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모함 이야기 ...(11부)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05.20 20:5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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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기 ...f4u 코르세어 1편

 

1938년 2월 1일, 미 해군이 우수한 성능의 항모 탑재 전투기 개발계획을 공표하자

첸스 보우트 사에서는 수석 항공기술자 렉스 베이젤을 비롯하여

공기역학 담당 기술자인 파울 베이커, 추진력 담당 기술자인 제임스 슈메이커등이

한팀이되어 시제기 개발에 착수했다.

슈메이커는 시제기인 v-166a(제작은 하지않음)에 당시 신뢰성있는

플렛&휘트니 r-1830 와스프 엔진을 탑재하는 설계를했으나

나중에 미 해군이 더 고속의 전투기를 요구하자 설계상의 시제기인

v-166b에 플렛&휘트니 r-2800-2와스프 엔진을 탑재하기로 결정한다. 

 

원형기에는 이 엔진이 탑재되나 나중에 r-2800-4 엔진으로 바뀐다.

하나의 실린더에서 100마력이상의 힘을 뿜어내는 18기통의 이엔진은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엔진이었다.

해군은 1938년 6월에 xf4u-1의 보우트 사 안을 정식 채택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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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로 제작된 코르세어 모형. 1939년 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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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f4u-1

 

 

강력한 힘을가진 엔진을 탑재하려면 결국 기체 디자인에 변화를 줘야했다. 

1850마력의 공냉식엔진에 그 힘을 받쳐줄 3개의 블레이드를가진 직경 4.06m의 해밀톤

프로펠러를탑재하자 기체의 높이 문제에 부딪힌다. 보우트 사는 긴 지주를가진

랜딩기어를 구상해보았지만 그것은 너무길어서 항모 착함 시에 위험했다.

항모에 착함하기위해서는 짧고 강력한 랜딩기어가 요구되는데 그러자면 프로펠러의

길이가 짧아져야하고 그 결과로 엔진의 힘을 낭비하게될 것이었다.

이 해결책으로나온 아이디어는 주익을 역 갈매기형상으로 구부려야한다는 것이었는데

(크랭크 윙) 이 것이 바로 코르세어의 트레이드 마크가된다.

 

 

주익에 상반각을 준결과로서 공기 역학적인 향상과(프로펠러 회전에의한

기체의 진동방지) 조종사의 측면 아랫쪽 시야가 더 확보되었다.

여기에다 주익의 공간에 랜딩기어를 90도 각도로접어 수납하는 방식을

채택하게되는데 이 방식은 미 해군기 중에서 최초로 시도된 것이었다.

당시 보우트 사는 스폿 웰딩이라는 새로운 기체접합 기술을 도입하여

항공기를 제작했기 때문에 기존의 전투기들같은 조금 통통한 모양이아닌,

큰덩치의 가장 강력한 공냉식엔진을 탑재하고도 아주 매끄러운 동체를 만들 수 있었다.

 

보우트 사는 터보 챠저의 중간 냉각기와 오일 냉각기를 프로펠러 바로 뒤인

주익 내측에 설치했으며 무장으로서는 30구경과 50구경을 혼합 장착한다.

엔진 카울 속에 장착된 30구경은 총 장탄 수가 750발이었으며

주익의 50구경 기관총은 300발이었다.

또한 해상에서 작전할 해군기여서 조종사의 안전을고려하여 양쪽 주익에

비상 공기 부양백을 설치했으나 나중에 폐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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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r-2800-4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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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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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 프레임 캐노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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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익의 50구경 기총옆의 폭탄창에는 5.2파운드의 작은대공폭탄이 적재되었다.

이는 전투 중 적의 폭격기를 파괴하기위한 것이었다한다.

동체하부에 목표물 확인 창이 설치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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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f4u-1의 테스트비행

 

 

보우트 사는 이후 1939년 2월에 목재로 제작된 모형기를 만들어 해군과함께

풍동 테스트에 들어간다. 그리하여 제작된 원형기 인 xf4u-1의 최초비행은

1940년 5월 29일, 보우트 사의 테스트 파일럿 벌라드 쥬니어에 의해서였는데

착륙 당시 심한 진동이 일어났다.

