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초 미 공군의 주력 수송기는 C-130, 더글라스 C-133 카고마스터와
C-141 스타리프터였으나, 그 어느 수송기도 공군이 원하는만큼의 탑재능력을 충족시키지는 못하고 있었다.
공군은 초대형 화물을 수송할 수 있는 거인과도같은 전략수송기를 원하고있었다.
C-130은 전략수송기가아닌 전술을 목표로 개발되었고 C-133도 터보프롭기로서 장거리 비행과
탑재 능력이 부족했다. 록히드가 개발한 터보팬 엔진 장착형 C-141 스타리프터도
동체 단면이 C-130과 같은 크기를 가져 탑재능력이 떨어졌다.
공군은 그 동안 진행 중이던 기존의 대형 수송기 /설계개발 계획인 CX-4 프로그램을 승격시켜
대형 수송 시스템인 CX-HLS(Cargo Experimental-Heavy Logistics System)를 확정하였다.
그리하여 공군은 1964년 4월에 대형 수송기 개발 획득을위한 기본 요구 제안을 발표하였다.
최대속도 마하 0.75, 125,000파운드의 화물을 탑재하고 8천마일을 비행하며,
8천 피트 길이의 활주로를 이륙하여 4천피트 길이의 비포장 활주로에 착륙하도록 요구되었다.
115,000 파운드의 화물을 탑재 공중급유없이 5,000마일을 비행할 것과
최대 180,000파운드의 탑재 능력과 기체 총 중량은 550,000 파운드를 초과하지 않을 것 등이었다.
공군의 요구에 응한 회사는 보잉, 더글라스, 록히드였다.
세 회사의 기체는 크기, 형체 등이 거의 비슷했으나 차이점은 록히드가 T자형 미익을 채택한 것과
동체 전방 화물 탑재 문의 개폐 방식이었다. 록히드와 보잉은 위로 올려 여는 방식으로 동일했으나
더글라스는 기수 측면 개폐방식을 택했다.
공군이 요구한 승무원, 승객 및 전자 장비용 상층갑판 때문에 기체 상부가 혹 모양이 되었는데,
록히드 제시 기체는 보잉의 B-747과 매우 흡사하였다.
결론적으로는 보잉사의 안이 채택될 것이 유력할 것으로 알려졌으나
1965년 9월 30일, 록히드가 최종 승리자로 결정되었으며 기체명은 C-5A 갤럭시(Galaxy)로 명명되었다.
CX-HLS용 엔진은 플랫 앤 휘트니와 제너럴 일렉트릭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제너럴 일렉트릭은 축소 엔진을 제작하여 그 성능을 공군측에 실제로 증명해보이는 등
사운을 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우렸다.
1965년 10월, 제너럴 일렉트릭이 승리하여 TF-39 엔진 개발 계약을 따 내었다.
최초 계획은 엔진 6기를 장착하는 것이었지만 4기로 축소되었다.
공군은 총 115대의 C-5 갤럭시(맥나마라 국방장관의 지시로 초도 도입분 58대와 이후 발주될 옵션 기체포함)를
획득하기로 결정하였다. 계약이 체결되자 기쁨에 들뜬 록히드는 100대 이상이 실제 제작되기를 기대했다.
당시 항공 잡지들도 차세대 다목적 대형 수송기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100대 이상의 C-5갤럭시가 하늘을 날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조지아주 마리에타 록히드 공장은 C-5 제작에 들어갔으나 처음 부닥친 고민은 무게였다.
당시의 항공기 제작 기술을 훨씬 뛰어넘는 능력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무게 증가는 필연적이었다.
기체 도장에 사용될 페인트 무게만도 무려 907kg이나되어 록히드는
"도색이 필요없다면 우리는 공군이 원하는 수송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표현했을 정도이다.
1968년 3월 2일, C-5A 갤럭시 제1호기(66-8303)가 제작을 완료하였다.
1호기의 처녀비행은 1968년 6월 30일에 테스트 파일럿 레오 설리반에의해 성공적으로 실시되었다.
