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FY-1 포고(POGO)/수직이착륙기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05.10 20: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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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세계대전 중  미 공군은 적의 각종 공격에서

활주로가 너무 쉽게 사용불능 상태에 빠져 버리는 경험을하였다.
미래의 전쟁은 개전 24시간내에 적 활주로를

먼저 제거하는 측이 최후의 승리자가 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고정 활주로의 취약점을 보완한 것이 항공모함이었으나

해군은 일본 가미가제 특공대의 육탄 돌진으로 항모의 취약성을 경험하였다.

이때부터 해군은 좁은 갑판에서도 이륙할 수 있는 수직이착륙 전투기라는 개념을 품기시작했다.

만약 이러한 항공기가 개발된다면 항공모함 뿐만 아니라

기타 대형 함선에 배치하여 함대방공 요격기로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2차대전이 종결되고 더 새롭고 강력한 힘을가진 전투기 개발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1947년, 미 공군과 해군은 프로젝트 벌새/허밍버드(Hummingbird)를 마련,

수직이착륙(VTOL-vertical take off and landing)기 개발에 착수하였다.

1948년, 해군은 독일 공군의 수직이착륙(VTOL-vertical take off and landing)기에

관련된 문서를 획득,  연구팀을 조직하였다.

 

독일공군의 문서에는 2차대전 중 개발이 지연되고 있었던 포케 울프사의

램제트 추진 수직이착륙기 트리엡프뤼겔/Triebflugel에 관한 정보들이 기록되어있었다.
이를 근거로 해군은 만약 비행갑판이 필요없게되는 VTOL 전투기 개발이 실현된다면,

LST, 급유함, 수송함, 구축함 등 대형 주력함에 배치한다는 미래적 구상을하고있었다.
항공모함이 모든 함대를 보호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이들 함선에  VTOL 전투기들을 탑재하여 요격기로 사용한다는 것이 기본  골격이었다.
먼저 레이더에 적기가 포착되면 이들 함선들에 탑재된 VTOL 전투기를 발진시켜 중간에서 적기를 요격한다.
그리하여 항모에서 발진한 전투기들이 현장에 도착하기까지 수송함대나 기동함대를 보호한다는 발상이었다.

 

121041941599179.jpg독일 포케 울프 램 제트 추진식  트리엡프뤼겔/Triebflugel

 

121041943856893.jpg컨베이어 원형 시제기 XFY-1 포고

 

1951년 5월 31일, 해군은 컨베이어, 록히드와 터보프롭 엔진을 이용한

세계최초의 수직이착륙 전투기 개발, 발전 계약을 맺었다.

록히드와 컨베이어가 각각 2대씩 제작키로 결정된 VTOL 전투기 시제기는

동일하게 앨리슨  YT-40엔진을 장착하도록 설계되어야했다.
록히드 시제기는 XFV-1 살몬(Salmon)으로,

컨베이어 시제기는 XFY-1 포고(Pogo)로 각각 비공식 명명되었다.

 

기체 설계의 기본 베이스가 포케 울프의 Triebflugel였기 때문에 자연히 그 형체도 비슷했다.
  앨리슨 YT-40엔진은 2기의 T-38엔진을 결합한 것으로,  병렬로 연결된 2기의 엔진이

하나의 변속기를 구동, 프로펠러를 회전하도록 되어있었다.

앨리슨사의 T-40엔진은 더글라스  XA2D-1스카이샤크, 노스아메리칸  XA2J-1수퍼세베지,

그리고 R3Y-1/-2 플라잉보트에도 장착되어 테스트된 앨리슨사의 T-40엔진은 많은 결함을 보이게된다

 

 

XFV-1 살몬과 XFY-1 포고는 각각 2~4문의 20mm 기관포 또는

날개 끝에 48발의 폴딩 핀 로켓 포드를 장착하도록 지시되었으나 실제로 장착된 예는 없다.

두 회사의 시제기는 동일하게 주익 끝단과 수직 미익 포드에

4개의 소형 바퀴를 이용한 랜딩기어가 설치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제동장치가 없었다.
시제 원형기였기 때문에 제동장치가 없어도 무방하였지만

만약 개발이 성공하여 함재기로 정식 채택될 때는 어림도없는 일이었다.

 

컨베이어는 XFY-1 포고의 균형잡힌 착륙을 위하여 델타형 주익, 대형 수직미익 2개를 십자형으로 배치하였다.