 

7월에는 비행도중 일어난 폭풍우로인해 비행장에 착륙하지 못하고

골프장에 비상착륙하다  비에젖은 풀에 미끄러져 나무를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 때 기체는 무전기가 가동되지 못했고 연료도 모자랐었다.

강인한 설계에의해 제작된덕분에 동체는 조그만 손상을 입었지만

날개는 심하게 파손되었고, 수 개월간 수리 후 원상복구 되었다.

그리고 1940년 10월 1일에 그 첫 번 째 정식 테스트비행에서 73km 구간을

시속 650km로 비행하자 해군은 무척 고무되었다. 이 기록은 당시 록히드에서

새로이 개발되어 가장 빠르다고 평가받은 p-38 라이트닝을 능가하는 속도였다.

이것은 나중에 육군이 개발하는 p-47에 영향을주게된다.

 

그러나 엔진의 문젯점들이 드러나 개량을 요구받았고, 

동체 중앙에 장착된 2정의 30구경(7.62밀리) 기관총을 폐지하고

콜트 브라우닝  50구경(12.7밀리) 기관총을 주익에 장착하도록 요구되었다. 

1941년 6월에 584대를 발주하게는 되지만 해군의 강력한 엔진, 강력한무장과

방탄능력의 요구는 결국 훗날 코르세어의 항모 실전배치가 늦어지게되는

단초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것은 육상발진기지의 해병대에의해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게된다. 미국은 유럽의 전쟁소식을 매일매일 뉴스로전해듣고있었다.

독일 루프트바페는 영국에비해 더 강한 기총과 포를 장비하여 좋은효과를 거두고있었다.

 

 

유럽전을 교훈으로 미국도 더 큰 구경의 기총을선택했으며 6정의 50구경기관총에서

초당 80발의 총탄이 통상 약300m전방 탄착점에 뿌려질 수 있도록했다.

총 장탄 수는 2350발로서 조종사가 발사스위치를 계속 누른다면 6정의 기총은

약30초동안에 모든 실탄을 다 비울 수 있게된다.

 

기관총이 모두 주익으로 이사를가게되자 주익의 연료적재 공간이 거의없어지게되었다.

이 대처방안으로 주익속에 설치된 총273갤런을 적재하는 4개의 연료탱크를 제거하고

 237갤런짜리 탱크를 동체 내에 설치하며 또 2개의 63갤런 보조연료탱크를

주익에장착하도록했다.  이때문에 동체의 앞부분을 약 45cm 길게 제작해야했으며

조종석 주변과 연료탱크에는 총탄과 새 떼와의 충돌시 안전을확보하기위해

합계 75kg의 방탄장갑이 추가된다. 동체가 늘어난 결과로 캐노피가 약 91cm 뒤로

밀려나게되어 조종사의 전방시계가 극히불량해지게된다.

전쟁의 먹구름이 미국을 불안하게 만들자 설계의 변경을가해오던 xf4u-1의

승인 테스트가 1941년 2월부터 시작되었고

6월 30일에 f4u-1으로서 584대의 생산발주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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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4u-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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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4u-1초기형은 주익의 파일런에 100파운드 소형폭탄 2발을 장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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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에서 생산 중인 f4u-1. 조종석에 사격조준경이 아직장착되지 않았고 백밀러가보인다.
오른쪽 그림은 주익의 100파운드 폭탄 파일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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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4u-1. 다중프레임의 버드케이지(새장)형 캐노피와 오일냉각 인테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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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익에 장착된 6정의 50구경 기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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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2800-8w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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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mf-222 해병전투비행대 소속 f4u-1

 

 

 

