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참전시 포로로 붙잡힌 중공군
해병제1사단의 정면은 어떠했을까?
당시 제1해병사단의 작전지역인 흥남, 함흥부근에는 게릴라활동이 활발했다.
그래서 사단장은 곧도착할 예정인 미 제3보병사단이 올 때 까지 2개연대로 후방지역을
방어하고 1개 연대 전투단(제7해병연대)으로 장진호를 향해 북진하기로 했다.
제7연대 전투단은 제7해병연대에 제11해병연대 3대대(105mm곡사포), 수색중대,
제1수송대대, 제1공병대대 C중대, 제1의무대대 E중대, 제1통신대대 분견대,
제1근무대대 분견대를 배속시켜 편성되어 있었다.
제7연대 전투단은 중공 제124사단의 저항을 격퇴하면서 흥남-장진호 도로를 따라
긴 도로를 조심스럽게 전진해나갔다.
한편 제1, 제5해병연대는 흥남, 함흥지역에서 게릴라와 교전 중에있었다.
해병대가 전진해야할 이 도로는 흥남을 깃점으로 약76cm의 협궤철도와
나란히 북상하여 비교적 평탄한 함흥평야를 지나 마전동을 거쳐 진흥리부근에서
산악지대로 접어들어 급경사를 이룬 황초령을 넘어 고토리를 지나서
장진호 남단인 하갈우리에 이르고 있었다.
진흥리까지는 2차선의 자갈길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진흥리부터는 울퉁불퉁한 1차선 도로이고 고토리 남방 4km의 황초령 고갯길은
급한 낭떠러지가 있는 산허리를 꾸불꾸불 돌아가고 있었다. 철도도 급경사를
이룬 이 구간에서는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고토리까지 운행하고
여기부터 다시 단선인 협소한 철도가 이어져 있었다.
도로는 장진강을따라 장진호로 통하고 있었는데, 이 도로는 고토리에서부터
기복이 심한 고지대를 지나 장진호 남쪽 하갈우리에 이르고 있었으며
경하리에서 호수 동쪽으로 북상하는 도로와 서쪽인 유담리에 이르는 도로로 갈라져 있었다.
서쪽으로가는 도로는 하갈우리 분지를 지나 덕동산(해발 1,653m)을 넘어
계곡을 따라올라가서는 호수 서남단의 유담리로 통하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도로는 다시 북쪽과 서쪽으로 향하는 두 길로 갈라져 있었다.
이 부근의 도로 양측에는 활엽수와 소나무의 엉성한 숲이 여기저기 있었으나
시계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었다.
주요기점간의 노상거리는
흥남-함흥 13km, 함흥-진흥리 56km, 진흥리-고토리 16km,
고토리 -하갈우리 18km, 하갈우리-유담리 22km이다.
이 도로가 바로 미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로 진출하기 위한 유일한 도로였다.
진흥리 이북은 긴 협로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 도로를 폐쇄하게되면
보급도 후송도 단절되고 만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일이었다.
특히 진흥리 북쪽으로부터 고토리 남쪽 사이에
황초령 언덕길(직선거리 6.5km, 노상거리 13km, 표고 760m)은 아주 험로였다.
이것은 인공 저수지인 장진호가 양 구간의 낙차를 이용해서 발전하기 위하여
만들어 졌다는 점으로 보아서도 그 경사가 급하다는 것은 짐작이 간다.
더욱이 이 도로는 노면상태도 좋지 않은 1차선이어서 트럭의 운행이 극히 어려웠다.
도로의 한쪽은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이 솟아 있고 그 반대쪽은 낭떠러지였다.
그리고 도로폭이 좁아서 전차가 지나가려면 도로를 개수해야만 했다.
1950년10월. 원산항 기뢰제거 작업에 투입된 UDT.
이 당시 한국군은 중공군의 출현을 이미알게되었고, 붙잡힌 포로들이
중공 제4야전군 9집단군(병단) 42군 124사단 소속으로 밝혀졌다.
