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 양요 - 미군 레밍턴 소총과 스펜서 카빈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05.22 20:5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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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세사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순간에
역할을 한 총기들을 기회있을 때마다 소개하겠다.

이미 자국 디자인의 소총들이 생산되고 있고 국군이 무장하고 있는

이 시기에 한번은 그 소총들의 역사를 한번쯤 정리해놓을 필요가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연구가 없었다.


역사의 순간에 중심역할을 한 무기를 소개하는 글들은

미국 무기잡지에서는  한 패턴으로 정착을 했다.

이제 이 블로그에서 부정기적이지만

역사의 현장에서 주인공 도구역할을 했던 무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신미양요의 레밍턴, 스펜서 소총을 시작으로 동학 혁명의
개틀링 기관총, 조선 말기 호랑이 사냥꾼들이 애용하던
윈체스터 71, 안중근 의사의 브라우닝 권총,

청산리 전투의 일본 38식 기병총과 러시아 모시 나강 소총,

김일성이 애용했던 모젤 C96 권총과 광복군의 모젤 소총,

그리고 한국 전쟁과 월남 전쟁을 거쳐 1,21사태 때의
PPSH43기관총 등과 궁정동의 왈서 권총까지, 좋은 역할을 했던
나쁜 역할을 했건 한국 중요 근세사적 사건에서 주역을 했던
총기들을 모두 소개 하기로 한다.

 

신미양요

      -미군 레밍턴 소총과 스펜서 카빈


19세기 말  서양의 세력이 문턱까지 몰려오는데 엄혹한 국제 정세에도

조선은 아직도 500년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를 않았었다.

어떠한 서구 국가와도 접촉하기를 거부했으며 천주교 같은
서구 문화의 유입에도 극형의 응징으로 일관하였다.


그래서 조선은 서구에 은자(隱者)의 왕국이라고 알려 졌었다.

그러나 조선이 동아시아 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고 대륙의 관문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서구 세력의 문 두드림은 계속되었다.



이런 정세에서 1866년 조선에 통상을 하겠다고 찾아온 미국 상선

제네랄 셔만 호는 확실히 조선을 잘못 읽은 판단의 소치였다.

그들은 대동강을 한강으로 잘못알고 들어와 평양이 서울인줄 알고

통상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더해서 배가 좌초 되고 평양 백성들과 시비가 생겼다.


백성들은 격분하여 배에 화공을 가하여 불태워 버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평양 감영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그 때  평양 감사는 실학의 거두 연암 박지원의 손자며 개화파였던

박규수이었는데 사태는 그의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국은 그 뒤 실종해버린  제네랄 셔먼 호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나서야 평양에서 제네랄 셔먼 호가 겪은 사건이

과장되어 중국의 지부 항에 있는 미 아시아 함대에 접수되었다.

선원들이 토막이 나고 젓으로 담겨져서 8도에 전시 회람되었다는
오보였다.


프랑스 신부들 처형도 배로 도망친 프랑스 신부들 눈앞에서
한 프랑스 의사가 십자가에 매달려 껍질이 벗겨졌다는 과장된
괴 소문으로 변질되어 나돌았다.
대원군이 천주교도 학살은 했지만 이렇게 엽기적인 살해는
하지 않았었다.

프랑스인으로 의사 직업을 가진 사람은 조선에 오지도 않았었다.


미국 아시아 함대는 함장 존 로저스 소장이 함대 사령관이었다.

이 함대는 그러나 그 무렵 중국공사 로우를 태우고
일본 나가사키에  가있었다.

기함 콜로라도 이하 군함 아홉 척, 함포 97 문으로 구성된
비교적 작은 함대였다.

함장 로저스는 정부의 훈령을 받고 조선에 책임 추궁과 보상을
요구하기 위해서 출동한다.


조선이 그런 요구에 응할 리가 없었다.

결과로 보면 무력 응징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단수는 이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미국은 이번 사건을 조선 과의 수교와 통상의 기회로 삼기로 했다.

동해에 출어하는 많은 미국 포경선들을 위해서 보급기지로서

조선은 극히 필요한 수교 대상이었다.


일본에 방문하던 로우 공사가 나가사키에서 기함 콜로라도에
승선하여 강화도까지 왔었다.

그는 이미 1870년 본국 정부로부터 조선과 수교하도록 노력하라는
훈령을 받아 놓은 터였다.


A. 미군의 광성보 공격


아시아 함대는1871년 5월 23일 입하도(Eugenie 섬)에 잠시

기항했다가 5월30일 작약도로 이동했다

이 작약도는 병인양요 때도 프랑스 함대가 정박했던 곳으로서

 Boisee 섬이라는 프랑스식 이름으로 불리웠다.

여기서부터 강화 침공이 기획되고 지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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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공 함대 기함 - 콜로라도


함대가 작약도에 도착하고 얼마 안 되어 지방 관리 세 명이 나타나서

함대의 퇴거를 요청했다. 부천 원이 보낸 이방이나 호방 같은
아전들 같다.

로우는 낮은 지위의 그들과 대화하기를 거부하고 책임과 권한이 있는 고위 관리만을 상대하겠다고 통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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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함 콜로라도를 방문한 조선 관리들.

그리고 함대는 고위 관리가 올 때까지 연안 수심 측량과
연안 관측을 하겠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었다.

국제 정세에 무지했던 조선 관리는 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선에 시비를 걸기 위한 미국의 교묘한 외교전이 첫 발을 내디는
순간이었다.


미국은 이 하급 관리의 반응을 나중에 침공의 한 구실로 삼았다.

다음날 1871년 조선의 도발을 유도하기 위한 작은 함대가 그 당시
염하(鹽河)라 불리던 강화 해협을 향하여 출발했다.

 

시비 목적의 함선들은 아시아 함대에서 제일 작은 포함인 모노케시와

파로스 두 척과 지금 구명정 격으로 아시아 함대 대형 함들이  

장비한 작은 증기선 네 척이 동반했다.

