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난관 속에서도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는 한,
그 사람은 전투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1945년4월24일 모택동)
중공군은 미군의 완전한 제공권하에서 탄약, 장비, 식량, 방한구등의 결핍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명령을 충실하게 실행하며 묵묵히 행동하고
전투했다. 격렬한 미군의 포화망에도 개의치 않고 제1대대가 쓰러지면
제2대대가 그 시체를 타넘고 전진했다. 그리하여 제3, 제4대대로 이어지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의 한 사람까지 전투를 계속하는 모습은 순교자를 방불케 했다.
미군들도 그 용맹성에 감탄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공포심마저 느꼈다고한다.
중공군의 감투정신과 강인성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단지 강제나 명령뿐만은 아닐 것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신앙심, 그리고 지금 싸우고 있는 이 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라는 신념,
이런 것들이 중공군 장병들의 마음 속에 깊이, 아니 골수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중공군병사
한국으로 물밀 듯 들어오는 중공군(위)
중공군의 야간 인해전술(아래
미군의 잘못된 정보도 문제였다.
11월24일(해병사단의 공격개시 3일 전), 유엔군 사령부는 북한에 진주한 중공군은
총 12개 사단으로서 그 병력은 4~5만 명이며, 미 제10군단 정면에는 그 중 2개 사단이
있다고 병력을 과소평가했으며, 또한 중공군은 방어만 할 것이다 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사령부의 이러한 판단을 제 10군단도 똑 같이 하고 있었고,
이것이 해병사단의 판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해병사단으로서도 다시 정밀한 지상 및 항공정찰을 했어야만했다.
해병사단은 강력한 전투정찰대를 내 보낸 것이 중공군에의해 저지되어 그냥 돌아오고
말았는데 이것이야말로 재수색을 보다 철저히 하여야 할 징후가 아니었을까...
결국 해병사단은 완전 포위당해 버렸고,
하갈우리에서는 당시 57세이던 올리버 스미드 해병제1사단장 휘하에
약 1만명의 병력들은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준비를 해야만했다.
여기에는 미 해병대외에 약1500명의 군단 직할부대원,
385명의 육군 페이스부대 생존자, 125명의 영국 해병 코만도 대원과
소 수의 한국군 경찰관이 있었으며 차량은 약 1000대 가량이었다.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미1해병사단장과 육군 제7보병사단장등과 함께
회의를 개최하여 장진호지역을 포기하고 신속히 함흥으로 철수한다는 결정을
내리고는 철수에 장애가되는 장비의 파기권한을 스미드 사단장에게 부여했다.
그러나 부상자를 반드시 구출한다는 신념의 스미드 사단장은
철수 속도는 부상자 후송 능력에 달려있으며, 해안까지 전투를 지속하면서
장비의 대부분을 가지고 가도록 명령하게된다.
이 당시 하갈우리를 방문했던 마가렛 허킨스 종군기자는
해병대의 모습을 그의 저서인 한국전쟁에 이렇게 기술하고있다.
"나는 하갈우리에서 전투에 지친 해병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이 중공군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여 그곳을 빠져나갈 만한 힘이 있을까
하고생각했다. 해병들의 군복은 너덜너덜하고, 그 얼굴은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으로
부어올라 있었다. 장갑도 뚫어져 실이 풀려 있었으며 방한모가 없어 동상으로
귀는 시퍼렇게 변색되고, 동상에 걸린 발은 부어 군화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맨발로 군의관이 있는 천막까지 걸어온 병사도 있었다.
5연대장 머레이 중령은 너무나 야위어서 마치 망령과도 같았는데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했던 당시 5연대를 지휘하던 그의 면모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스미드 제1해병 사단장(왼쪽
텍사스 출신의 키가 크고 깡마른 사나이 올리버 스미드(Oliver P. Smith)해병소장.
1916년 캘리포니아 대학 졸업 다음 해에 24세로서 해군 소위에 임관한다.
