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최고의 격전지, 백마고지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이어진 10일간의 전투로 한국군 보병 9사단은 3428명의 사상자를, 중공군은 사망 8234명, 포로 5097명, 귀순 57명의 희생을 내고 물러났다.
30만발의 포탄이 쏟아져 산이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으며 12번이나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접전이 계속되었다
백마고지 전투시 부상당한 한국군
탈환의 재탈환... 하면서 백마고지 참호에서 찍은 한국군 사진
백마고지를 향해 105mm 지원포격 아무래도TOT 포격을 한듯합니다
여기서 TOT포격이란 한발 한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포탄이 동시에 발사되서 동시에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게 해서 밑에 사진처럼 산이 ㅡ,.ㅡ;;
백마고지를 지킬 수 있었던데는 연합군의 유연한 합동작전과 우세한 포병전력도 한 몫 했지만 그 무엇보다 한국군 보병 9사단 장병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국전쟁 후...
보병 9사단은 백마부대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베트남전에도 파병되어 혁혁한 전과를 달성했다
6.25전쟁, 백마고지 전투참석,
강원도 철원군(1952년 사진)
현제 백마고지엔 태극기만이 ..... ㅡㅡ;;
'평화'란 무엇인가?... '자유'란 무엇인가?...
휴전선이 가로놓인 이 땅에서 "평화와 자유"의 소중함을 잊고 살아간다
비극의 6.25...평화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장열하게 싸우다가 꽃다운 젊음을 바쳤다
"자신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은 존재가치도 없다"고 했다
우리의 56전 자화상을 되돌아 보며 님들의 우국충정을 기려보자
.........
백 마 고 지
강원도 철원의 휴전선 안쪽에 위치한 "백마고지"는
해발 395m의 작은 산등성이에 불과하지만 철원평야를 통제하는 요충지로써
6.25 한국전쟁중 가장 치열한 접전을 치룬 곳이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10일동안 국군 제9사단과 중공군 38군의 주력부대가
7차례에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 혈전의 진퇴를 거듭하다가
아군 3,146명과 중공군 14,389명이 희생된 곳이다.
10월15일 결국 우리 국군이 쟁취하여 승리를 장식하고 백마고지로 명명하였다.
포탄이 30만발 이상 퍼 부어져 산등성이의 높이가 1m정도 낮아졌으며
황폐된 산의 능선이 백마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백마고지라 이름을 붙였다 한다.
의정부→동두천→연천→신탄리역을 지나면 나온다.
6.25전쟁중 한국군의 가장 큰 승리였으며
중부전선에서 한국군이 당하고 있던 수세 일변도를 뒤집어 놓은 전투이다.
백마고지는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그 주변이 평야이고 평강, 철원, 김화 이 세곳,
속칭 철의 삼각지를 차지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즉, 백마고지는 이 삼각형의 무게 중심역할이라고 할 수도 있으므로
교통이 서로 연결된 교차점이라 철원평야를 차지해야하는 중공군과
지켜야하는 아군의 누구도 포기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백마고지가 남쪽에서는 고지로 보이지만
북쪽에서 보면 근방에 더 높은 고지들이 즐비해서 백마고지를 점령한다고 해도
적에게 백마고지 자체가 계속 제압당하는 현상을 나타낸다는 것이었다.
지형자체가 뺏고 빼앗는 혈투를 부르고 있었다. 아예 몇 킬로미터 더 전진해
백마고지 전방까지 안전하게 먹어 두면 좋을텐데라고 생각하겠지만,
병력부족 상태가 계속되어 그럴 공세작전을 취할 능력이 국군에겐 이미 없었다.
그러면 백마고지를 포기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백마고지 뿐만이 아니라 간신히 지탱되어오던 '철원, 김화'의 두축이 무너지고
10-15킬로의 전선이 붕괴되고 예비병력이 거의없던 국군과 유엔군에겐
자살에 가까운 결과가 되고 말 것이 분명했다.
"김종오"장군이 제9사단에 부임한 것은 1952년 5월 30일이었다.
김종오 사단장은 부임길에 미 제8군 사령관과 미 제9군단장을 만났다.
그들은 한결같이 적이 곧 백마고지로 몰려 올 것이라는 충고아닌 충고를 해주었다.
묘한 우연이었다. 김종오 사단장은 하필이면 격전지역에 전투개시 직전에
부임하는 일을 당한 것이 됐다.