작은 증기 구명정들은 해협이 극히 얕아서 두 큰 함들이 좌초되었을 때

구난하기 위한 목적으로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미니 함대는 해협으로 들어서서 광성보 앞 해상까지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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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 부근


이 때 광성보의 포성 한발이 울리고 이어서 수없는 포성이 뒤따랐다.

경고 없는 포격이었다.

광성보에서 발사된 포탄들은 전부 미국 함들의 상공으로
날아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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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함 모노케시


미 함선들에게 한발도 맞지 않았다.

단지 해협으로 쭉 뻗어 나온 용두 돈대에서 발사한 징겔포의 탄환에

두어 명의 수병이 경미한 부상을 입었을 뿐이다.


징겔 포는 화승총을 크게 확대한 2미터가 넘는 대형 총이다.

삼각대나 와이 자 모양의 고정  총가(銃架)가 붙어있고 두 사람이
사격한다.

미 함에 발사한 징겔 포는 조선병들이 부젓가락으로 점화하는 것이

미 수병들에게 관측 되기도 했다..

수병들이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은 조선군이 징겔 포로 실탄
아닌 산탄을 발사한 것으로 추측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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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겔포 - 중국과 인도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나중에 광성보를 점령한 미군들이 포들을 조사해보니 통나무에

거치해 놓은 것들로서 조준이 불가능했다.


수비대 포수들은 해협을 통과하는 함선이 시야에 보이는 어느
특정 지점을 통과할 때 발사하라는 훈련을 받았었다.


지금 광성보에 전시해놓은 포는 이순신 제독이 쓰던 화포보다는

한 발 앞선 서양식 불랑기라는 것이었다.
바퀴도 달아 근사하게 만들어 놓았지만 미군들이 본 대포들과는
달랐다

이 포는 명나라 군대에 의해서 발사되어 청태조 누루하치에게
중상을 입힌 실전 경험도 있었던 포였는데 왜 이리 조준 장치기
부실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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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 대포

임진왜란 때 비격진천뢰라든가 화차 같은 명무기를 만든

조선군이 300년 동안 이룩한 군사부문의 과학화에 미미함에
유감스러운 생각이 들뿐이다.


더구나 포탄은 폭발 능력이 없는 그저 커다란 쇳 덩어리이어서
튼튼한 미 군함이 맞아도 별다른 손상을 주지 못할듯하다.


미 함대는 광성보로 오기 전 프랑스 해군으로부터 이지역의 모든
정보를 세세하게 수집해가지고 왔던 것으로 추측된다.

프랑스는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를 침공하고 정족산성에서

양 헌수에게 패전 하여 퇴거 할 때까지 두 달간이나 강화도에 머물러

있었으니 조선군 사정에 대해서는 조사할 만큼 조사 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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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작전 지도- 대단히 정밀하다

광성보 일대를 자세히 수록한 지도는 프랑스 해군에게서 얻은 것이다.


프랑스 해군이 만든 강화 해협 입구의 자세한 정보는 물론 미 함대는
조선군의 위력 없는 포화에 대해서도 정보를 충분히 입수했던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군함이 유유히 중무장한 해안포 요새 앞으로 지나 갈 수는 없는것이다.


조선군이 발포하자 두 척의 미국 군함은 즉각 응사했다.

한바탕 함포 사격에 당한 광성보는 침묵하고 말았다.

두 함선은 광성보를 지나서 더 항진 하다가 선도함 모노케시가
암초를 부딪쳐서 함저에 구멍이 나는 바람에 함수를 돌려서
작약도로 돌아왔다.

두 함들과 종선들이 돌아오는 길에 다시 광성보 앞을 지나왔지만

더 이상의 포격은 없었다.


함대 사령관 로저스 소장은 두 척의 미 함이 광성보 포대로부터
포격 당했다는 보고에 자기들의 계략의 첫 단계가 성공했음에
회심의 미소를 띄었다.


이제 공격할 구실은 만들어 진 것이다.

그러나 사리를 조금 지난 시기라서 조류가 너무 빨랐다.

지금의 디젤 엔진에 비해서 마력이 낮은 증기 기관이 붙은 기범선 시대

군함으로서 이 조류 때문에 상륙 작전 지원을 위한 운행에  큰 장애를

받을 수 있었다.


함대는 다음 조금 때 까지 십 여일을 기다리기로 했다.

미 해군이 한국 서해안의 조석표까지 입수한 것을 보면 정보 제공자인 프랑스 해군의 정보 수집량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함대에 동행한 노련한 로우 공사는 이 공백기마저 외교적으로
활용했다.


“작약도에서 조선 하급 관리에게 연안조사와 수심
측량 계획도 이미 밝혔고 귀측에서 아무런 반대도 없었는데
예고 없는 포격을 받았다.

중대한 도발행위이다.

이에 열흘간 기간을 줄 터이니 정중히 사과하고 보상하라.“


꿩 먹고 알 먹는 포석이었다.

이래서 포격 다음날 실행에 옮겨지려던 상륙 작전이 열흘 아상
늦추어졌다.


이 사이 조선 정부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먼저 강화도 방어사령부 사령관격의 직책에 순무중군에 어 재연이
발탁되었다.

1823년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1841년 헌종 때 무과에 급제 한 뒤

여러 직의 벼슬살이를 했다.

그는 회령부사와 병마사를 역임했었고 병인양요 때도 참전했었다.


신미양요 때는 진천 집에 돌아와 쉬고 있다가 대원군의 부름을 받고

한양에 달려와 평안도에서 급히 소집되어 온 포수 군들과 기타 증원군

300명과 화약과 포탄 등의 지원 품을 가지고 광성보로 달려갔다.


이 과정에서 특기할 사항이 있다.

어 재연의 동생 어 재순이 별도로 강화도의 형에게 온 것이다.

그는 형보다 다섯살 아래였다.

