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은 한국전쟁에서 벨(Bell) H-13 헬기에 기관총을 장착하여 방어용으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미군 최초의 헬리콥터 무장 사례가된다.
이후 시콜스키(Sikorsky) H-34와 피아세키(Piasecki) H-21에 더 강력한 무장을하여 사용한다.
미군은 한국전쟁을 겪으며 병력 수송용 헤리콥터 호위와 대 지상 공격에 무장 헬리콥터가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으리라 보았다. 또한 무장 헬리콥터는 적 영토 깊숙히 침범하여 자력으로
구조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미군은 베트남전에서 UH-1이로코이 헬기와 OH-6 카이오와 헬기를 개조하여 건쉽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원 제작 목적은 공격용 헬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공격력, 항속력, 탑재력 등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UH-1 건쉽은 4정의 M60 기관총과 로켓으로 무장하여 대단히 성공적인 대지상 지원작전을 하였다.
강력한 공격 헬기의 필요성을느낀 미 육군은 진정한 공격 헬리콥터 개발을 원했으나
공군의 반대로인하여 양군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1966년, 양군의 타협끝에 지상 병력 지원용 건쉽 헬기 개발이 이루어져 결과적으로
벨사의 AH-1 코브라 건쉽이 개발되었다.
** 여기서AH-1코브라편이 따로 편성이 되있어서 AH-1코브라의 대해서는 차후에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쏘링^^
이에 앞선 1963년 6월, 육군은 차세대 공격헬리콥터 요구 사항 확립을위해
화력지원공중시스템/ FSAS(Fire Support Aerial System)프로그램을 마련하였고,
1964년에 발달형 공중화력시스템/AAFSS(Advanced Aerial Fire Support System)으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
육군은 각 항공사에 차세대 공격헬기 개발에대한 요구 사항을 발표하였다.
육군은 록히드와 시콜스키가 제출한 제안서를 비교 평가한 다음,
진보된 기술을 사용한 록히드 AH-56 샤이엔(Cheyenne)을 채택하였다
AH-56 샤이엔은 제너럴 일렉트릭 3.435마력 T64 터보샤프트 엔진에 4매의 블레이드를 사용하였다.
AH-56A 샤이엔 원형 제1호기는 1967년 9월 21일,
407 km/h의 속도로 처녀비행을 실시하여 육군을 깜짝놀라게 만들었다.
미 국방부는 총375대를 도입하기로 계획하였고, 우선 10대의 원형기를 이용하여 각종 테스트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AH-56A 샤이엔이 1969년 3월 12일 추락하여 조종사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또한 샤이엔은 뛰어난 고속의 기동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북베트남군이 휴대용 견착식 SAM-7 지대공 미사일을 보유하자 상황이 180도 달라져버렸다.
이제 공격용 헬리콥터는 고공/고속보다는 나무 꼭대기보다 더 낮은 저공에서 몸을 숨기고
민첩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게된 것이다.
거기다 각종 기술적 지연 문제와 높은 도입가격은 샤이엔에게 불리한 조건이되었다.
국방부는 샤이엔 조달 댓수를 1000대로 대폭 줄였다가 나중에는 획득 자체를 완전히 취소시켜 버렸다.
AH-56A 샤이엔의 원래 대당 도입가격은 120만달러였으나 최종적으로 200만달러 이상으로 치 솟았던 것이다
AH-56A 샤이엔 제7호기의 2.75인치 로켓 발사. 토우 미사일 포드도 장착하고있다(상)
추락한 AH-56A 샤이엔 잔해. 샤이엔은 결국 제식 채택되지 못하는 비운을 맞는다(하)
그동안 베트남에서 AH-1G 코브라 건쉽으로 충분한 경험을 축적한 육군은 무장 헬리콥터의 개념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1972년, 발달형 공격 헬리콥터/AAH(advanced attack helicopter)프로그램이 마련되었다.