1942년 6월 24일에 코르세어로 명명된 f4u-1 첫 번 째 기체가 탄생하여 첫 비행에

나서게되었고, 해군에게는 7월 31일에 전달되었다.  주익에는 짧은 길이로 나누어진

넓은 보조익을 달았고 2000마력급의 r-2800-8 엔진을 탑재하여 무게가 대폭 증가되어

생산되었다. 뒤로 밀려난데다 많은 프레임을가진 새장형 캐노피로인해 전방 시계가

극히불량했고 이것은 이함과 착함공간이 극히 제한된 항모에서는 치명적인 결점이

아닐 수 없었다. 기체의 앞 부분 때문에 불량한 전방시계는 조종사들이 항모 착함 시에

정확한 착함지점을 가늠할 수 없게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갑판의 착함유도장교도

볼 수가없었다. 거기에다 시야를 방해하는 또 하나의 결점은 엔진카울플랩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바람에날려 캐노피에 뿌려지는 것이었다.

이 결점은 나중에 카울상부의 플랩을 제거하면서 문제가 해결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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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진은 불안하게 넘치는 회전력이 문제였다. 만약 조종사가 항모에 착함하기위해

접근하다 속도를 감속하면 급속한실속을 일으켜 기체가 한쪽으로 쏠려 버릴  

위험이 크고, 회전을 급속히증가시키면 보조익이 말썽을일으켰다.

착함을위해 148km이하로 속도를줄이면 엔진이 꺼져버렸다.

착함제동장치의 결함도 발견되는데 어레스팅 훜이 제동 케이블에 제대로 걸리지않아

항모 측면에 처박히기도했으며 제대로 걸렸다해도 다시 튀어나가려는 현상을

일키기도했다. 랜딩기어는 충격흡수력이 딸려 착함 시 기체가 위로 튕겨오르는

결함을 보였다. 이런결점들은 특히 신참조종사들을 아주 불안하게만들었다.

 

 

해군에 배치된 코르세어들이 말썽을일으키고 항모 운용상의의 결점들이 드러나자

보우트 사는 기체의 결함을 수정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결국해군은 함재기로서의 운용여부를 결정하기위해 1942년 9월 25일부터

항모 샌가먼에서 테스트를하게되는데 여기에는 보우트 사의 기술자들도 참가했다. 

해군 책임 시험비행사인 샘 포터 소령은 육상에서 7대의 코르세어를 발진시켜

항모로 날려보냈다. 코르세어들이 항모에 차례로 착함했는데 어느정도는 개선되었지만

위로 튀어오르는 현상과 더불어 제동 케이블에 어레스팅 훜이 제대로 걸리지못하는 

결함은 여전하였다. 샘 포터 소령은 코르세어가 함재기로서는 아직은 함량미달이라는

보고서를올리게된다.  이런 결함이 발견되는 가운데에서도 생산은 계속 진행되어왔으며

1942년 말에는 180대가량의 기체가 생산되었다. 이것은 미군기들이 열세속에서도

치열하게 일본기에 맞서고있는 상황에다 계속 개량되어지는 신형전투기인 코르세어의 

조종교육을 해군 조종사들이 받아야했기 때문에 꾸준히 생산납품되어왔기 때문이었다.  

해군은 전장에서 큰 활약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던 코르세어가 항모에서의 운용이

부적합한 것으로되자 1943년 1월부터 생산되어나온 f6f 헬 캣이

그 역할을 대신해주길 기대할 수 밖에없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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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오로지 일본의 제로기를 때려잡아주길 기대하며 제작에 들어갔던

헬 캣과 코르세어는 한 대의 제로기를 노획하면서부터는 빠른 속도뿐만아니라

강력한 무장과 방탄능력이 강조되었던것이다. 일본이 미드웨이 공격의 양동작전으로서

실행한 알라스카의 알류샨 열도 공격에 참가했다 모함으로 귀환길에 올랐던 제로기

한 대가 알류샨 열도의 더치하버 부근의 조그만 섬인 아쿠탄에 불시착한다.