이어 1969년 10월 17일에는 801,000 파운드(363,351kg)의 총중량으로 이륙하는 기록을 수립하였다.
공군은 1969년 12월, 공수 사령부 휘하의 훈련 비행대가 편성된
오클라호마 알투스 공군기지에 최초로 C-5A를 공식 배치하였다.
결과적으로 공수 사령부는 1973년 5월 18일에 마지막 C-5A를 전달받게된다.
그러는 동안 C-5A 갤럭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수송기도 아니었으며,
기체 가격도 대당 6천만달러로 급상승하였고, 예비 부품 획득비용 증가와
주익을 비롯한 구조적 결함이 발견되는 등의 복합적 요인으로 인해
닉슨 행정부는 도입 댓수를 115대에서 81대로 감소시켰다.
주문이 감소하자 록히드는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닉슨 행정부는 록히드의 파산을 우려하여 2억 5000만 달러의 비용을 우선 지불토록 조치하여주었다
추력 43000파운드 제너럴 일렉트릭 TF-39엔진
C-5A 제1호기(66-8303)가 1970년 10월 17일 테스트 도중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C-5A 제1호기는 록히드와 에드워드 공군기지 등에서 각종 전자 장비들을 탑재하고 테스트되었다.
록히드가 실시하던 비행 테스트 프로그램 도중 공기 냉각 장비에서 발생한
스파크에의해 기체 내의 연료 탱크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기체는 총 3번의 폭발을 일으키며 조지아주 시골 마을 곳곳에 흩어져 지상에있던 한 사람이 파편에 맞아 사망하였다.
불이 꺼졌을 때 기체는 T자형 꼬리와 주익 끝단의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라져버렸다.
이 보다 앞선 1970년 5월에 이미 67-0172기(11번째 제작기)가 비행 도중 화재가 발생하는 사고를 만났다.
승무원 전원은 무사하였지만 기체는 구조상의 큰 피해를 입었던 터였다.
1971년에도 사고가 발생했다.
1971년 9월말, 알투스 기지 활주로를 막 이륙하던 C-5A 주익에서 엔진과 파일런이
땅에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는데, 다행히 승무원들은 무사했다.
공군은 모든 C-5A 갤럭시의 비행을 중지시켰으며, 국회는 계약 종료와 함께
C-5A 프로그램에 대한 철저한 조사에 착수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이때부터 C-5A는 어처구니없는 경제적 불행 - Ridiculous Economic Disaster에서 유래된
프레드/FRED라는 별명을 얻는 등의 혹평을받았다.
1973년 4월, 워싱턴 포스트지는 논설에서 "날으는 관" "죽음의 함정"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대형 사고가 발생하자 록히드는 실물 크기의 모형을 여러 대 제작하여 비 비행상태에서
C-5A 테스트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유압 수축 실험을 실시한 결과
주익에 크랙현상이 진행 중인 사실을 발견하게된다.
C-5A는 하는 수 없이 화물 탑재 중량을 제한 하는 등의 수명 연장 조치를 마련해야만했다.
설계상 주익의 피로 한계 수명은 원래 30,000시간이었으나 비상시를 제외하고는
탑재 중량을 174,000 파운드로 제한하였지만 수명 연장은 겨우 7,500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훈련 비행대에에이어 C-5A갤럭시의 첫 번째 실전부대 전개는 1970년 6월
사우스 캐롤라이나 찰스턴 공군기지부터 시작되었으며 같은시기에 일본 오키나와 가데나 기지에도 전개되었다.
C-5A는 2에서 3회의 비행후 랜딩 타이어를 교체하도록 정비 교범에 명시되어 있었다.
따라서 가데나 기지의 정비사들은 예비 타이어의 비축분 부족으로 상당한 애로를 겪었다.
1971년 4월에는 델라웨어의 도버 공군기지도 C-5A를 장비하게되었고,
파리 에어쇼에도 참가하여 전세계에 그 모습을 공개하였다.
