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학익진과 트라팔가 해전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05.07 19:4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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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트라팔가르 해전의 상황도다. 얼핏 어떤 해전과 유사하지 않은가? 그렇다. 이 그림을 살짝 바꾸면 한산도 해전 당시의 학익진이 된다. 물론 영국 해군이 일본군, 프랑스 해군이 조선군 역할이다. 그럼 결과는? 아다시피 프랑스 해군의 완패다. 19대 1. 19척의 배가 침몰하거나 나포되는 동안 영국해군의 손실은 함선 한 척. 도대체 이유가 무얼까?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함대가 그야말로 박살난 이유와도 같으니까.

원래 다른 교통수단도 마찬가지만 배라는 것이 바다를 가르고 나가는 것이라 앞뒤로 길죽한 모양을 하고 있기 십상이다. 당연히 대포를 실어도 측면을 바라보고 싣는 것이 더 많이 실을 수 있고, 따라서 측면을 적에게 향하고 공격하는 것이 더 강력한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것을 유럽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유럽의 해전이라는 것이 길게 일렬로 단종진을 펼치고 평행하게 기동하면서 가진 바 화력을 집중해 투사하는 형태를 띄기 쉬웠다. 그러다가 영국 해군에 의해 이러한 유럽에서의 일반적인 해상전술을 파훼하려 새로운 전술이 연구되었으니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적 함대 대열에 대한 종단이다. 그림에 나온 바와 같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당시 함포의 명중율이라는 것이 참으로 형편무인지경이었다는 것과 함포의 발사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통신수단의 미비로 말미암에 빠른 전술적 변화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당시 함포의 위력은 전열함을 일격에 격침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 마디로 저렇게 대열의 측면을 노리고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적에 대해 한 순간에 화력을 집중시켜 기동을 저지하고 함대를 괴멸시키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결국 넬슨의 영국 함대는 프랑스해군의 함포사격을 무릅쓰고 12번째와 13번째 함선의 사이를 파고들어 프랑스 해군의 함대를 종단, 화력과 규모에서 우위를 확보하고 철저히 프랑스 함대를 짓이겨 버린다. 이름하여 역사에 그 이름도 찬란한 트라팔가르 해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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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학익진이 결국은 육지와 마찬가지로 지형이 복잡한 연근해에서나 가능한 전술이라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한산도 해전 당시 일본 수군이 이순신의 함대와 대등한 속도와 화력을 지니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해전이 벌어진 장소가 너른 대양이었다면? 이순신의 함대가 화력을 집중하는 사이 일본군 함대는 이순신의 함대를 돌파하여 종단, 오히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의 프랑스해군과 마찬가지로 이순신의 함대가 더 큰 위험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수군은 프랑스 해군이 아니었고, 일본 수군도 영국 해군이 아니었다. 전장 역시 트라팔가르와는 달리 주위의 섬들로 인해 함대의 기동이 제한되는 연근해였고, 화력과 방어력에 있어 조선수군의 판옥선은 일본 수군의 세키부네를 크게 압도하고 있었다. 조선 수군의 얇은 포위망을 돌파하기에도 너무 작고 약했던 세키부네는 기동마저 제약당한 상황에서 조선수군의 대열을 종단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결국 트라팔가르에서의 영국해군과는 달리 조선수군과 주위의 섬들에 갇힌 채 집중포화 아래 철저히 섬멸당하고 만다. 요체는 연근해라고 하는 지리적 조건과 개함전럭에서의 압도적인 우위, 그것이 트라팔가르와 한산도에서 전혀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나게 된 이유였다.

한 마디로 한산도 해전에서의 조선수군의 승리란 위에 언급한 조건들이 갖추어졌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만의 하나 일본수군이 보다 자유롭게 능동적으로 기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이었고, 조선수군의 화력이 일본 수군을 압도하지 못했다면 트라팔가르에서와 마찬가지로 오히려 조선수군 자신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물론 그러한 것까지도 모두 고려하여 작전을 짰기에 이순신이 위대하다 하는 것이겠지만, 학익진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래도 한계가 많았다. 그것이 한산도 해전 이후로 특히 대양에서 학익진이나 그와 유사한 전술이 쓰이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면 도고 제독의 쓰시마 해전은? 도고 제독의 정자진도 학익진과 비슷한 원리라고 하는데? 물론 도고 제독의 쓰시마 해전도 결국 원리는 같다. 아래는 당시 쓰시마 해전의 전투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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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그림을 살펴보면 러시아 해군에 비해 일본 해군의 기동이 더 복잡하다. 당연히 기동이 복잡한 만큼 일본 함대의 속도가 러시아 함대에 비해 떨어져야 하겠지만 도리어 몇 차례의 절묘한 선회기동 - 회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일본 함대가 러시아 함대의 진행로를 종단하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저 유명한 도고 제독의 정자기동이다.

