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헤스콕 (carlos noman hathcock) 2세.
해병 저격수 카를로스 헤스콕 1 부
1959년 봄.
미국 아칸소 주 리틀 락의 해병 모병 사무실에 카를로스 헤스콕이라는 매우 키가 큰
소년이 어머니의 자원동의서가 첨부된 해병대입대지원서를 들고 찾아들어왔다.
자신의 17번 째 생일이었던 5월20일 저녁, 카를로스 헤스콕은 13주간의 훈련을받기위해
해병신병 훈련소(mcrd: marine corps recruit depot)가있는 샌디에이고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샌디에이고에 도착한 헤스콕은 약30명의 신병지원자들과함께
군용버스에 태워져 훈련소로 들어갔다.
교관 말마따나 "이똥구멍의 주름보다도 못한놈들" 30명은 그날밤 군복과 양말, 흰내의,
비누 칫솔등 개인용품을 지급받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고함소리에놀라 일어나보니 새벽4시가 조금 넘은 아직 깜깜한 새벽이었다.
이렇게 지옥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신병 훈련소는 결코 어린이 놀이터가 아니었다.
지원병 카를로스 헤스콕은 하루종일 뛰어다니고 굴러도 전혀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않았다.
카를로스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도 가혹하게 이어지는 훈련에 잘 견뎌낼 수 있는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5살때 고등학교에 떨어지자 리틀 락의 콘크리트 제조공장
에서 하루에 10시간 씩 삽으로 시멘트를 퍼담는 고된일을 해왔었다.
부모가 이혼하여 헤스콕은 어머니, 2살 많은 형과함께 할머니집으로 들어와살게되었다.
가난한 이소년에게는 아버지가 유럽에서가져온 낡은 모젤 22구경소총이 있었다.
처음엔 드는 것조차도 불가능했지만 10살때부터는 사격을 할 수 있었다.
소년은 소총을들고 집 근처의 숲 속을 돌아다니며 노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마냥 놀기만한 것은 아니어서 집에돌아올 때는 먹거리를 사냥해왔다
1954년5월7일 체로키 족 인디언의 피가 흐르는 소년 카를로스 헤스콕은 자신의12번 째
생일을 13일 남겨놓은 그날도 숲 속에서 놀고 있었다.
바로 이 날 인도차이나 의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 군이 베트민에게 패배한 날이었고
소년은 이 사실을 뉴스로 들어 알게되었으나 훗날 자신이 그 나라에 가게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12번 째 생일날 카를로스는 할머니에게서 길고 폭이좁은 종이상자를 선물받았다.
상자속에는 레밍턴 산탄총이 들어있었다.
할머니는 비둘기, 꿩, 메추라기를 잡아 주길 바랐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헤스콕은 산탄총을 가지고 숲으로 들어갔으나 토끼사냥에 실패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22구경소총을들고 다시 숲으로 돌아갔다.
정오무렵, 카를로스는 두 마리의 다람쥐와 토끼를 꿰어차고 집으로 돌아왔다.
헤스콕은 산탄총으로도 자주 사냥을했지만 22구경 소총으로 긴장감을 느끼며
사냥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소년은 이오지마 정상에 성조기를 꽂고 전사한 스트라이커 하사의 무용담을 다룬
죤 웨인의 영화 이오지마의 모래를 보고는 감명받아 자신도 꼭 해병대에
입대하리라 결심을 하게되었던 것이다.
훈련소를 수료한 헤스콕은 하와이에 배치되어 제4해병연대 제2대대 e중대
소총소대원으로 근무하게되었다.
교관으로부터 총기수입상태를 검사받는 훈련병
해병 정찰/ 저격학교에서 교육 중인 해병
에드워드 랜드(edward j. land) 대위
훈련소에서 출중한 사격실력을 선보인 카를로스는
1960년 에드워드 랜드(edward j. land) 대위가 지휘하는
해병 스카우트 스나이퍼 (marines scout sniper school) 학교에서
저격훈련을 받았으며 1961년 2급 저격수 자격을 받았다.