1차대전 중에는 괌에서 복무했고 능력과 인품을 인정받아 미 육군보병학교장을 역임한다.
이어 프랑스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해병대학교 교관의 보직을 받게된다.
2차대전 중에는 핀란드에서 대대장을 역임하고 남태평양 타라와전에서 해병제5연대장을,
펠레류 도에서 해병제1부사단장, 오키나와 전에서 제10군단 참모부장을 역임한다.
그 후 2차대전이 종결되고 해병대학교장, 해병대 부사령관을 역임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1해병사단장으로 자리를 옮기게된다.
외모는 대학교수같으나 완고하고 굴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와 강력한 투지를 지녔으며
그는 술을 마시지 않으며 심한 말도 사용하지 않는 점잖은 사람이었다.
격전 시에도 침착하여 흥분된 기색이 보이지 않기로도 유명하며
"최악에 대비하라"
"최악의 사태에 처하더라도 낙관적이어야 한다"는 두 가지 신조로 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장진호 철수작전에서
"퇴각이라니 말도 안 돼! 우린 지금 다른방향으로 공격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해병대 대장으로 전역한 후 예비역 원로 해병으로서 각종행사에 참석하며
원기왕성하게 살았다.
목적지인 함흥으로 철수작전 중인 미해병 M4A3 105밀리/도져 셔먼 전차
하갈우리에서 출발 준비 중인 미 해병(죄송합니다 오래된 자료라서 사진이 흐리네요 ㅡ,.ㅡ;;)
부상자 후송과 탄약 수송 (하갈우리)
헬기의 후방지원.
수송기와 헬기를 이용한 부상자 후송이 빈번해지자 중공군은 미군의 철수를 예감했다.
중공군은 미군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고립시켜 완전히 섬멸할 생각이었다.
12월4일, 북경방송은 미 제1해병사단의 섬멸은 시간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또한 미국에서는 해병사단병력 전원이 전멸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아
해병대 사령부에는 해병대원 가족들로부터 문의 전화가 쇄도했다.
일본 아사히 신문은 1950년12월1일자 기사에 미 해병 고립되다 라는 제목으로
미 해병대는 30일 장진호지역에서 중공군에 완전히 포위되어 고립당했다 라고 보도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핵무기 사용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하자 이에놀란 영국수상이
워싱턴으로 달려와 전면전쟁 방지를위해 핵무기 사용을 하지말 것을 요구하기도했다.
그러나 결국 해병대는 장비를 고스란히 보존한 채 탈출에 성공하고야 말았다.
중공 제20군은 장진호 작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반성하고 있다.
우리는 적의 분산과 포위에는 성공했으나 적을 축차적으로 섬멸하는데는 실패했다.
하급부대는 상급부대의 명령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예로서 유담리에서 적을 섬멸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갈우리에서도
적을 섬멸할 수 없게 되었다. 하급부대가 조기에 전투를 개시하여 적을
각개 격파하도록 의견을 상신했으나 이것을 상급부대가 거부했기 때문에
미군에게 포위망에서 탈출할 기회를 준 결과가 되었다.
우리의 통신수단은 불비했다. 예로서 상급부대로부터 지시를 받는 데 2일 이상이 소요됐다.
적정은 급속히 변화되어 가는데 통신연락의 지연으로 우리들은 전투에있어
호기를 놓쳤으며 상급부대의 명령은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미해병대 공간사)
미 해병대가 산중의 긴 애로에서 철수하는데 성공한 전술적 요인은,
양측의 감제고지를 축차적으로 탈취하면서 그 엄호 하에 철수했다는 것이다.
전투교본에는 산악전에 관해서
"주요도로상에 있는 고개 및 도로탈취와 도로를 제압할 수 있는 고지의 공방은
극히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또 산악지에서의 부대이동에 있어서는 전방과 측방의
요지를 적시에 점령하고, 그 엄호하에 전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 기술되어있다.
미해병대가 이와 같은 착실한 전법을 구사할 수가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요인에 의한 것이다.
