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개전 사흘만에 서울을 내준 것을 두고 흔히 기습남침이었기 때문이었다고들 한다. 우리는 한 대도 보유하지 못한 탱크를 북한군이 무려 수백 대나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정작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역시나 기습남침에 의해 전투가 벌어진 동부전선을 보면 역시 독립전차연대의 지원을 받으며 2, 7, 15사단의 세 개 사단이 기습적으로 공격해 들어오고 있었지만, 정작 북한군 7사단이 6사단 7연대가 지키고 있던 춘천에 진입한 것은 개전 이틀뒤인 6월 27일이었고, 홍천에서도 역시 6사단 2연대가 6월 30일까지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함으로써 1사단과 8사단이 각각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하여 전열을 정비하고 전선을 구축하기까지 시간을 벌어주었었다. 이로써 국군의 주력을 한강 이북에서 포위 섬멸하겠다던 최초의 계획이 결정적으로 틀어지니, 김일성 자신이 바로 이곳에서의 작전실패가 전쟁의 결과를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았음을 인정했을 정도였다.
같은 기습남침이고, 같은 전차의 지원을 받는, 같은 화력과 병력에서 우세한 적을 맞아 싸운 전투였다. 그러나 서부전선은 한 순간에 뚫려 버렸고, 동부전선에서는 오히려 서부전선의 붕괴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후퇴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큰 차이를 불러온 것일까?
가장 결정적인 것은 역시 개전 몇 달 전부터 전방으로부터 계속해서 보고되고 있던 개전쟁후에 대한 대처였다. 당시 6사단장은 김종오 소장이었는데, 역전의 노장이기도 했던 김종오 소장은 이러한 보고들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당시 국군은 군량미의 부족을 이유로 병사들의 외출외박을 적극 권장하고 있었는데, 그런 이유로 서부전선에서는 상당수 장병들이 외출과 외박을 나가 있던 6월 23일, 예하 지휘관들에게 "상황이 긴박하다. 모두 복귀하여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라!"고 명령하여 개전 5시간 전 병력을 모두 부대로 복귀시켜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실 이게 가장 컸다. 당시 북한군의 기습남침에 대해 완편된 부대를 가지고 조직적인 방어전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상 이들 6사단이 전부였으니.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무리 미리 병력을 복귀시켜 전쟁발발을 준비했다고 하더라도 서울이 함락당하기까지 사흘이면 외출외박을 나가 있던 병력을 복귀시키고, 부대를 정비하여 방어전을 펼치기에 빠듯하지만 충분한 시간이다. 더구나 서울로 이어지는 통로라 이쪽에는 1사단과 7사단이 주둔하여 서울을 방어하고 있었고, 서울에는 다시 수도경비사령부가 있었으며, 후방으로는 대전의 2사단, 광주의 5사단, 대구의 3사단이 유사시 서울을 지키기 위해 예비대로서 투입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히려 전력만 놓고 보자면 동부전선보다도 훨씬 유리한 조건에 놓여 있던 곳이 바로 개성, 의정부, 서울로 이어지는 서부전선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당시 서울 북쪽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한 마디로 뻘짓들 하고 있었다. 다른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뻘짓. 비슷한 말로 삽질이랄까? 도저히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당시 6월 25일에서 6월 28일 사이 서울 북쪽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임진교 폭파 실패하든가, 외출외박을 나간 병력의 미복귀로 인한 전력의 열세에 따른 후퇴 같은 것은 사실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다. 전력에서도 우세했고, 더구나 북한군의 주력은 중국공산당 팔로군에 소속되어 국공내전을 치른 바 있던 역전의 정예들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6월 25일 새벽 6사단 7연대장이던 임부택 중령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투덜거리며 잠에서 깬 채병덕은, 의정부에 있던 7사단 사령부에 도착하여 북한군의 전면남침을 확인하자마자 수경사 예하로 배속되어 있던 5연대와 18연대, 여기에 육본의 배속명령을 받고 서울로 올라와 있던 2사단 5연대를 7사단에 배속시켜버린다. 얼핏 가용한 전력을 집중하여 방어전을 펼치고자 하는 꽤나 합리적인 명령으로 보일 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그냥 당황한 마음에, 하여튼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7사단에 몰아주어 상황을 모면하고자 했던 - 말 그대로 묻지마 명령에 불과했다.