당시 러시아 함대는 멀리 희망봉을 돌아 오느라 오랜 항해로 사람이나 배나 무척이나 피로가 누적되어 있던 상태였다. 더구나 러시아 함대에는 속도가 느린 구형함정도 상당수 섞여 있어서 이들과 보조를 맞추느라 기동속도가 10노트 정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반면 일관된 전술적 목표를 가지고 건조된 일본함대는 15노트 이상으로 항해할 수 있었고, 이러한 속도의 우위가 여러 차례의 급격한 선회기동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함대를 따라잡고 그 진행로를 차단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여기에 이전과는 한 차원 달라진 포격의 명중율과 통신기술의 발달은 중앙통제에 의한 일제사격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화력을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한 마디로 기동력에서도 우세한 상황에서 높은 명중율과 다수의 화력을 집중함으로써 단기간에 집중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었고, 그로써 러시아 함대는 괴멸적인 피해를 입고 필사의 도주를 감행해야 했다. 물론 그나마 살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간 함선도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이처럼 결과만 놓고 본다면 도고 제독의 정자진과 이순신 제독의 학익진은 무척 닮아 보인다. 하긴 원리 자체가 비슷하기는 하다. 상대의 기동정면을 차단하여 기동을 제한하고 화력의 우위를 확보함으로써, 보다 효율적으로 화력을 집중하여 단기간에 적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가한다고 하는. 그러나 사실 두 전술 사이에는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도고 제독의 정자진은 기본적으로 기동전술이었다. 고도의 함대기동을 통해 상대의 기동로를 차단하고 그로써 화력의 집중을 꾀하는 유럽식 함대기동전술이었다. 반면 이순신의 학익진은 정적인 포위전술이었다. 육전에서 쓰이던 학익진의 변형으로, 기동보다는 매복과 유인을 통해 적을 함정으로 끌어들여 포위하여 섬멸하는 방식의 전술이었다. 기동이 제한된 연근해에서 상대적으로 화력과 기동력에 취약한 적선을 상대로 포위하여 화력을 집중시키는 것이었지 기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과연 두 전술에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다 할 수 있을까?

물론 그것은 알 수 없다. 어쩌면 실제 도고 제독이 학익진을 연구하여 학익진의 화력집중 방식을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넬슨의 전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럽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화력을 집중하여 운용하는 전술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온 것이 넬슨의 종단전술. 서로를 압도하지 못하는 화력과 기동력 아래에서 상대의 화력이 이쪽을 단기간에 압도하지 못하기에 그 대열을 종단 전술적인 우위를 확보하여 섬멸하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상대의 대열을 종단했을 때 화력에서 우세한 측면을 상대의 정면에 노출함으로써 화력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었고. 따라서 굳이 그것을 이순신의 영향이라 보는 것도 조금은 어색하다. 오히려 기동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도고의 전술은 넬슨이나 이후 유럽의 그것에 더 가깝다. 그리고 나로서도 그쪽에 더 가능성을 두는 편이고.

박쥐가 날개가 달렸다고 새가 아니듯, 결과적으로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고 서로 같은 것이라 보는 것도 무리다. 도고 제독의 정자진과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도 마찬가지다. 내 수준에서 결론을 내릴 문제는 아니지만 정자진이 학익진에서 나왔다고 하는 주장은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무척 흥미로운 가설 이상은 되기 힘들지 않을까 한다.도고 제독이 이순신에 대해 이랬다 저랬다 하는 설도 꽤나 설득력 있게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정작 그 출전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고 보면 - 한 마디로 실제 그런 말을 했는가 안 했는가를 확인할 근거가 없다는 뜻이다. - 역시나 도고 제독 스스로 이 부분에 대해 밝힌 보다 확실한 자료가 나타나기까지는 단정지어 말할 수 없다 하겠다. 그저 이런 가능성도 있구나 하는 정도? 그 이상은 무리다.

그나저나 분명 이 소리 하면 이순신 장군을 폄하하느냐는 소리가 나올 것 같은데, 도고가 뭘 어쩌든 이순신 장군의 전술과 전략과 인품의 위대성이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도고 따위가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위대함은 이미 확고한 사실이니까. 오히려 도고에 어떻게든 끼워 맞추려 하는 것이야 말로 이순신 장군의 가치를 폄훼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도 다 쓸데없는 컴플렉스다. 우리의 영웅조차 외국의 영웅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 하는. 아무려면 어떤가? 이순신은 이순신인 것을. 그렇다.



더 자세히 써보려 했는데 그러자니 무지 귀찮아져서... 대충 기억나는 대로만 끄적여봤다. 어차피 더 자세해져봐야 글만 길어질 뿐이라. 참고로 유틀란트 해전에서도 영국해군과 독일해군은 서로의 함대를 향해 T자 기동을 시도하게 되는데, 역사에 나온 대로 그리 큰 효과를 보고 있지 못하다. 서로 대등한 수준의 기동력과 화력, 그리고 숙련도를 가진 함대를 상대로는 역시 T자기동을 통해 상대를 압도하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뭐 어느 전술은 안 그렇겠냐만.

 

자료제공 : Cool~H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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