일본군은 잠수함을 급파하여 기체와 조종사를 찾으려했으나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다 미군 기가 상공을 비행하다 우연히 이 제로기를 발견하게되었고 미군은

즉시 이 기체를 회수하여 미국으로 보낸다. 수리된 제로기는 여러 가지 테스트를

거치게되었는데 방탄능력이 거의없고 950마력 엔진을 탑재하고도 고속비행을해

미군을 놀라게만들었다. 제로 기의 약점과 장점을 실체적으로 파악하게된 미국은

2000마력급 엔진을 탑재해 더 빠르게, 더 높이 날아오르고 강력한 방탄으로

자기를 보호함과아울러 강력한 무장으로 단번에 제로 기를 잡아 낼 기체를 구상할 수

있게되었다. 그 주역이 바로 코르세어였는데 결함으로인해 항모에서 쫒겨나고 조

역급으로 제작되었던 헬 캣이 먼저 항모에 배치되어 태평양 상공에서

제로 기들을 상대해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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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부위에 알루미늄 테이프를붙인 f4u-1(no.02161)이 풍동실험에들어간다

(1942년 10월 19일)

 

 

그렇다고해서 코르세어를 마냥 활주로에 세워둘 수만은 없는노릇이었다.

해군은 코르세어를 해병대에 공급하여 육상 발진 전투기로 활용하게된다.

항모에서의 운용이 부적합했을뿐, 하늘에서는 뛰어난 전투능력을 갖춘 코르세어를

얻게된 해병대는 그야말로 대환영이었다.

 

코르세어를 제일먼저 수령하게된 부대는 해병대의 vmf-124전투비행대였다.  

vmf-124는vmf-122에서 살아남은 조종사와 새로운 조종사들로 구성되었으며

1942년 9월에 캘리포니아의 캠프 커니에서 새 기종인 코르세어 조종훈련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때까지 아직 코르세어가 공급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기종으로 훈련했다.

보우트 사는 해병대에게 코르세어의 운명을 걸었고 이 때문에 개량된 부품들을

해병비행대에 지속적으로 공급했다. 그리하여 12월에 vmf-124 해병비행대가 전투에

투입해도될정도의 기량이 갖추어졌다 판단되자  이 비행대를 1943년 초에 과달카날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24대의 vmf-124소속 코르세어가 호위항모 키티호크에실려

에스피리투 산토로 향했고, 1943년 2월 12일에 에스피리투 산토를 이륙하여

과달카날의 헨더슨 비행장에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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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대는 이틀 후 부겐빌에가해지는 pby 카타리나의 폭격 호위임무를 맡아

p-38 라이트닝,p-40등과함께 출격했으나 태양을등지고 기다리고있던 제로기에게

여러 대의 전투기가 격추되었는데 그 중에서 2대의 코르세어가 격추당했다.

초반 데뷔전에서 코피가터진 코르세어 조종사들은 기지에서 일본기를 제압할 전술을

연구했다. 이것은 첫 번 째로 코르세어를 장비한 비행대대로서 다음 비행대대를위한

전술을 개발해야한다는 사명감 때문이기도했을 것이다. 강력한 파괴력을가진 

50구경 기총은 방탄능력이 빈약한 제로기에게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무기였다.

물론 명중만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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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사들이 출격을위해 자신의 f4u-1코르세어를 향해 달려가고있다(1943년 과달카날)

 

 

와일드 캣으로 일본군과 힘겹게 전투를치뤘던 고참 조종사들은 기동성이 뛰어난

제로 기와는 절대로 정면 대결을 해서는안된다고 충고했다.