그것은 당시 전쟁발발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와 있던 이형근 2사단장을 만나고서도 바로 드러나는데, 그 자리에서 채병덕이 내린 명령이 2사단으로 하여금 의정부로 향하게 해, 거기서 반격작전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광주와 대구의 각 5사단과 3사단에도 출동명령을 내리고 있었는데, 한 마디로 되는대로 가용한 병력을 불러들여 전선으로 밀어넣는 -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축차투입의 명령이었다.
군을 주둔지에서 이동시키고 작전에 투입하는 데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특히 원래 주둔하던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생소할 수밖에 없는 지리적 조건과 제반환경, 그리고 전장상황등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와 더불어 구체적이고 상세한 작전계획이 뒤따라야 한다. 다른 부대가 더 있으면 이들과의 유기적인 작전을 위한 계획 역시 필수적이고. 특히 우세한 적의 기습적인 선제공격에 대해 방어전을 펼칠 것이라면 더욱 병력을 집결시켜 전력상의 격차를 최소화시키고,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작전계획과 실행을 통해 전술적, 전략적 상황을 최대한 유리하게 이끌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채병덕의 저러한 명령은 그러한 군사상의 상식따위는 깡그리 무시한, 그냥 알아서 이동한 다음 알아서 투입되어서 알아서 막으라는, 묻지마 방어작전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미 우리가 역사를 통해 알고 있는 바다.
당연히 이형근 준장은 그러한 채병덕 참모총장의 명령에 반대했다. 이형근만이 아니라 김석원, 이범석, 김홍일 같은 군의 숙장들도 대부분 채병덕의 명령이 축차투입을 명령하는 잘못된 것임을 들어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채병덕은 그러한 자신의 명령에 반대하는 제장들에게 "대통령의 명령"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뽑아들었다.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명령을 들어 권위로서 압박하여 강제로 따르도록 한 것이다. 어리고 경험없는 놈일수록 뒷배만 믿고 설친다더니 채병덕이 딱 그 꼬라지였던 것이다. 결국 군법재판까지 나오고, 계급이 깡패라고 계급에서까지 밀리면서 이형근 준장은 의정부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여기서 유재흥이 당시 7사단 3연대장으로 있던 이형근 준장의 동생 이상근 중령을 들먹이며 재차 요구하자, 어쩔 수 없이 그토록 반대했던 축차투입에 자신의 2사단을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좋았다. 7사단이 동두천을 점령하기까지 북한군의 움직임은 상당히 소극적이었고, 그래서 단 몇 시간만에 동두천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을 때에는 "국군의 총반격으로 북한군이 물러가고 있다.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것이다."라며 기세등등 언론을 통해 큰소리치기도 했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완편된 전력도 아닌 2사단이 포천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지리멸렬 패주하면서, 퇴각하는 2사단의 꼬리를 물고 의정부로 진입한 북한군에게 그만 오히려 의정부를 점령당하고 만다. 7사단의 주력이 동두천에 남아 있는 상황에 그 퇴로랄 수 있는 의정부가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진 것이다. 그 뒤는 그야말로 지리멸렬, 의정부를 뚫고 창동으로 탈출한 이외의 나머지는 삼송리로 퇴각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국군 7사단은 사실상 해체되어 버린다. 참고로 당시 7사단장 유재흥은 2군단과 3군단도 역시 해체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는데, 그 공을 인정받아 국방장관에까지 오르고 있기도 하다. 물론 저 두 개 군단은 국군 군단이다.
아무튼 이렇게 어이없이 의정부가 함락당하자 채병덕은 그때 막 청주에서 올라온 2사단 25연대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의정부 탈환을 명령한다. 축차투입의 결과 의정부까지 잃고 두 개 사단이 사실상 와해되었음에도 또다시 한 개 연대로서 축차투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두 개 사단으로도 불가능했던 일이 한 개 연대로 가능할 리 없어, 이미 연이은 패전으로 공황상태에 있던 이들 병력은 그대로 패주하여 미아리까지 후퇴했다가 미아리마저 잃으면서 서울을 완전히 적들에 내주게 된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다. 축차투입이 문제가 아니라 당시 서울을 점령하자고 투입한 북한의 주력이 너무 강했기에 그런 것이라고. 축차투입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불시에 기습남침을 한 데다, 전차까지 보유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실제 그런 식으로 채병덕을 옹호하는 사람도 있는데, 당시 미아리가 무너진 뒤에도 김홍일 소장을 중심으로 패주한 1, 2, 7사단, 수도사단의 병력을 규합하여 7월 3일까지 서울방어선을 유지했던 시흥전투지구사령부 앞에서 그러한 주장은 전혀의미가 없다.