9사단의 방어구역은 장송동-백마고지-학당리 간 10km로
1952년 9월22일에 사단에서 부대 교대를 실시, 30연대가 좌측, 29연대가 우측,
28연대는 중앙에 위치했다. 백마고지는 30연대 제 1대대가 맡고 있었다.
또 한가지 김종오 장군의 자랑은 그의 제6사단이 바로
압록강에 최초로 도착한 부대였다는 사실이다. 그의 예하 연대가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화이다.
그런데 그때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사단이 거의 궤멸 직전까지 몰리는 수모도 당해야만
했다. 너무 성급한 전진과 방심, 그리고 통일에만 급급해
마치 남침하던 인민군처럼 훈련이 덜된 병사와 간부들을 급조해 만든 부대라는 것이
당시의 참패의 원인이었다.
그 쓰디쓴 패배의 경험으로 이번에는 김종오 장군도 복수를 다짐했다.
중공군의 떼거리로 몰려오는 전술이라든지, 기만, 항복을 가장한 접근,
또한 천하무적에 가까운 야간습격전술 등을 예하 장병들에게 철저히 교육시켰다.
따라서 그는 철저히 야간사격훈련과 야간전투훈련을 시켰다.
또 아군 지원부대가 올때 까지 버틸만한 깡다구라고나 할까?
하여튼 총검술 연습도 상당히 시켰다.
이런 훈련의 효과는 전투 개시후 그 효력을 증명하게 된다.
세상에 어떻게 1개사단이... 1개 군단을 격파해 버린단 말인가?...
5월말이면 장마가 계속될 무렵이었다. 그는 또한 진지 보강 공사를 강화했다.
철조망은 모두 7겹으로 치게 했고, 각종지뢰도 닥치는대로 깔았다.
그리고 격전중에는 고질적으로 발생하는 문제, 부상병을 나른답시고
부상병 한명을 성한 병사 두명이 메고와서 진지 이탈을 해서 복귀를 하지 않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조건 경상자는 대피호에 대피 시켰다가 전투후 나르도록
대규모의 대피호도 준비했다.
또한 대부분의 진지를 '유개호'화했고 교통호는 목높이까지 팠다.
또한 부대 교대제도도 엄격하게 실시했다. 격전을 치루면 무조건 48시간에 한번씩
부대를 교대시켜 주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상당히 중요하다.
전쟁터에서 웃기는 원칙이 있는데 "용감한 병사는 먼저 죽는다"는 것이다.
즉 용감하게 싸운 부대는 계속 격전지구에서 전멸할 때까지 적을 상대하라고 하므로
용감해봤자 기다리는건 죽음 뿐이라는 것이다.
김종오 장군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이런 부대교대를 엄격하게 실시했고
이것이 장병들의 사기를 올리는 큰 힘이 되었다.
백마고지를 놓고 싸우게 될 중공군은 제 38군으로
김종오 사단장이 압록강에 도달하였을 때 초산, 혜산, 등지에서
김종오 장군의 제6사단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 부대였다.
중공군 제 38군은 만주에서 창설된 고참부대로
1.4후퇴때 적의 선봉에 서서 아군을 수원까지 내 몰았던 부대였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나 할까?
정말 힘든 상대였다.
다른 중공군 부대들은 대개 1개 군단이라고 해도 사실
미군 1개사단 이상의 화력을 갖지 못한 인해전술 전용부대였던 반면,
38군은 백마고지 전투를 위해서 오랫동안 후방에서 교육받았고 완벽하게
소련식으로 훈련된 완전 편성된 포병을 가진 막강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적의 제 13병단의 작전은 전에 말했듯이 일단 백마고지를 점령하고
이곳을 발판으로 손쉽게 철원 평야를 차지해 아군전선을 붕괴시키고
국군에게 심각한 정신적 군사적 피해를 입혀주는 작전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당시 유엔군보다는 아무래도 국군이 장비나 화력, 간부의 능력, 모두 열세였으므로
중공군은 한국군만 골라서 공격하고 소모시켜 전선을 돌파하고
별로 싸울 열의가 없던 유엔군의 전선을 공황상태로 만드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때쯤 모든 유엔군들은 전쟁에 시들해져 있었다)
38군 군장(우리의 군단장에 해당)은 112사단과 114사단을
백마고지 탈취의 주력으로 내세우고 113사단은 예비로했다.