그들은 특히 시속480km이하의 속도에서는 기동성이 뛰어난 제로의 밥이될것이니

느린 속도에서의 공중전은 피하고 빠른 속도를 최대한 이용하여 제로의 꼬리를 

물 수 있어야한다고 말했다. 조종사들은 코르세어의 빠른속도, 높은 상승고도의 잇점과

강력한 기총을 최대한 활용하기로했다. 조종사들은 실험을통하여 코르세어가

높은고도에서 다이빙하듯 하강하면 약 800km에 달하는 엄청난 속도를 얻을 수 있음을

알게되었다. 일본기와 만나면 정면으로 뛰어들다 재빠르게 높은 고도로상승하여

일본기가 선회하여 반전을 시도하는 사이에 쏜살같이 고속으로 내려꽂히며 기총탄을

쏟아붓는다면 절대 피할 수 없으리라 믿었는데 실제 전투에서 그 효과가 확실히입증

되었다. 그 후 와일드캣을 대체하여 코르세어를 장비하고 계속 배치되어지는

해병전투비행대에의해 일본 기들은 11.3:1의 기체손실비율을 기록하며

고전을 면치못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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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양상은 시간이갈 수록 치열하여  보우트 사가 필요한 수 만큼의 항공기를

재빠르게 공급할 수 없게되자 미군은 코르세어를 면허생산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브류스터 사와 굿 이어 사가 면허생산업체로 선정되었다. 

면허생산은 기존의 코르세어를 개량하여 양산하게되는데 1943년 말까지

모두 2000대가량의 코르세어가 생산된다.

 

브류스터는 f3a-1으로서 1943년 12월까지 136대의 코르세어를 생산했으며

굿 이어는 fg-1으로서 377대의 코르세어를 생산하여 최전선에 공급했다.

중반 때 생산된 기체에는 시험적으로 r-2800-8w 엔진을 탑재하는데 물, 메탄올의 

인젝션으로 비상동력을 제공하는 이 엔진은 조종사에게 큰잇점을 제공하였다.

전투 중이던 조종사가 스로틀 레버를 재빠르게 밀어넣게되면 약 250마력의 힘을

추가적으로 제공해주는 이 엔진 시스템은 고속 전투기동에 매우유리했다.

그리고 랜딩기어의 바퀴가 공기타이어로 바뀌어 충격을 흡수하도록했으며

약 18cm높아진 조종석과 싱글 프레임으로 개선된 캐노피는 전방 시야를 개선시켰다.

폭탄탑재능력도 증가하고 연료 적재량이 많아진 보조연료탱크를 탑재한

f4u-1a가나오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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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mf-122 소속 fg-1a로서 굿 이어 사가 면허생산한 기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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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4u-1a. 동체하부에 1000파운드 폭탄을 장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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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4u-1의 새장형을 폐지하고 싱글 캐노피 플레임을 적용한 f4u-1a 캐노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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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량된 배기관과 1000파운드 폭탄을 장착할 수 있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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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4u-1a-1d형에 이르러서는 5인치 hvar로켓을 장착할 수 있으며

175갤런의 외부 보조연료탱크를 장착할 수 있다    

여기서 fg,f3a, 굿 이어니 뭐니해서 헛갈리게하는 부분들을 정리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브류스터 사는 버팔로를 제작했던 항공회사로서 나중에 기체공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해군이 계약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았다합니다.

브류스터가 생산한 기체는 f3a-1과 f3a-1a로서 735대이지만

굿 이어는 총 4017대를 생산합니다.

타이어제조회사인 굿 이어는 전쟁전에 비행선제조를위해 제플린 사와

굿 이어합작법인인 굿 이어 항공사를 설립합니다.

회사는 경금속 제작기술과 고부가가치의 화학기술들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 관련 사업과 밀접한 영업을합니다. 소형 비행선과  tbf 어벤저뇌격기를 비롯한

항공기생산에 군사적용도의 화학관련 제품들을공급하고 총포화약관련제품을 납품하다가 

나중엔 경금속 제조기술을 활용하여 여러 기종의 항공기 날개를 제작하여 납품합니다.

1941년에는 정부의 자금지원을받아 항공기관련제품생산 공장을 건설하여

1942년 2월부터 생산을 가동합니다. 그리고 면허생산방식이었지만 코르세어 완제품을

생산해내기에 이릅니다.  회사는 b-24, b-29, p-61등의 기체부품과 항공관련

육상기지장비도 제작하고 구명보트를 비롯하여 군용타이어생산과 아울러

가벼운 해군함정도 제작하게됩니다.