결국 제7연대 전투단은 지연작전을 실시한 중공 제124사단 병력과 실제로 만나게되어
고지 쟁탈전을 벌여야했다. 해병은 코르세어의 근접항공지원 하에 적 진지를 공격했고,
중공군은 낮에는 진지를 방어하고 있다가 밤이면 포위, 우회작전을 시도하여
미군진지를 공격해왔다. 또 일부는 밤낮없이 배후로 침투하여 후방을 차단하려했다.
산정에서는 소규모 부대 간의 근접전투가 처절히 벌어졌다.
설마했던 중공군의 개입이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산악지대에서의 근접전에서 60, 81mm 박격포는 아주 효과적인 무기였다.
당시 중공군124사단은 북한군 344 전차연대소속 T-34전차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해병대와의 수동 전투에서 큰 피해를입고 잔존병력들이 북쪽으로 후퇴하여
황초령 고개로 올라가는 곳에 진지를 구축하였는데 전차들은 길이좁아 올라가지 못하고
고개 입구에 포진해야했다.
결국 이 전차들은 해병대원의 로켓포, 무반동총, 항공기의
공격에의해 고철로 변해 버렸고 포병 11연대의 대포에
중공군124사단 잔존병력은 거의섬멸되었다.
작전 내내 공중에서 필사적으로 지상군을 엄호해준 VF-791소속 FAU-4 코르세어
제10군단장 알몬드 (Edward M. Almond) 육군 소장
11월7일,
제7해병연대 전투단은 험준한
황초령 문턱까지 진출했다.
알몬드 군단장은 7일 비행기로
흥남의 미 해병사단 사령부로
날아와 사단장과 회담을 가졌다.
군단장은 사단의 공격을 독려하였
지만 스미드 사단장은 겨울이
목전에 다가왔고, 산악지대에서의
보급의 어려움과 게릴라가 날뛰고
있는 점을 고려해 볼때 험준한
황초령을넘어 산간의 긴 애로인
고토리까지 전진하는 것은 위험
하므로 우선 사단의 병력을
집결시켜 원산, 함흥, 흥남을
확보하는데 필요한 지역을 점령하는 정도로 그치는게 좋겠다고 주장했다.
제1연대는 원산, 5연대는 신흥계곡, 7연대는 수동 북쪽에있기 때문에
사단의 각 연대는 너무 멀리 분산 배치되어 있어 스미드 소장은 전투력의
약화와 무방비 상태에 놓여진 사단의 좌측면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직하고 고집이 센 알몬드는 자신의 주장을 쉽게 바꾸지 않았다.
더욱이 맥아더 원수로부터 전속력으로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를 한사코 실행하려했다. 그리하여 스미드 소장의 건의에대해 병력 집결문제는
찬성했으나 다른 사항은 일체 승인하지 않고 사단에 대해서 다시금 북쪽으로 전진하여
하갈우리를 확보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10군단 특수작전 부대가 측면을 방어할 것이라며 안심시키려 하였지만
이 부대는 중공군에게 호되게 당해 오히려 해병대가 도와주는 처지에 놓이게된다.
여러가지 불미스런 일들로 인해 해병전체로부터 이미 전술과 용병술에있어
신뢰를 잃어버린 알몬드 소장은 스미드 소장의 통찰력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7연대 전투단은 이틀에간에 걸쳐 강력한 정찰조를 편성하여 수색을 실시했다.
연대장 호머 리첸버그 대령은 무방비 상태의 연대의 측면과 매복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런데 황초령을 지키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던 중공군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중공군은 이미 2일 전부터 유엔군과의 접촉을 끊고 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8군 정면의 중공군도 철수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적이 없음을 확인한 제7해병연대는 황초령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중공군이 자취를 감춘 이유는 대략 3가지로 추론된다.
하나, 1차개입 부대는 후속부대의 전개를 엄호한다는
지연임무를 완수했기 때문에 철수했다.
둘, 본격적인 공격준비를 위해 보급 및 재편성을 실시하려했다.
