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동남아시아에서는 월남전이 치열하였다.
월남에서는 월남 군 한국 군 미군들의 베트콩 소탕전이
한창이었고 월맹 상공에는 미 공군과 해군의 전투기들이
끊임없이 출격하고 있었다.
전쟁은 오늘의 월남 바로 옆 인접국 라오스로 확전되었다.
월맹에 남쪽으로 보내는 병력과 물자를 이 라오스로 우회해서
보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관광지가 된 호 지민 루트가 월맹에서 라오스를 통하여
월남으로 뻗어 있었다. 이 호 지민 루트가 미군 해공군의
폭격 목표였다.
그래서 라오스에서도 미 항공기의 출격이 잦았었다.
그해 7월 20일.
미 공군 제 101 항공 코만도 그룹 대장 유진 페이턴 데트릭 중령은
부하와 함께 라오스 상공을 순찰 비행 중이었다.
두 사람이 몰던 항공기는 해군기로 개발된 A-1 스카이레이더였다
스카이레이더- 해군형, 월남전에서 공군도 사용했슴
단좌 공격기였던 스카이레이더는 성능이 좋아서 월남전 내내
사용되었고 미 공군도 이 프로펠러 공격기를 대지 공격기로
활용했었다.
요란한 폭음을 뿌리며 조용한 라오스 정글을 비행하고 있는 중에
지상을 내려다 본 찰라에 데트릭 중령의 망막에 푸른 정글 사이에서
티끌만큼 하얀 물체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 날 기적이 벌어졌다.
그는 이 반딧불만한 흰 빛이 그의 망막에서 그의 머릿속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그는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지만 그 흰 색깔이 그의 관심을 자꾸 끌었다.
그 상황에서 있을 수가 없는 일이 생겼던 것이었다.
조종사의 시야에 만사가 움직이고 만물이 있는 지상에서 그 정도
크기에 그 정도 색깔은 비행 중에 눈에 보이는 수천 수 만 가지의
현상이나 사물중의 하나 일뿐이었다.
그것은 서울 북한산 높이에서 지상에 있는 방석만한 물체를
유의해 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련한 전투 경험을 가진 데트릭 중령은 이상하게도
그의 육감이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진로를 다시 뒤로 바꾸어서 조심스럽게 지상을 살펴보다가
흰 천을 필사적으로 흔들어 대고 있는 한 인간을 발견했다.
데트릭 중령은 심상치 않다고 보고 교신 가능한 공군 탐색
구조팀에게 긴급 구조를 요청했다.
한 시간도 안 되어 달려온 공군 헬리콥터 탐색 구조팀은 주변에서
두 기의 스카이레이더들이 엄호하는 가운데 그 인간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하여 구조해냈다.
남루한 옷차림에 뼈만 남은 그를 잘 보니 분명 코카서스인,
다시 말하면 백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해군 조종사 디이터 뎅글러 대위로서 파테트 라오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했다고 신분을 밝혔다.
구출된 직후의 뎅글러 대위- 몸무게 47킬로
그가 출격해서부터 기적적으로 구조된 그날까지의 경위를 알아보자
왼쪽에서 두 번째가 뎅글러 대위- 동료 결혼식에서
구조되던 때로부터 반년 전인1966년 2월1일.
뎅글러 대위는 월남 해역에 작전하던 항공모함 레인저 호에서 발진한
다른 세 기의 스카이레이더 기들과 함께 월맹에서 전날 공중 정찰에서 발견 된 트럭 수송대를 폭격하는 임무를 받고 출격하였다.
최초롤 두개의 활주로를 가진 항모로 디자인 된 항모 레인저
1957년 취역 1993년 퇴역 - 뎅글러가 발진한 항모
임무 수행을 방해해서 이들 편대는 이차 예정 공격 목표인 라오스의
무 기아 고개 서쪽에 있는 교차로로 행했다.
무기아 고개는 높이 418미터 밖에 되지 않았지만 호 지민 루트에서
통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요지로서 미군의 폭격이 끊이지를 않았다.
그 무렵 라오스에서의 미 항공 작전은 비밀리에 수행되고 있었다
누런 부분이 호 지민 루트(트레일)- 무 기아 고개가 보인다.
그러나 다음 목표 인근 상공은 산불에서 나오는 연기 때문에
시야가 영 좋지 않았다.
