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모함 이야기 (2부)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04.23 19:3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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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항모 이글

랭글리가 건조되기까지 여전히 보수적이었던 해군당국은 석탄 운반선을 항모로

개조하려는 계획에 있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항공 관계자들은 쥬피터로

개조해야하는 당위성을 해군 위원회를 상대로 설득해야했다.

 

특히 해군 항공 관리 토마스 크라벤(THOMAS. T. CRAVEN)대령은 쥬피터 개조를

위한 예산을 얻어내기위해 입법 청문회에서 고군분투했다.
프랑스에서 근무하던 그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와 미 해군 항공 담당 관리자로서

조종사와 항공 요원들을 지원하는 연구를해왔다.

그들은 쥬피터가 속도가 느려 항모로서의 고유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차기 해군의 항모와 항공기 정책 결정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실험실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논리를폈다.

 

거기에다 전쟁말기에 독일이 상선 슈트트가르트(stuttgart)를 항모로 개조하려하며,

영국이 이글(HMS.EAGLE)을 자신들의 두 번 째 항모로 개조하고 역시 상선이었던

아르거스(HMS. ARGUS)를 항모로 개조했던 예를 들었다.

 

또한 해군내 진취적인 장교들이 이를 지지하여 힘을 실어주었다.

사실 실제로 작동하는 해군 항공기를 한번도 본 적이없는 장교들로서는

그냥 단순한 보수론자일 뿐이지 과격한 반대자는 아니었다.

그들도 마음 속으로는 무언가 새로운 것이 보여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었다.

거기에다 헨리 마요 장군을 비롯한 여러 장교들이 항모가 자신들의 함대에

포함되어지길 바란다는 희망을 상부에 건의함으로 이를 우회적으로 옹호해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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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벤

1913년 4월 7일에 건조되었으며 쾌속 석탄 운반선으로서

1차대전 중 프랑스등지로 항해했던 전력이있는 쥬피터를 

항모로 개조하는데 있어서 불리한 점이 많았지만 유리한 점도

찾아내야했다.

 

사실상 쥬피터는 해군이 원했던 이상적인 항모로의

개조 조건은 그리 완벽히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쥬피터는 특별히 개조된 갑판을 사용하여 비행기를 이륙시킬 수 있는

충분한 길이를 가졌으며 각각의 문들이 다른배에 비해 현저히 크고 또한 모든 격실들의

높이가 다른 배에 비해 무척 높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쥬피터는 빠른 시간 내에 아주 값싸게 개조할 수 있다는 이점이 강조되었다.

 

이렇게하여 쥬피터의 개조 작업 추천서가 해군에서 작성되어 제출되고 의회는

1919년 7월 11일 예산 편성을 승인하게된다.

그리하여 1920년 3월에 석탄 운반선 쥬피터는 자신을두고 일어났던 모든 논란들을

뒤로한 채 개조를 위하여 버지니아의 노포크 해군공창으로 들어가게되었던 것이다.

 

쥬피터는 함내의 석탄관련 기계들을 모두 철거하고 길이163m, 폭19.5m의 비행 갑판이

설치되며 갑판으로 항공기와 장비들을 올려 줄 엘리베이터도 선체 중앙에 설치될 것이었다. 그리고 이 엘리베이터 주변으로는 갑판에 몰려있을 여러 대의 항공기로부터 사람과

장비를 보호하기위해 말뚝들이 보강되었다. 

수상기들을 운용하기위한 크레인도 설치되었으며 기관실은 뒤로 옮겨졌다.

항공부품, 연료, 공작기계, 예비엔진등 군수품과 엄청난 수의 자재들을 적재할 방들도

만들어졌으며 굴뚝은 배의 측면에 설치되면서 서서히 항모로 변신해가고있었다.

 

토마스 크라벤(THOMAS. T. CRAVEN)대령은 자신이 항공관리자로 근무했던

1919년부터 임기 만료인 1921년 3월까지 조종사들의 훈련에 각별히 신경을썼다.

그는 항모와 같은 조건에서 항공기를 이 착륙 시킬 수 있는 훈련이 가능한 시설들을

육지에 마련하여 조종사들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그는 1921년 3월 7일에 해군 제 9국방어사령관으로 임명된다.

 

마침내 1922년 3월 20일 쥬피터는 랭글리 항모로 변신하여 세상에 나타났다.