어 재연은 달려온 동생을 나무랐다.

"나는 궁향(窮鄕)의 일개 포의(布衣)에 불과한 몸이다.

너는 왕사(王事)로 죽는 나와는 다르다. 어찌 빨리 돌아가지 못하겠느냐?" 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형 곁에 남아서 최후를 같이 하였다.


어 재연이 요새의 방비를 굳히고 있는 동안 서해의 물때는 미군 함대의
작전을  위해서 조금씩 다가왔다.


사과의 최후 시한이 다 된 6월9일 상륙 전야 상륙 부대장 H.C.BLAKE는

함대 사령관 로저스로부터 정식으로 작전 명령서를 받았다.

"포격을 했던 광성보를 점령, 파괴하고 적에게 우리가 응징할 힘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줄 때까지 점령하고 있으라."


공격 부대는 총 759명의 해병과 수병으로 혼성된 부대이나 상륙

할 부대는 총 651명이 될 것이었다.

각 병사는 실탄 100발과 이틀분의 식량을 지급받았다.

해병들은 포를 한 문 양육하여 가지고 왔었다. 


배를 움직이는 수병이 무슨 육상 전투냐고 하겠지만 그 무렵의 수병은

곧장 육상 전투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보병 전투 훈련을 받았었다.

실제로 함대가 황해를 건너오는 동안 수병들은 해병들과 함께 함상에서

보병 전투 훈련과 사격 훈련을 열심히 받았던 것이 기록에 나와 있다.


상륙은 해협의 맨 외곽에 위치했고 측면이나 후방에서 적의 공격
가능성이 없는 초지진이 선택되었다.

상륙대는 뻘과 물길을 건너 초지진 인근 육지로 샹륙했다.


초지진의 조선군은 전부 광성보로 집중하고 비워두었던 탓에 저항 없이

비워 두어서 손쉽게 점령했다. 지원함 모노케시의 포격으로 초지진은 이미 초토화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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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진 작전 때나 아니면 철수 때 강화도 쪽에서 촬영한 것같다.

그들은 초지진을 점령하고 자기들 입맛대로 해병 요새라고 개명했다.

그리고 초지진을 전부 파괴했다.

그러나 너무 늦은 오후가 되었기에 그 날은 근처 경계가
양호한 곳에서 야영을 했다.


11일 일요일 아침 5 킬로미터 북쪽에 떨어진 광성보를 향한
전진이 시작되었다.

해병들이 척후를 맡아서 앞장을 섰다.

광성보와 초지진 중간에 있는 덕진진도 점령했다.


이곳도 어재연의 광성보 집결 지시로 비어 있었다.
미 공격 부대는 이를 역시 자기들 멋대로 모노케시 요새라고 명명했다.

열흘 전에 광성보에서 공격받았을 때 발휘한 포함 모노케시의

포격 정확성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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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덕진진 점령

그들은 덕진진 역시 모두 파괴하였다.

이 작은 포대에서만 발견된 포가 5,60문이 넘었으니 휠씬 더 큰 

광성보는 포만해도 수백 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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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돌목 돈대  -현대에 새로 단장한 것이다. 미군은 반대편에서
공격해왔다.

공격대의 척후 부대는 아무 저항도 안 받고 전진해서 드디어 바다를

바라보는 광성보 손돌목 돈대의 바로 뒤 내륙 쪽 작은 산을 점령했다.

해병대가 상륙할 때 가져온 포까지도 높은 산으로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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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돌목 돈대에서 본 뒷산


건너 산에 나타난 미군을 본 돈대의 조선 병의 사격은 치열하였다.


그들은 장전과 사격이 힘든 화승총을 놀랄만큼 연속으로 쏴댔다.

조선 병이 쏘는 총기는 태반이 사정 거리가 긴 징겔 포였다.


미군의 척후 부대 뒤 따라 오는 미군 본대가 합류할 때까지 기다렸다.

본대가 산의 능선에 전개하자 미군들은 건너 150미터 있는 돈대의

조선 병사들에게 일제 사격을 했다.


용두 돈대 조선 병사들에게 전멸을 가져온 이유가 있었다.

돈대를 둘러싼 방벽이 너무 두꺼워서 조선 병들은 벽에 엄폐해서
사격을 하지 못하고 상체를 노출해야 사격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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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돌목 돈대 내부 -200평크기이다.

이들이 상체를 노출할 때마다 미군의 정확한 사격은 그들을
나뭇단처럼 쓰러뜨렸다. 

포도 가세를 해서 돈대 안에 너 덧 발의 포탄을 쏘아 넣었다.


사격 도중 돈대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조선 병사가 전부가 우는 소리였다.

아이고 아이고 하는 통곡 소리였던 것이다.

처음 듣는 동양식 통곡에 미군은 어리둥절했다.


방벽위에 더이상 조선병이 안 나타나자 대장 Casey 중령은 돈대를
향한 돌격 명령을 내렸다.


미 해병대와 수병들이 앞장서서 돌격하자 돈대에서 사격이
또 시작되었다.‘

이 돌격에서 한명의 수병과 한명의 해병이 조선군이 쏜 탄에
맞아 전사했다.


조선군은 화승총을 빨리 장전하지 못하자 몸을 다 들어내고
아래에서 올라오는 미군들에게 바윗돌을 집어 던졌다.

이렇게 상반신을 들어낸 조선군은 조준하고 있던
다른 사격 지원 팀의 미군들에게 사살 되었다.


돈대 안으로 제일 먼저 뛰어든 사람은 미 해군 장교 맥기 대위였다.

그의 계급은 루테난트로서  한국 역사에는 중위로 잘못 소개 되어있다.

육군이나 해병대에서는 이 계급이 중위지만 해군에서는 대위다


그러나 그는 돈대에 돌입하던 순간 총에 맞고 쓰러지다가
조선 병에게 내지른 창에 허벅다리까지 찔리고 쓰러졌다.