산불 연기 속에서도 목표는 다행히 발견 할 수가 있었다.
네 기의 스카이레이더는 한 기씩 차례로 목표 공격에 들어갔다.
뎅글러 대위의 기는 공격기중 마지막 기였다.
시야가 한정되었지만 그들의 동료기는 그가 폭탄 투하를 위해서
급강하는 것까지는 보았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시야에 발견되지 않았었다.
무전도 불통이었다.
급강하 도중에 지상에서 기습적으로 쏴 올린 대공포에 맞아서
추락했던 것이다.
뎅글러는 가까스로 대파된 스카이레이더를 근처 평지에 불시착시키고
정글로 도주했다.
뎅글러가 타던 A-1H 형 스카이레이더
레인저 함으로 돌아온 대원들은 그래도 그가 미 해군 조종사
생존 학교에서 거둔 성적과 기발한 창의력으로 위기를 돌파했던
그의 생존 기술을 떠올리며 그의 귀환에 기대를 가졌었다.
그는 생존 학교에서 먹을 것이 없으면 더러운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었고 모의 포로수용소에서는 MP들의 집중 감시에도
세 번이나 탈출하였었다.
불행하게도 그는 구조 무선 수신기와 생존 도구를 불시착 때 모두
파괴되어 버려 그는 다음날 항모에서 발진한 구조 헬리콥터가
접근했지만 그는 헬리콥터에 신호를 보낼 방법이 없었다.
라오스는 친 서방 세력이 집권하고 있었으나 세력이 허약하여
지방은 월맹군에 적극 협조하는 반란군 격인 공산 파테트 라오 군이
지배하고 있었다.
뎅글러는 되도록 은신해서 수색하는 공산 반군인 파테트 라오 군에게
들키지 않게 노력했지만 다음 날 강가에서 물을 마시다가 파테트 라오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는 두 손을 묶이고 정글 사이를 끌려서 이동 하였다.
마을과 마을로 이동하며 이동하던 중 그는 탈출을 시도했다가
다음날 다시 붙잡혔다.
파테트 라오는 그를 고문했다.
우물 속에 매달아 놓거나 거미 굴 위에 얼굴을 대고 거꾸로 매달아
놓거나 손가락 밑을 죽순으로 찌르기도 했다.
그렇게 고문당하며 끌려 간 곳은 빠르 쿵 읍 근처 포로 수용소였다.
그가 끌려간 라오스 공산 반군의 수용소에서 그는
두안 마틴 중위와 유진 드부르인의 두 명의 미국인들과 한 명의
홍콩인, 그리고 세 명의 태국인이 포로로 억류되어 있었다.
마틴은 미 육군 헬리콥터 조종사로서 파테트 라오에게 포로가
된지 일 년이 넘어 있었다.
격추된 헬리콥터의 그의 다른 동료 승무원 세 명은 월맹군에게
끌려가서 억류 되었다가 1973년 석방되었다.
나머지 미국인 한 명과 홍콩인, 그리고 태국인들은 미 CIA가
운영하던 위장 민간 항공기 회사인 에어 아메리카 C-46수송기
화물 투하 요원들이었다.
에어 아메리카 승무원들은 굶주린 라오스 벽지 주민들에게 식량을
투하하다가 격추 되었었다.
두 명의 미국인 조종사들은 사망했었고 투하 요원 다섯 명만
낙하산으로 탈출했다가 파테트 라오에게 붙잡혔다.
이미 이 년 반이 넘게 구금 되어 있어서 기진맥진해 있는 처지였다.
대면 첫날 두 미국인 포로들에게 뎅글러는 자기는
탈출 할 계획이며 두 사람도 동참해 줄 의사가 있는지 물었다.
그 들은 물이 풍부해질 장마철까지 기다리자고 말했다.
탈출 중에 식수는 필수적이었다.
뎅글러가 끌려온지 며칠 안 되어 그들은 호이 헷 읍의 17키로 떨어진
포로수용소를 이동되었다.
이동 뒤에 그들은 탈출시기에 대한 여러 격론이 있었지만
결정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6월까지 몇 달 동안 포로로서 갖은 학대와 고문을 당하고
배고픔을 참아야 했다.