C-5A갤럭시 수송기는 주익에서 발생한 크랙으로인한 탑재 중량 감소에도 불구하고
1970년8월, 처음으로 베트남에 공중 보급 임무를 실시하게되었다.
미 공군은 그 큰 덩치 때문에 베트콩의 좋은 표적이 되지나않을지 걱정하였다.
C-5A는 사이공 공항에서 재빨리 군수물자 하역을 마치고 무사히 이륙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동남아시아에대한 공중 보급 필요성이 점점 증가하자
군 공수 사령부(MAC)는 때때로 중량 제한을 무시하면서까지 수송기를 띄워야했다.
미 본토 캘리포니아의 노턴 공군기지 또는 트레비스 공군기지에서 남 베트남 탄손 누트 공군기지,
캄란 만까지의 보급 비행은 일상적인 임무가 되어버렸다.
1970년 11월에는 6대의 C-5A가 총 171톤의 물자를 베트남에 공수하였다.
이때 갤럭시는 기내에 접어서운반하는 휴대용 하역 장치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는데,
이 것은 60톤의 화물을 20분만에 하역할 수 있었다.
1971년 4월에는 3대의 CH-47 헬리콥터를 사이공에 공수하고 손상된 3대를 회수하였다.
1972년 5월에는 다낭에서 M41 전차들을 한시간 반동안에 걸쳐 하역하기도 하였다.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빼면서 남베트남 정부에 최대한의 군사원조를 약속했었다.
1972년, 평화 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가능한한 최대의 물자 보급이 이루어져야했다.
C-5A 갤러시는 각종 군수물자, 전차, 헬리콥터 뿐만아니라 남베트남 공군에 공급할
F-5를 한꺼번에 6대(분해된 상태)를 싣고 비행하였다.
1975년, 북베트남군의 침공이 가속화되자 미국은 약 8천명의 자국민 구출 작전인 프리퀜트 윈드 작전을 발동하였다.
베트남 전쟁 막바지 함락 직전의 베트남 탈출시에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도 C-5A 갤럭시와 관련된 것이었다.
미국은 전쟁 동안 버려진 아시아계 미국 혼혈 고아(아메라시안)들을 미국으로 데려가기 위하여 베이비 공수 작전(Operation Babylift)을 마련하였다.
이 작전에 투입된 C-5A는 21번째로 제작된 68-0218기였으며,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에서 미국 의료팀을 태우고 사이공 탄손 누트 기지로 향했다.
1975년 4월 4일, 고아들을 태운 C-5A가 사이공을 이륙하여 미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고도 23,000 피트 상공에 도달했을 때, 기체 후방 출입문이 폭발을 일으키며 날아가버렸다. 이 때문에 기내 여압장치와 유압장치가 손상되어 미익은 작동 불능 상태가되어버렸다.
승무원들은 보조익 또는 수평타를 조작할 수가 없게되었다.
기수를 사이공으로 돌린 조종사 데니스 버드 트레이너 대위와 부조종사 틸포드 하프 대위는
한쪽 날개의 엔진에 추력을 올리고 반대편 날개의 엔진 추력을 낮추는 방법을 반복 사용하며 사이공으로 회항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비행이 불가능하자 승무원들은 기체를 불시착 시켜야만했다.
C-5A는 탄손 누트 인근 논에 불시착하면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이때 의료팀의 간호장교 레지나 앤 중위는 추락 당시의 충격으로 오른쪽 다리가 부러지는 등
온몸에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도 잔해 속에서 부상자들과 고아들을 구출하기 시작했다.
항공유에의해 발생한 강력한 화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구조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5분 후 구조 헬기가 도착하자 그녀는 부상자들을 헬기로 데려오기를 거듭 반복하였다.
마침내 그녀는 기절해 버렸다. 사이공 병원으로 후송된 그녀의 부상 상태는 매우 심각한 상태로 밝혀졌다.
자신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구조에 여념이 없었던 그녀에게 체니 상이 수여되었다.
앤은 체니 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이되었다.
