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디엔비엔 푸 전투 6편)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05.20 21: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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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압 장군은 1949년부터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무기와 군사고문관 지원을 받았다.
그동안 제대로된 무기도 갖추지 못한 채 프랑스군과 싸웠던 베트민은 서서히

신형무기들로 무장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후, 지압장군은 중국군이 노획한

미국제 기관총과  소총, 소련제 로켓 발사기 등을 공여받아 5개 사단을 편성할 수

있었다. 또한 지압장군은 소련편제를 모방한  제351 중(重)포병사단을 창설하였다.
제351 중(重)포병사단은 소련제 포와 미제 105mm 곡사포를 장비한 2개 연대로

이루어졌다. 대부분이 농촌 출신 게릴라였던 베트민 포병으로서는 한번도 포에

관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포병 부대 운용은 대단히 어려웠다.
그러나 중국 포병 교관의 도움을 받으면서 서서히 포병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베트민은 1950년 10월, 대규모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프랑스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 주었다.이때 프랑스군은 6,000 여명이 사상하고 다량의 포와  총기와 더불어  

약 100톤의 탄약을 노획 당했다.
최초로 큰 승리를 맛본 지압장군은 홍강 델타 지역으로까지 공세의 폭을 넓혔다.

 

그러자 프랑스 정부는 장 드 라트레 장군을 베트남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지압장군을 제압하도록 명령하였다. 베트남에 도착한 라트레 장군은 모든 프랑스군

이 적극적인 공세로 전환하지 않는한 베트민을 제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트레 장군은 제2차대전 당시 유럽에서 자유프랑스군을 지휘한, 전투 경험이

풍부한 장교였다.그는 베트남전쟁이 유럽전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간파했다.
높은 산, 울창한 밀림과 논과 습지들 때문에 도로를 이용하지 않고는 부대의 이동이

불가능했다. 만약 그 도로에서 매복 공격을 받으면 몇 시간이고 발이 묶여있어야 했다.

프랑스군이 정상적인 도로가 아닌 지역에서는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숲속에 매복한 베트민은 호송트럭들을 종종 공격하였다.
호아 빈이 포위되었을 때 프랑스군은 꼬박 11일 동안에 단지 40km를 전진할 수 있었다.

장군은 즉시 기계화된 기동부대와 공수부대를 증강시켰다.
기동부대는 포대대와 공병, 전차를 장비한  그룹들로, 각 연대에 배속되어

합동전투부대로서 운용되었다.
이 기동부대는 "GM"으로 불리었으며 부대원들은 프랑스 장교와 하사관,

식민지 병사와 외인부대원 등 다양한 국적과 인종으로 구성되었다.
초기의 GM은 그다지 강력한 차량들을 보유하지는 못했으나 1950년 후반부터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한 미국의 원조에 힘입어 신형 차량을 보유하게 되었다.
연대에 배속된 그룹들은 10여대의 전차와 100대의 할프 트랙, 군수지원 및

탄약 운반용 트럭 등을 보유하였다.
라트레 장군은 105mm 포가 트럭으로 견인될 때 포구가 진행방향의 반대편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매복 공격 시 즉시 반격을 가 할 수 없는 것을 고려, 포를 분산 배치하여

호송하도록 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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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민의 매복 공격을 받아 파괴된 프랑스군 차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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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초기지의 포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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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 전방 전초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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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 포 지원 기지. 2문의 포가 설치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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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초기지

 

 

 


 

 

 

 

라트레 장군은 포병에 항공력을 추가하여 강력한 기동부대가 완성되기를 기대했다.
14개의 공수대대는 도로를 이용하지 않고도 먼 거리를 즉시 이동하여 베트민과

전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1951년까지 약 1만명으로 증강되었다. 공수부대도 여전히

소수의 프랑스군과 다수의 외인부대와 식민 원주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프랑스군은 수송기를 많이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병사들은 중무장을 할 수가

없었다. 소구경 개인 휴대화기와 지원화기인 기관총을 휴대하고 낙하했으며,

무반동총과 경 박격포는 문을 통하여 낙하시킨 다음 회수 하였다.,
때문에 디엔 비엔 푸에서도 75mm 무반동총이 많이 사용되었다.
공수부대는 일반 보병장교보다 좀 더 유능한 엘리트 장교들로 구성되었으며

타 부대에 비해 양질의 군수품이 보급되었다.


공수부대는 공군의 지원이 없이는 거의 무용지물이나 다름 없는 부대이다.
라트레 장군은 공군의 수색과 보급, 폭격지원을 중시하였으나 프랑스 공군이

폭격기로 사용할 수 있는 항공기는 독일 융커스 JU-52 수송기 뿐이었다.
처음엔 승무원이 폭탄을 문 밖으로 던져 투하시켰으나 나중에 동체하부에

폭탄을 장착할 수 있도록 개조하였다.

그러다 1950년, 지압장군의 대공세가 실시되기 직전에 다행히도 미국으로부터

벨 P-63 킹 코브라를 공여받을 수 있게 되었다.
킹 코브라는 베트남의 프랑스 공군이 최초로 장비한 현대식 미국 항공기이다.

P-63 킹 코브라는 대 지상 지원기로 사용되었으나  빈약한 화력과 예비부품의

부족 때문에  F-6F 헬캣과 F-8F 베어 캣으로 대체된다.

1950년 10월에는 24대의 B-26 인베이더 중 폭격기가 프랑스 공군에 도입되어

공군력이 대폭 증강되었다. B-26은 기수에 6정의 기관총을 장비하여 대 지상

근접지원과  1,000파운드의 폭장 능력을 가졌으며 보유 기종 중에서 가장 먼 거리를  

비행할 수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군과 해군이 보유한 모든 항공력은 라트레 장군의 직접

지휘 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육해공군 간의 지휘 혼란은 제거 되었다.
라트레 장군은 3개의 공군 총사령부(GATAC - Groupments Aerien Tactique

Command)를 조직하여 항공기를 배치시켰다.

