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디엔비엔 푸 전투 4부)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05.12 21:3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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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옌에서 6,000명의 병력을 상실하고 패주한 지압 장군은

3월에 다시 3개사단으로 하이퐁 북쪽 마오퀘의 프랑스 전초부대를 공격했다.
전초부대는 공격에 대비하여 튼튼하게 보강되어 있었고, 수비대원들은

B-26폭격기를 비롯하여  해군과 긴밀한 함포지원 협조를 미리 해놓았다.

여기에 제6식민지 공수대대가 증원되어 베트민은 빈옌에서보다 더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

그러나 지압장군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2개월간 휴식하며 병력을 재편성한 다음 델타 남부지역에서 공세를 시작했다.

거듭 계속된 전투에서 병력의 절반 가량을 잃어 버린 지압 장군은 이제

대규모 공세의 실패를 분석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장군은 대규모 공세를 포기하고 산 속으로 들어가 다시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지압 장군은 프랑스군의 강력한 화력에 정면으로 맞설 수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적의 약점을 파악하고 성공의 확률이 높을 때 총공세를 펼치기로 하였다.

 

그는 타이 고원지대과 라오스 고지에서 소규모 작전을 계속 수행하였다.
옌벤과 뒤 이은 전투를 치르면서 베트민들도 전투기량이 한층 높아졌고 처음엔

너무나도 공포스러웠던 네이팜 탄도 그다지 파괴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항공기가 나타나면 엄폐물로 뛰어들어 대공화기 또는 소총으로 대공사격을 가하여

비록 격추는 못했으나 몇 대에 명중 시키기도 했다.
지압 장군은 경포와 박격포, 그리고 무반동 총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래서 타이 고원지대의 좁은 애로에서 효과적으로 전투를 치루어

프랑스 군의 공급선 차단작전인 로레인 작전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1953년 치앙 마이 부근에서 베트민의 포들은 약 3km정도 늘어진 프랑스

호송부대를 오도가도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언덕에 호를 파 숨겨진  포와 화기들은 호송대로부터 50m 떨어진 곳에서

매복 공격을 실시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항공기와 포병, 프랑스 외인부대가

언덕을 공격하자 비로소 공격이 멈추었다. 프랑스군은 호 속에서 단 한문의 포도

발견하지 못했다. 호 속에 단단히 숨겨진 채 공격했기 때문에 프랑스 포병과

항공기의 공격에 피해를 입은 포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지압 장군은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공여받은 무기들이 근거리 전투에서는

프랑스 무기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력 프랑스 공수부대는 어쩔수 없이 중무장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외부의 화력지원을 필히 받아야만 한다.
지압 장군은 중국에서 제공된 중포로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여 맞서기로 했다.
베트민은 상대적으로 빈약한 화력을 극대화하는 전술을 개발했다.

프랑스 부대를 공격할 때 주위에 참호를 파서 2개의 포대대(각각 3문의

소련제 75mm포)를, 3개의 박격포중대(각각 3문의 82mm 박격포)와

 7문의 무반동 총을 배치하기로 하였다.
처음에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400발 정도를 발사하여 프랑스군이 반격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음, 보병들이 경계선에 도착하여 자동소총 등으로 공격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해서 프랑스 포병과 포격전을 실시하고 보병들이 열광적으로

전진하는데 유리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이러한 전술들이 프랑스군을 제압하기엔

전력이 불충분하지만 포가 프랑스군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해졌다.

지압 장군은 자신이 야전을 치루면서 너무 조급했음을 인정하였고,

이제는 대규모 전투를 피하지 않는 전략으로 바꾸었다.
지압은 강력한 화력을 집중, 기지들을 공격하고 그것이 성공하였을 때

후방 보급선을 차단하여 기지의 전투능력을 떨어뜨기로 하였다.

날씨도 최대한 이용하여 유리한 방향으로 전투를 이끌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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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민 사상 교육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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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중 야외에서 식사 중인 베트민

 

 

유인 섬멸로 큰 재미를 보았던 프랑스군 장교들에게서 한 곳에서 고정된

전투를 해야만 인도차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큰 전과를 올렸던 빈옌 전투가 그 대표적 예였다.