그녀는 훗날 대령으로서 커트랜드 공군기지 제377 의료단장으로 복무하게된다.
C-5A 조종사 데니스 버드 트레이너 대위와 부조종사 틸포드 하프 대위에게는 공군 십자장이 수여되었다.
*** 여기서 C-5갤럭시 수송기에 관한 베트남전 자료는 차후에 다시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자료집을 보니 정말 어마어마 하군요 ㅡ,.ㅡ;; 킁 이거 찾는다고 해군..정보자료실을 다 뒤지고 있음.. 동기생 안테 부탁을 해성 ㅋㅋㅋ ***
그동안 고가의 수송기이면서도 빈번한 사고로인하여 혹평을 받고 있었던
C-5A 갤럭시의 참담한 이미지를 180도 반전시키는 사건이 발생한다.
1973년 10월, 이스라엘은 아랍 동맹국들의 기습을 받아 매우 위급한 상황에 빠져있었다.
제4차 중동 전쟁 발발로 위기에빠진 이스라엘은 미국제 무기를 긴급히 필요로하였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유일한 해답은 공수였다.
미국은 즉각 이스라엘 지원을 결정, 1973년 10월 13일, 니켈 그라스(Nickel Grass) 작전을 발동하였다.
미국은 C-141 스타리프터를 비롯한 전 수송기를 총동원하여 이스라엘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중동지역을 향해 비행한 첫 번째 C-5A는 대서양에서 만난 이스라엘 공군 F-4 팬텀의 호위를 받으며
비행하여 현지시간 10월 14일 밤 10시에 이스라엘 로드 공항에 도착하였다.
193,916 파운드의 물자를 하역한 C-5A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C-5A 갤럭시들은 이스라엘에 공수된 전체 화물의 절반에 해당하는 21,600,000 파운드를 공수했으며,
총 비행횟수는 145회로서 전체 출격의 25%에 해당했다.
비행 시간은 총 4,880시간이며 여기에 사용된 연료는 약1억 4300만 갤런에 달했다.
당시 소련도 아랍 동맹국들에게 물자를 공수 지원하였는데,
비행 거리가 훨씬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만큼 효과적인 공수를하지는 못했다.
소련 수송기들은 1,700마일의 거리를 935회 비행하여 40일 동안 15,000톤의 물자를 공수하였다.
이에반하여 C-5A 와 C-141 등 미국 수송기들은 6,450마일 이상의 거리를 비행하여
33일 동안 22,000톤 이상의 물자를 공수하였던 것이다.
미국 수송기들은 M48, M60 전차를 비롯, CH-53 헬기와 각종 포, 트럭, 탄약등의 군수 물자를 공수하였다.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국무총리는 미국의 거대한 수송기들이 기적처럼 이스라엘을 살려냈다고 칭찬하면서
그 주인공으로 C-5A 갤럭시를 지목했다.
공군은 C-5A의 주익에서 발생한 금속 피로 문제를 비상시에는 예외로하는 규정을 마련하였었는데,
중동 사태를 비상사태로 인정, C-5A를 긴급히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C-5 갤럭시에서 하역되는 CH-47 시누크
시간이 갈 수록 C-5A의 주익 크랙문제는 공군과 록히드 모두의 두통거리였다.
공군은 일시적인 대책아닌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토록 요구하였다.
국회의 압력도 거세지자 공군은 주익을 완전히 교체하는 것으로 결정하여 록히드와 계약을 맺었다.
주익 교체 작업은 우선 1대의C-5A (68-0214)를 사용하여 테스트하기로 하였다.
68-0214기는 주익 교체작업을 마친다음 1980년 8월 14일에 테스트 비행을 실시하였고,
수 개월간의 테스트에 들어갔다.
주익 교체작업은 동체 중심구조 변경과함께 양쪽 주익 박스를 완전히 재설계, 교체하는 것이었다.
록히드가 재설계한 주익은 1965년에 이미 설계된 주익과 거의 흡사했으며
교체작업은 거의 6개월이 소요될 예정이었다.
