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치하고 차량에 병력과 기관총을 싣고 유럽 전장의 질퍽한 진창길을 헤쳐나간 차량들이
원류라 할 수 있으며 전쟁이 만들어낸 용어이다 라는것에는 동의해야만 할것이다.
미국의 J.W 커티스 장군은 "짚은 발명이 아니라 세계사의 이동이다" 라고 말했다.
미 육군대령 반 다우즌은
"짚은 4륜구동과 강한 출력을지닌 차량을 필요로하였던
보병들의 요구에의해 만들어진 결과물인 것이다" 라고 말했다.
로버트 호위 대령은 제1차 세계대전 중 보병들이 위치를 옮길 때마다
무거운 기관총을 분해하여야만했던 불편한 문제에대해 고민했다.
그는 고전하는 보병들에게 기관총과함께 재빨리 달려온 두명의 병사는
전투의 승패를 결정할 수 있을만큼 그 값어치가 큰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기위해서는 말이나 모터를 대체할 수 있는 능력과
디자인을 이루는 차량이 되어야할 것이다.
1919년, 미국 병참단(QMC-QarterMaster Corps)의 기술 위원회는
잘 부서지지 않고 험한 지형 곳곳을 수색할 수 있도록
강하게 디자인된 차량을 군대에서 사용하도록 권고했다.
차량은 충분한 적재량과 낮은 차체 중량,
그리고 흐르는 강물을 헤치고 건너갈 수 있어야한다고했다.
그 동안 미군은 이 일반적인 개념에따라 수 많은 차량들을 테스트해오고있었다.
1921년, 무한궤도 트랙과 결합된 경 차량들 중 15개 모델을가지고
에버딘에서 능력 평가를 실시했다. 당시 육군은 모터나 사이드 카를 대신하여
광범위한 지역을 수색할 수 있는 차량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에버딘에서의 테스트의 결과는 실망스럽게도 이들 차량이 너무 무겁고
단지 상업용으로만 적합하게 디자인된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된다.
이에대한 연구는 윌리엄 F 비즐리와
기술자이자 현역인 칼 테리 대위에의해 한층 더 발전하게된다.
1923년 그들은 중량이 500 Kg인 포드 T 모델에 관심을가졌는데,
이 차량은 더 무겁고 덩치가 더 큰 차량보다 유능했다.
그러나 표준 타이어가 모래나 진흙에서 고전하자 테리 대위는 필립스 비행장에
보관하고 있는 잉여 항공기의 타이어로 교채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낸다.
비즐리는 항공기의 소형 타이어로 바꿔끼우는 작업에 들어가게된다.
이로서 차량에 저압 타이어가 도입되는 계기를 만들었고,
이 타이어들은 야지에서 대단히 큰 효과를냈다.
이 차량은 아주 단순하게 2인승 시트를 장착했고 당시의 차량들 중 가장 가벼웠다.
그들은 짚의 기초적 기본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더 많은 장비들을 탑재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무게의 증가 때문에 더 관심을 끌지못한다.
1923년에 제작된 모터 카트(Motor Cart)- 포트 베닝.
뒤쪽에 탑재된 V형 쌍발엔진은 할리 데이비슨 모터 싸이클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차량은 수 십년 지난1956년 해병대가 사용하게되는 Mule의 원조격이된다
V-8엔진을 탑재한 캐딜락에 탑재된 무전기를 사용하며
수색 정찰임무 훈련을 수행 중인 기병대 병사들. 1924년
위의 포드 T형 차량은 미군의 군수품에대한 테스트를 책임진 병참 부서에서
1923년에 테스트를 받았다. 수색 트렉터로 명명된 이 차량은
야지운용에 탁월한 성능을 보여주었다
아서 W 헤링턴 자동차회사는
1934년 4륜구동 1 1/2 톤 포드의 개조로 많은 명성을 얻고 있었다.
벨기에가 이에 큰 관심을가졌지만 이 차량은 너무 무거운 것으로 판명된다.
그러자 헤링턴은 1936년 7월부터 9월까지 0.5톤 포드로 바꾸어
텍사스 킹 목장에서 시험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937년6월26일,
국가 방위국은 5대의 마몬-헤링턴 포드(marmon-herrington ford)4륜구동
0.5톤 차량(모델명-LD I)을 얻게된다. 이 차량은 포트 베닝에서 테스트를 받게되는데,
적재능력 450kg, 변속장치를 채택하여 35mph의 속력을내어
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차량들 중 최고로 좋은 성능을 발휘하였다.
만족한 미군은 1938년1월20일, QMC를통해 64대를 발주하게된다.
미군에게 사랑받은 짚의 선조격으로 인정받게되는 이 차량은
The Grand-daddy of the Jeep-짚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얻게된다.