셋, 유엔군을 함정에 끌어넣기 위해 일부러 철수했다는 것이다.
스미드(Oliver P. Smith)제1해병사단장
제7해병연대 전투단은
소규모적인 접전을 벌이며 10일에는
고토리, 14일에는 장진호의 남쪽
끝에있는 하갈우리를 점령했다.
제5해병연대 전투단도 마전동,
진흥리, 고토리까지 진출하여
보급로를 방호했고
제1해병연대 전투단은 그
후방지역을 확보하고 있었다.
제10군단은 11일 사단에대하여
장진호 동쪽 기슭을 거쳐 북부
국경지대를 향해 공격함과 동시에
일부 병력으로 흑수리와 유담리에
저지진지를 편성하도록 명령했다.
또 미본토에서 도착한 미 제3사단
에게는 제1해병사단과 교대하여
원산-영흥지역을 담당하라고
명령했다.
(제3사단의 일부 병력은 11월5일에서6일 동안 원산에 상륙했다.
사단주력은 샌프란시스코로부터 9월 중순 동안에 일본에 도착하여 10월 한 달간에
걸쳐서 한국군 8,500명을 보충한 뒤, 11월10일에서 17일동안
원산에 상륙하여 미 제10군단 지휘하에 들어갔다.)
이것은 아직 전투경험이 없는 보병사단을 우선 후방지역을 방어하는데 사용하고
가장 어렵다고 예상되는 정면에 숙달된 해병사단으로 공격시킬 생각이었다.
군단이 제1해병사단에 일부 병력을 좌측방에 배치하도록 지시한 것은
서쪽으로부터의 위험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1해병사단은 하갈우리 주변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개마고원의 겨울은 빨리 찾아와 제7연대가 고토리에 도착한 10일에는
기온이 영하 18도 이하로 급강하했고, 15일이되자 하갈우리에서는
기온이 영하 26도까지 내려갔다.
제1해병사단은 보급로의 보수, 주요 보급기지 설치,
그리고 보급과 후송용의 비행장 건설, 방한용 피복 자재 입수에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혹한기 산악지역과 긴 애로지역작전을위한 적절한 조치였으며
이후 작전에 매우 효과적이었는데
그 개요는 다음과같다.
제7해병연대의 고토리 점령과 동시에 사단 공병은
진흥리-고토리간의 도로를 보수하기 시작했다.
18일에는 M-26 퍼싱전차의 통과는 불가능했으나
M4A3셔먼전차는 통과할 수 있게 되어 사단 전차대대는
셔먼 3대와 도저 전차 4대로 임시편성한 전차소대를 하갈우리로 전진시켰다.
한편 활주로는 13일까지 고토리에 경비행기가 이착륙할 수 있도록 완성되었다.
그러다 19일에는 고갯길이 개통되었기 때문에 사단은 대형 도저 5대를 보유한
공병 1개 중대를 하갈우리로 이동시켜 수송기용 활주로 건설에 착수했다.
제1해병사단 제1전차대대 M32A1B3 장갑 회수차량. 1950년11월10일 함흥.
11월23일,
유엔군 전선은 한반도 중앙을 남북으로 잇는 낭림산맥을 따라 동서로 양분되어 있었다.
서쪽의 제8군은 미군 4개 사단, 한국군 4개 사단, 영국군 2개 여단을 주력으로 하여
청천강 선에서 총공격을 위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동쪽의 제10군단은 4개의 공격축선에 따라 북방 국경을 향해 북진 중이었다.
이 중 미 제7사단 17연대는 21일에 한.만국경인 혜산진에 도달하여 압록강 건너편의
눈덮힌 만주의 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추수감사절동안 칠면조 등 여러 가지 음식들이 병사들에게 제공 되었고,
해병 제1사단은 이날 북진을 위한 명령을 하달했다.
"사단은 장진호 동쪽 기슭을 거쳐 북방 한.만국경을 향해 공격한다.
