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 형제의 비행기가 하늘을난지 몇 년이 지났다.
당시 비행대회의 우수한 기체를 제작하여 그 유명세가 높아진 커티스 항공사 사주인
커티스(Glenn H. Curtis)는 미래의 전쟁은 하늘에서 그 승패가 결정된다고 주장해왔다.
이즈음, 열광적으로 비행에 심취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제법 그 세력이 커진
미국 항공승무원 조직은 해군에서 비행에관해 연구할 대표자를 임명하라는
목소리를 내기도했으며 이때 당시에는 프랑스가 항공모함을 만들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미 해군 대령 워싱턴 어빙 챔버스(W. Irving Chambers)는
평소 해군은 독자적인 항공기를 가져야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1910년 10월, 해군은 항공인의 모임 행사에 수습사관들을
파견해보라는 권유를 받게된다.
그리하여 챔버스와 2명의 장교가 파견되는데 이것은
미래의 해군 항공기를 위해 아주 탁월한 선택이된다.
챔버스는 여기서 커티스와 커티스 항공사 조종사인 유진 앨리(Eugene Ely)를 만나게된다.
커티스와 앨리는 챔버스가 모르는 부분들을 세심하게 알려주고 그리고 증명해보였다.
그러나 챔버스는 여러 가지 문제들 때문에 난감했다.
예를 들자면 바다에서 항공기를 띄우고 그 항공기가 다시 착륙할 수 있다는
확실한 증명이 될 만한 것들이 이세상에는 없었다.
그리고 항공기가 해군에의해 운용되어지기 위해서는 항공기의 중요성이 해군에
입증되어져야만 했던 것이다.
너무나도 보수적이었던 해군 관료들은 항공기에 관한한 여전히 냉담했다.
챔버스는 업무에 있어서도 항상 어려움과 냉대 속에서 지내왔었다
또한 챔버스는 그곳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된다.
바다에서 항공기가 날아가야하는 준비과정에 사용된 함선이 독일 상선이었던 것이다.
미국은 세계 최초로 하늘을 나는 항공기를 개발한 나라인데 그 항공기가 다른나라
배의 도움을 받아 날려지고, 그들의 해상에서의 항공기 운용기술의 발전을 목격한
챔버스는 충격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순양함 버밍헴의 갑판에서 항공기를 띄워볼 결심을 하여 그 허가를 받아내기위해
뛰어다닌 끝에 결국 승인을 받아낸다.
챔버스는 이 사실을 라이트 형제에게 알렸으나 형제는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그러나 유진 앨리는 그 사실에 매우 기뻐하며 자신이 시험 비행사가 되기를 열망했다.
버지니아 주 노포크의 해군 공창에서는 경 순양함 버밍헴의 갑판에 목재를 사용한
임시 활주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3750톤의 순양함 전방 갑판에 길이 25m,폭 17m, 끝부분에 5도의 하향각도를 가진
임시 활주대가 완성되고, 1910년 11월 14일 월요일에 3척의 기뢰 구축함에
이끌려 버밍헴이 바다로나왔다.
활주대에는 커티스 사의 퓨샤 타입 복엽기에 앨리가 탑승해있었다.
크레인을 이용해 버밍헴 임시 활주대 위로 복엽기가 끌어올려지고있는 모습
이날은 날씨가 좋지 못하여 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소나기를 퍼부었다.
그러나 앨리는 낙심하지 않았다. 오후 3시쯤, 앨리는 이륙을 준비하였고, 출발 신호가
떨어지자 앨리는 자신의 항공기를 힘차게 발진시켰다.
순간 빗물이 항공기를 세차게 치면서 그의 고글에도 빗물이덮쳐왔다.
앨리는 일시적으로 현기증을 느꼈다고한다.
어쨌든 이날의 비행은 대성공이었다.
앨리는 버밍헴의 활주대를 떠나 4km를 비행했던 것이다.
챔버스는 결과에 대단히 만족했지만 사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었다.
시험 비행 도중 앨리가 이륙에 실패하는 것에 대비하여 진로를 바꿀 수 있는가,
정지할 수 있는가, 바다에 떨어졌을 때는 쉽게 구조할 수 있는가 하는
불확실성들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2개월 후에는 순양함 펜실베니아 호의 갑판을 개조해 이륙과
착륙 시험 비행을 함께 하기로 계획 되었다.
뉴욕 해군 공창에서 그 작업이 시작되고 있었으며 관계자들은 작업자들을 격려했다.
몇몇 해군 직업 군인들은 열심히 성의껏 일해주었다.
그러나 이때 까지도 챔버스는 조종사의 안전을 도모할 기술에 관한 해답은
여전히 갖고 있지를 못했다.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을 바탕으로 안전 장치를 고안하고는 있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은건 아니었다.