1972년 8월, 미 국방부는 신형 공격 헬리콥터(AAH)에대한 다음과같은 공식 요구 제안을 발표하였다.
순항속도 269km/h,
8발의 토우 대전차 미사일(또는 최소 454 kg의 무기적제능력)을 장착하고
1.9시간동안 지속적인 작전이 가능할 것.
최대속도 323 km/h, 분당 최대 150m의 상승 능력과
고도 1220m, 섭씨 35도의 온도에서 작전 가능할 것.
12.7mm 탄에대한 방탄능력과 추가로 23mm탄에 피탄되더라도 비행이 가능할 것.
(당시 바르샤뱌 조약국가의 제식 대공화기를 기준으로)
특히 SAM 지대공 화기의 위협에 대비하여 체프 플레어 디스펜서 운용
베트남에서 너무나 많은 헬기들이 무력하게 추락하여 많은 승무원을 잃었던 경험때문에
48 km/h의 속도로 추락, 초당 12.8m의 속도로 수직 하강 추락하더라도 승무원이 안전할 것 등이었다.
육군의 요구에 응한 항공기 제작사는 벨, 보잉 버톨(그루먼과 공동참여), 휴즈, 록히드, 그리고 시콜스키였다.
그중에서 모델 409를 제안한 벨(Bell)사가 가장 유리해보였으나
모델 77을 제안한 휴즈(Hughes)또한 결코 만만한 상대가아니었다.
1973년 6월 22일, 미 국방부는 벨과 휴즈를 선택, 벨 모델 409를 YAH-63로,
휴즈 모델 77을 YAH-64로 각각 명명하여 두 회사가 경쟁토록 하였다.
경쟁 제1단계는 1976년에 실시될 비교 평가 비행에 앞서 양회사는 먼저
2대의 비행 테스트용 원형기와 2대의 지상 테스트용 원형기를 각각 제작한다.
제2단계는 비교 평가와 최종 선정 작업 단계였다.
이 작업이 마무리되면 총472대로 예정된 신형 공격 헬리콥터 획득에대한
첫 발주가 1978년말 또는 1979년초에 있을 것으로 계획되어있었다.
벨사의 YAH-63은 자사의 모델 309 킹코브라에 사용되었던 고유상품인 teetering 로터에
2매의 블레이드를 사용하였고,
AH-1G와는 정반대로 조종사가 전방석에, 포수가 후방석에 위치했다.
휠은 동체 중앙 좌우에 각각 하나, 동체 전방에 노즈 휠이 설치되었다.
포탑은 기수의 센서 터렛 앞에 설치되었다.
휴즈사의 YAH-64는 4매의 블레이드, 짧은 날개, 폭이좁은 테일붐,
넉넉한 크기의 엔진포드를 가졌으며
YAH-63과는 달리 동체 최 후방에 테일 휠을 설치했다.
T자 형의 수평 미익은 테일로터 위에 설치되었다.
콕피트는 벨사와 동일하게 탠덤방식이었지만 승무원 배치는 정반대였다.
휴즈는 아직 뚜렷한 실물 모형의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던 가운데 휴즈항공에서
개발한(휴즈항공과 헬리콥터사는 모체는 같으나 별개의 회사) 1포신 XM230A 30mm 체인 건을 채택하였다.
벨사는 제너럴 일렉트릭 3포신 XM188 30mm 기관포를 채택하였다.
벨사는 AH-1G 코브라 건쉽을 베이스로하여 개발에들어갔기 때문에 휴즈사보다는 한발 앞서나가고있었다.
1976년 6월, 휴즈사는 비행 테스용 원형기 AV-01(Air Vehicle)로 지상 테스트에 들어갔으나
벨사는 이미 4월에 지상 테스트용 원형기(GTV-Ground Test Vehicle)인
YAH-63 GTV를 제작하여 테스트를 실시하고있었다.