또 공격부대에서 골수 당원을 골라
백마고지와 유사한 지형에서 모의 점령훈련을 3개월 동안이나 수차례 시켰다.
1952년 10월 2일은 추석이었다.
사단에서는 그동안 참호공사와 전투훈련등으로 지친 병사들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서
연대대항 운동회를 열어서 장병들의 사기를 올리고 있었다...
한참뒤 제30연대 2대대장으로부터 급보가 날라왔다.
"중공군 340연대소속의 국부군 출신인 중령 한명이 아군 수색대에게 투항해 왔다"
라는 것이다. 심문해 본 결과 놀라운 사실도 밝혀졌다.
중공군340연대가 10월4일부터 6일사이에 봉래호 댐의 수문을 열고
아군의 후방 보급로를 차단한 뒤 백마고지를 점령할 것이다라는 사실이며
아예 중공군은 점령후에 입을 동기피복까지 준비했다는 것이다.
놀란 백마고지담당 대대장(김영선)은 팬티만 입은채로 트럭에 대대원들을 싣고
황급히 달려갔다. 방어준비는 잘되어 있었다.
대대 지휘소는 백마고지 정상 남서쪽 300고지에 설치하고
그밑에 중화기 중대(81밀리박격포3.5인치로켓등)를
그리고 연대 전투단에서 배속받은 4.2인치 중박격포 3문을 무명고지 바로 밑에
방열하고 전방위로 사격할 수 있는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고지 쟁탈전은 탱크가 직접 개입할 수도 없다. 항공기의 공격도 위력이 감소된다.
곡사포의 포격이 효과적일 것 같지만 산의 고저가 다양해서 사각지대,
분명히 유효 사거리 이내인데도 포탄이 맞출 수 없는 곳이 많고
포격제원을 산출하기도 쉽지않다. 산악전에서는 일단은 병사 각개의 의지와 능력,
그리고 병력수와 수류탄이 많아야하고 가장 유리한 지원 화력은 박격포이다.
박격포는 45도 이상으로 발사되므로 사각지대가 좁고 산악에서도 분해해서
옮길 수가 있다.
연대의 각 대대는 백마고지를 둘러싸듯이 배치되었다.
아예 포위될 것으로 예측하고 배치를 한 것이다. 거기다가 각 중대와 대대사이의
유선 전화선은 사람 한길정도 깊이묻어 적의 포격에도 끊어지지 않게 했고
각 중대 진지 역시 포위 당할것을 예상하고 전면 방어태세로 만들었다.
또한 1주일분의 탄약 식량물을 비축해두었고,
유서 유품을 따로 후방에 부치고 일전을 불사할 각오가 되어있는 상태였다.
김종오 장군은 다음날 전화로 대대장을 불러 "곧 국군의 53전차중대와
미군의 73전차대대 c중대를 배속시켜 지원할테니까 화력은 염려말라"고 전했다.
10월 5일 적의 포탄이 한발 한발 작열하더니 어느새 우박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폭풍이 몰려오고 있었다...이제 적이 온다.
그러나 고개를 쳐든 아군에게 떨어지는 것은 적의 포탄 뿐이었다.
참호 속에 쳐박힌 병사들은 미칠 지경이었다.
이런 하루종일 쏘고 또 쏘는 포격은 처음 보는 것이었고
적의 공격이 얼마나 맹렬할지를 미리 말해주는 것이었다.
김종오장군은 이런 적의 사격으로 미루어 아군을 지치게 해 놓고
오히려 야간에 적이 공격을 감행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항공지원을 요청했다.
항공기 3개 편대가 날아와 적의 예상 집결지를 폭격했다.
적과 아군의 소총 교전거리는 일반적으로 200m이고 적이 조금만 진격해도 100m이다.
가까워 지면 박격포와 유탄 발사기, 기관총으로 화망을 구성한다.
일반적으로 포병 관측반에서 명중이라고 말하는 것이
탄착 예상지점에서 +-15m 이내에 떨어지는 것이므로 (105밀리포의 경우)
적이 아군과 100미터 이내로 들어오면 포격을 가하기도 힘들다.
아군의 피해도 각오해야만 한다. 그리고 아예 100미터 이내로 적이 밀고 들어오면
진내사격이라고 하는 것을 준비해야 되는데 이것은 지원받는 보병 부대장의 동의가
있거나 관측장교가 보기에 꼭 필요할 때만 해야 한다.