랜드 대위는 짧은머리에 땅달막한 불독처럼 생긴 사람으로
나중에 베트남에서 해병대 저격학교를 지휘하게된다.
헤스콕은 이후 노스캐롤라이나 해병 비행장에 배치되었다가 체리 포인트의
사격팀에 자신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결국 그 뜻을 이루게된다.
비행장에서는 해병대 보병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고민하다가
그에게 어디 특별한 곳에 근무할 생각이 있는지를 물었다.
체리 포인트에 사격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헤스콕 일병은 당돌하게도
"체리 포인트에 소총 사격장이 있습니까? 있다면 나를 체리 포인트의 사격팀으로
보내 주십시요. 나는 해병 스카우트 스나이퍼 학교를 졸업했으며
하와이 카*헤 만에서 사격 조교로도 근무했습니다."
헤스콕은 체리 포인트 팀에 들어가 사격훈련을 받게되었고
1년만에 250발 중 248발을 명중시켜 해병대 사상 최고의 기록을 세웠다.
헤스콕은 캐롤라이나에서 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캐롤라이나 뉴 배른의 한 은행에 근무하고 있었던 그녀는 30살의 이혼녀였으나
20대 초반으로 보일정도로 출중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당시 유행하는 최고의 옷과 헤어스타일을 즐기며 이혼의 아픔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중이었으며 뉴 배른의 작은 아파트에서 어머니를 모시며살고 있었다.
그녀는 이혼후 처음으로 연하의 남자인 헤스콕과 데이트를 즐겼던 것이다.
죠를 만나기 전까지의 헤스콕은 봉급에서 20달러는 항상 저금하였고
저축 채권도 구입했었다. 그는 상병 때 자동차를 살 계획이었다.
그런데 죠를 만나고부터는 돈 씀씀이가 헤퍼졌다.
선임하사였던 폴 예거 중사는 박봉의 헤스콕이 돈을 계획없이 쓰는 것을보고는
화가난 나머지 엄한 질책을 하였다.
그러자 헤스콕은 "저는 부대식당에서 먹고 부대막사에서 잠잡니다. 이발도 부대에서하고
청소비로 5달러를 지출합니다. 저는 그이상의 지출을 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한 주에 5달러를 쓰겠다던 애초의 계획보다 더 많은 지출이 발생했으나
죠를 사랑하는 헤스콕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녀는 예의바르고 편안함을 주는 이청년을 사랑했지만 이내 헤어지자고 말한다.
"나는 만날때마다 영화나보는 나이어린 소녀가 아닙니다.
나는 더 많은 것을 생각하는 나이든 여자입니다."
그러자헤스콕은
" 나는 결혼할 수 없습니다.
나는 하사관이 아닌 쥐꼬리 만큼의 봉급을받는 병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의 결혼을 허락할 것 같습니까?" 라고 조용히 대답하였다.
헤스콕이 알아듣기 힘들정도로 침울하게 대답하자
그녀는 "나는 기다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봉급으로는 가정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잘알고 있었던 헤스콕은
더 이상 이문제로 다투어봤자 해답이없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이 때문에 헤스콕은 무척 괴로워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죠를 놓치기 싫었던 그는 결국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제대할 결심을하게된다.
헤스콕은 폴 예거 중사와 마주앉았다.
"나는 그녀와 결혼할 계획입니다.
그녀는 좋은 직장이 있어서 경제적인 것은
큰문제가 아닐것입니다."
"그녀의 봉급과 일병인 너의 봉급으로 어디에 집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떻게 생활을 유지한단 말인가? 너의 차를 팔아서?
만약 임신이라도하면 직장을 잃을 수도 있다는걸 모르나?
만약 그녀가 정말로 직장을 잃어 버린다면 그땐 어떻게한단 말인가?"
헤스콕은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나는 결혼할 겁니다. 결혼날짜는 11월10로 잡았습니다."
다음해, 그녀는 임신하여 직장을 그만두었으며 헤스콕은 상병으로 진급했다.
2편으로 이여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