여기에 자극받은 휴즈사는 매우 급하게 개발에 매진하게된다.
이리하여 휴즈사는 YAH-64 원형 제1호기를 제작 완료하고 1975년 9월 30일에 처녀비행을 실시하게되었다.
계획보다는 몇 시간 지연되었지만 테스트 파일럿 로버트 페리와 랠리 플랫처는 38분간의 비행을 무사히 마쳤다.
벨사도 바로 테스트 비행을 실시하게되는데,
고속 변속기 이상에의한 메인 로터 진동이 발생하여 테스트 파일럿들은 단 2분간의 비행끝에 착륙해야했다.
그날 두 번 이상의 비행을 추가로 실시하였지만 똑 같은 문제로 총 10분 정도의 비행만 실시하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벨사가 12월 12일 두 번째 원형기의 비행을 실시하였을 때는
휴즈사의 2번째 원형기 AV-02가 이미 35시간의 비행을 기록하고 있었으며 제3호기도 비행을 개시했던 것이다.
휴즈사는 모든 지상 테스트 프로그램을 완료하고
캘리포니아 칼스베드의 팔로마 비행장에서 비행 테스트를 받게되었다.
두 회사의 신형 공격 헬리콥터(AAH)는 에드워드 공군기지에서 실시될 비교평가에 들어가기전인
1975년 9월부터 1976년 5월 31일까지 총 342 시간 이상의 선행 테스트를 수행해야만했다.
테스트 완료후에는 6월 16일까지 공군 조종사가 실시하는 125시간의 테스트 비행을 마쳐야했다.
이러한 선행 테스트 기간 중 벨사에게 매우 치명적인 사고가발생하게된다.
1976년 6월 4일, 벨사의 YAH-63 원형 제2호기가 추락, 승무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
사고원인은 횡 비행중 테일 로터 구동축 고장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파손된 기체는 다시 복구되어 4개월동안의 2차 비교 평가 테스트에 사용되었다.
위장 도색한 YAH-63 실물 크기의 뫀업(상)
노즈 랜딩기어를 채택한 YAH-63 원형기의 비행. 이 중 1대가 추락하는 사고를 만난다(하)
휴즈 모델 77 실물 크기 뫀업 (YAH-64)
벨 모델 409(YAH-63)와 달리 테일 휠을 채택하여 착지 안정성에서 훨씬 유리했다
그 당시, 육군의 신형 공격 헬리콥터(AAH)와 밀접한 또 다른 신 무기가 개발되고 있었다.
야간 작전을 위한 주요 장비로서 개발 중인 목표 포착 및 지시 조준기와 조종사 야시 장비
- TADS/PNVS(Target Acquisition and Designation Sight/Pilot's Night Vision Sensor)가 그것이다.
1976년 11월 27일부터 제안 및 경쟁에 들어간 두 회사는 노드롭과 마틴-마리에타였다.
두 회사의 제안은 매우 비슷한 시스템으로, 적외선 전방 감시 장비/FLIR과 전기 광학 센서가 탑재된
회전식 터렛을 기수에 탑재하는 방식이었다.
또하나의 주요한 무기, 헬파이어 대전차 미사일도 개발되고있었다.
1972년, 미국방부는 신형 공격 헬기가 3000m의 사정거리를 가진
TOW 대전차 미사일 8발을 무장하도록 요구하였었다.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소련제 레이더 연동 자주대공포 ZSU 23-4 쉴카(Shilka)와
SA-8, 9 등의 대공무기에 고전하였다. 그래서 육군은 유선 유도식 TOW 대전차 미사일을 표적까지
유도하는동안 이들 소련제 신형무기에의한 피격의 위험이 크기 때문에
신형 공격 헬리콥터에 사용하기에는 부적당한 것으로 판단하게된다.