진내 사격이란 것은 아군과 적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아군의 희생을 각오하고
아군이 점령하고 있는 진지를 좌표로 해서 포격을 때리는 것을 말한다.
대개 두가지 때에 실행된다. 이미 아군 보병부대가 전멸했을때,
아니면 아군이 도저히 진지를 지킬 수가 없어서 후퇴할 때 적이 따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아니면 아군은 진지의 대피호에 대피하고 적을 모두 날려버릴때
동반자살하는 식으로 써먹는다.
항공지원은 당시의 수준으로는 진지에 육박중인 적에게 공격을 할 순 없었다.
소총으로 교전중인 적과의 거리가 최대한 200미터인데
이정도 거리에선 폭탄을 투하했다간 정말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고
기관총이나 야포 공격이 제일 큰 공격이었다.
여기다가 산이 많고 숲이 많은 곳에선 머리에 모두 표시가 달려 있는 것도 아니므로
오폭사고가 많이 일어났다. 그러니까, 유능한 지휘관일수록 각종정보를 종합해서
미리미리 항공공격으로 폭격할 지점, 적의 사령부, 포병대, 병력 집적소, 탄약고 등을
강타 해야한다.
김종오 장군의 생각대로 적은 19:15에 역곡천을 따라 아군의 후방으로 뚫고 들어와
10중대 앞으로 밀고 올라왔다. 또한 조공은 낙타능선으로 공격해왔다.
낙타능선은 수풀이 울창하고 사각지대가 많아서
아군의 지원포격이 잘 먹히지 않는 곳이었다. 적도 이점을 노린 것이었다.
대대장은 황급히 "남쪽고지로 옮겨 사수하라"고 명령했으나
중대는 와해 직전에 있었다. 연대장 역시 사태의 위급함을 느끼고
9중대를 10중대의 돌파지역에 투입하고 전차중대는 돌파구에 조명탄을 쏜뒤
일제사격을 거듭, 적을 저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적을 일단 항공공격과 포지원 사격으로 묶어놓는다. 28연대는 즉각 증원준비를
완료하라. 적이 약해지면 즉각 반격을 개시한다."
새벽2시에 B-29 4대가 적의 예상 집결지인 하진, 명동,등을 강타하고
각종 포(155밀리 32문, 105밀리 32문, 4.2인치 박격포 7문, 전차포 10문) 81문을
있는데로 발사하여 돌파구에 포격을 가했으나 적의 돌파구는 넓어져만 갔다.
새벽5시, 적의 병력수가 도저히 줄어들지 않고 늘어만 갔지만 다른 수가 없이
28연대 1대대에게 백마고지 탈환 명령이 내려졌다.
48대의 항공기가 날아와 백마고지를 쑥밭으로 만들고 있던 적의 포병부대 위에
3000파운드의 포탄을 퍼부었다.
28연대의 지원을 받은 30연대는 낙타능선으로 역습했지만
워낙 병력의 열세가 심해 어쩔 수 없었다.
밤10시, 흰말 같은 백마고지가 붉은 말처럼 피에 물들었을때
백마고지의 주인은 중공군에게 넘어가고 만다.
이날 이후 적과 국군은 뺏고 빼앗기는 싸움을 계속하게 된다.
김종오 사단장은 미 제9군단장 젠킨스 소장에게
"사단 전 병력으로 백마고지를 지켜고 있으나
이렇게 극심한 병력열세에 작전을 계속하는 것은 너무 무모하다"고 건의했다.
(적의 1개연대가 올라가서 지키고 있는 고지를
아군 1개 대대가 공격해서 빼앗고 있다는 것도 기적이었다.)
젠킨스 군단장도 이 말을 인정하고 51연대를 배속시켜
사단 좌일선에 배치된 9사단 29연대도 백마고지쪽으로 투입시키도록 했다.
모든 것을 건 도박이었다. 포로의 진술에 의하면 적도 막대한 피해를 입어
공격부대를 340연대에서 334연대로 교체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마저도 많은 피해를 입자 적은 또 하나의 연대 342연대를 투입했다.
10월9일 간신히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찾은 백마고지였는데
적의 새로운 교체부대 342연대가 밀어닥치자
이미 만신창이가 된 아군은 적을 저지하지 못하고 붕괴되고 만다.
