중 지원을 요청했다.
로버트 쿠스먼 제3수륙 양용군 사령관은 지휘 헬리콥터에서 작전을 지휘하였다.
해병대는 남베트남 비정규군과 합세하여 북베트남군에게 대 피해를 안겨 주었다.
미 정보 당국은 전국 주요 대도시에서 실시된 구정 공세에 참가했던 북베트남군 수를 68,000명으로 추정했고,
그 중 37,000명이 공세 30일 동안에 죽었다고 추정 하였다.
도시 대부분이 파괴된 고대도시 후에 시를 재건하는 데에만 150만 달러 이상이 사용되었다.
아무튼 대도시에서 구정 공세를 실시한 하노이 당국이 케산을 포위 한 목적이 과연 무엇인가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 하였다.
도시들을 기습 공격하기 위하여 미군을 케산으로 끌어들인 양동 작전이라는 주장과
남베트남 정부와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한 것,
또는 미국민의 실망과 이에 따른 반전 분위기 조성을 위하여 제2의 디엔 비엔 푸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 들이 나왔다.
구정 공세가 개시되고, 케산에서도 불길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2월 5일 아침, 숲 속에 살포된 전자 감지기의 정보에 의하면
대병력의 북베트남군이 881S고지를 공격하기 위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좌표를 전달 받은 해병대와 육군 포병이 대규모 집중 포격을 가하여 이 공격을 저지 시켰다.
6일 새벽 3시, 200여명의 북베트남군이 박격포 지원을 받으며 861A 고지를 공격했다.
북베트남군은 861A고지에 60, 82mm 박격포탄을 발사했고
공병과 보병이 방어선의 철조망을 절단하여 근접 침투에 성공하기도 했으나 곧 해병들의 반격을 받았다.
제26해병연대 2대대 E중대원들은 최루 가스를 사용하는 등 가용한 무기를 총동원하여 결사적으로 역습을 가했다.
결국 북베트남군은 100여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퇴각했으며
2대대 E중대는 7명이 전사하고 35명이 부상 당했다.
861A 고지 전투가 끝나갈 무렵 케산 활주로에는 탄약과 의료팀을 태운 미공군 C-130E 수송기가 착륙하고 있었다.
북베트남군 포병이 이를 마냥 지켜보고만 있을리가 없었다.
수송기 동체를 뚫고 들어온 탄환이 적재된 탄약에 맞아 화재가 발생했다.
조종사 하워드 돌먼 중령은 기체를 활주로를 달리면서 승무원들에게 진화을 명령했다.
다행히 불은 꺼졌고, 유산탄에 파괴된 타이어 수리를 마친 수송기는 다시 다낭을 향해 이륙했다
제311전술공수비행대 소속 C-123K 수송기가 케산 기지 활주로에 착륙하고 있다. 1968년 3월
C-130 수송기가 포화가 작렬하는 가운데 케산 기지에 군수물자를 공수하고 있다
랑베이(Lang Vei) 특수부대
랑베이 미군 특수부대 캠프는 9번 국도를따라 케산으로부터 9km남서쪽에 위치했다.
그러나 이 캠프에서는 관측이 좋지 못할 뿐만 아니라 좁고 내부 방어선도 없으며 2개 중대만 수용이 가능했다.
앞서 언급한 것 처럼 1967년 5월 4일 북베트남군의 기습 공격으로
캠프의 A팀 지휘자를 포함 그린베레 2명이 전사하고 많은 수의 대원들이 전사하게 된다.
신임 A팀 지휘자 프랭크 윌로비 대위가 발령을 받아 막 캠프에 전입해왔다.
그는 베트남의 특수부대 캠프를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팀의 지휘자에게는 전술 지역을 변경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대원들의 권유에 따라 관측이 용이한 곳을 찾아 강력한 새 캠프를 설치하기로 결정 하였다.
그린베레는 9번 도로 남쪽 측면을 따라 새 캠프를 건설하기로 결정 하였다.
결정 당시 대 전차 방어책은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랑베이의 새 특수부대 캠프는 서쪽으로 약 1km 정도 더 전진하여
라오스 국경으로부터 약 2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게 되었다.