그는 미 해군 사관 학교 시절 얼짱으로 유명했는데 죽음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았다.


그에게 창을 내지른 조선병사는 같이 뛰어든 미군 Schley 소령의 권총에 맞아 죽었고 멕기는 출혈을 계속하다가 여섯 시간 뒤에 사망하였다.


돈대 안에서의 전투는 15-20분 동안 더 계속되다가 끝이 났다.

돈대 아래에서 해안 쪽 용두 돈대를 경계를 했던 부대와 돈대 점령의

부대는 즉시 해안 쪾으로 돌진했다.

용두 돈대에 있던 조선 군사들은 전원 바다로 뛰어들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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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용두돈대


대장 어 재연은 수하 병사들과 함께 아수라처럼 싸웠다.

칼을 휘두르다가 칼이 부러지자 포탄인 쇳덩어리를 던지며 저항했다.

한국 측의 기록에 그가 미군의 창에 찔려서 전사했다고 했는데

창이 아니라 미군의 총검에 당한 것이었다.

어재연을 찌른 미군은 James Dougherty라는 해병이었다.


다른 해병 두 명이 어재연의 지휘소에 걸려있던 대형 사령관 기를
탈취했다.

이 수(帥)자기는 미 해군사관학교에 보관되어 오다가 작년에 한국에
임대라는 방식으로 돌아와 국립 고궁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대부분 전사했지만 포로도 20명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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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재연 수(帥)자기

전투 후 더 북쪽으로 척후병을 내보내서 조선군이 방어선을 구축한 것을 본 미군은 엄중한 경계를 하며 하루 동안 더 광성보에 머무르다가

사령관 로저스의 명령으로 잡은 몇 명의 조선군 포로와 노획품을 싣고

광성보 앞에서 포함 모노케이를 타고 함대로 철수했다.


미군 전사자인 맥기 대위와 다른 병사의 유해는 작약도에 매장하였다.  

구미의 군대들은 아편전쟁에서의 중국군과 그 뒤 중국 해안선에
창궐하던 해적들과 교전한 경험을 바탕으로 아시아 군대를
허약하게 보고  있었다..

그러나 광성보의 손돌목 돈대에서 최후까지 격전을 벌리고 전사한
어 재연과 병사들은 미군들을 경탄하게 만들었다.

지휘관  해군 중령 케이시는 조선군이 비할 바없이 용맹하게
싸웠다는 보고서를 남겼고 해병 대위 멕레인 틸턴은 조선병사들이
호랑이와 같이 싸웠다고 썼다.


어 재연과 어 재순 두 형제의 시신은 고향으로 운구하여 그 곳에서

매장되었다.

돈대에서 전사한 51명의 전사체들은 연고자들이 없거나 너무 먼 곳에서

온 포수들의 사체들은 돈대 아래에 7개의 무덤으로 나누어 매장했다.


이들은 대부분 가족이 시신을 수습하러 오기 힘든 먼 평안도에서
급파된 산포 대원일 가능성이 높다.

이 무명용사들의 묘가 지금 손돌목 돈대 바로 아래에서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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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 전사자 합장 묘지


적은 물러갔었고 시간에 쫓기지도 않았는데 개별로 매장하지도 않고

이렇게 모아서 합장한 것을 보니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두 최선을 다한 영웅들인데 전사자 대우가 너무 무성의 했다는

생각이 든다.


미군들은 잡은 포로를 미끼로 삼아 조선과 대화하려 했으나

조선은 “우리는 전쟁에서 살아남아 포로가 된 불충한 자들은
받지 않는다 그러니 너희들이 알아서 처리하라"로 하며 냉담하게
대답하고 대화를 계속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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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병사 포로들- 민간인과 중상자가 보인다. 


함대는 작약도에서 20일 이상 기다리며 계속 조선 정부와 대화를

시도했지만 조선 정부에서 아무 반응이 없자 할 수없이 포로들을
내려주고 중국으로 철수해버렸다.


후에 작전에 참여했던 맥레인 틸턴 대위은 이 작전이 완전 실패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미국 국무성내에서도 로저스의 전투 행위를 지각없는 짓이라고

비난했다. 

꼭 수교를 해야 할 국가의 포대를 파괴하고 사람을 죽였으니

수교의 가능성은 물 건너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말은 이들이 이 원정을 통해서 얼마나 한국과 수교를 하고
싶어 했는지를 말해준다.


미국 측 기록에 의하면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 243명을 사살했고

징겔 포를  포함한 481문의 포를 파기했다고 했다.


이 원정은 미국이 미 건국 이래 최초의 해외 원정이었다.

2차 세계 대전 뒤 세계의 경찰이 되어 한국전, 월남전, 이라크 전,

아프간 전등의 분쟁에 개입하고 있는 미국의 세계 정책이 조선의
한 작은 요새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B. 신미양요의 미군 총기


나는 우리나라 근세 역사의 현장에서 어떤 무기가 어떤 역할을
했는가하는 주제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 왔었다.


글의 시작을 병인 양요로 잡았으나 너무 자료가 없었다.

다시 몇 년 뒤로 내려와서 신미양요를 살펴보았다.


광성보에서 조선 병사들이 썼던 화승총과 징겔포는
다른 글로  집중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여기서는 조선병사들을 힘들게 싸우게 만들었던 미군들의
최신 소총들만 다루어 보기로 한다.

나는 잘 모르던 시절 신미양요 때 미국 해병대가 육군과 같이

스프링필드와 같은 단발식 소총을 썼던 것으로 추측했었다.


 강화도의 광성보를 공격했던 미군에 한 사진사가 동행해서
많은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자료가 풍부하게 남아있었다.


그 자료들 중에서 초지진 점령 후 찍은 사진이 있었다.

해병과 수병이 어울려있는 기념 촬영식 사진이었다.

이 사진에 광성보에서 죽은 맥기 대위가 프랑스 외인 부대원들이
쓰는 하얀 케피 모자를 쓰고 나와 있었다.