 

각 사별 제작형식과 (생산댓수)입니다.

보우트 : xf4u-1 (1)           f4u-1, 1a (2814)           f4u-1c  (200)

            f4u-1d  (1685)       f4u-4 모든형식  (2357)      f4u-5 모든형식  (568)

            au-1  (111)           f4u-7  (94)

 

굿 이어 : fg-1, 1a  (2010)       fg-1d  (1997)       f2g  (10)

 

브류스터 : f3a-1, 1a  (735)

 

 

 

코르세어를 해병대 최초로장비한 비행대인 vmf-124에서 해병대 최초의

의회 명예훈장을 수여받는 코르세어 에이스가 탄생하게되는데

그는 케네스 a 월시 중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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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월시 중위가 기체넘버 13인 자신의기체가 택싱중인 가운데 촬영했다.  

그는 총 21대의 일본기를 격추시켰고 그 중 17대가 제로기였다.

1943년 9월 1일 촬영사진.

 

 

유명한 해병 비행대로서는 vmf-214의 검은 양(black sheep)비행대였는데

중대장인 그레고리 '파피' 보잉턴 소령이 그 주인공이었다.

수우족 인디언 후예인 그는 레슬링을 즐겼으며 1930년 워싱턴대학에서  

rotc를 지원하고 그 후에 해병대의 징병에 자원하여 어릴적 꿈이었던

비행교육을받게된다. 그는 해군조종사 규정을어겨 결혼사실을 숨겼으며 술을즐겼고

빚도많이진 말썽꾸러기였으나 비행에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기량을 갖춘 인물이었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자 미국은 정식개입을하지 않고 중국을 돕기위해 의용비행대로서

민간비행정비회사로위장한 camco(central aircraft manufacturing company)를

설립한다. 여기에는 모험을 즐기는 많은인물들이 지원하였으나 우선순위는 유능한

군조종사였다. 이들은 임무를마치면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도록되어있었다.

봉급은 파격적인 수준이어서 조종사의 한달 봉급이 600달러이상이었고 일본군 항공기

격추 수에따라 보너스가 지급되었는데 이것은 평균적으로 현역에 종사하는 조종사 봉급의

3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파산직전의 보잉턴은 이에 자원하게되고 중국에서

플라잉 타이거즈의 에이스로(6대중 몇대의 격추기록을 인정받지못하는 불이익도당한다) 

활약하다가 그 지휘관인 센놀트와의 불화로 1942년 4월에 플라잉 타이거즈를 떠나게된다.

 

그리고 다시 해병대에 복귀한 보잉턴은 28대의 일본기를 격추하는데 이기록은

해병대 최고의 기록이었다. 1943년 보잉턴과 그 휘하의 조종사들은 미국 메이저리그의

구단에서 야구모자를 보내준다면 보내준 그 수 만큼의 일본기를 격추하겠다는

제안을한다. 이에 세인트 루이스 카디널즈 구단이 1943년 12월에 20개의 모자를보내왔고

검은양은 약속한 수 보다 더많은 48대를 격추한다. 보잉턴은 1944년 1월 3일,

라바울 전투에서 격추당하여 낙하산으로 탈출했다가 일본군 잠수함에 생포되어

1년반동안의 포로수용소생활을하게되며 전쟁이 끝난 뒤 풀려나

의회 명예훈장을 수여받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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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 라벨라에서 택싱중인 f4u-1a콕피트의 보잉턴. 194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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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mf-214 검은양소속 f4u-1a. 에스피리투 산토에서의 컬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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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4u-1a과함께 베트와 야구모를쓰고 기념촬영한 검은양 조종사들 1943년 1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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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잉턴이 일본기 격추 스티커를 야구모자와 교환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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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해군의 첫 번 째 코르세어 장비비행대는 vf-12비행대였다.