건설대가 공사를 맡게된 새 특수부대 캠프의 몇 개의 주요 시설들은 지하에 콘크리트로 건설되었다.
공사를 진행하면서 건설대는 일본군과 프랑스군이 매설한 약 1,400개의 지뢰를 발견하였다.
하는 수 없이 이 지뢰들을 모두 제거한 뒤 다시 공사가 재개 되었다.
캠프 중앙부에 위치한 벙커 대부분은 지하에 콘크리트로 건설 되었다.
전술작전지휘센터, 의료 벙커, 2개의 탄약 저장 벙커, 그리고 지원 시설 팀 벙커가 지하에 설치되었다.
전술작전지휘센터의 지붕 두께는 원래 12인치가 요구 되었으나 미리 제작된 9인치 짜리가 헬리콥터로 공수 되었다.
중앙부를 방어하는 무기는 4.2인치 M30 박격포 1문, 81mm 박격포 5문,
16곳의 60mm 박격포 진지, 50구경 기관총 2정으로 구성 되었다.
또한 2문의 106mm 무반동총은 9번 도로의 동쪽과 남쪽 접근로를 향하여 배치 되었다.
이 무반동총들은 적의 기갑 차량 또는 전차가 공격할시 중앙부를 방어하는 주요 역할을 맡게된다.
그러나 대전차용 고폭탄(HEAT)발사의 경우 20발만이 유효 하였고, 4문을 보유한 57mm M18A1 무반동총은
대전차 무기로서는 완전히 역부족 이었으며 그나마 대전차 지뢰는 하나도 보유하지 않았다.
캠프 외곽 방어선에 배치된 4개의 타격중대는 각각 81mm 박격포와 57mm 무반동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중대들은 짚으로 만든 거주 캠프 주변에 나무나 모래 주머니를 쌓아 엄폐물로 사용했다.
수류탄 투척 가능 거리의 2배가 되는 철조망을 중대 외곽에 설치 하고 각종 장애물도 함께 설치하였다.
그리고 불도저로 평평하게 다져진 땅에는 지뢰와 클레이모어가 매설 되었다.
자동화기는 과도할 정도로 많이 보유했는데, 47정의 M1919A6 30구경 기관총과 2정의 7.62mm M60,
그리고 38정의 50구경 기관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중에는 50구경 M55 쿼드 기관총도 포함되어 있었다.
새 특수부대 캠프는 1967년 9월 27일에 공사를 완료하였다.
57mm M18A1 무반동총을 점검하고 있는 그린베레와 CIDG 대원
그림의 모래 주머니를 쌓은 지휘 벙커 아래에 구축된 콘크리트 지하실은 후방으로 연결되는 출입구가 있다
1967년 7월 랑 베이 특수부대 캠프에 설치된 50구경 M55 쿼드 기관총을 조작하는 그린베레 A-101분견대 하사관과 남베트남 특수부대 LLDB 하사관
랑베이 특수부대 캠프의 그린베레 A-101 분견대 지휘자 프랭크 윌로비 대위는
세폰 강을 가로질러 대규모 침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보고에 따라 캠프 방어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던 중 1월 24일에 제33라오스 대대 병력이 황급히 패주해오자 방어력 강화를 서둘렀다.
특수부대는 전투용 벙커 강화및 5개소의 지원소를 설치하고
캠프 주위에 클레이모어와 조명탄을 매설하고 철조망을 설치 하였다.
그리고 100문의 M-72 대전차 무기(LAW)는 12월 29일 캠프에 이미 보급 되었으며 1문의 바주카포도 별도 보유하고 있었다.
캠프에는 24명의 미군특수 부대원과 14명의 남베트남 특수 부대원(LLDB - LUC LONG DAC BIET),
443명의 CIDG(Civilian Irregular Defense Group) 민병대 및
기동타격부대/MIKE Force 중대 병력(161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제33라오스 대대 병력은 4명의 미군 특수부대원과 함께 옛 특수부대 캠프에 있었다.
특수부대 캠프는 케산의 해병과 동쪽의 미육군으로부터 장거리 포사격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며,
자체적으로는 4.2.인치 박격포 1문과 7문의 81mm, 16문의 60mm 박격포를 보유 하고 있었다.