아무튼 교체 프로그램으로인하여 C-5A의 주익은 원래 계획되었던 30,000 시간으로 수명이 연장되었다
C-5A 갤럭시 마지막 제작기가 1973년 마리에타 공장에서 출고된 후,항공기 제작 기계들은 폐기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보존되고있었다.
그로부터 1년이지난 1974년, 이란 국왕이 C-5A 갤럭시 도입에 관심을 표명했다.
록히드는 이란 판매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으나 결국 거래가 성사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록히드로서는 갤럭시가 다시 재도약할 수 있는 작은 가능성으로 받아들일 만한 일이기도하였다.
1980년말, 미 공군은 하루 동안에 총 6600만 톤을 일제히 공수할 수 있어야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이러한 결론은 미국내 군용 수송기들을 총동원하여도 요구량의 3분의2 정도밖에 공수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자 거의 10억달러의 가치와 맞먹는 수송기 제작 기계들을 폐기하지 않고 있었던 록히드는
공군에게 50대의 신형 갤럭시 수송기 도입을 제안하였다.
록히드는 공군이 요구하지 않았던 옵션도 제공하면서 가격은 저렴하게 유지하겠다고 제안했다.
록히드가 신형을 의미하는 NEW를 사용, C-5N으로 명명된 신형기는 C-5A와 흡사하겠지만
최신 비행 데이터 기록장치와 신형 랜딩기어를 채택한 MADAR 시스템이 포함되어있었다.
유럽1 위장색으로 도색할 것이며, 교체된 A형과 동일한 신형 주익을 사용하고, 기체 구조를 보강하여
부식을 방지하며 승무원용 세면대와같은 편의 시설도 갖춘다는 것이었다.
록히드의 이러한 제안은 탈도많았던 A형과는 달리 국회에서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신형 갤럭시 수송기 도입비용은 1억 2000만 달러에 달했으나 당시로서는 그리 비싼 것도 아니었다.
이 가격은 개발 중인 맥도넬 더글라스의 C-17 도입가격의 절반에 해당했다.
당시 강력한 경쟁사 보잉이 군용개조형 747기를 제안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군은
도버 기지에서 비교 평가를해보기로 결정하였다.
C-5A와 747기는 도버 공군기지에서 공수 능력 테스트에 들어갔다.
두 기종은 각각 5대의 코브라 공격헬기를 탑재한 후 매릴랜드주까지 비행하여
앤드류 공군기지에 헬기를 하역하고 다시 델라웨어 도버 공군기지로 돌아와야했다.
헬기를 기내에 싣는 순간부터 747기는 낮은 높이 때문에 고전하였다.
C-5A는 순조롭게 5대의 코브라 공격헬기를 탑재한 후 활주로에서 이륙하였다.
C-5A 승무원들은 앤드류 기지로 비행을 시작하면서 헬기 탑재를위해 노력하고 있는
747 지상요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C-5A는 앤드류 기지에 공격 헬기를 하역하고 다시 도버 기지로 돌아왔다.
보잉의 패배는 확실해졌다.
1982년 12월, 공군과 록히드는 50대의 C-5N(C-5B) 갤럭시 수송기 제작 획득계약을 맺었다.
록히드는 36개월 이내에 초도 제작기를 공군에 납품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미 해병 AH-1J 코브라 공격헬기와 C-5B 갤럭시 수송기
기수의 노즈 랜딩 기어는 4개의 바퀴가, 기체 하부에는 6개의 바퀴가달린 메인 랜딩기어 4개가있다
C-5B 갤럭시 제1호기(83-1285)는 1985년 7월 12일에 제작을 완료하였고
9월에 처녀비행을 실시하였으며 1985년 12월 31일까지 공군에 인도하기로 예정되었다.
공군은 오랜 기간 동안 동일한 기종을 운용하였기 때문에
C-5B 갤럭시에 대해서는 대규모 테스트를 생략하기로 하였다.
