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중 미국은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함대를 형성하였다.
재래식 항공기와 일본의 가미가제 자살 특공기에 의해 파손되고
얼마쯤 침몰됐을지라도 에* 급 항공모함 그 자체의 생존력은 높았다.
항모의 생존성의 주요한 요인으로 먼저 과학적 설계와 우수한 건조능력과
당시로서는 세계최강의 성능을 자랑하는 레이더를 이용한
최신식 사격 통제 시스템, 병사들의 감투정신이 크게 작용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요인중 하나는 항모에 가장 큰 위협적 존재였던
일본기들을 태평양 상공에서 효과적으로 제거시켰던 그루만사의 f6f 헬캣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세계의 군용 항공기들은 제트 시대를 맞이하게 되어
비행속도 또한 당연히 빨라졌다. 소련은 폭격기를 이용하여 200마일 범위 내의
목표물을 공격할 수 있는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었고,
보다 더 긴 사정거리를 보유한 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소련의 로켓 추진 시스템 기술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고,
탄두에 핵폭탄을 탑재하여 발사하는 실험도 추진하고 있었다.
소련 장거리 폭격기 tu-16 배저a(badger-a)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항모기동부대 가까이에 접근하는 일본기를 요격하면 되었지만
이제는 장거리 폭격기가 수백 km떨어진 곳에서 공대함 미사일을 발사하기 전에
격추시켜야만 하고, 잠수함과 함정에서 발사되는 크루즈 미사일에 대한
위협도 증가하고 있었다.
1950년대 미 해군은 맥도넬 사와 f4h-1(f-4a 팬텀)을 개발하고 있었고,
이후 팬텀은 훌륭한 전투기로 탄생하고 있었다.
그러나 팬텀이 고성능의 전투기이긴 하지만
동시에 여러 목표물을 공격하기에는 역 부족이었다.
해군은 함대를 보호하기위한 방법을 시급히 개발해야했다.
당시 항공모함은 핵을 운반할 수 있는 항공기를 탑재한 매우 위협적이고
우수한 전략적 수단이었기 때문에 소련은 미사일을 탑재한 장거리 폭격기를띄워
미국 항모기동부대를 일거에 격멸한다는 전략을 수립해놓았다.
미국으로서는 미사일을 탑재한 항공기가 미사일을 발사하기 전에 찾아내어
격추시킬 수 있는 장거리 수색, 추적 능력을 갖춘 레이더를 탑재한,
장거리 공대공 미사일 발사능력을 갖춘 함상 전투기 개발을 서둘렀고,
그래서 개발된 항공기가 더글라스사의 f6d 미사일리어(missiller)이다.
이것은 당시 f4팬텀이 매우 우수한 전투기였으나 연료 소모량이많아 장시간
초계비행이 어려웠기 때문에 속도를 희생하고 장시간 체공이 가능한
대안을 모색하다 더글라스사의 제안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1957년, 해군은 함대방공 전투기(fleet air defense fighter - fadf)개발과 동시에
미사일, 사격통제 시스템의 개발과 도입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1959년, 더글라스 사의 안을 받아들였고,
장거리 공대공 미사일(xaam-n-10 이글) 개발은 벤딕스와 그루만 사가
공동으로 맡기로 결정 되었다. 벤딕스 사가 계약상 원청업체이긴 했지만
미사일 추진체를 담당한 그루만 사가 더 많은 분야의책임을 지고있었다.
더글라스가 제안한 모델 d-766(f6d-1)은 f3d
스카이나이트보다 좀더 큰 기체로서 마하 0.8의 아음속이며 본격 전투 능력은 배제된
대신 최대 8기의 벤딕스 xaam-n-10 이글 공대공 미사일로 무장하게될 계획이었다.
연료 소모를 줄여 장시간 체공하기위해
엔진은 플랫&휘트니 tf30-p-2 터보 팬 엔진 2기를 탑재하였고,
웨스팅하우스사의 an/apq-81레이더를 장비하였다.
1956년부터 개발되어온 이 레이더는 220km범위를 정밀 수색할 수 있으며,
16개의 목표물을 추적하여 그 중 8개의 목표물에 대하여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이글 미사일은 주익 아래에 6기, 동체 아래에 2기를 장착하게 된다.
이글 미사일의 길이는 4.9m이며 무게 약 582kg,
마하 4.0의 속도로 160km이상의 사정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1960년1월부터 개발이 시작된 핵 탄두도 탑재하도록 계획되었으나
이 계획은 6월에 취소되었다.
그리고 미사일 내부에는 보잉 사에서 im-99미사일에 사용하기 위해개발 중이던
펄스 도플러 목표물 탐색 레이더가 탑재되어 스스로 목표물을 찾아가도록 설계되었다.
f6d-1 미사일리어는 함대로부터 200km 이상의 먼 거리까지 비행하여
최대 6시간 동안 초계비행을 해야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f6d도입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자기방어능력이 부족하며,
느린 속도, 기동성의 빈약을 문제 삼았으며 특히 오로지 함대방공 한 가지
임무만을 위해서 운용하기 때문에 예산만 낭비하는 결과가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f6d-1
이렇게 찬반논란을 거듭하다가 1960년 12월, 결국 f6d 개발 계획은 전면 취소되었다.
