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흉노와 훈족은 동일한 민족인가?
흉노족이 후일 유럽 역사에 등장하여 민족 대이동을 유발시킨 훈족과 동일한 민족인지의 문제는 지금도 극심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흉노와 훈의 상관 관계는 아시아 및 유럽 고대사의 이해에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지금까지 훈족의 기원에 대한 학자들의 주장은 매우 다양하였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훈족은 아시아 흉노족의 후예일 가능성을 더욱 높여 주고 있다. 터키 역사학계에서도 일반적으로 '흉노=훈' 동일론을 바탕으로 그들의 고대사를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한 근거로 많은 고전 자료들이 제시되고 있는데, 주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인 스트라보는 훈족의 위치를 그리스계가 세운 박트리아 왕국의 동쪽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 방향은 흉노족의 주거지와 일치한다. 또 1세기 후반의 지리학자인 오로시우스나 2세기 중엽의 지리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가 작성한 지도에 훈의 거주 지역으로 표시된 지점들이 중국의 자료에 보이는 흉노의 지역과 상당 부분 일치하고 있다.
더욱이 355~365년에 카스피 해와 아랄 해 사이에 존속하던 알란족이 외부의 세력에게 침공당했을 때, 중국의 위서에는 흉노에 의한 침공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그 당시 라틴 학자 마르셀리누스는 침공의 주인공을 훈족으로 묘사하고 있다.
동일한 사건에 대해 동서의 자료가 흉노와 훈을 같은 존재로 묘사한 또 다른 예는 북위의 고종에게 보내진 소그드 어 문서이다. 이 문서에는 중국 서진 시대 흉노의 대선우인 유연이 평양에서 황제라 칭하고, 그 아들 유총이 서진의 수도인 낙양을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포로로 잡힌 소그드 상인들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낙양을 공격한 흉노족을 훈족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더욱이 유명한 훈족의 왕 아틸라의 외모에 대한 기록을 보면 작지만 튼튼한 체격과 낮은 코, 양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 큰 머리 등 전형적인 동양계 인종의 모습이며 이로 말미암아 흉노와 훈족이 동일한 개체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2. 흉노족(훈족)과 한민족의 연관 관계는?
독일의 케이블 Tv에서 주장된 이른바 한반도에서 훈족이 출발했다는 가설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이미 한반도에서는 오래전에 농업 혁명이 이루어져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했으며 주민들은 유목 생활이 아닌 정주 생활을 하고 있었다. 더구나 유럽까지 이동해 가기에는 험난한 지리적인 여건 이오에도 선비, 거란, 유연 등 극복해야 할 장애가 너무나 많았다.
또, 훈족이 유럽에 등장하는 서기 4세기 후반 한반도 북부에서는 광개토 대왕이 등장해 고구려가 동북아 최강국으로 성장하는 와중이었는데 구태여 고구려인들이 머나먼 땅인 유럽까지 가야 했을까?
단, 그렇다고 한민족과 훈족의 연관성을 완전히 부정해 버릴 순 없다.
첫째, 아퀼레이아에 있는 크리프타 아프레시 교회에 그려진 벽화에 보면 추적해 오는 로마 기병을 향해 몸을 비틀며 화살을 날리는 훈족 기병이 등장하는데 사용하는 활의 형태가 유럽인들이 쓰던 단순한 직궁이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사용되던 만궁이다.
그리고 만궁 중에서도 부여와 고구려에서 쓰이던 예맥각궁과 그 형태가 매우 흡사하다. 맥궁이라고도 불렸던 예맥각궁은 당시 한족이나 거란, 여진이 사용하던 활과는 달리 비교적 소형인 단궁에 속하며, 활이 휘어지는 형태가 완만한 'C'자가 아니라 'ㄷ'자에 가까운 급격한 각도를 그리게 되는 점에서 다른 활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유럽이나 터키의 역사가들은 훈족을 투르크 계열이라고 주장하지만, 훈족의 활은 투르크 계열의 활처럼 끝이 바깥쪽으로 휘어져 나가 있지 않다.
둘째, 유럽의 사료에 따르면 훈족들은 휴대용 솥을 말 안장 뒤쪽에 묶고 다녔다고 하는데 이 모습을 정확히 보여주는 유물이 경주에서 발굴되었다. 우리도 익히 아는 형태의 신라 토기 기마인상인데 말 안장과 등자의 형태도 유사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말 엉덩이 부위에 솥이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셋째, 훈족들은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편두라고 해서 끈으로 머리르 묶어 길게 늘렸는데 이러한 풍습은 오늘날 몽골에서 프랑스에 이르기까지 훈족이 살았던 지역에서 골고루 발견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풍습은 고대 신라와 가야에도 있었다.
넷째, 기원전 3세기경 흉노족의 사회 조직에서 보면 군주인 선우를 좌현왕, 우현왕 양인이 보좌하고 있는데, 백제의 경우 기원후 5세기까지도 좌현왕, 우현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또 칸khan이란 칭호도 서기 4세기 유연의 지도자 사륜이 처음 사용했다고 하지만 이미 그보다 앞서 신라의 마립간, 가야의 구지간, 부여의 고두막한 등 한민족 계열의 왕조에서도 칸이란 호칭은 널리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혹시, 부여와 고구려가 세워지기 이전 한민족과 흉노는 같은 문화권에 속해있다가 서로 분열되어 갈라져 나온 것이 아닐까?
참고로 특이할 만한 사실은 고조선과 흉노가 충돌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1. 흉노와 훈족은 동일한 민족인가?
