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리조나가 아직도 잠들어 있다...
1시간 50분 동안 계속된 진주만 기습 공격에서 일본군은
미군의 간담을 써늘케하는 승리를 거두고, 미 태평양 함대에 치명적인 대타격을 주었다.
1941년 12월 7일(미국시간) 정오까지 진주만 군항은 무력하게 되어 버리고
여름 구름처럼 피어 오르는 연기 속에 싸여있었다.
그 막대한 손실의 추산은 전함 8척, 순양함 3척, 구축함 3척, 보조 함정 8척,
총계 22척으로 30만톤에 이르고 있었다.
또한 히컴, 휠러, 그밖의 비행장이 파괴되고 하와이 주둔 미 육군항공부대의 231대중
98대가 격파되었다. 그것도 나머지 항공기 중에서 곧 출격하여 반격할 수 있는 것은
겨우 7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오아후 섬의 미 해군기의 반 수 이상도 격파 당하고
말았다.
군함 승무원의 손실 만해도 총계 1763명(민간인 제외)의 장교와 수병이 피해를 입었으며,
이 숫자는 일본군의 기습 직후의 집계였고 나중에 육상에서의 인적 손실까지 합치면
2335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이 숫자는 사망자의 집계이며 이 숫자보다 더 많은 장병이
부상을 당했다. 그 중의 대다수는 며칠 후나 또는 몇 주 후에 사망했다. 하지만 일부
군인들은 부상에서 완쾌하고나서 다시 전선으로 복귀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상이용사로서 고향에 돌아갔다
진주만으로부터 8km떨어진 지점에서 미군의 대공포 파편에 희생당한 민간인.
민간인 피해는 사망68명, 부상35명이었다
진주만 기습 공격의 성공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에의해
뛰어나게 개발된 항공전의 새 전술이 안겨준 직접적인 전과였다.
미 해군의 제독들은 수심이 얕은 진주만 군항의 수역에선
항공기가 공중에서 어뢰를 효과적으로 발사할 수 있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주장을 이번 기습으로 증명한 셈이다.
또 미 해군 제독들은 폭탄이 과연 엄청나게 두터운 전함의 갑판을 꿰뚫을 수 있을것인지
의심하고 있었다. 다시금 일본군은 그와같은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도 입증해낸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본군의 대승리는 결코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미 함대의 항공모함을 단 한척도 격파하지 못했다.
그것은 불원간에 그들을 파멸시키게 되는 강력한 무기를 살려준 셈이었다.
또한 진주만에서 연출된 끔직한 참상은 미 해군의 낡은 작전계획을 전부 버리게 하였다.
일부 미 해군 관계자들은 일본군이 많은 고철같은 구식 군함을 격침시켰을 뿐만아니라
고질적인 전함제일주의(거함거포주의)까지 효과적으로 타파해주었다고 인정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미 태평양함대에 소속했던 항모 엔터프라이즈, 렉싱턴, 사라토가 3척은
진주만에 정박 하지 않아 기습 공격을 모면했으므로 부득이 전함을 대신하여
태평양 함대의 주력함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항모 기동부대는 자동적으로 주요한
해군 무기가 되었으며 곧 미 해군은 그것을 대대적이고 위압적인 전투력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산호해 해전에서도, 미드웨이에서도, 과달가카날에서도, 라바울에서도,
트럭 제도에서도 항모 기동부대는 새 역사를 엮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진주만 기습 공격에 있어서 일본군은 큰 실수를 저질렀다.
먼저 조심성 많고 적극적이지 못했던 나구모 주이치 기동부대 사령관이
3차 공격대를 발진시키지 않았던 점,
일본군이 오아후 섬에 있는 미 해군공창(海軍工廠)과 그밖의 시설들을 파괴하지
않았던 것은 너무나도 중대한 실책이었다. 이 기계공장 시설은 군항에서 격침 또는
파괴된 군함을 수리하는데 있어 헤아릴 수 없으리만큼 귀중한 것임을 알아야했다.
게다가 미 태평양함대의 생명을 유지하는 피를 저장한 연료 탱크도 손을 대지 않고
고스란히 남겨두었다. 이들 탱크는 모두 지상에 있고, 따라서 극히 공격하기 쉬운
먹이였다. 만일 이 연료 탱크들이 폭파되었다면 미 태평양함대의 잔존 함정은 미 본토로
쫓겨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일본군은 몇 달간에 걸친, 오랫동안 태평양을 완전히 지배했을 것이다.
그 몇 달이야말로 동남 아시아 방면에 있어서의 일본의 지위를 크게 강화시켜 당시의
국제정세에 중대한 변화를 주었을 것이 틀림 없었다.