제5연대는 주력부대로서 먼저 하갈우리 북방32km 떨어진 곳을 점령하고
제7연대는 유담리를 점령하라. 제1연대는 하갈우리, 고토리, 진흥리를 점령하여
보급로를 방어하라."
그리고 병참선을 방어하기 위해 제1전차대대를 마전동부근에 배치하고
제1공병대대는 병참선 유지와 하갈우리 활주로 건설을 중점적으로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또 보급소를 하갈우리에 설치하고 1종(식량)과 3종(연료)은 8일분, 5종(탄약)은 3일분,
2,4종(각종 피복과 장비)은 편제상의 소요량을 확보하도록 명령했다.
이 명령은 병력운용에 있어서 우선 1개 연대로 적을 공격하고 2개 연대로 보급로와 사단
좌측방을 엄호하려는 것이었다. 이 작전은 긴 협로를 따라 공격하는 것이므로
우선 진로상에 기지를 설치하여 필요한 물자를 집적하고 활주로를 건설하는 등
군수지원문제를 중요시한 점에 특색이있다.
이것은 제1해병사단장 스미드 소장의 의도된 바였다.
스미드 소장은 전진을 재촉하는 알몬드 군단장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사단을 한 곳에 집중시키려 부단히 노력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비록 깊은 골짜기와 험난한 협로로 꾸불꾸불 이어져있긴 했어도
사단 주둔지 끝에서 끝까지 차량으로 한시간 정도 걸리는 전술구역 내에
사단병력을 집중시키게된 것이다.
사단의 명령에따라 각 연대는 다음과 같이 조치했다.
제1연대는 진흥리, 고토리, 하갈우리에 각각 1개 대대를 축차적으로 추진시켰으며,
제5연대는 장진호 동쪽 기슭을 따라 북방으로 공격하기 위하여 병력을
하갈우리 북방인 장진호 동쪽 기슭에 집결시켰다.
제7연대는 24일, 주력을 유담리로 진출시켰으며
2대대는 26일에 제1연대 3대대와 교대할 때까지 하갈우리 방어를 맡고 있었다.
부대의 전진을 늦추어온 26일에야 비로소 스미드 소장의 염원대로
사단전체를 하나로 묶을 수 있게되는 것이다.
맥아더 유엔군 총 사령관
11월24일,
제8군은 8개사단을 병진시켜
압록강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맥아더 원수는 이날 공중에서
공격개시상황을 시찰하고 다시
압록강 상공을 비행한 뒤 동경으로
돌아와서 "유엔군의 포위작전은
계획대로 개시되었다.
적 전선의 후방과 압록강을 잇는
전국경선을 정찰한 결과 별다른
적의 군사행동은 보이지 않았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맥아더가 "크리스마스는
미국본토에서"를 외치며 전개했던
이 대공세는 시작하자마자 곧
절대절명의 위기에 봉착하게된다.
제8군은 앞을 가로막는 경미한
저항을 물리치고 전진해 들어갔다.
그러나 25일부터 전혀 예상치도
못한 중공군의 맹렬한 공격 때문에
제8군의 우1선인, 동해안을 따라
북진하던 한국군 제2군단이 붕괴
되어 버렸다. 이리하여 제8군의
우측방은 포위당할 위기에 빠졌다.
워커 중장은 예비대인 미 제1기병사단과 터키 여단, 영국 제27 및 29여단을 투입하여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중공군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제13집단군-18개사단)을
가지고 선제공격으로 제8군의 우측방을 포위하고, 이어 정면에 압력을가하여
드디어 27일에는 유엔군전선의 중앙을 돌파하기에 이르렀다.