이 사진에 미군 해병과 수병들이 사용하던 무기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 사진을 여기 블로그에 올리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럽다.

미군들이 사용한 총이 레밍턴 단발 소총과 스펜서 카빈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무기들을 소개한다.

미국 레밍턴 사가 개발해서 특허를 받은  견고하고 독특한 rolling block이라는 특이한 구조의 단발총이다. 한발씩 장전하고 쏘는 구조이다.

그 무렵의 군용 소총으로서는 최고의 위력과 정확성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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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밍턴 소총

구경이 50-70이다.
앞의 50이라는 숫자는 총의 구경이 1000분지 500인치라는 말이고
(그러니까 구경이 1.27센티라는 말이고) 뒤의 90이라는

숫자는 흑색(유연)화약의 장약이 90 그레인이라는 뜻이다.

그레인은 무게의 단위다.

탄속은 초당 1500-2000피트로 추측된다.


현대의 M-16 5.56미리 탄이 2900-3400피트니까 짐작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탄의 무게는 300 그레인 전후 5.56밀리 탄이 55-70그레인보다

너 덧 배 더 무겁다.

탄은 동피(銅皮)를 입히지 않은 그냥 납덩어리가 노출 된 것이다.


레밍턴 소총의 총신 길이가 32.5인치나 된다.

현대의 카빈 소총이 18인치 M-16 소총이 20인치이니 비교가

되리라고 본다.


여기에 장검만큼 긴 대검을 꽂거나 러시아의 나강 소총처럼

긴 꼬챙이인 총창을 꽂을 수가 있다.


조선 기록에 의하면 어재연 장군이 창에 찔려 전사했다고 하는데

이 총창이 역할을 했으리라고 본다.

이 총은 디자인이 호응을 받아서 더 신식인 모젤 소총이 나와서
군용 총 시장을 싹쓸이 할 때까지 스페인 노르웨이 프랑스등
유럽 각국에 판매되었었다.


이 롤링 브록이라고 불리던 총은 당시 민간 수렵용총으로 많이
제조되어 미국 서부에서 들소 사냥꾼에게 많이 애용되었다

들소 사냥꾼들은 이 총에 군용탄보다 큰 50-90 또는 50-110 또는
45-120등 더 위력이 큰 맹수용 탄을 발사했었다.


첨언하자면 서부 들소 사냥꾼에게 인기 있었던 총으로
샤프 라이플과 이 레밍턴 라이플이 있었다.


레밍턴 군용총은 레밍턴 이름은 붙었지만 사실은 미 국영(國營)
스프링필드 조병창에서 만든 것이다.

이 조병창은 이제 문을 닫았고 현대의 미 군용소총은 모두
민간회사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


광성보에서 미군이 쓰던 레밍턴 소총은 위력도 좋고 명중률도 좋다.

흑색화약의 실탄이 탄속이 느리고 탄도도 무지개같이 낙차가 크다고
해서 현대의 총탄보다 명중률이 뒤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옛날 흑색화약을 사용한 들소 사냥이 광활한 평야에서 300-500야드의

장거리 사격을 했음을 상기해보자.


나는 몇 년 전 이 흑색 화약총을 명중률 테스트를 한 결과를 미국 최대

총 전문 잡지 GUN&AMMO에서 읽은 일이 있었다.

미국에는 지금도 이 흑색화약으로 사격을 즐기는 메니아도 많고
지금도 생산되는 흑색 화약용 총기도 많다.

마이크 벤트리노라는 전문가가 테스트한 흑색 화약의 탄약은 나중에

미 육군이 1973년도에 채택한 스프링필드 소총의 45-70구경이었다.


결과는 예상외였다.      

그냥 연속해서 쏘면 총강에 접착제같이 찐득찐득한
나쁜 찌꺼기가 남는다.

이 찌꺼기를 제거하지 않고 연속 사격을 하면 명중률은 저하되었었다.

그러나 사격 시 매번 총강 청소를 깨끗이 하고 사격을 한바
그 명줄율은 놀라웠다.


명줄율을 따지기는 쉽지 않다

총마다 다르고 탄약마다 다르고 사수마다 다르다


명중율은 세발 또는 다섯 발을 쏘아보고 그 탄착군의 크기,또는
최대 직경으로 그것의 명중율을 가름한다.


M-16이 대강 100미터에서 다섯 발을 사격하면 3인치 원안에

다 들어 간다

그리고 AK-47는 명줄율이 조금 낮아서 5인치 정도의 탄착군을 가진다.


총강 청소를 해가며 쏜 흑색 화약을 쓴 실탄은 100미터
거리에 3-4인치였다.

이것은 실전에서는 M-16이나 K-2 소총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정확성임을 말해준다.


미군이 가진 레밍턴 소총의 명중률이니 광성보 운명의 날 결판은 이미

150여 미터 떨어진 뒷산에 아무 저항 없이 붙을 수 있었던 미군들이

모든 준비를 끝내고 수백정의 라이프로로 광성보 담 뒤로 머리를
내밀고 있던 조선병을 일제히 사격했을 때 결정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광성보의 불쌍한 조선 병사들은 미군의 소총들이 이렇게 사거리가
길고 명중률이 좋은 줄은 미처 몰랐던 모양이다


이 4-5분 계속된 사격에서 40여명의 조선군이 쓰러졌다.

총탄을 무릅쓰고 사격을 하려고 하던 병사들이 있었으나 연달아
죽어 갔다고 보아야 한다.

이 4-5분의 집중 사격에서 어 재연의 동생 어 재순도 목숨을
잃은듯하다.


나중에 조선 병사들의 사체 검사에서 대부분의 전상자가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죽어 있다고 했다.

그 만큼 현대 총기를 모르고 머리를 내밀고 있다가 죽임을 당한 

조선 병사가 많다고 한다.