이 기간 뎅글러는 성명 미상의 미 해군 조종사가 끌려와 당일로
머리가 잘려 처형되는 것을 보기도 했고 여섯 명의 부상당한
미 해병 대원들이 다른 건물에 이송되어 왔다가
전원 총살되는 것을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라오스 어를 아는 한 태국인 포로가 보초들이
포로들을 정글로 데리고 가서다 사살하고 상부에는 포로들이 탈출을
시도했기 때문에 죽였다고 보고하자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유는 보급 식량이 너무 부족해서 포로들을 먹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불길한 정보에 포로들을 탈출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하고
거사 날을 잡았다.
계획은 포로들이 식사를 할 때 이들을 제압하여 무기를 빼앗아서
탈출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 지역 상공에 밤마다 찾아오는 C-130 조명탄 투하 수송기에
신호하여 구출 되는 것이었다.
뎅글러는 결정한 날이 오자 자기들 감옥을 막은 통나무를 느슨하게
해서 사람들이 빠져 나갈 수 있게 만들었다.
C-130 수송기
1966년 6월 29일.
경비병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포로들은 발의 족쇄를 풀고
감방에서 빠져나가서 이들 경비병들이 놓아둔 무기들을
집어 들었다.
무기들은 미제 M1 소총, 중국제 자동 소총,
미제 칼빈 소총과 기관단총이었다.
식사하던 경비병들은 그제야 포로들이 탈출하는 것을
알아채고 달려들었다.
뎅글러는 그중 세 명을 M1 소총으로 사살했다.
한 타이 인은 또 다른 경비병의 다리를 쏘아서 쓰러뜨렸다.
나머지 두 명의 경비병은 도주하였다.
7명의 포로는 세 그룹으로 나뉘어서 탈출했다.
C-46승무원 드브루인은 원래 뎅글러와 마틴과 동행하기로 했었으나
그의 부조종사였던 중국인 토가 말라리아로 약해져서
미국인들과 같이 도주할 수 없음을 알고 그와 남아서
다른 루트를 택하기로 하였다.
두 사람은 멀리 보이는 산맥을 넘어서 숨어있다가 두 사람이
먼저 탈출해서 구조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러나 그냥 포로수용소에 남아서 다시
포로 생활을 계속했다.
드부르인은 본래 탈출에 소극적이었다.
포로수용소를 탈출한 다른 다섯 명중 살아 남은 사람은 다시
파테트 라오에게 붙들려서 구금되어 있다가 친 서방 라오스
정부군에게 구출된 인디라다트라는 태국인이 있을 뿐이다.
드브루인은 다른 포로 용소로 보내진 뒤 1968년까지 살아 있다가
어느 날 두 명의 월맹군이 끌고 나간 뒤 영원히 소식이 두절되었다.
뎅글러와 마틴 두 사람은 정글로 들어섰다.
뎅글러와 마틴은 메콩 강으로 가서 타이까지 강을 따라
탈출하기로 했다.
정글은 해충과 거머리 같은 것으로 가득해서 그들을 무척
고통스럽게 했다.
두 사람은 개천을 따라 내려가다가 강을 발견하였다.
둘 다 메콩 강을 향해 정확히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뎅글러와 마틴은 포로수용소를 중심으로 몇 키로의 원을
그리며 정글 속을 돌고 있었던 것이다.
몇 개의 촌락을 지났지만 다행히 촌민들에게 발견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촌락을 발견하고 빈 집에서 끊임없이
내리는 장마 비를 피했다.
두 사람은 포로수용소에서 쌀을 가지고 왔고 여러가지 야생식물로
허기를 채웠지만 이제는 아사 일보 직전이었다.
뎅글러와 마틴은 계획대로 밤마다 지역 상공에 나타나는 C-130기에
신호 보내기를 시도하였다.
C-130은 조명탄을 적재하고 야간 패트롤을 하면서 의심스러운
목표가 있으면 조명탄을 투하했고 목표물이 확인되면 대기한
전투기들이 출동하여 폭격했다.
공격기가 오면 C-130은 상공을 선회하며 조명탄으로 공격을 지원했다.
그래서 매일 밤 순찰 조명 투하기가 출몰하였던 것이었다.
밤마다 호지명 루트를 운행하는 월맹 트럭 수송대가 C-130 조명탄
투하기의 주요 목표였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대나무를 계속 마찰하여 불을 피울 만한 힘도
남아있지를 않았다.
다음날 뎅글러는 마틴이 버린 칼빈 실탄을 하나 찾아내어 그 화약을
꺼내 불을 피울 수가 있었다.