1986년, 트레비스 공군기지와 도버 공군기지는 초도 제작된 C-5B갤럭시를 인수하였다.
공군은 B형을 운용하면서 신형 시스템의 효율성을 인정하여
A형에도 신형 랜딩기어와 전자 장비 교체를 실시하였다.
1988년 C-5B는 남극 대륙의 얼음 위에 착륙하였고, 1989년에는 190,346파운드의 화물을 적재하는
세계 신기록과함께 노스캐롤라이나 포프 공군기지상공에서 1회에 73명의 무장 병사들을 공수낙하시키기도하였다.
1989년 봄에 C-5B 갤럭시 제작이 완료되자 록히드는 더 많은 도입을 요구하였으나
공군은 50대로 충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C-5A는 노던 멀티 모드 레이더를 설치하였다.
레이더는 지도작성, 적정순항위치표시 및 유지, 레이더 접근, 도피 등의 정보를 제공하였으나
기상 정보가 부족하였다. 공군은 1983년부터 신형 벤딕스 AN/APS-133 컬러 기상 레이더 시스템을 설치하였다.
벤딕스사가 개발한 이 신형 기상 시스템은 노던사 제품보다 소형의 레이돔을 사용할 수 있었다.
공군은 샌 안토니오 공군 병참센터에서 모든 C-5A, C-5B에 벤딕스 AN/APS-133
컬러 기상 레이더 시스템을 대체 설치하였다.
공군과 록히드는 1990년 여름부터 페이서 스노우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적외선 전자 대항 장비와 각종 전자장비 개량 작업을 실시하였다.
이 프로그램에는 2대의 C-5 갤럭시가 사용되었다.
2대의 C-5 갤럭시에는 AN/ALE-40 플레어 디스펜서와 AN/AAR-47 미사일 경보 시스템이 설치되어
가을부터 플로리다주 에그린 기지와 홈스테드 기지에서 비행 테스트하였다.
테스트가 성공하자 공군은 1대의 C-5A와 모든 C-5B에 설치하였고,
AN/ALE-40 플레어 디스펜서와 AN/AAR-47 미사일 경보 시스템은 이라크 프리덤 작전에서 사용되었다
다 먹는군 .....
1989년 12월 20일, 미국은 노리에가를 축출하기위하여 파나마 침공작전에 나섰다.
군 공수 사령부는 지상군의 공격이 실시되기 훨씬 이전부터 C-5 갤럭시로
AH-64 아파치 공격 헬리콥터들을 파나마로 실어날랐다.
파나마 침공작전에는 10여대가 동원되었는데, 지상으로부터 대공화기 공격을 받기도하였다
1990년 8월 2일,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략하자 도버 공군기지 제436 공수비행단은 경보 상태에 들어갔다.
미국 첩보기관은 이라크가 사우디 아라비아도 침공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라크의 침공을 멈추게하기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빨리 병력과 장비들을 사우디 아라비아에 전개시켜야했다.
사막의 방패와 사막의 폭풍작전동안 대부분의 장비들은 배로 수송되었다.
C-5 갤럭시는 쿠웨이트와 사우디 아라비아의 상황이 긴급을 요했기 때문에 즉각 동원되었다.
배로 물자와 인원을 수송하자면 30일에서 최대 45일이 소요되었다.
작전 초기 6주동안은 거의 대부분 공수 작전으로 사우디 아라비아에 물자를 보급하였다.
사막의 방패작전이 개시되고,1990년 8월 7일 처음으로 C-5B 갤럭시가 출격하였다.
기체에는 승무원들의 작업 부담을 줄이기기위하여 4명의 조종사와 승무원이 추가로 탑승하였다.
갤럭시의 임무는 도버 기지에서 유럽까지 비행하는 것이 첫 번째 임무였다.
두 번째 임무로서 유럽에 도착하여 물자를 싣고 페르시아만으로 비행하는, 11일간의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 비행 임무는 브라보 라이트로 불리웠다.
C-5갤럭시는 현지시간으로 8월 9일 오전 6시 40분에 바레인에 착륙하였다.