1973년에는 사정거리 3750m로 연장된 XRTOW로 바꾸도록 결정하였지만
1975년, 단점이 많은 토우 대전차 미사일을 신형 대전차 미사일로 대체하기로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개발에 들어간 신형 미사일이 사정거리 6km 이상으로 기대되었던
레이저 유도방식 AGM-114 헬파이어 / Hellfire(Helicopter-Launched, Fire and forget)이다.
1976년 1월 6일, 육군 시스템 획득국이 헬파이어 획득을 추천, 2월 26일 재검토끝에 획득이 결정되었다.
헬파이어 개발은 휴즈 항공과 록크웰 인터내셔널의 경쟁이었으며,
1976년 10월 8일 록크웰 인터내셔널의 승리가 결정되었다.
한편 신형 공격 헬리콥터 제2단계 비교 평가에 착수한 육군은
1976년 7월 31일에 기술적 관리 부문을, 8월 16일에는 도입 비용 문제 등을 검토하였다.
제2차 비교 평가에서 벨사의 YAH-63(377km/h)은 휴즈사의 YAH-64(362km/h)보다 더 빠른 속도를냈다.
분당 상승률은 좀 더 높게 요구되어 244m에서 335m로 증가된 상태에서 비교 테스트되었다.
무기 테스트는 2회에 걸쳐 실시되었으며, YAH-64는 90도 각도까지의 고난도 비행에서 XM230 체인 건으로
1176발을 발사하였으며 241km/h의 속도로 비행하며 2.75인치 로켓 184발을 발사하였다.
뛰어난 성능의 M230 체인 건을 채택한 휴즈사는 무기 비교 평가에서 우월한 점수를 얻었다.
이러한 4개월 간의 비교 평가에이어 객관적 공정성을위한 재평가가 최종완료된 1976년 12월 10일,
육군은 휴즈사의 YAH-64가 육군 신형 공격 헬리콥터로 선정되었다고 발표하였다.
벨사의 YAH-63은 추락 사고도 있었고, 2엽 블레이드 메인 로터의 내구성에 대한 의심과
메인 로터의 심한 소음이 작전 지역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소형 휠,
특히 노즈 휠이 동체 전방 하면에 위치하여 그로인한 불안정한 착륙 자세 등이 감점의 요인이되었던 것이다.
기수에 TADS/PNVS 탑재하고 초기형 TOW 대전차 미사일 포드를 장착한 YAH-64.
마틴-마리에타사 제품과 노드롭사 제품을 각각 탑재하여 비교평가 테스트를 실시하였다.
결국 노드롭은 마틴 - 마리에타에 굴복하고만다
휴즈사의 YAH-64를 신형 공격 헬리콥터로 채택한 육군은 양산을 위한
몇 단계의 테스트 프로그램을 실시하게된다. 먼저 제1단계 평가에서 메인 로터의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1536마력 T700-GE-700 터보샤프트 엔진을 장착한 YAH-64 원형기는
C-141 수송기 탑재를위한 높이 제한 요구에 응한 때문에 승무원의 강인한 인내가 요구되는
네가티브(negative-G)/마이너스 중력 상태에서 비행시 블레이드가 승무원의 시계를 방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캐노피를 타격할 위험이 있었다.
그리하여 마이너스 0.4의 중력을 극복하기위하여 메인로터의 마스터 높이를 24.3cm 높였고,
중량 감소와 비행 안정성 확보를 위해 테일 로터 상부의 T자형 수평 미익을 아래로 이동 설치하였다.
그이후, 100km/h의 속도(마이너스0.5중력)의 초저공(NOE-Nap Of the Earth)비행 능력 확보를
위하여 메인 로터 마스터를 15.24cm더 높이게된다.
그리고 메인 로터 4엽 블레이드 끝단에 후퇴각을주어 고속 비행시 소음 감소와 함께 속도가 증가하도록 하였으며
라운드형 캐노피의 빛 반사각을 줄인 평면 윈드 실드를 채용하여 방탄 강도를 더 높이게된다.