흉노족이 후일 유럽 역사에 등장하여 민족 대이동을 유발시킨 훈족과 동일한 민족인지의 문제는 지금도 극심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흉노와 훈의 상관 관계는 아시아 및 유럽 고대사의 이해에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지금까지 훈족의 기원에 대한 학자들의 주장은 매우 다양하였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훈족은 아시아 흉노족의 후예일 가능성을 더욱 높여 주고 있다. 터키 역사학계에서도 일반적으로 '흉노=훈' 동일론을 바탕으로 그들의 고대사를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한 근거로 많은 고전 자료들이 제시되고 있는데, 주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인 스트라보는 훈족의 위치를 그리스계가 세운 박트리아 왕국의 동쪽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 방향은 흉노족의 주거지와 일치한다. 또 1세기 후반의 지리학자인 오로시우스나 2세기 중엽의 지리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가 작성한 지도에 훈의 거주 지역으로 표시된 지점들이 중국의 자료에 보이는 흉노의 지역과 상당 부분 일치하고 있다.
더욱이 355~365년에 카스피 해와 아랄 해 사이에 존속하던 알란족이 외부의 세력에게 침공당했을 때, 중국의 위서에는 흉노에 의한 침공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그 당시 라틴 학자 마르셀리누스는 침공의 주인공을 훈족으로 묘사하고 있다.
동일한 사건에 대해 동서의 자료가 흉노와 훈을 같은 존재로 묘사한 또 다른 예는 북위의 고종에게 보내진 소그드 어 문서이다. 이 문서에는 중국 서진 시대 흉노의 대선우인 유연이 평양에서 황제라 칭하고, 그 아들 유총이 서진의 수도인 낙양을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포로로 잡힌 소그드 상인들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낙양을 공격한 흉노족을 훈족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더욱이 유명한 훈족의 왕 아틸라의 외모에 대한 기록을 보면 작지만 튼튼한 체격과 낮은 코, 양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 큰 머리 등 전형적인 동양계 인종의 모습이며 이로 말미암아 흉노와 훈족이 동일한 개체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2. 흉노족(훈족)과 한민족의 연관 관계는?
독일의 케이블 Tv에서 주장된 이른바 한반도에서 훈족이 출발했다는 가설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이미 한반도에서는 오래전에 농업 혁명이 이루어져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했으며 주민들은 유목 생활이 아닌 정주 생활을 하고 있었다. 더구나 유럽까지 이동해 가기에는 험난한 지리적인 여건 이오에도 선비, 거란, 유연 등 극복해야 할 장애가 너무나 많았다.
또, 훈족이 유럽에 등장하는 서기 4세기 후반 한반도 북부에서는 광개토 대왕이 등장해 고구려가 동북아 최강국으로 성장하는 와중이었는데 구태여 고구려인들이 머나먼 땅인 유럽까지 가야 했을까?
단, 그렇다고 한민족과 훈족의 연관성을 완전히 부정해 버릴 순 없다.
첫째, 아퀼레이아에 있는 크리프타 아프레시 교회에 그려진 벽화에 보면 추적해 오는 로마 기병을 향해 몸을 비틀며 화살을 날리는 훈족 기병이 등장하는데 사용하는 활의 형태가 유럽인들이 쓰던 단순한 직궁이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사용되던 만궁이다.
그리고 만궁 중에서도 부여와 고구려에서 쓰이던 예맥각궁과 그 형태가 매우 흡사하다. 맥궁이라고도 불렸던 예맥각궁은 당시 한족이나 거란, 여진이 사용하던 활과는 달리 비교적 소형인 단궁에 속하며, 활이 휘어지는 형태가 완만한 'C'자가 아니라 'ㄷ'자에 가까운 급격한 각도를 그리게 되는 점에서 다른 활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유럽이나 터키의 역사가들은 훈족을 투르크 계열이라고 주장하지만, 훈족의 활은 투르크 계열의 활처럼 끝이 바깥쪽으로 휘어져 나가 있지 않다.
둘째, 유럽의 사료에 따르면 훈족들은 휴대용 솥을 말 안장 뒤쪽에 묶고 다녔다고 하는데 이 모습을 정확히 보여주는 유물이 경주에서 발굴되었다. 우리도 익히 아는 형태의 신라 토기 기마인상인데 말 안장과 등자의 형태도 유사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말 엉덩이 부위에 솥이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셋째, 훈족들은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편두라고 해서 끈으로 머리르 묶어 길게 늘렸는데 이러한 풍습은 오늘날 몽골에서 프랑스에 이르기까지 훈족이 살았던 지역에서 골고루 발견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풍습은 고대 신라와 가야에도 있었다.
넷째, 기원전 3세기경 흉노족의 사회 조직에서 보면 군주인 선우를 좌현왕, 우현왕 양인이 보좌하고 있는데, 백제의 경우 기원후 5세기까지도 좌현왕, 우현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또 칸khan이란 칭호도 서기 4세기 유연의 지도자 사륜이 처음 사용했다고 하지만 이미 그보다 앞서 신라의 마립간, 가야의 구지간, 부여의 고두막한 등 한민족 계열의 왕조에서도 칸이란 호칭은 널리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혹시, 부여와 고구려가 세워지기 이전 한민족과 흉노는 같은 문화권에 속해있다가 서로 분열되어 갈라져 나온 것이 아닐까?
참고로 특이할 만한 사실은 고조선과 흉노가 충돌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각궁은 시위를 당겼을 때 'ㄷ'자 형태와 비슷하다
네이버 블로그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