작전에 참여한 거의 대부분의 승무원들은 하루에 고작 2~3시간 정도만 취침할 수 있었다.
수송기 승무원들은 언제 어느때고 비상 출격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여야했다.
임무를 마치면 휴식 시간도 겨우 10에서 12시간 정도만 주어질 뿐이었다.
한번 출격하면 최소 26시간에서 28시간 정도를 비행해야했고, 어느 때는 35시간을 비행하기도하였다.
공수 작전이 긴급히 실시되자 지중해 인근에서는 항공 교통 관제가 힘들 정도였다.
사막의 방패 작전에서의 공수 작전은 3단계로 계획되어있었다.
제1단계는 2~3일 동안의 기본 장비와 지원 병력 수송이었다.
제2단계는 전투부대 수송으로서, 제1전술전투비행단과 제101공수사단,
그리고 제24기계화 보병사단을 C-5로 사우디 아라비아까지 공수하는 것이다,
제3단계는 새로운 무기와 나머지 장비들을 공수하는 것이었다.
한 달 후부터 수송선들이 도착하기 시작하자 C-5갤럭시의 임무도 변화를맞게되었다.
사담 후세인은 사막의 폭풍작전이 개시되자 이스라엘을 전쟁에 끌어들이려하였다.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들이 이스라엘에 발사되었고, 후세인은 이스라엘의 보복공격을 기대하였다.
전 세계가 이스라엘의 행동을 주시하는 가운데 미국이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제공키로 하여 이스라엘의 보복을 저지시켰다.
C-5B는 즉각 이스라엘에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공수하였다.
쿠웨이트가 회복되자 C-5갤럭시는 병사들을 본국으로 수송하였다.
1993년말, 미국은 옛 소련연방국이었던 카자흐스탄으로부터 핵폭탄 36기를 제조할 수 있는
1,300파운드의 농축 우라늄을 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도버 공군기지에서는 3대의 C-5 갤럭시가 기술자들과 이동식 원자력 실험장비를 싣고 카자흐스탄으로 날아갔다.
911테러를 당한 미국은 알카에다 소탕을위하여 아프가니스탄으로 병력을 전개시켰다.
공수 작전은 스페인 모론, 독일의 람스테인 등 2곳, 터키와 괌, 그리고 디에고 가르시아 등의 기지를 사용하였다.
당시 공군은 심각한 예산 삭감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수송기 운용에 애로가 많았다.
그러나 C-5는 총 4,425회의 비행으로 210,000톤의 물자를 공수하였다.
이라크 프리덤 작전도 공중 보급에 크게 의존하였다.
C-5 갤럭시는 6,200회의 출격으로 총 330.000톤 이상을 공수하였다.
C-5는 2003년 4월부터는 바그다드 국제공항을 이용하게되었고, 11월부터는 바라드 기지를 사용하게되었다.
2004년 1월, C-5B(85-0010)는 이륙직후 4번 엔진이 미사일에 맞았다.
C-5B는 바그다드 국제공항에서 비상 수리를 받은 후 페르시아만의 또 다른 곳으로 날아가 다시 수리를 받아야했다.
그후 완전한 창정비는 조지아주 워너 로빈스 공군 병참 센터에서 실시되어
90일 후 C-5B는 다시 비행을 재개할 수 있었다.
바그다드 함락 이후 C-5 갤럭시는 제1기병사단 선발대를 이라크에 공수하였다.
2004년 12월 26일 인도양에서 쓰나미가 발생하여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C-5는 헬리콥터, 발전기, 식량, 의약품, 차량 등을 싣고 스리랑카와 태국 우 타파오 기지로 비행하여
1,300톤 이상의 구호 물자를 공수하였다.
2005년 태풍 카트리나로 재난이 발생하자 도버 기지의 C-5 3대가 홀로먼 기지로 전개하여
구호 작전에 참가하였다. 조립식 주택 킷트를 뉴올리언스로 공수하여 이재민 임시 숙소를 제공하였다
NASA는 스페이스 컨테이너로 알려진 트럭/트레일러 시스템을 사용하여 위성이나 특별한 화물을 수송하고 있었다.