또 하나 미국의 행운 블로그 진주만 기습공격[9]에서 다룬 유조선 *쇼가 잽싸게
움직여 일본군의 공격을 피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포드섬의 연료저장고는
모두 날아갔을 것이다.
훗날, 진주만 기습공격 25주년 기념일에, 당시 일본 제1항공함대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전후 일본 항공자위대 막료장과 자민당 참의원을 지낸다)가
"진주만 기습공격이야말로 세계 군사사상 영구불멸의 대성공이었다"라고 자찬했다.
그러나 이어 "그것은 정치적으로는 커다란 잘못이었다. 왜냐 하면 그것이 마지막에는
일본의 항복을 가져왔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추락한 항모 아카기 탑재 a6m2제로 센 전투기 (ai-154. 조종사 타카시 히라노)
진주만에서 인양되는 99식 함상 폭격기
인양된 에이치 d3a1 "val" 99식 함상 폭격기.
진주만 공격중 일본군 항공기는 모두 29대가 격추당했으며 55명이 사망했다.
일본군 잠수함부대의 작전은 정말 형편없었다.
이(伊)호급 대형잠수함에 27척과 5척의 특수 잠항정(일본명칭-甲標的)들은
오아후 섬 주변에 배치되었으면서도 임무를 거의 완수하지 못했다.
진주만 내에 잠입한 특수잠항정에게 피해를 입은 미 해군 함정은 한척도 없었다.
그리고 마침 진주만으로 귀항 중이던 엔터프라이즈를 포착한 3척의 이호 잠수함은
지붕의 닭쳐다 보듯하여 엔터프라이즈를 살려보냈으며, 특수잠항정 4척은 격침,
1척이 나포되어 그 승무원 한명이 체포당했다.
모함인 이호급 잠수함 1척도 격침당했다.
죽은 특수잠항정 승무원 9명에게는 각각 최고훈장과 2계급 특진이 추서되었다.
아무튼 이러한 결과로 일본군 잠수함부대는 그 면목을 잃고 증강을 위한 예산도
얻지 못하여 전쟁말기에는 거의 대다수의 잠수함이 솔로몬 군도에서 고립된
일본군 수비대에게 물자를 수송하는 보급선의 역할을 맡는 수준으로까지 전락하고 말았다
수중에서 발견되어 인양되는 특수잠항정(1960년)
특수 잠항정 승무원중 포로로 붙잡혀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카마키 카즈오(참조)
일본기의 파편이 항내에 떠있다는 보고를 조사하기 위해 부설함 몽고메리는
구조정을 파견했다. 항공기가 떠있었고 부서진 한쪽 날개 근처에서 조종사가 수영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구조정은 접근하면서 항복을 권유했으나 조종사는 날카로운
눈초리 외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러므로 배를 접근시키면서 손짓으로 항복권유를
다시 되풀이 했으며 조종사를 배위로 끌어 올리려 했을 때, 상의에서 권총을 꺼내는 것이
포로가된 사카마키도 미군에게 제발 자기를 죽여달라고 부탁했다.
도쿄 대본영의 진주만 공격 대성공 발표에 들뜬 군중들은 거리에 모여 서서 국가인
기미가요를 합창했으며 궁성앞 광장에서는 수만명의 군중이 일제히 머리 숙여 절을 올렸다.
기동부대 귀환후 2주일간에 걸친 축제소동 속에서 야마모토 사령장관은 침묵했다.
온 일본이 열광적으로 축하한 것은 바로 그의 승리였지만, 야마모토는 신변의 기쁨에
들뜬 소란 속에서도 잠잠하기만 했다. 그는 누이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 드디어 전쟁은 시작되었다. 지금은 들떠 기뻐하고 있지만,
우리들이 지는 일이 있을 수도 있다"고 우려를 감추지 못하는 뜻으로 쓰고 있다.
진주만 공격 이전 만해도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미 해군 장교는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2월 7일 이후 그의 이름은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올랐다. 모든 미국인에게 있어 야마모토는 일본의 악(惡)을 대변하는 상징이자
기습 침략자였고 단지 진주만 공격을 계획했을 뿐만아니라 오만하게도
백악관에서 미국의 항복을 받으려고 한 사나이로만 보였다.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공격은 오히려 가장 무서운 적을 만들어내는 결과가 되어버린다.
진주만 모형 . 일본은 진주만 기습공격을 영화로 제작했다.
진주만 모형 . 일본은 진주만 기습공격을 영화로 제작했다.
얕은 수심에서의 작업이지만 압축공기를 사용하여 장시간 작업하기 때문에
체내 질소 축적은 피할 수는 없는 것이어서 감압절차는 필수적이다.
해군 다이버들의 전함 애리조나 조사작업. 진주만 기념관을 만들기위한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