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6월29일,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한국전선에 도착하여
아직 검은 연기를 뿜고 있는 서울을 한강 남쪽에서 지켜보았다.
이 후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미 지상군 투입을 건의했다.
맥아더는 우선 남진하는 북한군을 어느 선에서 저지시킨 다음, 그 배후로 상륙하여
서울부근에서 일거에 포착 섬멸한다는 작전을 구상하게된다.
자신의 저서"맥아더 회고록"에서는 바로 이때 패배를 승리로 전환시킬 수 있는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작전이 구상되었다고 했다.
6월30일, 본국으로부터 지상군 투입 승인이 떨어지자 바로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을
통해서 일본에 주둔 중인 미 제24사단에게 출동 명령을 하달했다.
맥아더는 상륙작전은 미 제1기병사단(일본 관동지역 주둔)과
1개 해병연대 전투단(본토에서 파견되는 미 제5해병연대를 주력으로 편성 예정)으로
7월22일 경 인천에서 실시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 후, 상륙작전이 일단 보류되자 북한군을 격멸하기위해선 상륙작전이 필요하다는
맥아더의 결의는 확고부동했다. 맥아더는 해병연대 전투단을 더욱 증강시켜
파견해 달라고 본국에 요청했고, 대통령과 합참의장은 이것을 승인하여 7월7일,
임시 제1해병여단을 편성하도록 명령했다.
이 여단은 제5해병연대를 기간으로 하여 포병 1개 대대,
1개 전차중대가 예속되어 있었고 항공지원을 위해 제33해병항공대를 여기에 포함시켰다.
이들 지원부대를 포함한 해병여단 병력은 약 4000명 이었다.
여단의 장교와 하사관들은 전투경험을 가진 자들이 많았으나 대부분의 사병들은
그렇지 못했으며, 여단은 캘리포니아에서 편성을 마치고 7월14일 출발하여
8월2일 부산에 도착했다.
당시 새로운 상륙계획에따라 9월 중순경 인천에 상륙하기로 결정되었으며
낙동강 방어선을 설정한 유엔군은 위기에 직면한 부산 교두보를 확보하기위해
제1해병여단도 이곳에 투입하기로했다.
여단은 우선 교두보 서측방의 위협을 제거하기위해 마산 정면에 대한
국지적 역습(킨 작전)에 참가했다. 제8군은 여단을 기동타격예비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북한군에게 돌파된 정면에 거듭 투입되어 진격해오는 북한군을 격퇴했다.
약 1개월에 걸친 부산 교두보 작전 중 여단은 사상자가 약 900명에 이르는 피해와,
제5해병연대(보병 3개 대대, 각 대대는 2개의 소총중대로 편성)는
6명의 소총중대장 가운데 무사했던 사람은 단 한사람 뿐이었으며,
4개 중대는 중대장이 두 번 이상씩이나 교체되었다.
미 제1해병사단의 편성.
제1해병여단의 파견에 이어서 맥아더는 7월10일(인천상륙작전 예정일로부터 67일 전)
다시 1개 해병사단의 파견을 요청했다. 미행정부는 7월19일 대통령 령에따라
해병대 부사령관 올리버 P.스미드 해병소장을 사단장으로 임명하고
예비역 장병들을 소집하여 제1해병사단을 편성 하였다.
7월25일, 해병대 사령관은 사단에 대하여 8월10일부터 15일 사이에
극동방면으로 출항하도록 명령했다.
편성당시 미 제1해병사단은 제1, 제5의 2개 연대를 기간으로 했었는데,
제5연대는 이미 제1해병여단에 예속되어 태평양을 항해하고 있었다.
당시 사단의 편제는 평시편제였기 때문에 실제 인원은 적었으며
제5연대를 제외하면 약 3000명에 불과했다.
사단은 캠프 펜들튼 기지(캘리포니아)에서 편성하여 인원을 보충했다.
예비군 부대단위 동원이 시작되었고 먼저 로스엔젤레스의 보병중대,
샌프란시스코의 수륙양용 트랙터중대, 공병중대도 동원되었다.
또 예비군 부대단위 동원에 소속되지 않은 예비역 장병도 개별적으로 동원되었다.
이외에 미 제2해병사단(대서양 연안), 제1보충병교육대 등에서도 장병을 차출하여
미 제1해병사단에 전속시켰다. 이와같은 긴급조치로 8월7일경까지는
약 20,000명의 병력이 캠프 펜들튼에 도착하게 되었다.