AH-64 아파치 공격 헬리콥터의 양산은 그리 순탄한 과정을 거친 것은 아니었다.
미 육군은 AH-64의 양산을 최종 결정하지 않은 가운데 3억 1760만달러의 신형 공격 헬리콥터 획득 예산을 집행하면서
3대의 제식 시제형 AH-64 (AV-04, AV-05, AV-06) 제작과 기존의 지상 테스트용 원형기 2대의개조를 요구하였다
1976년 11월 28일부터 50개월로 계획된 AH-64 원형기 제2단계 테스트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AH-64의 양산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휴즈사는 생산 공장부지를 확장하고
해고되었던 근로자들을 다시 고용하는 과감한 조치를 단행했다.
AH-64 컨소시움 하청업체들도 휴즈의 모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비행 테스트용 기체로 개조된 AV-02의 첫 번째 비행은 1977년 11월 28일에 실시되었으며,
진정한 YAH-64가되는 AV-04호기가 1979년 10월 31일에 처녀 비행을 실시하였다.
팬들턴기지에서는 무기 테스트가, 비행 테스트는 팔로마 비행장에서 실시되었고,
기후와 관련된 환경 테스트는 플로리다 에그린 공군기지(더운기후)와 워싱턴(추운기후)에서 각각 실시되었다.
AH-1 코브라에 사용된 사격통제시스템/ATAFCS(Airborne Target Acquisition Fire Control System)을
이용한 헬파이어 대전차 미사일 테스트는 1979년 4월부터 팬들턴 기지에서 실시되었다.
AV-02기가 최초로 헬파이어를 발사하였으나 완전한 유도장치없이는 정밀 사격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한창 경쟁 중이던 목표 포착 및 선정 지시기와 조종사 야시 장비 / TADS/PNVS를 원형기에 탑재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AV-02호기에는 마틴-마리에타가 제작한 TADS/PNVS를,
AV-03호기에는 노드롭이 제작한 TADS/PNVS를 탑재하였다.
YAH-64 아파치 공격헬기는 2개사의 TADS/PNVS를 탑재하고 비교 테스트하였다.
왼쪽이 마틴 -마리에타사 제품이고 오른쪽이 노드롭 제품으로 마틴 - 마리에타가 승리한다
1979년 10월, AV-02호기가 처음으로 헬파이어 대전차 미사일을 표적에 발사하였다.
3mx3m 크기의 표적에 미사일을 발사하여 TADS/PNVS의 성능을 비교 평가하였다.
결과적으로는 1980년 4월, 마틴-마리에타가 신형 공격 헬리콥터용 TADS/PNVS 공급자로 선정되었고,
4560만 달러의 계약에의한 26개월간의 개발에 착수하게된다.
1979년 12월 AV-05호기가, 1980년 3월 16일에는 AV-06호기가 제작을 완료하였는데,
이 마지막 원형기는 테일 로터의 길이가 25cm연장되었으며 최고속도는 381km/h를 기록하였다.
광범위한 테스트가 진행되던 중 대형사고가 발생한다.
1980년 11월 20일, AV-04는 공기 저항 테스트를 위해 T-28D 사진 추적기와 함께 이륙하였다가
공중에서 충돌, 헬기 승무원이 사망하고 T-28D 승무원은 비상탈출하여 목숨을 건졌다.
AV-05호기는 업그레드된 엔진을 장착하게된다.
1,690마력 T700-GE-701엔진을 장착한 AV-05호기는 1982년 1월 15일 처녀비행을 실시한 후
8월까지 엔진 능력 테스트에 들어가게된다.
1981년 5월, AV-02, 03, 06호기는 제2단계 평가의 마지막 단계인
작전 성능 테스트 평가를위하여 육군에 전달되었다.
1981년 8월, AH-64 원형기들은 섭씨 43도의 뜨거운 사막에서 400시간의 비행 평가를 실시하는 등
총 2500시간의 테스트를 받았다.