다양한 우주 환경을 제공하기위한 컨테이너는 케네디 우주센터의 우주 셔틀의
화물실과 유사한 크기와 구조를 가지고있었다.
공군은 2대의 C-5A를 스페이스 컨테이너형으로 개조하는
SCM(Space Container Modification)프로그램을 마련하였다.
컨테이너를 수용하기위하여 C-5의 내부 압력 격벽이 재설계되었고,
화물 칸 천장도 아치형으로 높게 개조되었다.
외부적으로는 후미 화물 탑재 문의 모양이 기존의 갤러시와 조금 달랐다.
이개조 작업에 사용된 2대의(68-0213,68-0216)C-5A 갤럭시는 트레비스 공군기지에 배치되어
다른 기체들과 명확한 구분을 위하여 그 어떠한 마킹도 사용되지않았다.
SCM 개조형 C-5A는 1999년 4월, 아트라스 IIA 로켓을 운반 하는 등 우주 프로그램에 사용되었다
C-5M
1990년대초, 록히드는 C-5 갤럭시 성능향상을위하여 TF-39엔진을
제너럴 일렉트릭 CF6 시리즈로 대체하는 안(C-5D)을 공군에 제안하였으나 예산 부족으로 좌절되었다.
1990년대말이되자 C-5갤럭시의 전자 장비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장비가되기 시작했다.
엔진도 신뢰도가 떨어지기 시작하여 공수 능력이 감소될 운명이었다.
공군은 세계에서 가장 큰 수송기에 드는 갤럭시 수송기의 현대화를 추진했다.
그리하여 공군은 2개의 프로그램을 마련하였다.
전자 장비 현대화 AMP 프로그램과 신뢰성 향상 및 엔진 대체 RERP 프로그램이다.
AMP 프로그램에는 신형 계기판 교체, 신형 GPS와 링 레이저 관성항법장치, 항공 충돌 도피 시스템이 포함되었다.
RERP 프로그램에는 기존의 TF-39엔진을 추력 50,000파운드로 기대되는
제너럴 일렉트릭 CF-6-80(F138-GE-100)엔진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공군은 RERP 프로그램 실시 후 AMP 프로그램으로 옮겨가는 2단계 현대화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2002년 1월에 이 두 개의 프로그램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이리하여 첫 번째 C-5M (86-0013) 갤럭시가 2006년 6월에 완료되었고,
공군은 모든 C-5A/C 갤럭시에이어 C-5B의 현대화를 요청하였다.
C-5 현대화에는 약130억달러의 예산이 소요될 전망이며 2008년에 완료될 예정인 것으로 알려지고있다.
2006년까지 모두 6대의 C-5 갤럭시가 공군 자산 목록에서 삭제되었다.
이 6대 중 5대가 A형이고 1대가 B형이었다.
C-5A (66-8303)는 1970년 10월 17 화재발생으로 추락하였고,
C-5A (67-0172)도 1970년 5월 캘리포니아 팜데일에서 화재로 손실되었으나 인명 피해는 없었다.
C-5 (68-0218)은 는 1975년 4월 사이공 베이비 공수작전 도중 추락하였다.
C-5A (68-0227)은 1974년 9월 27일 오클라호마에서 긴급 비상 착륙 시 손실되었으나 인명피해는 없었다.
C-5A (68-0228)는 사막의 방패 작전 중 1990년 8월 29일 독일 람스테인 공군기지를 이륙했다가
엔진 역 추진으로 추락, 13명이 사망하였다.
C-5B (85-0059)는 2006년 4월 3일 도버 기지 이륙 직후 기체 이상으로 회항 중 추락, 승무원 전원은 무사하였다.
이 6대의 사고 손실기 이외에 14대의 C-5A가 2004년부터 점차적으로 퇴역하였다
자료제공 : (주) 천년천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