8월10일에는 제1, 제5연대 외에 다시 제7해병연대가 편성되어
미 제1해병사단에 편입되었다.
제7해병연대는 연말까지 편성하려 했으나 미리 앞당겨 진 것이다.
이 때문에 해병의 보충업무는 더없이 바빠졌고 가용한 자원을 모조리 끌어들였다.
제7해병연대의 2개 대대는 미 본토에서 편성되었으나
다른 1개 대대는 지중해에 있던 미 제6해병연대의 3대대(735명)로 충당되었다.
이 대대는 수에즈 운하를 거쳐 해상으로 직행하여 9월9일 인천에 도착,
제7해병연대 3대대가 되는 것이다.
해병대의 예비전력에는 부대단위로 동원되는 예비군부대와
개별적으로 동원되어 편성되는 예비역 장병이 있다.
1950년6월말의 부대단위로 편성된 예비군 병력은 지상군 33,527명과
항공대 요원 6,341명 이었다. 기타 예비역 장병은 90,044명의 남녀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중 약 2,000명은 현역으로서 재복무중이었는데 그 중 장교의 99%와 하사관,
병의 77.5%는 제2차세계대전의 전투 경험자였다.
예비역 인원의 총 수는 약 13만명이며, 그 당시 현역병력이 74,279명이었으므로
현역 1명당 약 2명의 예비역 장병이 있는 셈이었다.
예비역 부대로는 21개 보병중대, 16개 소총중대, 7개 105mm 곡사포대대,
5개 155mm 곡사포중대, 2개 40mm 기관총대대, 2개 전차대대,
3개 수륙양용 공병대대, 15개 여군소대, 30개 전투비행대대,
12개의 지상통제중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예비역 부대 중 지상부대는 9월11일까지 거의 다 소집되었다.
지원예비역은 8월15일부터 소집이 시작되어 1951년3월31일까지 51,942명이 소집되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부대단위 예비역 해병들. 전차병 복장등 다양한 유니폼이다.
제1연대를 기간으로하는 미 제1해병사단 주력은 8월1일부터 22일 사이에
샌디에이고를 출발하여 8월28일에서 9월1일 사이에 일본 고베에 도착했으나
제7연대 주력은 인천상륙작전(9월15일) 후인 9월21일 인천에 도착했다.
제1해병사단은 그 주력이 태평양을 항해하고 있는 동안
새로 편성된 미 제10군단의 지휘하에 놓이도록 결정되었다.
제10군단은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8월21일 특별히 편성된 부대로서
제1해병사단과 일본 주둔 미 제7사단이 속해있었으며 병력은 약 7만명 정도였다.
극동군 참모장이던 알몬드 소장이 제10군단장을 겸임하도록 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주역을 맡을 예정인 제5해병연대는 제1연대와함께
9월 초까지도 제1해병여단의 주력으로서 부산교두보를 확보하기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해병사단이 인천상륙작전을 하기 위해서는
이 연대들을 조속히 사단 지휘하에 복귀시킬 필요가 있었다.
한편 미 제8군은 전황이 위급했기 때문에 이 연대를 휘하에 조금 더 두기를
강력히 희망했다. 이 때문에 현지의 육,해군 수뇌부간에 격론이 벌어졌으나
맥아더의 결단으로 제5해병연대를 제8군으로부터 빼내어
미 제1해병사단에 복귀시켜 인천상륙작전에 투입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제1해병여단은 9월13일 해산되어 제5연대는 해병사단으로 복귀했다.
제10군단은(군단장 알몬드와 해병1사단장 스미드 와의 불화 속에서도 - 해병들은
알몬드 소장을 신뢰하지 못할 사람으로 생각했다.) 제1해병사단의 제1및,
제5해병연대를 선두로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여 멋지게 성공시켰다.
미 제10군단은 영등포-수원지역을 점령함으로서 북한군의 병참선을 부러뜨려 버렸다.
제1해병사단은 제1, 제5 그리고 뒤늦게 도착한 제7연대와 더불어
서울 공격부대의 주력이되었고, 9월28일 서울을 수복하게된다.
이어 제8군이 부산교두보로부터 반격을 시작하여 제10군단과 연결되자
보급로가 끊기고 퇴로 마저도 차단되어 버린 북한군은 포위망을 뚫고 도망가거나
약2만명의 병력은 산 속으로 들어가 게릴라 활동을 하게된다.
마침내 10월8일밤, 미 제1기병사단은 개성부근에서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하게된다.
미 해병대의 인천상륙작전.
제1 수륙양용 트랙터대대의 LVT-3에 탑승하여 블루 비치로 돌진하고있다.