그리고 랜딩기어는 용수철이 달린 막대형 놀이기구

포고스틱/pogostick-스카이 콩콩과 같은 원리로, 착륙시 충격을 흡수토록 하였다.

 

컨베이어는 1953년 12월부터 캘리포니아 린드버그 필드에서 XFY-1 포고의 수직 균형 및 기술적 테스트를 시작하였다.

1954년 2월에는 5,850마력 YT-40엔진 테스트가 시작되었으며, 테스트를 마친 엔진은 3월에 XFY-1에 장착되었다.
 린드버그 필드에서 엔진 테스트를마친 XFY-1 포고는

실질적 고난도 테스트를위해 모페트 필드 해군항공기지로 옮겨졌다.
 XFY-1 포고는 1930년대 초반에 비행선용으로 건설된 높이 159m의 대형 격납고에서 각종 실내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121041951640918.jpg추진력 증가를위하여  T-38엔진 2기를 병렬로 결합시킨 YT-40엔진이 XFY-1에 장착되고 있다.

엔진 장착 작업은 컨베이어 기술자들에게 악몽과도 같은 것이었다고한다

 

   

XFY-1 첫 번째 테스트는 제임스 스키츠 콜먼(James F. "Skeets" Coleman)해병 중령이 실시하게된다.

XFY-1은 실제 비행에앞서 대형 격납고에서  수직 이동 검사/vertical taxi trials라는

공식 테스트 명칭을가진 밧줄 비행테스트를 받게될 예정이었다.

스키츠 중령은 1954년 8월 1일로 예정된 야외 자유 수직 비행 실시전까지 밧줄에 매달려

약 60시간 이상의 수직상승, 수직착륙 테스트를 수행해야했다.

 

모터 드럼에의하여 제어되는 밧줄은 XFY-1 포고와 조종사의 안전을위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작업이었다.
컨베이어 기술자들은  XFY-1 기수의 프로펠러 스피너를 제거하고

프로펠러 바로 위에 100m짜리 밧줄을 걸었다.
테스트 도중  비행 안정성을 상실하게되면  스키츠 중령은 컨베이어 모터 담당 기술자

밥 멕그레이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기술자는 즉각 기체의 균형을 잡아주어야된다.
도움 요청은 그저  "밥! 나를 잡아줘!" 이 한마디였는데,

스키츠 중령은 "테스트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셀 수 없을 만큼 자주 밥을 불러야만 했다"라고 말했다.

1954년 4월 29일, 스키츠 중령은 밧줄 비행 테스트에 들어갔다.
밧줄 통제는 컨베이어 기술자 밥 멕그레이리가 담당하였다.
두 사람은 제발 프로펠러가 밧줄을 치지 않기만을 걱정하였다.
그러나 직경 4.8m의 프로펠러가 작동하면서 세차게 휘몰아치는 난기류 회오리바람은

행거에 매달린 기체를 회전, 뒤틀어 버려 통제불능 상태까지 몰아갔다.
 밥은  스키츠의 구원 요청에따라  기체 균형을 바로잡기위하여 안간힘을 다했다.
결과적으로 많은 고난을 겪게된 이 두사람은 마침내 요령을 터득하여 안정된 테스트를 실시할 수가 있었다.
스키츠 중령은 실내 밧줄 테스트 비행동안 많은 공포를 경험하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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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7월에 실시된  밧줄 비행 테스트를위해 사다리를 이용하여  XFY-1 포고에 탑승하는 스키츠 해병중령

 

121041959336934.jpg지상으로부터 15m 고도에 매달려 호버링 테스트 중인 스키츠 해병중령 탑승  XFY-1 포고

 

121041961789693.jpgXFY-1 포고 콕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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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페트 필드에서 실시된 사출좌석 테스트.
조종석에서 인형이 사출좌석과함께 사출되는 모습

 

실내 밧줄 테스트를 마친 스키츠 중령은 1954년 8월 1일, 야외 자유 수직 비행을 실시하였다.
스키츠 중령은 처음 비행에서는 오직  6m까지만 상승하였으나

두 번째 테스트 비행에서는 45m 고도까지 수직 상승 비행하였다.

그러나 초보적 수직 이착륙기 개념을 실현한 기체로 평가되는 XFY-1 포고는

야외 테스트비행에서는 결코 완벽한 수직 비행을 실시하지는 못하였다.