또한 위급 시에는 다낭의 제5특수부대 본부 C중대가 캠프를 지원하도록 계획 되어 있었다.
케산 기지가 서서히 포위 당하고 있었을 무렵, 웨스트모얼랜드의 사령부 참모들은
제3수륙양용군과 제5특수부대 그룹에게 랑 베이 캠프 지원 계획을 재검토하라고 지시 하였다.
그리하여 케산 기지의 론스 대령은 랑 베이 특수부대 캠프의 지원 요청이 있을시
2개 소총 중대를 도보 또는 헬리콥터로 전개시키기로 결정 하였고, 상황에 따라 필요하다면 추가 병력을 투입하기로 하였다.
1968년 1월 30, 특수부대 하사관들은 캠프로 피신해 온 라오스군도 정찰임무에 포함시켰고,
정찰대는 케산 마을 외곽에서 적을 포착하였다.
다음날, 마이크 포스는 케산 마을 외곽에서 북베트남군 대대를 공격하여 54명을 사살 하였다.
이날 북베트남군 304사단 66연대 8대대 소속 루옹 딘 두가 랑베이 캠프로 투항해왔다.
그는 북베트남군이 랑베이 특수부대 캠프를 공격하기 위하여 이미 수색 정찰을 끝마쳤다고 진술 했으나
전차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케산 기지로 옮겨져 추가 조사를 받을 때에는 전차를 보지는 못했지만
캐터필러 구동 소리를 들은적이 있다고 진술 하였다.
랑베이 공격 명령이 하달되자 북베트남군은 공격 대열을 정비 하였다.
북베트남군은 라오스와 케산을 연결하는 9번 도로 상의 전략 요충지에 위치한 특수부대캠프를 제거하여야 했다.
캠프를 제거해야만 측면 공격의 위험없이 안전하게 케산으로 침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북베트남군은 전차와 함께 라오스 베트남 국경에 걸쳐진 세폰강을 건너오고 있었다.
2월 6일, 다낭의 제5특수부대 본부 C중대 지휘관 다니엘 션겔 중령이 부대를 방문하였다.
이날 밤 11시 15분, 라오스 국경의 코록산 속에 은신한 북베트남 675포병연대 152mm 대대가
발사한 포탄 50발이 랑베이 캠프를 강타하였다.
이 포격으로 여러명이 부상당하고 벙커 2개소도 손상을 입었다.
윌로비 대위는 케산 기지에 무전으로 경고를 보내 비상 시 즉각적인 지원 포격을 요청했다.
포격 10분 후 랑베이 인근 공격 대기선에 은신하고 있던 북베트남군 전차와 보병이 행동을 개시 하였다.
2월 7일 0시 50분, 좁은 숲길을 따라 잠입해온 11대의 북베트남군 PT-76 수륙양용 경전차가
랑베이 특수부대 캠프의 3개 방향에서 나타났다.
캠프 남쪽에서 5대, 9번 도로의 서쪽에서 4대, 그리고 9번 도로 동쪽에서 2대의 전차가 접근해오고 있었다.
랑베이 공격에 투입된 북베트남군의 2개 전차 중대는 각각 8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5대는 예비로 두고 11대를 공격에 사용했다.
198전차대대 9중대의 전차 5대를 선두로 325C사단 101C연대 3대대와 2개의 지원공병중대 병력이 남쪽에서 진격 하였다.
동쪽에서도 2대의 전차를 앞세운 24연대 4대대 병력이 랑베이로 진격했고,
서쪽에서는 3전차중대의 전차 4대와 24연대 5대대 병력이 진격하고 있었다.
한편, 제33 라오스 대대가 주둔한 옛 특수부대 캠프는 304사단 66연대 8대대가 공격하도록 명령받았다.
랑베이 특수부대는 북동쪽에 101중대(82명), 그 남쪽에 104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서쪽에는 102중대(42명)가, 그 남쪽에 103중대(43명)가 배치되었다.
중앙의 2차 방어산 남쪽과 북쪽에 제1,2정찰소대를 200m 간격으로 배치하고
지휘 벙커 북쪽에 제3정찰소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전차2대를 앞세운 북베트남군이 101중대를 향해 전진했고,
전차4대와 함께 북베트남군 2개 보병소대가 102, 103중대를 향해 밀물 처럼 밀려왔다.