처음으로 아군의 붕괴가 시작되어 엄청난 낙오병이 발생되었다.
김동빈 부사단장이 길에 나가 붙들어 모은 병력만도 400명이 넘었다고 하니까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당시에 너무나 많은 병사들이
전사해 황급히 후방 신병교육만 받은 병사들을 급히 전투에 투입해서
적의 포격과 공격에 어쩔줄 몰라 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10월10일 상처받지 않은 29연대가 역습 백마고지를 다시 점령했다.
김종오 사단장은 즉각 28연대를 사단 좌측에 밀집배치해서 백마고지 방어를 돕게 했다.
(30연대는 전투초기에 막대한 피해를 입어 정비를 위해 뒤로 빠져 있었음)
적도 남는건 병력밖에 없는데 그 정도 피해에 그만둘 놈들이 아니었다.
10월10일 4시부터 역습을 시작,
이때부터 하루에 3번씩 고지의 주인을 바꿔가는 싸움이 계속된다.
김종오 사단장에게도 이제 결심을 해야 될 때가 왔다.
이렇게 적이 무차별적으로 인원을 투입해서 아군의 병력을 소모시키는 작전을 편다면
아무리 국군이 화력에 있어 우위에 있어도 백마고지 사수는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김 종오 장군의 나이는 32세. 군사교육이라고 받은 것은
일본군에서 몇 개월 동안의 장교교육을 받은 것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한국동란
개전이래 가장 잘 싸운 장군이 된 것은 참모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고
그 자신이 치밀한 전략가였고, 무식한 장군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 한국군의 장군들은 지나치게 "무식한" 작전을 감행했다.
마치 적이 아군의 꼭두각시 같이 움직여주길 바라는 작전들.. 예를 들어
서울 함락전 의정부에 나타난 채병덕은 무조건 전차에 육탄 공격을 감행하라!
고 했다. 그때 부대는 완전히 탄약이 고갈되어 수류탄조차 변변히 없었다.
결국 곡사포 장약을 화염병에 달아서 돌진했고 병사들만 죽어 나갔다.
"사수"란 말을 써놓고도 정작 자신들은 사단이 무너져서 자결한 사람은
정말 손에 꼽을 만하다.
김종오 장군은 달랐다.
그는 칼로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도 싸울 줄 아는 꾀돌이 장군이었다.
김종오 장군은 참모들과 한참 이 상황을 이야기했다.
"이런식으론 백마고지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제 앞으로 모든 화력을 동원해
한번 더 공격해서 적을 괴멸시키고 다신 빼앗기지 않는 작전을 세운다.
적에게 최대한의 인원 출혈을 강요한다."
참모들과의 토의 결과 김사단장은 백마고지의 터줏대감이던 30연대의 김영선 대대를
이번 역습작전에 동원하기로 결심했다.
김영선 대대는 중공군의 공격전에 백마고지를 지키고 있다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정비를 위해 물러나 있었다.
김영선 대대는 백마고지의 지리에 익숙해 있었고 3일간의 휴식으로 사기도 드높았다.
공격명령을 받은 김영선 대대장은 김종오 사단장이 방문했을때
"고지 점령을 장담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점령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해 김장군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김종오 장군은 또 미군에게 뻔뻔하게 군 것으로도 유명하다.
원래 한국군 장군들이 미군에게만은 좀 설설기는 스타일이 몇몇 있었는데,
김종오 장군은 미 제 9군단장에게 한번 왕창 대들었다.
9사단이 배속되어 있는 군단장인 젠킨스장군이 사단을 방문한 어느날
"이거, 사단에 온 고문관이 포탄 수를 제한하여 이렇게는 더 못싸우겠다."고
큰소리를 버럭 질렀다.
별 말 아닌 것 같지만 사실 32세의 사관학교 출신도 아닌 우습게만 보이던
김종오 장군이 군단장에게 정면으로 개긴 말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9사단을 지원하던 포병은 거의 미군이었고, 9사단의 포탄도
젠킨스가 파견한 고문단(미군)이 맘대로 하게 되어 있었다.
사실 이말은 "군단장. 당신이 보낸 고문단 때문에 더러워서 못 싸우겠다."란 소리다.
원래 배속 부대는 다루기가 까다롭다. 더군다나 인종적으로도 한국군을 우습게 보던
미군이니까 포탄을 잘 주지 않았던 지도 모른다.