그동안 캐터펄트와 어레스팅 기어에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랭글리가

실제 바다로 나가게되는 9월에 착함장치인 어레스팅 기어가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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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글리에서 첫 번 째로 이륙한 VE-7SF

랭글리에서의 첫 번 째 이륙은 정지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만약의 사고에 대비한 안전요원과 보트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비상 대기하였다.
1922년 10월 17일, 버질 그리핀(Virgil C. Griffin) 대위가 보우트 VE-7SF로 이함했으며
착함은 10월 26일에 해군소령 시벨리어(Godfrey.D.C.Chevalier)에 의해 이루어졌다.
시벨리어 소령은 에어로마린 39B로 착함을 시도했는데 그의 항공기는 아무런 손상도없이
성공적으로 랭글리의 어레스팅 기어에의해 정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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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ROMARINE 39B형 수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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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벨리어 소령의 랭글리 착함을 그린 그림

11월 18일에는 첫 번 째로 PT 뇌격기가 캐터펄트에의한 이함에 성공한다.
이러한 시험들로인해 이후 항공기들은 해군의 항공기 조건에 충족되어야했고,

어레스팅후크(테일 후크)와 랜딩기어는 착함 시의 충격에 대비해 더욱 강력하게

설계 보강되었다.

 

랭글리는 이후 5년간 미 해군의 유일한 항모로서 존재하며 미 해군 조종사들을

교육 훈련하는 더 없이 훌륭한 학교나 진배없었다.

조종사들이 숙달되는 동안 랭글리의 이함 시설과 착함 시설들은 꾸준히 개량되어졌다.

조종사들은 함 밖으로 튕겨나가거나 함 구석에 처박히고 기체가 부러지기도 하면서

그 기량들을 닦았으며 그 동안 사망 사고같은 대형 사고는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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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의 랭글리

그동안 미 해군은 제2의 항공모함을 가지기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1921년 2월 24일에 39000톤 급 항모건조를 승인했으며 그 설계도가 11월에 제출되었다.

하지만 그 다음해인 1922년에 체결된 워싱턴 군축 조약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행해져야만했기 때문에 미국은 2척의 순양전함인 렉싱턴과 사라토가를 주목했고

처음 계획되었던 39000톤급 항모를 위해 준비되었던 계획들이 순양전함의 개조에

적합한 것으로보고 작업에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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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2 번 째 항공모함 CV-2 렉싱턴

선박 설계사인 어네스트 퍼헴은 1921년 초부터 작성해오던 설계도면을

1922년 10월에 완성하여 제출한다.

새로이 건조되는 항모는 고강도의 단층갑판에 섬모양인  아일랜드 함교를

채택하는 것으로 설계되었는데 풍동실험을 거쳐 1921년 7월 6일에 최종 승인을 받았다.
두척의 항모에는 플라이휠 방식의 캐터펄트가 설치된다.

 

이리하여 33000톤 급 항모인 렉싱턴(USS LEXINGTON)은 1927년 12월 14일

CV-2로, 사라토가(USS SARATOGA)는 그 보다 빠른 1927년 11월 16일에 CV-3으로

명명되어 정식 취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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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3번 째 항공모함 CV-3사라토가

한편............................

일본 항공대는 미국, 영국, 프랑스등지로 장교들을 유학보냈으며 1912년에

프랑스에서 2대의 파먼 수상기를, 미국에서는 2대의 커티스 수상기를 가지고 귀국한다.
그리고 도쿄 만 서쪽 측면에 위치한 해변에 해상 긴급 이착륙 설비를 갖추게된다.

여기에는 4명의 고급장교와 약100명의 병사들이 비행 훈련에 종사했다.

일본은 군 항공사업에 1912년부터 1917년까지 매년 3~4십만 엔(약20만 달러정도)을

분배했고 1918년까지 약 200만엔을 지원했으며 매년 더 늘려갔다.

해군과 공군은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하여 배우며 익혀나가고 있었다.

일본의 해군 확장 프로그램은 1920년에 시작되어 1923년에 완료가된다.

 

일본 항모 호쇼(HOSYO)는 1919년 아사노 쉽빌딩 회사에서 건조에 들어간 항모이다.

표준 배수량은 7470톤 이었으며 25노트의 속력을 가지도록 되어있었다.

6대의 폭격기(외에 4대의 예비기), 5대의 전투기(외에 2대의 예비기)와 4대의

수색항공기로 구성된 총 21대의 항공기를 탑재하는 항모로서 요코스카 해군 기지에

인도되었다.

 

호쇼는 일본인이아닌  조단 이라는 영국 민간인이 조종하는 항공기가

1923년 2월 22일에 첫 번 째로 착함한다.

일본은 영국의 기술을 전수받아 항모를 만들고 노하우를 축적했으며,

영국 비행교관을 초빙하여 함상 이착륙에관한 기술울 지도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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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쇼

일본은 워싱턴 군축 조약으로인해 순양전함 아카기를 항모로 개조하기로했고,

1928년에 완성된 아카기(AKAGI)는 일본의 두 번 째 항모가된다.

당시 아카기는 표준 배수량 3만톤, 속력 31노트에 3단 비행갑판으로서

60대의 항공기를 탑재할 수 있었으며 18인치 포와 4.7인치 포 12문으로 무장했었다.

건조 중이던 자매함 아마기(AMAKI)는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관동대지진에 의해

선체가 휘어져버려 1924년 7월에 요코스카에서 스크랩처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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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조 중인 아카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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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군축협정에의해 스크랩 처리 예정이던 3만9천톤급의 전함 가가(KAKA)를

항모로 1928년에 개조완료하여 1929년에 취역시킨다.