중공군은 제8군이 공격을 개시한 1950년11월24일 경까지 중공 제4야전군 예하
이천우 사령관의 13집단군(18개사단 약 18만명)을 제8군 정면에,
제3야전군 예하 9집단군(12개사단 약12만명)을 제10군단의 제1해병사단 정면에
전개하고, 중공 제4야전군이 제8군에 대한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서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지원부대인 제1, 제2 기계화 포병사단과 제5, 제42자동차연대도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유엔군사령부는 이무렵 한국에 투입된 중공군 병력을 6~7만 정도로 판단했는데
실제병력의 4분의1도 안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과소평가된 이유는 중공군이
저녁7시부터 새벽3시 까지만 행군했고 항공정찰에 대비한 위장조치는 새벽5시30분 까지
모두 끝내어 숨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숙영지를 정찰하기위하여 소 수의 선발대
만이 행동했고, 부득이 부대전체가 주간에 이동하게될 경우에도 항공기가 나타나면
각자는 그 자리에서 정지하여 절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철저히 훈련되어 있었다.
장교에게는 이러한 명령을 지키지 않는 자를 즉결처분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었으며, 철저하게 유엔군의 항공정찰을 무력화 시켰던 것이다.
제10군단은 제8군의 공격에 호응하여 대포위작전의 일익을 맡기위해 11월23일,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은 이미 15일, 맥아더가 알몬드 군단장에게
전문을 보내 명령한 것이었다.
작전내용은
군단은 제1해병사단은 장진호 서쪽 유담리를 점령한 뒤 서쪽으로 주공의 방향을 돌려
제8군과 대치하고 있는 중공군의 배후를 공격하여 제8군과함께 격멸한 다음
유담리 서방 약 90km 떨어진 곳에있는 무평리를 점령하라는 것이었다.
이 여세를 몰아 북진하여 압록강 남쪽 기슭을 점령한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역시 이 주공은 제1해병사단이 맡으며, 제7보병사단은 제8군의 우측부대와 협조하여
제10군단의 좌측방을 엄호하도록했다.
이렇게해서 북방을 향해 움직이던 제10군단의 주공방향이 서쪽으로 변경되는 것이고,
11월23일에 하달되었던 장진호 동쪽 기슭을 거쳐 북쪽으로 공격한다는
종래의 임무는 육군 제7사단이 인수하기로했다.
공격개시일은 27일 아침으로 결정 되었다.
이 때문에 초조해진 사람은 다름아닌 제1해병사단장 스미드 소장이었다.
제7연대가 장진호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제5연대는 뒤따라 황초령을 넘어와
장진호의 동안으로 나아가 제7연대의 우측을 방어하도록 되었으나 두 부대 사이가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 측면방어를 제공할 수 가 없었다.
거기다 장진호로부터 방향을돌려 험준한 낭림산맥을 향해 전진하라는
말도안되는 작전에 해병대가 주역을 맡게될 운명이었다.
스미드는 맥아더의 명령에따라 무조건 전진을 재촉하는 알몬드에게 항의하였으나
무시되어 버렸다. 스미드는 사단병력이 다 집결하고 활주로가 완성되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으려했던 것이다. 또한 작전의 변경때문에 사단의 후방지경선이
하갈우리 부락의 남단으로 조정되자 스미드 사단장은 알몬드 군단장에게
강력히 건의하여 진흥리까지를 후방책임지역으로하고 진흥리와 고토리에도
사단의 경계부대를 배치하도록했다.
이것은 작전의 특성으로 보아 군수지원이 매우중요하기 때문에 늘어난 병참선을
타부대에 의존하지 않고 해병사단 스스로 확보하겠다는 사단장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군단의 명령에따라 해병제1사단은 26일 아침,
다시 무평리로 향하라는 공격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은 먼저 유담리 서측방 약 43km에 위치한 용림동 도로의 교차점을 점령하고,
다시 서쪽으로 공격을 계속할 준비를 하는 것으로서 공격개시는 27일 아침으로 정했다.
최초 주공부대는 제5연대이며 제7연대의 임무는 유담리를 점령, 확보하여
주공부대의 공격을 지원하면서 덕동고개-유담리 사이의 병참선을 방호하는 것이었다.
압록강을 건너 한국으로 들어가는 중공군 행렬
중공군.