9월15일. 상륙주정에서 사다리를 이용하여 인천에 발을 내딛는 해병대
9월15일 그린 비치로 상륙하는 제1전차대대 A중대의 M26 퍼싱전차
서울 시내에서 작전 중인 제1전차대대 A중대 퍼싱전차(위)
서울 시내의 북한군과 시가전을 수행 중인 해병대원(아래)
이즈음, 맥아더 원수는 제10군단을 다시 북한 깊숙이 상륙작전을 통해
들여보내어 일거에 전승을 거두려는 결의를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제8군과 북진임무를 교대한 제10군단은 인천과 부산에서 승선하여
원산을 향해 출발하게된다. 맥아더는 제10군단을 원산에 상륙시켜 반도의 동쪽에서
평양 북방으로 공격하여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남쪽에서 평양을향해 진격중인
제8군과 협공하여 북한군 잔류병력을 평양부근에서 포착, 격멸하려는 계산이었다.
또한 제8군과 제10군단의 공격에대한 군수지원이 부산과 인천항 그리고
김포비행장에서의 공중보급만으로는 부족했으므로
동해안의 원산과 흥남 항구를 조속히 이용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원산 앞바다에 도착한 제10군단은 기뢰제거 때문에 해상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육로로 동해안을따라 북진한 한국 제1군단이 원산을 점령했고
제8군은 평양을 점령했다.
이 때문에 유엔군 사령부에서는 전쟁은 곧 끝난다는 낙관적인 분위기에 휩싸였다.
10월15일,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가 웨이크 섬에서 회담을 가졌을때
맥아더는 북한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11월23일까지 끝날 것으로 예상되며
미 제3사단을 주축으로하여 재편성할 예정인 미 제10군단만 한국에 남기고
그외의 부대는 모두 미 본토나 일본으로 철수시키겠다고 말했었는데 21일에 평양이
점령되자 기자단에게 "전쟁은 종국으로 치닫고 있다"라고 말한다.
맥아더는 소련과 중국이 개입할 기회가 이미 사라졌으므로 북진을 제한하는
진출제한선을 철폐하고 제8군 사령관과 제10군단장에게 조속히
북한전역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맥아더는 제 10군단에게 " 한국 제1군단(제3사단, 수도사단)을 통합 지휘하여
태백산맥 분수령 동쪽 지역의 적을 격멸하고 국경을 향해 전진하라"고 명령했다.
이로서 한국 제1군단은 최우 일선부대로서 두만강변 동북국경을 향해 전진하고,
미 제7사단은 서쪽으로 최종적으로 혜산진도로를 따라 국경을향해 전진하고,
제1해병사단은 함흥과 고토리를 지나 장진호를향해 북진하게된다.
이같은 결정은 전력이 가장 우세한 해병대를 산악지역에 투입한 것으로서,
노출된 군단의 좌측방에대한 적의 공격에 대비시키기위한 용병술로
알려지고 있지만 해병대로서는 불행한 일이었다.
10월26일부터 11월9일 사이에 한국 제1군단이 이미 점령하고 있던 원산과 이원에
상륙한 뒤, 동으로부터 한국 제3사단, 수도사단, 미 제7보병사단,
제1해병사단을 나란히하여 북진을 개시했다.
해안을따라 북진하고 있던 한국 제1군단은 비교적 경미한 적의 저항을 격퇴하면서
계속 전진하였고 그 서쪽의 제7보병사단도 산악지대로 신속히 북진했다
원산에 상륙하는 미해병
원산항의 해병 제1전차대대 M26A1 퍼싱 전차
LST로 이원에 상륙중인 미 제7사단 병력
다음에 계속.....
지나가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이 흘러 벌써 6월문턱에 다가섯습니다
모두들 몸 건강히 잘 지네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올리는 시리즈 자료를 계속해서 올려도 될런지 여러분들에게 감히 여쭙니다 ^^;;
자료가 너무너무 광범위해서 킁 ㅡㅡ;;
무기란 어떤것?? 그리고 전쟁이란 어떤것?? 전우란?? 그리고 왜 정의와자유를 위해서 목숨받처 지키고 수호는 해야 하는지...
바로 알고자 함에 이러한 자료들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럼 다가오는 여름 더위먹지 마시고..
언제나 늘~~ 궁정적으로 좋게 생각하세요 ^^
광고에도 나오듯이 막히면 돌아가면되고.. 배고프면 밥먹으면되고..싫으면 안하면 되고....
모둔분들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