이 마지막 테스트단계에서 AH-64 공격 헬리콥터는 아파치(APACHE)로 공식 명명되었다
사막 환경 테스트를 수행 중인 AH-64 아파치 공격 헬리콥터
1981년 9월에는 미 해병대가
AH-64 아파치(APACHE) 공격 헬리콥터의 도입 적합성 여부 판단을위해 2주간 테스트하였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서독이 관심을 보이고있었다.
이때 소련의 Mi-24 하인드 공격 헬리콥터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하는 사진이 공개되었다.
Mi-24 하인드 공격헬기는 AH-64 아파치와는 근본적으로 개념이다른 헬기였지만
이에 대항할 만한 공격 헬기가 없었던 나토 동맹 국가들은 소련의 군사적 우위를 우려하였다.
이에따라 휴즈사는 판버러 에어쇼82에 참가하여 영국군을 비롯한 유럽 판매를 적극 모색하게된다
AH-64 아파치 공격 헬기의 테스트가 완료되어 미국방부는 1982년 회계연도 예산에 14대의 획득을 포함시켰지만 이 결정은 연기되어버렸다.
1970년대의 석유파동 이후 물가가 상승하여 예산 조달에 어려움이있었다. 미 국방부는 총536대의 획득 계획을 446대로 줄일 운명이었다.
따라서 휴즈사는 이 금액이 총 59억 9400만 달러가될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물가 상승으로 인한 도입 비용이 급상승하자(1972년 기준 대당 단가는 160만 달러였으나
1982년에는 1300만달러가됨) 미 상원 의원들은 더 싼 가격의 코브라를 제안하는 등 휴즈는 매우 불리한 입장에 몰렸다.
6월 25일부터 AH-64 아파치의 평가를 실시한 독일 등 아파치에 관심을 표명하였던 나라가 더 싼 기체로 옮겨갈 수도 있는 최악의 상황이 염려되었다.
이때 휴즈사에게 구세주와도 같은 사람이 등장한다.
대통령 특별 보좌관을 역임하고 1979년 7월 북대서양 조약기구 NATO 최고사령관으로 취임하였던
브랜든(Bernard C. Rogers)대장이 상원의 AH-64 아파치 반대파 의원들에게 편지를보냈다.
브랜든 사령관은 "유럽은 바르샤뱌 조약국의 위협에 긴급히 대비하여야한다...
지금 유럽의 우리 나토 연합군은 AH-64 아파치 공격 헬기를 필요로한다.
더 이상 사치스러운 논쟁을 벌일 여유가 없다."
이리하여 재개된 여러번의 협상 끝에 휴즈사는
먼저 48대를 1억 560만달러에 납품키로 하는 등 단계적 납품 계약에 합의하였다.
이로서 미 육군은 도입 대수를 서서히 증가시켜 515대를 획득하기로 결정하였다.
마침내 미 육군의 신형 공격 헬리콥터(AAH)개발 프로그램은
AH-64 아파치 공격 헬기 양산의 첫발을 내 딛게되었다.
아파치 양산 결정 1년전부터 이미 휴즈사는 애리조나주의 대지에 공장을 건설하는 모험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양산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생산 설비들이 빠르게 들어서고
AH-64 아파치 제1호기가 1982년봄부터 제작에들어가게된다.
그리고 최초 생산된 마틴-마리에타의 TADS/PNVS가 1983년 7월에 전달되었다.
1983년 9월 30일, 아파치 공격 헬기의 제식 공급에 앞서
휴즈사는 AH-64 아파치 제1호기 탄생 축하 의식을 거행하였다.
대형 성조기 아래 아파치 공격 헬기는 백마를 탄 아파치 인디언 전사와 함께 참석자의 축하를받았다.
알 림 : 자료가 광범위 한 관계로 2부에서 계속 하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