하나, 일련의 거점을 점령하고 있었다.
사단장이 군단장에게 요청하여 사단의 담당지역을 진흥리까지로했고
진흥리로부터 유담리에 이르는 사이에 일련의 거점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계적인 작전을 수행하여 재편성과 전력회복, 그리고 차후의 작전준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 항공의 우세를 유지했다.
셋, 화력과 군수지원이 우월했다.
마지막으로 해병대원이 해병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시종 왕성한 사기와
공고한 단결을 유지하고 끝까지 싸웠다는 것이다.
우세한 병력에의한 인해전술로 쇄도하는 중공군에 대해서 해병대는 일보의 양보도없이
당당히 이를 맞아 최후까지 필승의 신념하에 악전고투를 거듭했다.
특히 고지 지휘관이 투철한 해병정신으로 최악의 사태에 직면해서도 비관하지 않고,
각급 간부가 전통에따라 항상 진두지휘했다는 것이 부대의 단결을 강하게 했던 것이며
이로 인해 간부의 손실률 또한 매우 높아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중공군 제9집단군의 임무는 미 제1해병사단을 섬멸한 후 함흥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함흥의 점령은 성공했으나 해병사단을 섬멸하지는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많은 전투, 비전투손실률을 입고 전력을 상실해 버렸다.
그 피해가 너무 컸기 때문에 재 편성과 전력회복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1950년 말에 시작된 중공군의 미제8군에대한 대공격에도 참가할 수 었는 지경이 되었다.
즉, 3개월 간 조직적인 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한편, 미군은 해병사단을 북한 깊숙이 진출시켜 제8군의 공세와 호응하여,
중공 및 북한군의 주력을 북방에서 포위하여 격멸하려는 전략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제1해병사단은 그 대부분의 전력을 유지하면서 철수했던
전술적 행동은 눈부신 성공이었다.
북한에서 성공적으로 철수한 미 제1해병사단은 제8군 휘하에 들어가 마산 부근에
위치하면서 강력한 예비대로 자리하게된다. 그리하여 1951년 상순에 1개
사단규모의 북한 게릴라부대가 유엔군 전선의 간격으로 침투하여 경북 안동으로부터
의성으로 육박, 대구 - 안동 -원주의 유엔군 보급의 대동맥을 차단하려하자
해병사단은 이 게릴라 사단에 대한 공격명령을 받고 급거 북상하여
이들을 토벌하고 보급로를 지켜내었다.
중공군과 정반대로 미 제1해병사단이 장비를 보유하고 건제를 유지한 채 장진호에서
탈출했기 때문에 즉시 이 전투에 참가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해병대의 감투정신으로 성공시킨 장진호 철수작전은 미 국민들에게 큰 감명과
자신감을 주었고 나아가서는 차후 한국전쟁에대한 정책결정에도 크게 기여하게된다.
철수 중인 제5, 제7 해병연대. 노상에 T-34/85 전차가 파괴되어있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과 눈보라를 뚫고 철수하는 미 해병
코르세어의 공중 근접지원을 받으며 철수하고 있는 미해병대원들.
코르세어가 공격한 지점은 중공군의 진지이다.
탈출에 성공한 제1해병사단 전차대대가 낙동강 전선에서 작전 중이다
F-84E 썬더 제트의 대 지상 항공지원
알 림 : 위 자료는 일본육전사 연구회가 발간한 한국전쟁에대한 내용입니다
알 림 : 제가 이러한 자료를 올리는 이유는 단순하게 보기만하는 자료...
혹은 흘러보네는 자료...가 아닌 좀더 자세히 알고.. 광범위하고 길지만
하나하나 이해하고 생각하고 또한 상상하고... 사실적인 내용과 자료를
나름대로 각색/편집/카피해서 올리는 것입니다...
비록 긴 자료라 할지라도 끝까지 봐주셧으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한국전쟁 장진호편 계속 기재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