특기할 것을 이들 총격에 죽은 전사자 외에 포탄에 맞아서 까맣게

타 죽은 병사도 있다고 되어있으니 절망에 쌓인 돈대에 포탄까지도

정확히 떨어져 폭발 한 것이 있는 모양이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비장하게 싸운 어재연과 병사들의 결의의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광성보 전투에서 미군이 쓴 한 가지 소총이 더 있다.

스펜서 카빈이라는 연발총이다.

카빈이란 기병총이란 말로 짧은 총신의 총을 말한다.

스펜서 카빈은 다른 소총인 레밍턴 소총보다 몇 년 먼저
세상에 선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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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펜서 7 연발총 소총

1860년 크리스토퍼 스펜서에 의해서 특허가 주어진 연발총이다.

구경은 52구경 그리고 장약은 45그레인으로 탄약이 레밍턴 소총의

50-70보다 훨씬 작고 위력도 작다 


그러나 당시 아주 새로운 개념인 연발총이었다.

탄창은 파이프 형으로 개머리 판 안에 들어있다.

이 탄창에 일곱 발의 실탄이 일열로 장전되어 있다.


방아쇠울을 위 아래로 작동하면 실탄이 장전된다.

숙련된 사수는 15초안에 7발을 발사할 수가 있다.


스펜서 카빈은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미 북부군에 도입되었다.

여기에는 일화가 있다.

북군들의 일선사병들은 이 총을 아주 좋아했지만 장군들은
탄약 소비가 많은 이 총을 좋아하지 많았다.

많은 탄약을 공급하기 위한 보급 문제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일선의 요구와 장군들의 부정적인 갈등이 계속되자 링컨 대통령이

직접 간여했다.


그는 백악관에서 직접 시사해보고 도입을 명령하였다.

그가 40야드 거리에서 서서 쏴 자세로 일곱 발을 시사했던 검은 점을

그린 나무 표적은 지금도 미국 어느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스펜서 카빈은 주로 기병대에 주어졌고 이 기병대는 남부군과의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앞서 말한 초지진 점령 뒤 찍은 미군들 사진에서 보이는
스펜서 소총은 불과 서너 정의 극소수였다.

짐작컨대 부 사관들이나 일부 특수 임무자 같은 직책의
병사들에게만 주어진 같았다.


그리고 이 소총이 손돌목 돈대 돌격의 마지막 순간 선두 부대에
또는 화력지원 부대에 배치되었거나 또는 지급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돌격의 순간 화력 집중을 위한 연속 사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3.광성보 전투 분석


광성보 전투는 미군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래서 장렬한 죽음을 한 어재연 장군이지만 그 분의 지휘와 작전에

대해서 그 당시와 뒤에 뒷 말이 조금 있었던 듯하다.


제일 큰 이슈는 왜 병인양요 때 양 헌수 장군처럼 적을 유인해서 기습하는 유연한 기동 전술을 쓰지 않고 진지전을 고수해서 피해를 보았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더 세부로 들어가서 어떻게 대비를 했길래 손돌목 돈대 뒷산까지 미군이 들어와서 무혈점령하게 놔두었냐는 것이다.


나도 국난의 위기에 뽑은 인재였을 어 재연이 왜 이런 이상한
작전 지도에 의문을 가졌었다.


그러나 여러 자료를 놓고 분석한 결과 위의 지적이나 비난으로
어 재연의 희생이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1. 어재연의 각오.


조정으로부터 대명을 받았을 때 그의 심리를 읽으면 그는 미 함대가
강화도를 직접 공격한 프랑스 함대와 달리 광성보 앞바다를 지나
한양으로 직행하려고 하는 의도가 있다고 믿은 것 같다.
괴물같은 적선들이 한강으로 들어가 임금님 계신 궁궐에 포격을
가하면 그건 500년 왕조의 위기를 말했다.


강화 해협이 좁아지는 이 광성보는 강화도 포대 중에 제일 컸다.

이곳을 통과하면 미 함대를 차단할 대형 포대는 없었다.

사실 미국은 그런 의도가 없었고 능력도 없었다.


만약 함대를 통과 시키면 그는 나중에 엄중한
처벌을 받을 것이 확실했다.

그러면 무관으로서 평생을 살아온 그의 명예는 날아가고
그는 가문의 수치가 될 것이었다


더구나 퇴관한 자신을 불러준 대원군의 배려도 감격스러웠다.

그는 막중한 책임감을 안 느낄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함대를 막을 방법은 막막했다.

그렇게 포격을 했는데도 미 함대는 유유히 포대 앞을 왕복했다.

유일한 포사격이 효과가 없는데 다른 방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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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에서 바라본 강화 해협입구 - 어 재연은 미군들이 돈대로 쇄도
할 때까지도 한양의 궁궐은 포격 할지도 모르는 함대가 이 곳을 통과 할 것을 우려했었다 .이것이 그가 돈대를 사수했던 이유이다.

강직한 무관인 그는 고민 끝에 광성보에서 죽을 것을
각오한 모양이었다.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을 줄 알아야 한다는 중국의

옛말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압도적인 적군이 몰려오는데도
그렇게 완강하게 광성보를 고수하다가 전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2.동생 어재순의 합류


아무런 직책도 없는 한 선비에 지나지 않는 동생 어 재순이
형을 따라 참전했다가 전사한 사건도 분석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어 재순을 어재연이 부관삼아 데리고 가서 같이 전사한

것으로 짐작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 재순이 전쟁에서 공이라도 세워서
벼슬 한자리 하려고 경망스럽게 참전했다고 추측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에 그는 나이가 40을 넘었고 가족까지 있는
처지에 그런 경솔 한 행동을 했을 리 없다.


그러나 그는 어재연과 같이 동행하지도 않았고 그러나 어재순은
뒤늦게 강화도로 쫓아와 합류하였다.

어 재연은 앞에서 말한 대로 동생을 심하게 꾸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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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형제가 자랐을 경기도 이천의 생가.



두 형제의 우정은 대단히 돈독했던 것 같다.