천차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전술지휘센터 위에 설치된 감시초소에 있었던 니콜라스 보조위생병장이었다.
북베트남군 공병 2명이 104중대 외곽 방어선 철조망을 절단하는 모습을 본 니콜라스 병장은 무전기로 전차의 출현을 알렸다.
PT-76경전차가 캠프를 향해 돌진해오는 광경을 목격한 특수부대 캠프는 초비상이 걸렸다.
전차가 동남쪽 104중대의 벙커들을 날려 버리고 캠프 중앙부에 위지한 지휘센터를 목표로하여 접근하고 있었다.
그린베레는 케산에 무전을 넣어 104중대 전방에 포화를 집중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경험이 풍부한 다니엘 중령은 즉각 대전차팀을 조직하였다.
캠프로 난입한 북베트남군 병사들은 자동화기를 난사했고 전차도 포격과 12.7mm 기관총을 쏘며 벙커를 향해 나아갔다.
특수부대가 케산 기지에 지원 포사격을 요청하였지만 케산 기지도 코록에서 발사된
152mm 포격에 두들겨 맞았기 때문에 즉각적인 지원 포격이 어려워 15분 후에야 지원 포격이 가능했다.
윌로비 대위는 케산의 포병에게 무선으로 표적을 중계했다.
북베트남군은 화염방사기와 소형 가방 폭약으로 벙커를 공격했다.
어느 지휘 벙커의 병사들은 화염방사기 공격을 받아 항복했지만 즉결 처형 당했다.
미군 특수부대원들과 CIDG들은 벙커에서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특수부대장을 비롯한 장교와 하사관 그리고 남베트남 특수부대원들은
콘크리트로 건설된 작전 지휘 벙커와 돌을 채운 50갤런 드럼 뒤에 몸을 숨기고 반격 하였다.
지휘 벙커 맞은편에 있는 관측 벙커는 북베트남 공병의 가방 폭약에 의해 폭파 되었다.
지휘 벙커로 접근하던 전차가 LAW공격을 받았다.
불타는 전차에서 승무원 3명이 탈출하다 총에 맞아 죽었고 전차가 내부 폭발을 일으켜 포탑을 날려 버렸다.
철조망을 돌파한 전차들은 벙커를 노렸고 뒤 이어 더 많은 북베트남군들이 캠프 내로 침투했다.
가방 폭약과 최루 가스 수류탄, 화염 방사기 공격에 벙커를 탈출하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캠프 동쪽 104중대 방어선 일부가 함락 당했다.
104중대가 무너지자 북베트남군 중대병력은 전차 2대를 앞세우고 북쪽의 101중대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린베레는 근접 집중 포화를 요청하여 북베트남군의 공격을 일시 멈추게 하였지만
CIDG들이 후퇴하는 바람에 캠프 동쪽은 새벽 1시 15분 쯤에는 북베트남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캠프 서쪽 800m 떨어진 지점에 설치된 감시초소도 공격을 받아 린드왈드 중사가 전사하고
병기 하사관 케네스 한나 중사는 포로로 붙잡혀 영영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아마도 그는 처형 되었을 것이다.
캠프 서쪽 제102, 103 중대의 외곽 방어선이 돌파당해 전차들은 근거리에서 벙커를 파괴하고 있었다.
벙커 대부분이 가방폭약에 의해 폭파 당했고 캠프 내에는 포위망에 고립된 병사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제102, 103 중대의 생존자들은 뒤로 후퇴하거나 케산 기지를 향해 몰래 탈출해 나갔다.
전투가 끝날때 까지 특수부대원들은 전차를 향해 M-72를 발사하였으나
불발 또는 명중하였더라도 격파에 실패하는 경우를 많이 경험하게 된다.
LAW는 66mm 고폭탄(HEAT)을 사용하여 200m 사거리 내에서 최대 350mm의 장갑을 관통하도록 고안 되었지만
초기형은 열과 습도에 큰 영향을 받아 성능이 썩 좋지 못했다.
이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특수부대원들이 발사한 LAW에 명중된 1대의 전차가 불길에 휩싸였다.