항모에서 와일드 캣으로 힘겨운전투를 경험했던 조셉 클립튼 소령은 샌디에이고에서

새로운 비행대편성임무를 맡았고, 1942 11월에 갓 생산되어진 15대의 코르세어를

공급받아 미군최초의 코르세어 전투 비행대가된다. 나중엔 더 많은 코르세어를

수령하여 총 27대의 코르세어를 보유하지만 비행훈련 중 많은 사고가일어나게되었고

그러는 가운데 수리부품을원활히 공급받지 못하다 1943년 7월, 빠르게 생산되어나온

f6f-3들로대체되어 결과적으로vf-12는헬캣장비 전투비행대가된다.

 

 

 

 

해군에서는 토미 블랙번 소령의 vf-17전투비행대가 에*급항모 벙커힐에서

코르세어를 운용하도록 계획했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싸웠던 블랙번은 적어도

8월까지는 태평양 전장에 나갈 수 있도록하라는상부의 명령에따라 1943년 1월에

버지니아 노포크에서 비행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는데 자신휘하 42명의 조종사대부분이

갓 졸업한 신참소위였다. 블랙번은 사기를 드 높이기위해 해적(졸리 로저스)기를

부대마크로 채택한다. 코르세어의 공급은 더디기만하였으나 비행대는 훈련을위해

육상에 항모 비행갑판을 모방한 콘크리트 비행갑판을 만들어 다른 기종으로

착함훈련에들어간다. 조금씩 공급되어지던 코르세어의 다루기힘든성질들을 파악하며

훈련해오다  항모 벙커힐에서 실제 테스트비행을하게된다.

 

 

항모는 다른 부서의 모든업무를멈추게하고 오직 함재기로 채택될지도모르는

코르세어에대한 테스트만을 실행했다. 코르세어의 어레스팅 훜은 도끼모양의

갈고리형태를가지고 있었으나 테스트 후에 수정되었다. 맨 처음 제동와이어에

걸리지 않은 기체가 다음번 와이어에 걸리기까지 어레스팅 훜이 목재로된 갑판부분에

고랑을파며 전진하는 것을 항모 수병이 발견하였던 것이다. 제동문제는 해결되었으나

여전히 착함은 어렵고 문제가 많았지만 코르세어의 힘에반한 블랙번은 코르세어가

항모에 채택되기를 희망했다. 보우트 사는 개량된 기체인 f4u-1a

12대를 8월 10일까지 보내겠다는 약속을한다.

 

마침내 항모 벙커힐에서 코르세어를 운용한다는 결정이 내려져 vf-17전투비행대는

보우트 사가 약속대로 보내온 기체들과함께 1943년 11월 정식 취임을 마치고

태평양으로 향하게된다. 그러다 결국 vf-17은 육상발진전투비행대로 그 성격이

바뀌어버려 항모에서 이탈되어 에스피리투 산토로 보내진다. 이것은 f4u-1a 코르세어가

항모에서 운용할 수 있다 판단했던 지휘부에서도 어쩔 수 없이 내린결정이었다.

 

코르세어운용의 단순한 문제가아니라 그 복잡한 병참체계가 문제가되었던 것이다.

항모에는 헬캣과 와일드캣이 운용되고있었으며 코르세어는 그 수가 적고

여러기종을함께 운용하자면 병참체계상 비효율적이었던 때문이었다.

결국 vf-17 비행대는 코르세어를 운용하고있는 해병대의 육상발진기지의 시설들에서

탄약, 부품보급과 수리등의 보수유지를 의지해야했다. 비행대는 vmf-215해병비행대와 

합심하여 일본군을 괴롭혔던 해군의 첫 번 째 코르세어 전투비행대로서 유명해지며

전쟁이 끝난후에도 졸리 로저스 비행대로서 그 명맥을 그대로이어가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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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f-17비행대의 항모 벙커힐 테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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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트를위해 항모 벙커힐에 착함하는 vf-17전투비행대 소속 f4u-1 제 12번기.

194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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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번(왼쪽인물)이 자신의기체인 닉네임 big hog와찍은 사진.
f4u-1a(no.17640) 기체에 4대의 일본기 킬마크가 표시되어있다. 1944년   121128470843560.jpg
    12부 기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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