그들은 항공력과 포병의 파괴력이  충분히 베트민을 압도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베트민이 자체적으로 화력을 갖추고, 또한 숙련되어 가고 있어 더 많은

무기들이 필요하였지만 프랑스 정부는 국방비 지출에 인색했다.
포병화력을 중시하였던 프랑스군이었지만 500문 이상의 포들이 지방의

전초부대에 흩어져 있었다.

공군도 가난하기는 마친가지여서 1951년 한해동안 가용한 모든 항공기를

총 동원해서 투하한 폭탄은 8,621톤 이었다. 이만한 양의 폭격을 위해 공군과

해군기 종사자들은 인내의 한계점에 도달한 것으로 그 고생을 표현했다.
나중에 미군이 2개월 동안의 단일 작전 지원에서 110,000 톤의 폭탄을

투하하는 것에 비교하면 보잘 것 없지만, 항공기와 부품, 무기가 부족한 가운데

힘겹게 이루어낸 것이다.

지상군의 보병대대는 보통 야지에서 수 개월을 보냈고 전투와 질병, 탈진 등의

이유로 10명 중 1명의 비율로 목숨을 잃었다. 또한 훈련부족에 사기 마저 바닥을

쳤다. 프랑스군 지휘부는 프랑스군 만으로는 이러한 손실률을 대체할 수 없어

아프리카 식민지, 베트남 또는 외인부대원들로 충당하였다.
이러한 요소들이 누적되어 1951년부터 프랑스군의 전투력은 급속히 하락하였다.
상황이 악화되자 군 고위층은 포병의 지원을 더 한층 강화시켰다.

예전에는 매복이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곳에 맨 먼저 보병이 출동하였으나

이제는 포병이 그 선두에서 작전을 실시하였다. 날이 갈수록 보병은 포병과

항공기의 지원에 의존하는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1952년에는 통킹의 모든 포들이 3개월 동안에 4,800톤의 포탄을 사용하였으나

1954년까지 8,900톤으로 증가하였으며 보병은 1952년 3개월 동안 850톤의

박격포탄을 소비했으나 1954년에는 1,980톤을 소비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빈옌 등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획득하였던 라트레 장군이

1952년 암으로 사망하였다. 아마도 맹장 나트레 장군이 죽지 않았다면

디엔 비엔 푸에서의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었을런지도 모른다.
프랑스군에게 베트민을 유인 섬멸할 수 있다는 결정적인 자신감을 심어준  

전투가 바로 나산 전투였다.

1953년 11월, 나산 비행장에 오직 5개 대대병력 만이 있는 것으로 오판한

보 구엔 지압 장군이 사단급 공격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나산 비행장에는  항공기로 속속 공수된 10개의 대대가 베트민의 공격을

받아쳤다. 총력을 다하여 거듭된 공격에서 1,000명 이상의 병력을 상실한

지압 장군은 마침내 격퇴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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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자를 매장하는 프랑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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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산 작전에서 승리한 프랑스군 사령관 앙리 나바르 장군은 나산에서 항공기에 의해

병력과 보급을 지원받은 수비대가 뛰어난 전투를 수행하자 이러한 승리를 

반복하기로 결정하였는데, 그 곳이 바로 디엔 비엔 푸였다.
카스트로작전으로 명명된 이 작전은 전략 요충 지역에 기지를 설치한 다음,

결정적인 대규모 전투를 유도하여 적을 완전히 섬멸하는 것이었다.
1953년 11월, 프랑스 공수부대가 하노이에서 디엔 비엔 푸로 공수되어

소 수의 병력을 잃고 마을을 탈취하자 뒤이어 군수물자가 투하되었다.
디엔 비엔 푸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오직 지상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기지를 설치하였을 뿐, 기지 주변을 병풍처럼 둘러 싼 평균 910m 높이의

산들은 점령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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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 전초기지 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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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민의 침입에 대비해 전초기지 바깥에 철조망과 깡통을 메달았다

 

121059552357447.jpg작전을 위해 전초기지를 나서는 프랑스군

 

5부 기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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