어 재연이 급히 강화도로 가면서 동생이나 가족들에게 세상을
하직하는 유서 같은 마지막 편지를 보냈고 이를 본 동생이 형만을
그런 사지에 혼자 보낼 수 없다고 따라가서 합류한 듯하다.

가족적 유대가 지금보다 훨씬 깊었던 그 시대 무인의 집안에
있을 수 있는 일이다.


3. 전투중의 미스테리한 손돌목 돈대의 통곡소리


미국 여러 기록들은 돈대에 가한 일제 사격이 있은 후 돈대에서

수수께끼의 집단 통곡 소리가 흘러 나왔다고 썼다.

어떤 기록은 이를 구슬픈 노래라고 했고 어떤 기록들은 인디언의 주술 할 때 소리 같다고 하기도 했고 심지어 개떼가 울부짖는 것 같다고 하는 병사의 회고까지도 있었다.


신미양요를 기록한 한 미국 기록만이 이를 한국에서는 호곡(號哭)이라고 하는 것으로 죽은 사람에게 보내는 슬픔의 울음이라고 썼다.


모든 정황에서 이는 동생 어 재순이 사격전에서 전사했던 것 같다.

어 재연은 자기 때문에 죽음을 한 동생을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으로

통곡했었고 죽음을 각오하던 주변 병사들까지도
모두 통곡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4.손돌목 돈대의 20분간 전투


미 해군 대위 맥기가 돌입하다가 전사하고 전투는 15-20분간

계속되었다고 앞에서 썼다.


사실 몇 명 남지 않은 손돌목 돈대 수비 병력을 제압하는데
이렇게 긴 시간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렇게 시간이 걸린 것은 공격군이 어재연의 생포를 노리고 시간을
끈 것 때문으로 보인다.


미군 측에서 보면 이번 조선 원정이 조선의 개항과 수교였던 만큼
적장 어 재연을 생포하면 이보다 더한 협상의 인질은 없었다..


그래서 몇 명 남지 않은 어 재연과 최후 병력을 압박했고 어 재연은

칼을 휘두르며 최후까지 저항했고 칼이 부러지자 포탄을 던지며

끝까지 싸웠다. 어재연과 부하들이 창과 칼만으로 감행한 전투는
치열했던 것같다.
이 전투에서 선두 부대에서  싸웠던 윌리엄 류크스라는 수병은 칼과
창에 18곳이나 난자당해 39일간이나 의식 불명 상태였었다. 


칼이 부러졌다는 것은 그가 내리친 칼을 미군이 총신으로

막아냈다는 이야기인데 칼을 제대로 맞았으면 뼈까지
부러질 만큼 강한 가격이었다.

어 재연이 50이 다되었지만 칼을 제대로 쓸 줄 아는
무인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마지막에 최후가 온 것을 알고 어재연은 최후 돌격을 감행했다가

결국 모두 미군들에게 다시 밀려 전멸당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의 전사는 절망상황에서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이나 부대는
반드시 최후 돌격을 해서 스스로 죽음 속으로 뛰어 드는 것으로
되어있다.

어 재연이 바로 그 길을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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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을 친 지휘소로 몰려 장렬한 최후를 맞은 조선 병사들

사진을 보면 차일을 친 지휘소 옆에 시체의 무더기가 있다.

총격에 죽었다면 이렇게 한 무더기가 되어서 죽었을 리가 없다.

사진에 보이는 전사자중 한사람이 어 재연 같지만 구분 할 수가 없다.


황헌의 매천 야록에 의하면 미군이 어 재연을 창으로 죽이고 머리를 
잘라 갔다고 써있다.

사실은 조선군이 호랑이처럼 싸웠다고 말한 해병대장 맥레인
틸튼대위가 말총으로 꼬은 새끼로 테를 두르고 공작 깃털을 꽂아
화려하게 장식한 어 재연의 전립을 전리품으로 가져갔을 뿐이다.


5.미군의 부풀려진 전과


전투는 손돌목 돈대주변에서만 있었고 여기서 50여명의
전사자 사체를 거두었다 .
그러나  미군 기록은 약 243명 정도를 사살한 것으로 되어있다.

과장도 조금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돈대를 점령한 미군이 용두돈대로 공격해가자 
퇴로가 막힌 용두 돈대 병력(100여명으로 추산)은 전부
강화 해협에 투신했다.

미군들은 이들이 자살했다고 너무 간단히 기록 되어 있다.
물위에서 헤엄치는 조선병사들에게 미군들이
사격을 가했을 가능성도 있다.
미군 전과에는 이들 투신자들을 포함한 것 같다.


5. 광성보  수비병력의 크기

광성보에서 미군과 맞선 병력에도 여러 이설이있다

광성보에서 조선 병사가 방어병력을 한번 헤아려 보자

제일 중요한 것은 미군이 페기했다고 하는 대포의 문수가
400문이 넘는 것을 보자.

상당수가 소형 징겔 포라고 하지만 징겔포도
두 사람이 조작하여야 한다.
이중 예비포가 있다 해도 인원을 보면 상당한 숫자이다.


어 재연이 평안도에서 불러온 산포대 300명을 인솔하고 강화도롤
달려갔다고 하지만 600명을 데리고 갔다는 기록도 있다.


이것은 제 2차 증파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초지진과 덕진진에서 철수한 병력도 있었으니
병력은 600-800명 수준으로 보인다고 추축할 수있다.
병력들은 상륙에 대비한 해안 배치 병력과 미군 상륙후의

뒷산에 배치한 병력으로 삼분되어 있었을 것이다


6. 어 재연의 미군 접근 경계 실패.


어 재연과 손돌목 돈대 병사 전멸은 뒷산을 미군이 점령할 때까지
아무런 저지도 받지 않고 접근하도록 경계를 게을리 했다는 대목이
어 재연의 작전에서 가장 논란이 일고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어재연의 장렬한 전사의 이면에 숨은
일부 장수들의 비겁한 행위가 의심되는 대목이다.