제2정찰소대와 함께 있었던 홀트 중사가 발사한 106mm 무반동총에
1대의 전차가 화재를 일으켜 바로 옆에 있던 전차로 불길이 번졌다.
다니엘 중령이 신속히 조직한 2개의 대전차팀은 지휘 벙커 바깥에서 용맹한 전투를 벌였다.
다니엘 중령과 니콜라스 병장 등 대전차팀이 전차 격파를 위해 지휘 벙커를 벗어나자 2대의 전차가 기관총격을 가해왔다.
땅바닥에 엎드려 몸을 피한 뒤 전차를 향해 여러발의 LAW를 발사했으나 격파에 실패했지만
다시 끈질기게 전차를 공격하여 지휘 벙커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수 많은 마이크 포스 부상자들이 CH-47 헬리콥터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1969년 푹 퐁
조명탄을 발사하는 그린베레 특수부대 캠프 박격포대의 4.2인치 M30 박격포
캠프 공격 직후 출격한 공군 전방항공통제기와 건쉽이 랑베이 캠프 상공을 맴돌고 있었다.
통제관은 캠프의 윌로비 대위와 교신하면서 AC-47 스푸키 건쉽의 지상 공격을 유도 하였고, 전폭기들도 폭격에 나섰다.
항공통제관이 지상의 표적을 선정하기란 매우 어려운 작업 이었다.
흐린 날씨에 대공화기의 위험을 무릅쓰고 300~360m상공을 비행해야 했으며 케산 기지에서 날아오는 포탄도 조심해야 했다.
조종사들은 불타는 랑베이 연료고의 환한 불빛을 기준으로 비행하여야 했다.
그린베레에게는 대공 표시판 및 적당한 조명 장치가 없었다.
랑베이의 통신 담당은 적의 포가 발포할 때 내뿜는 화염이 보이면 전방통제관에게 통보 하였고,
통제관도 화염방사기 불꽃이 보이면 적으로 판단 하였다.
전방통제관이 표적에 스모크 로켓을 발사한 후 B-57폭격기를 호출하여 폭격하도록 하였다.
B-57 폭격기 조종사는 4발의 폭탄을 투하하여 3대의 전차를 손상 시켰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구름이 두꺼워져 랑베이 방어는 무척 불리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새벽 2시 45분경에 전차 한 대가 특수부대 작전 지휘벙커를 공격하기 위해 캠프 내의 방어선을 공략하는 모습이 목격 되었다.
다급해진 윌로비 대위는 케산의 론스 대령에게 2개 소총중대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론스 대령은 신중한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랑베이 전역을 북베트남군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야간에 헬리콥터로 투입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 없었다.
그렇다고 9번 도로를 따라 이동했다가는 매복공격을 받을 것이 명백했다.
매복 공격을 피하기 위해 우거진 숲을 헤치며 이동한다면 무려 19시간이나 걸린다..
론스 대령에게서 보고를 받은 쿠스먼 중장과 톰킨즈 제3해병사단장은 2개 중대를 지원하기 않기로 최종 결정 하였는데,
이것은 매우 현명한 결단 이었다.
한편 새벽 1시 30분경, 옛 특수부대 캠프에서는 새 특수부대 캠프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반격을 준비 하였다.
새 특수부대 캠프의 동쪽 방어선이 무너졌지만 옛 캠프는 크게 공격받지 않았고 공군 전폭기의 폭격 지원을 받았다.
무전기로 캠프의 전투 상황을 살펴온 에슬리 중사와 3명의 그린베레는 4.2인치 박격포로 조명탄 발사 지원을 하는 한편
라오스군을 설득하여 100여명으로 공격팀을 만들어 북베트남군에게 반격을 가하기로 결정하였다.
하늘에서는 전방항공통제관들이 최선을 다하여 이들의 반격을 지원 하였다.
뜻밖의 반격을 받게된 북베트남군은 공격의 주공을 지휘벙커에서 에슬리의 공격팀에게로 돌렸다.
해군 A-1스카이레이더들은 구름 아래로 하강하여 최저 150m 상공까지 저공 비행을 하여
지휘 벙커 벽을 파괴시키려는 북베트남군을 타격했다.