안전한 하강을위하여 라이안 항공사가 개발한 도플러 레이더 고도계가 왼쪽 주익 끝단 포드에 설치되었다.
하강 표시기는  호버링 및 상승을 가리키는 녹색,  안전 하강 속도를 나타내는

호박, 초당 3m 이상의 속도로 하강할 때 빨간색 경고등이 들어오도록 설계되었다.
 

 

9월부터는 수직 상승 후 수평비행으로 전환하는 완전한 비행을 위하여

캘리포니아 브라운 필드 해군 항공 기지로 이동하였다.

안전한 상태에서 XFY-1과 스키츠 중령은 다시 70회 이상의 이륙, 상승을 실시하였다.

그동안 많은 시간의 테스트 비행을 경험한 스키츠 중령은 1954년 11월 2일,

28분간의 비행 중 21분간의 수평비행에 처음으로 성공하였다.

 

 

XFY-1 포고의 수평 전환 비행이 성공하자 해군은

군관계자들을 초청하여 공식적인 비행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틀 후인 1954년 11월 4일, XFY-1 포고의 첫 번째 공식 비행에는 기술자들과 사진사를 태운  

AD-5 스카이레이더와 HU-1 HUP 해군헬리콥터가 추적기로서 함께 비행하기로 되었다.

XFY-1에 탑승한 스키츠 중령은 약 15m 상공까지 상승한 후 수평으로 전환한 다음 480km/h의 속도로비행하였다.

 

활주없이 상승하여 수평 비행하는 모습을 난생 처음으로 목격하게된 참석자들은 깜짝놀라버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스피드 브레이크가없었던 XFY-1 포고의 비행 속도가 너무빨라

AD-5 스카이레이더 추적기 조종사 버그스트드 해군 소령은 XFY-1을 제대로 추적하기가 어려웠다.

속도가 너무빨라 스키츠는 착륙에 애로가있었으나 능숙한 비행으로 착륙하였다.

착륙 과정을 지켜보던 추적기 조종사와 헬리콥터 승무원들은 스키츠의 수직 하강과 착륙 솜씨에 감탄하였다고한다.


 

스키츠 중령은 비상 시에 대비, 언제라도 즉각 탈출하기위하여 항상 캐노피를 닫지 않은 채로 비행하였는데,

그 누구도 이러한 행동을 지적할 수는 없었다.
스키츠는 수직이착륙기 개발에 기여한 공로로 하몬 어워드를 수상하였다.

 

 

 

XFY-1 포고는 결코 완벽한 수직 상승을 할 수는 없었다(비스듬히 상승한 후 수평전환).

다만 착륙 시에만 수직 하강이 가능했다.
포고의 이륙부터 수평 전환 비행, 착륙까지의 과정을 그림으로 봅니다.

 

121041968622424.jpgXFY-1 포고의 추적/확인기로 사용될 AD-5 스카이레이더와 HU-1 헬기가 도착하였다

 

121041972220677.jpg사다리를 이용하여 조종석에 탑승 중인 제임스 스키츠 콜먼 해병 중령

 

121041975138435.jpg비상 사태 발생에 대비 컨베이어 소방대가 대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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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FY-1 포고의 수평 전환 비행
스키츠 중령은 비상 탈출에 대비하여 항상 캐노피를 열고 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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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041988785495.jpg수직 하강비행으로 착륙 중인 포고

 

121041992141548.jpgXFY-1 포고가 성공적으로 착륙하자 지상요원들이 사다리를 옮기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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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로 수직이착륙 및 수평 전환 비행에 성공한 제임스 스키츠 콜먼 

 

 

스키츠 중령은 1955년 2월 5일에는 3000m 고도까지 상승하여 비행했으며,

1955년 6월 16일 실시된 자신의 마지막 비행에서는 가장 장시간을 비행하기도하였다.
또다른 테스트 파일럿 존 크네벨은 연습없이 비행에들어갔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해군은  1956년 5월 8일부터 다시 안전한 밧줄 비행에 들어갔다.
 8월 1일까지 32회간 실시된 밧줄 비행에는 테스트 파일럿 찰스 척 마이어즈와 존 크네벨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미 항모의 갑판에서는 신형 함상  제트기 테스트가 한창 진행중에 있었고,
앨리슨사의 YT-40엔진도 결함이 나타났으며, 테스트에 혹사당했던 XFY-1도 서서히 금속 피로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해군은 XFY-1 개발 프로그램을 종료시키고  XFY-1를 노포크 해군기지에 보관하였다가

1973년에 항공 우주 박물관에 영구 전시되었다.

 

 

자료제공 : (주) 천년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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