 

이 3개의 GATAC는 각각 북부 베트남, 남부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책임졌으며
43개의 지상군과 근접한 지역에 본부를 설치하여  전투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통신장비가 부족하여 명령과 통제의 어려움이 발생하였고, 시간이 많이

걸리긴 하겠지만 조금씩 해결해 나갔다. 그러나 미공군 군사 고문관은 이렇게

뿔뿔이 흩어진 항공기 배치는 전력을 분산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대규모 화력을 집중시킬 만한 큰 부대나  보급기지가

지압 장군에게는 없다고 반박하였다.

 

프랑스  GATAC는 항공지원체계를 미국식 시스템을 도입하였지만 항공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체계를 자주 변형하였다.
예를 들어 미리 지정된 표적지를 향해 비행하던 전투폭격기들이 갑자기 전투가

벌어진 다른 지역으로 날아가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타격에 나섰던 조종사들은

표적지의 특성에 알맞지 않은 폭탄을 장착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각 지방의

항공 사령부는 폭격지역에 알맞은 항공기 선택권과 폭탄 적재량을 결정하는

유연성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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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공수부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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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지  착륙에 실패하여 랜딩기어가 부러진 모레인 500 연락 정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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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커스 JU-52 수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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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제 스피트파이어 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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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력 통제기로는 독일 피제르 스트로히의 프랑스판인 모레인 연락기가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유지 보수가 쉽고 야지 운용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으며

관측자가 탑승하여 무전기로 전폭기와 포병의 화력을 유도, 통제하였다.
모레인은 주로 공군과 육군 조종사들이 조종했는데, 모레인이 상공에 있는한  

매복공격 당하는 일이 좀처럼 발생하지 않았다.

 

보병들은 포병과 항공기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공중 관측자의

능력이 지상전투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레인 승무원들의 임무는

막중하였다. 순간의 오판이 아군의 화력을 아군 진영에  쏟아지게끔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 이었다. 지상의 지휘관들과 관측자들은  모레인 관측자에게 화력통제

권한 일체를  맡겨 버리는 일도 허다했다. 시계가 몹시 제한된 밀림 속의 그들보다

공중의 관측자가 전투상황을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레인 관측자의 또 다른 어려움은 대단히 가까운 거리를 사이에두고 적과

근접전투 중인 아군을 지원하는 기술이었다. 폭탄은 통상 아군으로부터 약 100m

떨어진 지점에 투하되어야 했으며 위급시에는 아군의 희생을 무릅쓰고 약 40m

전방에 포탄과 네이팜 탄이 떨어지도록 유도해야 했다.  이것은 관측자의 능력과

직감에 더하여 전폭기 조종사, 포병의 능력이 일체가 되었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1951년 1월 13일, 지압 장군은 2개의 기동부대가 주둔한 하노이 북쪽 도시 빈옌을

기습 공격하였다. 그동안 전력을 증강시키며 적의 공격을 손꼽아 기다려왔던

라트레 장군은 베트민 2개 사단의 빈옌 기습공격 보고를 받았다.

자신의 작품인 연합 기동부대를 사용할 기회만을 기다려 왔던 그로서는

대규모의 베트민 부대가 한지역에서 작전한다는 것에 고무되었다. 
라트레 장군은 대규모의 화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보았다.

 

1월 14일, 장군은 빈옌 북쪽 언덕을 방어하는 수비대에 공중 보급을 집중시켰다.

장군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 언덕으로 베트민을 유인하여 섬멸할 계획이었다.

돌진하는 베트민의 머리 위로 엄청난 포화가 쏟아졌다. 순식간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두 세명씩 발목에 끈을 연결하여 전진하였다. 한명이 다치거나 죽더라도

나머지 한명이 전진을 계속하여 수류탄을 던졌다.

모레인 정찰기 조종사들은 3일 동안 베트민 상공에서 포화를 유도했다.

밤이면 베트민이 더 격렬한 공격을 시도해서 C-47 수송기는 조명탄을 낙하산에

메달아 투하 했으며 또 다른 수송기들은 포탄을 투하했다. 라트레 장군은

프랑스군이 보유하고 있는 전폭기 전부를 빈옌 전투에 투입시켰다.

네이팜 탄이 든 깡통을 미군으로부터 제공받았다.

라트레 장군은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사용되었던 네이팜 탄이 전세에 유리하게

작용한 것을 인정했다. 파괴적이지  않으면서 엄청나게 크고 맹렬한 화염을 일으켜

베트민에게 큰 심리적 공포를 안겨 주었던 것이다. 다른 항공기들은 뒷 쪽으로

급습하여 소이탄을 투하하였다. 전투는 너무나 치열해서 어느 곳에서는 양쪽

병사의 시신 타는 냄새 때문에 숨을 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네이팜 탄과 소이탄이 화재를 일으키자 공포에 빠진 베트민들이 사방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도주하는 병사들의 머리 위에 포탄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베트민 지휘자들은 미친 듯 도주하는 병사들을 저지할 수 없었다. 자신도

난생 처음보는 네이팜 탄의 위력에 얼이 빠져있기는 마찬가지였다.

1월 17일이되자 베트민들은 빈옌을 포기하고 모두 숲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라트레 장군은 위기일발의 빈옌을 보병과 화력으로 구해내었다.
빈옌 전투는 프랑스군의 명백한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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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 감시 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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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 기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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