하여간 젠킨스 군단장도 좀 찔렸는지 "무제한으로 사격하라"고 포병 고문단장을
질책했다. 그리고 옆에 따라온 군단 포병단장(통상 1개군단 직할로 포병여단이 있음)은
이쁘게 보일려고 그랬는지 자신의 전속부관까지 딸려 보내주고
김종오 사단장이 말하면 언제든지 포격해 주었다.
그리고 아예 바로 옆에 있던 미 제 2사단의 화포까지 끌어들여
200문의 화포로 TOT사격을 가한 일도 있다.
10월 12일 08시 김영선 대령이 지휘하는 제 30연대 1대대는 공격개시선을 박차고
돌진을 개시했다. 김영선 대대의 공격개시 4시간전에 먼저 공격했던 29연대는
적진 40미터에서 적의 기관총 화망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때는 정말 전사자의 군번줄이 한 트럭분씩 나왔다고 한다.
하여간 이 말을 들은 30연대 1대대 병사들은 아예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는 생각을
포기한다. 인간 본연의 공포감 대신 실려내려가는 전우의 시체를 보면서
오직 증오만이 불타 오른다.
"젠장..죽을 바예야 한발이라도 더 맞고 고깃값이라도 하고 죽는다."는 말까지 유행했다.
최초 29연대 격퇴후 한숨놓고 있던 적에게 김영선 대대(30연대 1대대)는
지원 포격없이 기습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2시간후 또 다시 중공군의 중기관총에서 뿜어대는 화망에 전사자가 속출하고
정상 코앞에서 공격은 멈추어 서고 만다.
이 광경을 본 30연대장은 2대대를 1대대의 우측에 투입, 증원했지만
이미 기습효과가 상실된 후여서 피해는 늘어만 갔다.
제1대대의 선봉3중대가 진격이 부진하자 대대장은 바로 뒤에 있던 1중대를 돌격시켰다.
1중대도 그러나 돌격선(적에게 육박전을 벌일 만큼 가까운 거리쯤 됨) 바로 직전
3명의 소대장이 쓰러지고 1개중대에 불과 30여명의 병사만이 살아 남았다.
1중대장의 교대요청 명령에 대대장은(그도 300m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막바지에 무슨 교대냐! 우린 이미 죽기로 각오하지 않았나!"라고 말했다.
사실 교대해 줄 병력도 없었다. 대대장이 돌격선에서 300미터까지 온 것은
정말 자결하겠다는 뜻이다. 그만큼 결의는 비장했다.
사태가 점점 악화되어만 가고 있었을때 30연대 1대대 1중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강승우 소위는 오귀봉, 안영권 두 병장에게 "돌진하자"며 수류탄을 꺼내 들었다.
망할 놈의 중기관총을 부수지 않고는 여기까지 올라오며 죽어간 전우들의 피에게
뭐라고 할 말이 있을 것인가!
세명은 미친듯이 불을 뿜는 적의 중기관총 좌로 돌진했다.
잠시후 연기만이 솟아 오르고 적의 기관총은 멈췄다.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나머지 대원은 일제히 돌격했다.
그리고 완전히 중공군을 싹 쓸어 버리는 전과를 올렸던 것이다.
고지에 돌입한 1중대원은 불과 10명.
중대장은 중상을 입고 장교는 전사 혹은 부상을 입었다.
중대원들이 3용사의 행방을 찾아냈을땐
이미 온 몸에 기관총탄이 박힌채 산화한 후였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적이 아직 점령하고 있는 낙타능선까지 점령해야 백마고지를 지킬 수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1대대가 공격했지만 원낙 적의 저항이 거세어 공격은 멈췄다.
하지만 다음날 사기가 오른 29연대가 재차 공격을 감행,
낙타능선의 적을 괴멸시켜 버렸고 백마고지는 아군이 완전히 점령하게 된다.
백마고지의 승리로 국군은 철의 삼각지대를 차지했고
적의 정예 2개사단을 재기불능으로 만들었다.
알 림 : 없는 자료실력 으로나마 나름대로 구성을 해봤습니다...
어떻게 보셧는지는 모르지만...인터넷에서 퍼온것도 있구...
제가 알고 있는 자료를 올린것두 있구...
잘 보셧으면 합니다 슈퍼스탈리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