마찬가지로 1934년부터 가볍고 지면과 가까이 밀착된 차량을 개발하려했던
로버트 G 호위 대령은 1937년1월 맬빈 G 윌리 상사와함께 차량제작에 들어가
3월에 밸리 프로퍼(Belly Flopper)로 이름붙여진 차량을 만들어낸다.
이 차량은 길이 1.9m, 높이 83cm, 차체 중량 460kg이며
엔진은 뒤에탑재되고 앞 바퀴 구동식 이었다.
2인승이며 완충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승차감은 몹시 피로할 정도였다.
이 차량은 최고시속 45km로 달렸으며 7.62mm 기관총 1정과
1500발의 탄약을 적재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1937년 4월,
테스트에 들어간 육군은 낮은 차체는 군용으로서 위장과 피탄회피율 면에서는
유용하긴하나 논밭과 강 등의 야지를 달리기에는 많은 약점이 있다는 평가를내린다.
포트 베닝의 자동차 평가관 죤 도스턴 소령은 군용차량은 결국 트럭을 개조하는
길 밖에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 차량의 평가를 '불만족스러움'으로 끝냈다.
이 테스트에는 훗날 진주만 공습에대한 책임을지고 군복을 벗게되는
비운의 사나이 월터 C 쇼트 장군도 참관하였다.
맬빈 윌리 상사의 아이디어로 밸리 프로퍼를 제작한 로버트 호위 대령팀.
1935년에 아메리칸 기병 저널에 실린 H.G 해밀턴 중위가 그린
"라이트 크로스 컨츄리 카"의 구상도.
1940년초, 유럽에서 전쟁의 불길이 일자 미군 참모본부는
차량연구를위해 군수품 기술 위원회의 각 부서에 위원들을 추가임명한다.
이들의 임무는 차량의 각종 군 적합 요구사항을 명시한
공식 설계도를 작성하여 표준화시키는 것이었다.
밸리 프로퍼를 제작했던 호위 대령도 위원에포함되었다.
이들은 우선 기술향상용역 대상으로 지정된 밴텀(Bantam) 자동차 회사에 모여
광범위한 연구와 토론에 들어가게되어있었다.
밴텀 사는 1938년 펜실베니아 주 방위군으로부터 3대의 표준 오스틴 차량에대한
기술 용역을 받았으며 그해 여름 기동작전에들어간 주 방위군으로부터
만족스럽게 평가되었었다.
1940년5월27일,
워싱턴에 모인 군수품 기술위원회는
1/4톤 4륜구동차량 발주에대한 기본적인 요구사항을 확정하게된다.
차량은 최고무게가 590kg을 초과해서는 안되며,
272kg의 적재능력이 있어야한다.
차량의 길이는 2.32m이다.
위원에는 엔지니어들도 참가하여 4륜구동 자동차 개발에 기술적 지원을했다.
어차피 미래의 자동차는 2개의 액슬을 필수적으로 사용하여야했기 때문에
변속기 엔지니어들이 노력이 필요했다.
3명의 고위 군 엔지니어(밥 브라운, 빌 버갠, 윌리엄 비즐리)는
군에서 필요로하는 기본적인 조건들을 다음과같이 명시했다.
최저속도 5km,
4륜 구동,
7.62mm(30구경)기관총 장착,
3명의 승무원 탑승.
차량바닥과 지면과의 높이 16cm.-지상고
미군 수석 엔지니어 윌리엄 비즐리가 1940년6월에 작성한 짚의 기본 베이스
4800대가 제작된 일본육군의 95형 차량. 25마력 2기통 엔진을 탑재하고
8리터의 연료로 100km를 주행할 수 있는 연비를 가졌다.
사막전용 타이어를 장착한 독일 아프리카 군단의 큐벨바겐
군수품 기술위원회는 자동차 제조업자들에게 다음과같은 무리한 입찰 요구조건을 달았다.
디자인을 제출한뒤 8대의 4륜 구동 차량을 포함한 총70대의 차량을
75일 이내에 제작하여 납품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원형차량을 49일 이내에 제작한뒤 나머지 차량들을 모두
26일만에 만들어내라는 너무나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요구사항은 직 사각형의 모양을 지닐것, 젖혀지는 방풍유리,
3개의 접이식 의자, 4륜구동과 2개의 프랜스퍼 케이스를 갖출것,
야간 등화관제식 라이트를 장비하도록했다.
미군은 즉시 175000달러의 예산을 책정하였고,
QMC는 135개의 제조업체들에게 이 같은 조건에 무조건 합의하라고 권유했다.
낮은 가격, 너무나 짧은 납품기간, 최대한 낮은 중량요구는
제작사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비현실적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약조건에도 불구하고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 차량제작 업체는
밴텀(BANTAM) 사와 윌리(WILLY)오버랜드 2개 회사였다.
밴텀 사의 첫 번 째 원형 "짚" 차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