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두면 좋은 정보..환두대도가 지배하던 시대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04.21 20:5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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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두대도가 지배하던 시대

 고조선과 삼한을 거쳐, 본격적으로 고대국가가 들어서기 시작하는 기원년을 전후하여, 모든 생산공구류나 무기류가 [철제]로만 만들어지고 복잡해진 생활에 따라 그 기능도 다양화하고 용도도 분화되었다. 

 그 중 한 두대도는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4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공동으로 출토되는 무기류이다. 물론 이 한두대도는 중국 한나라 시대에 기원을 두었지만, 역시 우리나라에 와서 크게 유행하였다.
 특히 3세기 후반 이후 4국이 각축을 벌이면서, 철제 무기는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 왔으며, 부장품과 신분 과시용 의장품으로 각광을 받으면서여 4~5세기 무렵 환두대도는 그 전성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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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식 쌍룡문 환두대도 손잡이 부분

  이 칼은 금으로 된 칼의 손잡이 부분과 철로 된 칼날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떨어져 있으나 원래 같이 붙어 있었다. 손잡이 부분은 표면 전체에 서로 엉킨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다.

  고리 안에도 두 마리 용이 조각되어 있으며, 용의 눈은 옥으로 장식되어 있다. 칼날 부분은 철제 부분만 남아 있으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이 칼은 신라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는데, 용무늬가 호화스러운 점에서 사용자의 신분이 매우 높은 귀족이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일반전인 환두대도의 형태

칼몸의 중간에 길게 금이 나 있는 것을 호대도(鎬大刀), 호가 없이 평평한 것을 평대도라 하는데 호대도보다 평대도가 많다. 칼끝은 뾰족한 것과 일직선인 것이 있고, [칼]등은 편편하게 직선으로 된 것과 약간 휘어진 것이 있다.

  삼국시대 전기에는 칼몸의 너비도 넓고 길이도 길며 무게도 무겁던 것이 중기 이후로 내려가면서 차차 좁고 날씬하며 가벼워졌다. 이것은 칼을 만드는 기술이 발전해간 것을 의미한다.
중기 이후로 내려가면 칼을 호화롭게 장식하는 풍습도 크게 일어나는데 주로 칼자루와 칼집에 많은 장식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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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쌍용문 환도대도 부분
길이 : 11 cm / 너비 : 10.4 cm

일본에선 6-7세기 경의 고분에서 자주 보이는 장식으로,
우리나라 신라의 영향을 많이 받아 유행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환두대도 장식은 환두대도 손잡이에 달려 장식을 더한 것으로 생각된다. 타원형으로 아랫부분이 편평하고 아랫부분의 중앙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 고리가 돌출되어 있다.
  타원형 내부에는 용 2마리가 1개의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이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자루는 금실이나 은실을 감기도 한다. 파두에 특별히 신경을 써서 조각을 하는데 그 모양에 따라 환두대도(環頭大刀), 방두대도(方頭大刀 칼 고리가 사각형임), 규두대도(圭頭大刀칼 고리가 삼각형), 소환두대도(素環頭大刀) 등으로 나누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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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중인 삼엽문 환두대도 (나뭇잎 무늬가 조각되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환두대도는 자루머리가 큰 고리모양이고 거기에 여러가지 상서로운 동물이나 식물을 조각하였다. 조각의 문양에는 쌍룡문, 단룡문, 단봉문(單鳳文), 삼엽문(三葉文), 그리고 용과 봉이 함께 조각된 용문문등도 있다.
 이들 환두는 청동이나 금동으로 만들기도 하는데 그 형식에 따라 만든 시기를 판단할 수 있다. 

 

 

경남 합천 옥전 고분군에서 출토된 가야식 용봉문 환두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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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과 봉황문의 환두 대도는 화려하고 독특한 장식으로, 출토 당시부터 주목을 받았다. 환두부(環頭部)에는 목이 서로 교차된 용과 봉황이 조각되어 있는데, 몸이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 특이하다. 그 밑에는 두 마리의 주룡문(走龍文)이 서로 대칭이 되도록 엉켜진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손잡이는 가운데에 빗금이 새겨진 가는 은실이 촘촘하게 감겨 있으며, 양쪽에 용 무늬가 그려진 장식이 감겨져 있다. 칼집 머리 장식에도 역시 서로 대칭되는 두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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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대도는 백제 역사상 그  주인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검이다. 그 중 가장 걸작품은 단룡문이 조각된 환두대도이다. 자루의 중간을 금실로 곱게 감고 양쪽 끝에는 육각형의 문양구획을 4개 만들어 서로 연결되게 배치하고 그 안에 다시 한마리의 봉황을 새겨 넣었다. .
  무령왕은 재위중에 군지휘관으로서 전쟁에 나간 일이 없는데도 이처럼 여러 자루의 크고 호화로운 대도를 가진 것은 왕자의 권위를 과시하는 상징으로 쓰인 듯하다.

 백제뿐만 아니라 경주의 신라고분이나 낙동강유역의 가야고분, 그리고 영산강유역의 크고 작은 무덤들에 이르기까지 환두대도가 많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당시 사회에서 칼은 남자들이 몸에 지니는 필수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의 신라왕릉 병풍석에 조각된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모두 보검을 잡고 있는 것이라든지, 불교사원을 지키는 팔부신장(八部神將)이 모두 장검으로 무장하고 있는 것 등으로 보면 종교적 의식에는 장검이 많이 사용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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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벽화중 안악 3호분(동수묘)의 행차도, 마차를 중심으로 환두류 무기로 무장한 병사들이 압장서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또한 실전에서도 환두류 무기들은 맹위를 떨쳤는데, 바로 칼 고리에 끈을 꾀어 손목에 묶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내가 죽기전까지는 결코 적에게 무기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로 이 무기를 지니고 다녔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환두 무기는 수제국과 당제국등 막강한 중국세력으로부터 우리나라를 지켜내는데 위력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간혹 고구려의 패망에만 집착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다시 발해가 일어설 때에도 역시 대조영은 이검을 손목에 묶고, 대륙을 누비며 사즉필생의 각오로 대의를 다졌을 것이다.

 

 

자료제공 : 야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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