중공군의 각 야전군은 몇 개의 집단군(중공은 병단으로부른다)으로 편성되어 있으며,
각 집단군은 2~8개의 군을 가지고 있었고 군은 보통 3개의 보병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1950년2월 중.소 방위조약에따라 3,000명 이상의 소련군과 기술자들이 중공에 파견되어
중공군을 훈련시켰다. 중공이 사단을 소련식 편제로 개편하던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중공은 미군과 마찬가지로 3각 편제를 채택했다. 사단은 3개 보병연대와 포병, 공병 등의
지원부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보병연대는 3개 보병대대를, 보병대대는 3개 소총중대,
소총중대는 3개 소총소대를 각각 기간으로하여 지원화기를 배당받아 편성되어 있었다.
보병사단의 편제상 정원은 약8,000명 정도로 추정되며 실제로는 여기에
각종 지원부대를 배속받아 10,000명 정도가 된다.
사단은 화포 12문으로 장비된 포병대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화포가 부족했기 때문에
사단에 따라서는 신형과구형 등 여러 종류의 화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중공 제9집단군은 구경이 큰 화포를 압록강 북쪽에 남겨 두고 왔었다.
아마도 이것은 예상되는 전장의 지형이 험준하여 수송이 어려우며 탄약보급이
곤란하다고 판단하여 남겨 두고 온 것으로 생각된다.
어떻든 82mm 이하의 중구경화포인 박격포가 사단 지원화력의 주무기였다.
그밖에 대부분의 사단에서는 말이끄는 견인포, 또는 조랑말에 실은 75mm 정도의
곡사포 등을 장비하고 있었다.
무전기도 몹시 부족하여 무선통신망은 연대 이상에만 구성되었다.
유선전화는 보통 대대본부까지 통했다.
때로는 중대본부까지도 유선망을 구성하기도 했다.
대대 이하의 통신수단으로는 전령, 나팔, 피리, 신호탄, 회중전등 등을 교묘히 사용했다.
군량은 소위 "적지에서 구하는 방법"을 구사하고자하였으나 주민이 별로없는
북한지역 같은 곳에서는 보급수요를 충당할 수 없어 전투력 발휘에 지장을 주는
요인이 되기도했다. 처음에 압록강 도하시 식량으로 각 개인에게 쌀,조, 콩 등을
4일분씩 지급했을 뿐, 그 후에는 거의 현지에서 조달했다.
그러나 인구가 적은 산지에서는 현지조달이 어렵기 때문에 점차 소비량을 줄여야했다.
복장은 솜누비옷을 입었다. 만주출신 병사들은 비교적 추위를 잘 견뎌냈다.
그러나 솜옷은 건조시에는 따뜻했지만 젖으면 잘 마르지 않고 무겁게 얼어붙었다.
실탄은 각 개인에게 소화기탄약을 80발씩 지급했을 뿐 그 이후는 거의 지급되지 않았다.
포탄의 휴대량도 지극히 적어서 82mm박격포는 문당 90발, 60mm박격포는 문당
40발 이었다. 그러나 수류탄은 비교적 넉넉하게 지니고 있었던 것같다.
1차 참전 시 미 육군과 한번 붙어본 중공군은 그후 미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중공군은
" 미군은 후방이 차단되면 중장비를 포기하고 무기도 방치한 채
제멋대로 행동한다. 미군 보병은 나약하고 죽기를 두려워하며 일단 후방이 차단되면
공격이나 방어를 할 용기가없다.
전투는 주간에 실시하며 야간전투는 서툴고 백병전에 약하다.
후방이 차단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며 보급이 두절되면 전의가 사라진다." 는
팜플렛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화력이 강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미군과 전투시
주요고려사항은 부대나 개인은 신속히 적을 우회하여 그 퇴로를 차단하도록
작전해야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병사들에게는 철저하게 사상교육을했다.
"미국은 인간이 저질 수 있는 온갖 악덕 소굴이며 미군은 짐승처럼 잔인하므로
집으로 기어 들어온 뱀을 죽이듯이 말살해야 한다" 고 되풀이해서 교육을 시켰다
3부로 게속 이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