한편, 앨리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해군은 주머니를 움켜쥐고 있었다.
사실 커티스는 해군이 시험 비행에 쓸 항공기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항공기를 제공해주었었다.
그것은 시험이 성공하면 자신의 항공기들을 해군에 판매할 수 있게되지 않을까
해서였는데 계속 해군이 항공기 도입에 무관심하자 커티스는 자신의 돈을들여
해군 관리들에게 비행 교육을 시켜주면서 로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펜실베니아 호가 개장 작업을 완료하고 샌프란시스코 항에 정박했다.
1911년 1월 18일, 앨리는 자신의 복엽기와 함께 펜실베니아 호에서 있을
이 착함 시험 비행을 위해 비행장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앨리는
나는 시험이 성공적으로 끝나리라는 생각에 의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날 날씨도 좋았으며 지난번 처럼 미끄럽지도 않아 커티스 복엽기가
제성능을 발휘할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이번 시험 비행에는 간단한 착함 장치가 설치되었다.
착함 장치는 성능 시험 때 여러번 실패했던 일이있어 만약을 대비해 맨 끝에
천막을 준비해 항공기를 최종적으로 세우기로 계획했다.
펜실베니아의 개조된 활주대로 진입하는 앨리
착함에 성공했다. 와이어에 연결된 50파운드 무게의 모래 주머니가 보인다.
이함을 위해 복엽기가 돌려지고있다.
이함성공
이 착함 장치는 조잡해보이기는하나 미래의 항모 착함 시스템인 어레스팅기어의
모태가 된다.
이것은 22개의 와이어가 갑판을 가로질러 쳐지고 그 끝에는 모래주머니가 달려
제동 장치 역할을했으며 앨리의 항공기에는 낚시 고리같은 도구를 장착시켜
착륙하면서 와이어에 걸리도록했다.
앨리는 펜실베니아 호에 착함한 다음, 다시 기수를 돌려 힘차게 날아올라
이날의 시험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게되었다.
이날 시험 비행으로 이함보다는 착함이 더 어렵다는 경험을 얻음과 동시에
챔버스는 의회에 바다에서의 항공기 운용을 증명해보이기위한 더 많은
비용의 지출을 요구할 것이라고 천명하는 계기를 가져다 주었다.
이렇게해서 해군은 5월에 그 첫 번 째 항공기를 주문하게되고 의회에
항공기 운용에대한 비용으로 25000달러를 요구하여 승인받게된다.
하지만 일부 해군 내에서는 항모의 개발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항모는 비 효율적인 바다의 격납고일 뿐이며 특히 비 전투용 함선이라는
이유로 항모 개발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착함 시에 너무 위험해 굳이 그러한 모험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소리도있었다.
챔버스는 이 착함 시에 시간이 지연되는 문제점들을 해결하여 항공기들을
재빨리 움직일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리게되고
그 해결책을 캐터펄트 시스템에서 찾고자했다.
그리하여 벌판에 이 시스템을 사용하기위한 시험 기계들을 설치하여 시험해보였지만
모두 해군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압축 공기를 사용하는 방안을 내놓게되고 그 첫 번째 제품을 아나폴리스의
엘리슨 비행 제어 센터에서 제작했으나 실패하고만다.
그러나 여기서 많은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다.
이후 엘리슨 비행 제어 센터와 챔버스는 해군 기술자
리처드슨(H. C. Richardson)과 함께 개발에나서 3개월 후 그 결실을 보게된다.
1912년 11월 12일, 워싱턴에서 A-3 수상 항공기를 이용하여 바지선에 설치된
이함 장치의 테스트를 실행한 끝에 그 시험을 성공시킨다.
수상기를 조종한 사람은 미해군 최초의 조종사인 앨리슨(T.G.Elleyson) 대위였다.
이 광경을 지켜본 커티스는 이것은 아주 중요한 업적을 이룬 것이라 평가했다.
커티스 비행 교육생 시절의 앨리슨(맨 왼쪽) 과 커티스 (중앙)
워싱턴 해군 공창. 앨리슨과 수상기
다음해 1월, 챔버스는 해군 항공대 병사들을 쿠바의 관타나모 기지로 보냈다.
1913년 1월 6일부터 8주간 행해지는 해군 선단의 쾌속 훈련에 참가시켜 거기서
잠수함 추적과 파괴를 위한 수뢰설치및 수색과 초계훈련에 들어감과 아울러
해군에게 항공기에 관한 교육도 함께 실시됐다.
그들은 항공기의 안전성과 기동성을 바탕으로한 척후활동과 수색 전술등에서
그 우월성을 증명하고, 교육을 통해 그들이 관심을 가져주길 기대하여 편성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미 해군은 항모와 항공기를 갖추기위한 미래를 준비하며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1913년 6월 챔버스는 퇴역하였다. 그해 겨울 브리스톨(Mark L. Bristol) 대령이
그 자리를 이어받는다.