이미 사기가 꺾이고 기세가 몰린 상황에서 패잔병을 이끌고도 그만큼 전선을 유지하며 유엔군이 개입할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면, 그 전에 아직 병력과 전력이 건재할 때 그들을 집결하여 더욱 효과적으로 더 오래 방어전을 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한강대교를 폭파할 일도 없었을지 모르고, 북한군과 남한군이 번갈아 점령하면서 그 점령지에서 끔찍한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 잘만 풀렸다면 바로 서울에서 북진하여 통일을 이루었을 수도 있고. 최소한 춘천 - 홍천지구에서 6사단이 보였던 만큼만 선전을 보였어도 한국전쟁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그러지 못한 것은, 당시 군을 움직이는 명령권자, 채병덕의 무능 때문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이제 서른 갓 넘은 애송이를 오로지 자기에게 듣기 좋은 말 잘 한다고 국방장관이라는 중요한 자리에 앉힌 이승만의 노망이었다. 그래놓고는 고작 한다는 소리가 기습남침이고 탱크가 없어서 졌다? 그러면 김홍일은 뭐고, 김종오는 뭔가? 임부택 중령의 6사단 7연대는 또 뭐고?
당시 기습선제공격을 받고 있던 국군의 입장에서, 더구나 전력의 열세가 확실하던 상황에서, 국군의 최우선목표는 적을 격퇴하는 것이 아니라 반격을 위한 준비가 갖추어질 때까지 전선을 유지하고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어차피 당장 이기기 힘들다면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여 적당한 곳을 골라 전선을 형성하고 후방의 병력이 증원되고, 외교적인 노력으로 다른 나라의 군사적 지원을 이끌어낼 때까지, 그럼으로써 적과의 전력적인 격차를 최소화하고 초반 기습공격으로 인한 충격이 상쇄될 때까지 버티면서 시간을 버는 것이 당시 국군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설사 그 전선이 적에게 돌파된다 할지라도 적에게 막대한 시간적 물적 피해를 강요함으로써 장차 전황을 국군에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 있었다. 춘천 - 홍천지구 전투가 바로 그 예가 될 것이다. 공격받는 입장에서는 적을 무찌르지 못해도 적의 진격을 지연시켜 작전계획 자체를 틀어놓는 것만으로도 전략적인 승리가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당시 국군의 수뇌부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다. 현실성 없는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같은 구호나 외칠 줄 알았지 당시 최전선에서 병사들이 느끼고 있던 당황과 공황과 그리고 전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무력하게 패주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오로지 적을 격퇴해야 한다는 유아적인 사고만으로 병력을 축차투입하여 나중에는 방어전을 수행할 병력마저 없어 한강다리를 폭파하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도주하는 지경에 놓이고 말았다. 분명 이것은 국군의 전략적 실패였다. 나아가 군 수뇌부, 국가 수뇌부의 전략적 실패이자 무능이고 무책임이었다.
역사상 하나의 전쟁이 어떠한 한 가지 무기에 의해 결정된 바는 없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는 미국조차 한동안 일본을 상대로 수세에 몰려야 했을 정도이지만, 그렇더라도 이미 전부터 수차례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결국은 지휘부의 무능이다. 무책임이다. T-34가 아니다. 권력에 아부할 줄이나 알았던 정치군인과 보급품 빼돌리는데나 열심이던 부패한 관료들이 저러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저들이야 말로 T-34나 야크전투기보다 더 위협적인 적이었다고나 할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소중한 목숨들이 그들으 무능과 무기력으로 인해 의미없이 죽어가야 했던가.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나서 더욱 출세하여 높은 자리에 올랐던 자들이 바로 그런 주제들이었기에 여전히 T-34가 무섭고 기습남침이 비겁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야 할 테니까. 그래야 자신들이 한 짓거리들이 지워질 테니까. 그래서 6월이면 슬프면서도 우습다. 과연 지금은 얼마나 다를까? 설마 아니기를 바라면서도...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