이역시도 영국의 영향을 받아 3단 갑판 방식이었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항모 생산 기술을 비밀로 유지해오면서 서서히 해상및

항공기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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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

 

영국에서는........

영국 해군 장관 처칠은 해군의 비행기 개발을 정력적으로 지지했었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중에 어느나라도 갖지 못했던 항모를 개발하여 가졌던 나라이다.

 

앨리오트 (Alliott Verdon Roe)라는 사람은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를 본따서 설계한

비행기를 만든다.

그 비행기는 삼엽기로서 1908년 6월 8일에 성공적으로 비행하게된다.

처음 제작한 항공기는 정말 형편없는 수준이었으나 나중에 그가 제작한

AVRO 504는 영국 육군항공대의 표준항공기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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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RO 504 복엽기

1911년 3월 2일, 3명의 왕실 해군 간부 3명과 1명의 해병대 장교가 열성적인 민간인

비행사에게서 비행 교육을받게되는데 그 중엔 샘슨(Charles R. Samson)대위도 

끼어있었다.

1912년, 영국의 첫 번 째 수상기인 호라스는 샘슨이 조종하여 성공적으로 비행한다. 
 

그리고 4개월 후인 5월에 역시 1911년에 최초의 비행교육을 받았던 4명의 군인중

한명인 그레고리( R. Gregory)대위가 전함 히베르니아에 일시적으로 설치된

비행갑판에서 함이 10~12노트로 움직이는 가운데 이함하여 비행에 성공한다.

 

그리고 이때 쯤 프랑스는 이미 육군 항공대를 창설하여 운용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1912년과 1914년 사이에 순양함 포드레를 이용하여 수상기를 실험하고 있었다.

그러나 배는 수상기를 격납하지 못해 해변에 배를 보관하여 연습했다. 

그러다 더 발전된 배가 개발되어 나오지못하자 관심을 잃어 버리고만다.

그리고  육상발진 기지에서의 비행연습도 활발히 진행하는등 프랑스는

항공기 운용의 선두주자였다.

 

독일은 항공기 개발에있어서 공기보다 더 가벼운 물질을 이용한 항공기 개발에 더 몰두했다.
그것은 페르디난드 폰 제플린의 비행선이었다. 아울러 육상항공기도 개발했으며

바다에서는 U보트가 그 위력을 태풍처럼 발휘할것으로 기대했다.

반면에 이탈리아는 별로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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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비행선 제플린

 

영국은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이보이고, 독일의 U보트가 급성장하여 

제해권을 위협받을 경우를 대비해 항공기로 대항하는 방법을 모색하기로했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바다로 항공기를 바로 밀어넣어 실험을 하면서 수상기를

연구 개발하는 동시에 함정도 함께 연구했다.

 

그러다가 배로부터 항공기를 띄우는 실험으로 들어갔고, 쓰기 까다로운

수상기의 잇점과 육상기잇점을 결합하여 새로운 항공기로 개발하는등

이 분야에 관한한 영국은 선구자였다.

 

영국은 바다에서의 항공기 발전을 공군의 창설로 연결하려 움직였다.
1912년 4월 13일, 영국 육군 항공대는 업파본 다운스에 비행학교를 설립하여

사람들을 소집하기 시작했다.

특수병과를 설립하였으며 특수병과와 학교는 왕실 해군과 타군의 비행교육 활동을

위해 집중 운영되었다.

 

전쟁의 기운이 유럽을 흔들기시작하자 영국은 1912년 10월, 연안 경비를 위해

자국 해안 곳곳에 해군 기지들을 설립했다.

이것은 항공기들이 연료보급을위해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없게 하나의 체인으로

연결하기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차량으로 운반된 자재들이 1913년 6월에 순양함 헤르메스에 얹혀질 때

항공기들은 항모의 개념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헤르메스에서는 2대의 수상기가 이미 운용되어지고 있었으며 차차 보강되어지다가

1914년 10월에는 더 많은 항공기를 탑재할 수 있게되지만 결국 그 운명을 다해버리고만다.

 

처칠은 비행에 매혹되어있었다.

그는 원래 호전적인 사람으로서 해군의 항공기 개발을 적극 장려하고 나섰다.

처칠의 전폭적인 지원에의해 영국 해군과 더불어 해군항공은 점점 더 발전되어진다.

그러다 유럽은 전쟁에 휘말리게되어 조약관계로 맺어진 각국들이 자동으로

전쟁에 참여하고 영국은 1914년 8월 4일, 독일에 선전포고를한다.

영국의 유일한 항모인 헤르메스가 1914년 10월 30일 저녁, 어뢰에 맞아 격침당하고만다.

다행히 대부분의 승무원들은 탈출하여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자 영국은 신속히 헤르메스와 동일한 설비를 이용하여 상선을 개조하기 시작한다.

 

3부 기대해주세요 ^^

자료제공 : 사진으로보는 세계대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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