그날 밤 그들은 횃불을 만들어서 상공에 출현한 C-130기에
SOS의 S와 O자를 그리며 신호를 보냈다.
항공기는 빙빙 돌면서 두 어 발의 조명탄을 투하했다.
그들은 항공기가 자기들을 발견했다고 믿고 기뻐했다.
다음날에는 구조나 수색기가 올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근처 일대가 안개와 이슬비로 덮여 있는 것으로 알고 낙심했다.
오후에야 안개가 개었지만 구조기는 오지 않았다.
포로수용소를 탈출한지 18일째가 되었다.
마틴은 말라리아로 쇠약 할대로 쇠약해져서 영양 보충할 식량이
필요했다.
그는 사람들이 사는 근처 아카 촌으로 가서 식량을 구걸해
오겠다고 했다.
뎅글러는 그 생각이 꺼림칙하게 생각되었지만 마틴을 혼자
마을로 가게 할 수는 없었다.
마을 입구에서 그들은 개들과 놀고 있는 어린아이를 만났다.
그들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본 아이는 기겁을 하고
“ 미국 놈이다! 미국 놈이다!”
하고 외치며 마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금방 한 촌민이 나타났다.
이미 기진맥진한 두 조종사는 길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 촌민의 동정심을 사서 음식을 구걸해보자는 바램에서 이었다.
그 만큼 그들의 입장은 절박했다.
그러나 상황은 두사람의 바램과 반대로 나타났다.
촌민은 정글 도를 들고 다가오더니 갑자기 꿇어앉아 있는 마틴의
다리를 찍었다.
동남아 현지 민들이 쓰는 정글 도는 우리가 아는 철판 가공의 정글도와
달리 동네 대장간에서 벼루었기 때문에 마치 중국의 마적들이
휘 두르던 청룡도와 같이 타격력이 매우 크다
농촌에서 자라신 분이라면 아시는 옛날 시골 작두를 작게 축소해 놓은 것과 비슷하다.
다리를 찍은 그는 다시 칼을 휘둘러 무릎을 꿇고 있던 마틴의 목을 쳤다.
마틴은 그 칼질에 목을 깊이 베어 목숨이 끊어졌다.
촌민의 인정을 구걸하며 무릎까지 꿇었던 미국 젊은이는 이역에서
어이없는 죽음을 했다.
뎅글러는 이 참변에 격분하여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고 칼을 든 그 자에게 덤벼들었다.
뎅글러의 반격에 놀란 촌민은 부락 쪽으로 소리를 지르며 도망쳤다.
뎅글러는 다시 밀림 쪽으로 도주했다.
칼질한 놈이 데려온 촌민들이 그를 추격했지만 그는 더욱 깊은
밀림 안으로 들어가서 추적자들을 따 돌렸다.
밀림에서 방황하던 뎅글러는 며칠 전에 마틴과 그가 한 때 지냈던
빈 마을로 다시 돌아갔다.
그 곳에서 밤에 나타난 C-130에 구조 신호를 보내서 반응을 받았었다.
그가 자리 잡은 그 날 밤 다시 C-130 조명탄 투하기가
밤하늘에 나타났다.
뎅글러는 마을의 빈집들에 불을 질렀다.
C-130은 다시 상공에서 선회하며 조명탄을 투하했다.
그러나 다시 몇 번 선회하고 떠나 버렸다.
C-130 조종사는 기지인 태국 우돈 미 공군 기지로 돌아가서 이날
야간 출격에서 본 지상의 화재를 보고했지만 정보 장교는 그 화재를
구조 요청의 사인으로 분석 판단하지 않았다.
구조 신호를 몰라 본 비행기가 다시 돌아가자 뎅글러는 낙담했다.
야간 신호가 효과가 없자 뎅글러는 주간 신호를 시도 해보기로 했다.
그는 구조 요청 신호를 하기위한 도구로 조명탄에 부착된
작은 낙하산에 착안했다.
그 낙하산들은 흰색이라서 상공에서도 잘 보일 것 같았다.
뎅글러는 다음 날 촌락 부근 밀림을 뒤져서 조명탄을 달고 떨어진
낙하산을 구할 수가 있었다.
1966년 7월 20일,
그가 보초들을 처치하고 포로수용소를 탈출하고 밀림 속을 헤맨 지
어언 23일째가 되는 날이다.