미국과는 달리 유럽 여러나라에서는 자신들의 항모와
항공기운용을 위한 실험에 금전적 투자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유럽은 국가 간에 공군을 운용하기위한 경쟁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미 해군 항공대는 1914년 4월에 처음으로 공식적인
작전 비행에 들어가게된다.
멕시코와의 사소한 문제였긴 하지만 여기서 그들은
수색비행등을 수행하게되었다.
1915년 11월 5일.
해군 장관 벤슨(W.S Benson)은 노스캐롤라이나 호를 방문했다.
그곳에서는 새롭게 개발된 런처 시스템을 배에 임시로 설치하여 AB-2수상 항공기를
발사시키는 시험이 있을 예정이었다.
팬사콜라의 미 해군 승무원 조직(Naval Aeronautic Station)을 지휘했던
머스틴(H.C.Mustin)대위가 항공기에 탑승하여 시험에 임했는데,
발사는 성공하여 만족스러웠으나 시스템의 개량이 절실하다는 것은 명백했다.
다른 조종사들은 또 다른 캐터펄트 테스트를 수행했다.
캐터펄트에의해 발사되어지는 AB-2수상기
수상기가 육지로 오르고 있다.
이렇게 미 해군은 항모를 보유하고있지는 못했으나 캐터펄트와 어레스팅등의
시스템을 개발해오고 있었다.
이 때 영국은 이미 항모를 보유하고 있었다. 영국은 순양함 헤르메스(HERMES)를
3대의 수상기를 탑재하기위해 개조하여 운용하였다
HMS HERMES 헤르메스
운용하기를 상부에 강력히 건의했다.
그러나 해군은 항공기 운용 기술이 완벽하지 않은 마당에 항모를 갖기위해 많은
돈을 들이는 것은 슬기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브리스톨은 1917년 회계 연도에서 항모 건조를 위한 자금으로 500만 달러의
지출을 건의했지만 좌절당한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대서양에서는 독일 U보트의 공격을 받은 함선들이
엄청나게 수장당하자 잠수함 수색을 위한 수상 항공기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유럽 해군 지휘관이었던 심스(W. S. Sims)해군 소장은 수상 항공기와 그것을
운용할 항모 개발을 촉구했으며 더 나아가 수상 기들이 항모 갑판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발사될 수 있는 기구의 개발을지지했다.
HMS FURIOUS 퓨리어스
미국은 영국의 항모 운용 기술과 발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영국은 전함 퓨리어스의 갑판을 개조하고 그 아래에 격납고를 만들었다.
5대의 복엽기와 3대의 수상기를 탑재하여 그 이듬해인 1918년에 실전 투입한다
일본 항모 호쇼
일본은 영국으로부터 기술지도를 받는등 항공모함 건조를 준비해오다가
미국 보다는 조금 늦지만 1922년에 표준 배수량 7470톤, 총 톤수 10000톤,
속도 25노트의 항모 호쇼(HOSYO)를 건조한다
영국은다시 상선을 개조하여 아르거스 항모를 만들었다. 18000톤의 아르거스는 진보된
평 갑판을 사용했으며 속도는 21노트에 20대의 숖위드 항공기를 탑재할 수 있었다.
건조 후 전쟁이 끝나 아르거스는 실전 참가는 하지못한다.
미국이 항모를 보유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영국은 벌써 5대의 항모를
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자극받은 미국 해군은 예산을 책정하여 드디어 본격적인 항모 건조 계획에
착수하게되어 당시 석탄 운반선인 쥬피터를 항모로 개조하기로 결정했다.
일각에서는 전함을 개조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는데 갑판아래에 항공기를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어윈(noble.e irwin)해군 대장의 주장으로 일축되었다.
국회에서는 순양함 개조를 고려했지만 결국 쥬피터를 개조하는 것으로 결론이난다.
우여곡절 끝에 1920년 1월, 5십만 달러의 예산이 국회에서 책정되어 쥬피터의 개조는
박차를 가하게된다.
그리하여 석탄 운반선이던 쥬피터는 버지니아 주 노포크에서 1920년 3월 20일에
총 톤수 14700톤에 랭글리(LENGLY)라는 새이름을 달고
미 해군 역사상 첫 번 째 항공모함(CV-1)으로 태어난다.
노포크 해군 공창에서 개조되고있는 석탄 운반선 쥬피터
길이 163m. 15노트의 느린 항모인 랭글리는 1937년에 수상기 모함(AV-3)으로 개조된다
자료제공 : 사진으로보는 세계대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