스카이레이더 조종사들은 저공비행을 하면서 20mm 기관포와 범용 폭탄 및 네이팜 탄을 투하 하였다.
북베트남군의 수류탄이 벙커 계단을 타고 내려와 폭발하여 부상 당한 에슬리 중사는
미친 듯이 무전기로 포격과 공중 지원을 유도 하였다.
그린베레와 라오스군이 여러번의 반격을 시도하였지만 거듭 실패하였고, 북베트남군의 공세는 조금도 무뎌지지 않았다.
에슬리 중사의 유도를 받은 전폭기들이 캠프를 타격하는 틈을타 다리 등 여러곳에 총상을 당한
그린베레 지휘관 다니엘 중령이 CIDG의 도움을 받아 탈출에 성공, 옛 특수부대 캠프로 향했다.
오전 11시 쯤에 또 다시 반격 작전을 시도했던 에슬리 중사는 기관총탄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으나 PRC-25무전기로
계속 포격을 유도하는 등 전투를 지휘 하다 쓰러졌고 옛 특수부대 캠프에서 달려온 찝차로 후송 도중 죽었다.
전사한 에슬리 중사에게는 메달 오브 아너가 추서되었다.
수류탄과 최루 가스 수류탄 공격을 받으면서도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지휘 벙커를 구원하기 위한 반격 작전이 거듭 시도되었지만 또 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윌로비 대위는 지휘 벙커외에 온전한 벙커는 몇개 남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탈출을 결심했다.
화염방사기와 수류탄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투항한 CIDG가 처형당했고
밤사이 가까스로 캠프를 탈출한 병사들은 옛 특수부대 캠프 또는 케산으로 몸을 피했다.
치열한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은 윌로비 대위는 자신들외에 생존자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캠프 내에는 아직도 몇몇 고립되거나 몸을 벙커 내에 숨긴 생존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거듭된 반격작전의 실패와 더 이상 그어떠한 구원도 소용없다 판단한 윌로비 대위는
살아남은 50여명과 함께 캠프를 탈출하기로 결심 하였다.
윌로비 대위는 전방항공통제관에게 집중 공격을 해 탈출로를 열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오후 4시, 탈출이 시작되었다.
지원기들의 근접 공중 지원 속에 벙커를 빠져나온 윌로비 대위를 포함한 50여명의 생존자들은
빗발치는 탄막을 뚫고 각기 캠프를 빠져나갔다.
생존자들이 안전한 곳까지 도피하자 오후 5시 15분에 케산 기지 FOB-3에서는
조지 쿠아모 소령의 반격대원들이 헬기 구조 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랑베이에 공수 되었다.
구조된 특수부대원들은 케산 기지로 공수 되었고 캠프를 탈출한 몇몇 병사들은 걸어서 케산 기지까지 탈출하기도 하였다.
랑베이 특수부대 캠프에 주둔했던 24명의 그린베레 중 14명(11명 부상)이 살아남았고
포로2명을 포함한 나머지 10명은 돌아오지 못했다.
CIDG는 부대원 절반 가량을 잃는 큰 피해를 당했다.
244명의 CIDG가(부상 61명)탈출에 성공했고, 남베트남 특수부대원은 14명 중 9명(부상 3명)이 살아남았다.
약 3,000명에 달하는 라오스군과 그 가족, 몽타냐족, CIDG, 산지 난민들이 케산 기지에 임시 수용되었다.
론스 대령은 첩자의 유입을 걱정하여 그린베레의 도움을 받아 이들의 무기를 회수한 다음 안전 지대에 수용했다.
미군은 북베트남군의 피해를 전차 7대 격파(4대는 북베트남군이 회수)와 250명 전사로 집계 하였다.
제2 방어선 근처에서 포탑이 차체에서 분리되어 버린 PT-76 경전차 옆에 지붕이 날아가 버린 지휘 벙커와 55갤런 드럼통이 보인다.랑베이 특수부대 캠프를 공격한 북베트남군은 총 7대의 PT-76을 격파 당했다. 106mm 무반동총에 2대, M-72 LAW에 5대가 격파 되었으나 4대는 회수 후 수리되었다
부상사를 옴기는 모습
3부 기대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