미 공군 기가 스카이레이더 두 기가 그가 배회하던 강 위를 지나다가
그리고 기적 같은 구출이 이루어진 사실을 글머리에서 소개했었다.
당시 두 공격기는 강을 따라 가다가 뎅글러가 신호를 보내던 있든 지점,
다시 말하면 강이 굽이쳐 흘러서 방향 전환을 위해서 스카이레이더를 옆으로 기우렸다.
우연이었지만 뎅글러가 그런 지형지물의 선택한 것에서 부터
기적이 시작되었다.
,
뎅글러는 그의 회고록에서 그가 발견된 확율이 얼마나
기적적이었던가를 이렇게 회고하였다.
“스카이레이더의 날개는 조종석 바로 아래에 붙어있어서 기체를
옆으로 90도로 기우리지 않으면 바로 아래 지상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 때 높은 바위에 누워서 흰 낙하산 을 흔들고 있었다.
데트릭 중령이 방향을 틀기 위해 90도로 옆으로 기체를 기우린
시간은 3 초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천 미터 상공에서 그 찰라와 같은 시간에 지상에 작은
점과 같은 흰 색을 본 것이다.”
말한대로 데트릭 중령은 기체를 돌려 다시 확인했을 때야 그 흰 빛이
사람이 흔드는 천임을 알았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데트릭 중령은 구조를 요청하는 의심스러운
존재의 발견을 본대에 보고하고 구조기의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나 탐색 구조팀에서는 그런 희미한 단서와 육감에 의미해서
요청하는 구조 출동은 사실 들어주기가 힘든 노릇이었다.
전에도 그런 유사한 요청이 있어서 출동했다가 허탕 친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근래에 그 지역에서 격추되어 실종된 공군 조종사는
한 명도 없었다.
본대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데트릭 중령의 요청은 끈질겼다.
그의 동료 부하 조종사까지도 거들고 나서서 강하게 요청하자
본대에서 마지못해 구조 헬리콥터를 파견했다.
여기서 또 하나의 기적이 존재한다.
데트릭 중령의 계급이 낮았거나 그가 본대의 구조 요청 거절에
포기하는 일이었다면 뎅글러는 절대로 구조되지 않았었다
데트릭 중령 - 대령 때 사진
노련한 그의 육감이 뎅글러 대위를 살렸다.
계급도 거절하기 힘들만큼 높았고 경험도 많은
그가 포기하지 않고 강하게 구조기의 파견을 요청했기 때문에
구조 본부가 할 수없이 움직였던 것이다.
또 다른 기적 같은 사실이 있었다.
데트릭 중령은 사관학교를 나와서 조종사 초년기 생활을
바로 탐색 구조팀에서 했었다.
그렇기에 지상의 미세한 신호에 반응하는 남다른 육감이 있었다.
기적은 연속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데트릭 중령은 대령까지 진급하고 은퇴하였다.
그리고 지금 미국에 생존해있다.
헬리콥터 기가 나타났고 뎅글러는 헬리콥터 위로 끌어 올려졌다.
그러나 강하 구조병들은 이 엉뚱한 장소에 나타난 그가 적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버리지 않았다.
만년의 디이터 뎅글러
그가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 될 때 해군 F-14전투기들이
추모 비행을 했다.
해군은 영웅이었던 그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전 나는 그의 기사가 그 때 한국 신문에 보도되었는지
알아 보았다.
그의 기사도 1966년도 한국의 신문에도 상당히 크게 보도되어 있었다.
나는 외신을 인용한 두 어 개 흥미로운 기사를 그 때의 신문에서
찾아냈다.
마치 특종이나 되는 듯이 그가 서독 공군의 조종사로서 경험을 쌓기
위해서 미 해군에 비밀리에 파견된 조종사라고 보도한 기사가
그 하나이다.
그가 독일 액센트가 강한 영어를 쓰는 독일계였었기 때문이었으리라 .
그리고 또 다른 기사는 그의 탈출이 일 억 분의 일 확률의
기적이었다는 기사였다.
비록 수학 공식으로 그의 구조를 표현 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모든
조건이 기적이라는 단어의 연속처럼 연결되어 그의 행운이 있었던
것을 보면 그렇게 과장 된 표현이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영화로 만든것 입니다 "레스큐돈"
자료제공 : 야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