손돌목 전사자 명단에서 어재연 형제를 제외하고 죽은 장교는
천총 비장 김 현경, 초관 유 풍노, 군관 이 현학, 자결한 광성 별장
박 치성등,몇 명이 보이지 않는다.


현대 군 체제로 따지면 광성보를 지키던 대대 병력이 미군을 맞섰는데 소대장 부관 중대장급의 간부들이 다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해당하는 숫자만큼의 조선군의 간부 이름들이
전사자 명단에 없다.


그러다가 어재연이 전사하고 나서 공을 세우는 때와 장소에

장교들의 이름이 다 나타난다.

이것도 전부 거짓 말 투성이의 허위 보고에서 말이다.


먼저 어재연이 경계병을 배치하지 않았고 안개가 자욱해서 미군들이
안개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 뒷산을 점령했다고 알려진  사실에서부터 거짓이 보인다.


미군들의 기록에 초지진에서 광성보까지 진격로에 안개가 끼었다는

말은 없다.

오히려 경치가 좋다던가 마을 주민이 멀리서 보고 도주했다던가 하는

글이 있는 것을 보면 안개가 끼기는커녕 시계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미군 기록에서 뒷산과 접근로에 병력이 배치되었다가
미군 접근과 함께 도주했다는 사실이 있다.

적이 전날 강력한 부대로 상륙을 했고 적의 접근이 예상되는 접근로에 어재연이 대병력을 배치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 병력은 뒷산 방어와 일부는 미군이 강화 읍성으로 진격에 대비해서
그 길목을 지키게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자신 미 함대의 돌입 가능성을 대비해서 사령부인 손돌목 돈대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상륙한 미군들  방면에는 높은 계급의 부장에게
대 병력을 주어 방어하게 했던 것이 틀림없다.


앞에 있는 미군 지도에 이들 조선병사들이 지켜야 뒷산에는 보이지
않고 뒷 산 반대편의 산위에 미군이 돈대를 공격하고 어 재연이
싸우다가 죽을 때까지 구경만 했던 조선 병력의 위치가 보인다.

이 병력의 지휘관이 진정한 군인이라면 돈대를 공격하는
미군들의 후방을 온 힘을 다하여 당연히 쳤어야 했다.

그 방면 방어를 담당했던 지휘관이 어재연을 죽게 만들고
자기는 도주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자가 상부에 거짓투성이의 보고를 올린듯하다.


어 재연이 죽고 나서부터 역사의 신미양요 기록에 갑자기
용감 하게 싸우는 조선 장수들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광성보 점령과 함께 북쪽으로 보냈던 미군 정찰대가 조선군
대 병력을 있음을 알고 다시 돌아와서 보고한  사실이 미국 기록에
있는데 조선 기록은 조선군이 용감히 싸워서 접근한 미군을
격퇴한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이 병력이 어재연에게 뒷산과 미군을 지키게 명령 받고 도주해서
엉뚱한 먼산에서 구경만한 비겁한  인간이 지휘한 병력임에 틀림없다.


다음날 미군이 질서정연하게 광성보 앞바다에서 미군이 군함을 타고

철수 한 뒤 텅텅 빈 광성보는 물론이고 비어있던 덕진진이나
초지진까지도 각 전투 지휘관 이름까지 넣어가며 격전을 치루며
탈환 한 것처럼 보고했다.


서로가 비겁 행위를 한 처지에 공을 나누어가져 입막음을
한 것으로 보인다.

상륙한 미군 대비 경계 실패에 역사는 광성보에서 세계 전사에
보기 드믈게 죽음을 걸고 버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어 재연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


병인양요도 있었으나 신미양요는 조선이 최신식 서양화기에
처음으로 크게 당한 전투이다.


일본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메이지 유신 때 혁명을 주도했던 조오슈는 본래 페쇄적인
반외세 철학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바칸 해협(馬關 海峽)을 지나던 서양 함선들에게 포격을
하다가 보복을 받았다.


뜨거운 맛을 본 조오슈는 태도를 바꾸어 개국으로 돌았다.

선진국에서 신무기 기술을 배워서 국방을 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대원군은 어 재연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 전투를 면밀하게
분석하려고 하지 않고 미군이 물러 간 것을 잘못 해석 하고
척화비라는 것을 팔도에 설치하고 더욱 쇄국을 굳게 했다.

그가 어 재연의 절망적인 전투끝에 죽음을 맞은 사실에 대해
제대로 보고만 받았어도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급물결로 변하는 세계 정세에서 빠른 변신이 필요했던 조선에게
답답한 일이었다.

나는 글을  올리기 전 두 번 광성보를 방문했었다.
1871년 피비린내나는  수 십 명의 조선 병사의 시체가 딩굴던
처절한 곳은 마치 골프장처럼 가꾸어져 있었고 가족 나드리 나온
어린 아이들은 그 곳에서 무심하게 여기저기 뛰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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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이 많이 찾는 오늘날의 손돌목 돈대- 어 재연과 그의 부하들이
세운 살신 진충의 무공은 관광의 가치보다  더 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



1871년 한 조선의 장수가 도저히 이루지 못할 태산 같은 책임을
다하고자 목숨을 던지고 이국 침입자에게 대항했던 이 작은 곳,

미국의 알라모의 요새나 이스라엘 마사다 요새에 못지않은
이 곳이 과연 그들 유적지만큼 한국인의 주목과 존중을 받는 곳일까?


어재연이 휘두르던 마지막 칼바람을 느껴보는 기분으로 다시 생각
해보지만 문약한 조선의 황혼기에 세계 최초의 외국 원정을 나온
미군들의 경탄을 자아내게 했던 어재연 장군의 호랑이 같은
최후의 전투는  더 자세한 조사와 더 높은 국민의 평가가
반드시 있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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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맥기 대위의 후손과 어 재연 장군 후손의
광성보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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