효용성에 대한 조사 때문에 취소가 미루어졌던 이글 미사일 개발마저도
1961년4월25일에 취소되었으며, 동시에 개발 중이던 휴즈 사의 사격 통제 시스템 개발도
취소되었다. 이렇게 함대 방공 전투기(fadf)사업계획은 공식적으로는
완전 백지화되었지만 이 미사일에 사용된 기본적 개념은 그대로 유지되어
사실상 개발이 완전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이 이글 미사일은 나중에 xaam-n-11(aim-54a)피닉스 공대공 미사일로,
휴즈 사는 an/awg-9 미사일 사격 통제 시스템을 개발하게되는 것이다.
1960년 봄, 공군은 f-105 선더치프의 후속기로서
속도 마하 2.5의 장거리 저공 침투용 전투기 개발 계획인
sor 183(specific operational requirement)을 가동하고 있었다.
공군이 생각하고 있었던 이 기체는
장거리 비행과 대량의 폭탄을 탑재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전투기라기 보다는
전략 폭격기에 가까운 것이어서 기체 크기가 좀 더 대형화될 것이 확실했다.
1961년,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예산 절감을 위하여
공군(sor 183)과 해군(fadf)이 각자 추진하던
차기 전투기 개발계획을 tfx(tactical fighter, experimental)로 통합하여
양 군이 공동개발하도록 지시하게된다.
그러자 1961년8월,
해군은 완전히 그 성격이 다른 해군과 공군의 기체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tfx계획은 해군에 적합하지 않다고 반발했다.
공군이 생각하는 기체는 너무 무겁고(약34000kg)
커서(해군은 전장이 총 17m이상이면 엘리베이터 운용이 불가능하다 주장)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하는 항모에서는 운용상 맞지 않다 주장했다.
또한 서로 원하는 탑재 레이더 크기도 너무 달랐다.
(공군-직경 38인치, 해군- 직경 48인치의 레이더를 요구)
이것은 공군은 저공으로 침투하여 폭격하려는 목적이었고,
해군은 제공과 함대방공 목적의 레이더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무게 25000kg,
직경 38인치의 레이더로 절충안을 마련하였고, 해군은 마지못해 이에 따라야했다.
1961년10월1일,
사업 계획이 공표되어 제안 요구서가 확정되어 6개 회사가 경쟁에 들어갔으며
주 사업자로 제네럴 다이내믹스와 그루만이 최종확정 되었다.
이리하여 a6d-1 미사일리어에 탑재하기로 되었던 tf30엔진에
애프터버너를 추가한 tf30-p-1엔진을 2기탑재한 병렬 복좌형,
가변익 기술이 도입된 f-111 아드바크가 제작되게된다.
tfx의 해군형 기체(f-111b)를 담당한 그루만은 ff, f2f, f3f복엽기를 비롯하여
2차대전 당시에는 f4f 와일드캣, f6f 헬캣을, 전후에는 f8f 베어캣, f9f 팬서
그리고 팬서에 35도 후퇴익을 채용한 걸작기 f9f-6 쿠거를,
그 개량형인 f9f-8을 무려 1200기나 생산하여 오랜 기간동안
미 항모갑판을 장악했었던 해군 함재기 제작에 전문적인 기술을 지닌 회사였다.
그러나 1953년 이후부터 경쟁력을 잃기 시작했다.
1953년에는 그루만 디자인 97형이 보우트 사의 f8u 크루세이더에게 패배하였고,
심지어 디자인 98(f11f 타이거)도 f8u 크루세이더에 밀려 생산 댓수를 삭감당했던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1955년에도 디자인 118을 내놓았으나
f4h 팬텀을 제안한 맥도넬 사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루만 f8f-1 베어캣
그루만 f9f 팬서
그루만 사의 캣- 고양이 시리즈 기체들
이러한 실패들을 만회하기위해 f-111이 아닌
다른 디자인의 항공기를 개발하고 있었던 그루만 사였지만
정치가와 관료들의 결정에 따라 묵묵히 f-111을 개발해야만했다.
그루만 사는 xf10f-1재규어(웨스팅 하우스 aj40-we-6 터보 제트엔진,
an/apq-41 공대공 레이더, 20 mm 기관포 탑재)를 제작하면서
얻게된 기술적 경험들을 f-111과 f-14 제작 동안 유용하게 사용하게된다.
1965년5월18일, 첫 비행에 나서게된 f-111이었지만
설계 변경등의 요인으로 인해 당초 계획된 무게를 심각하게 초과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로서 해군형인 f-111b는 무려 31750kg에 육박하는 중량을 가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항모의 비행갑판에서 연속된 이착함이 어려워졌다.
여기에다 엔진마저도 문제를 일으켰다.
그루만 사는 중량문제를 해결하기위한
무게개선 프로그램(wip-weight improvement program)을 가동하여 어느정도
무게를 감소시키긴 했지만, 이 때 그루만 사는 제네럴 다이내믹스의 공군형 f-111a는
몰라도 해군형 f-111b는 결코 개발에 성공할 수 없으리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수석 디자이너 마이크 필리챠를 선두로하여 대체안을 연구하도록 결정했다
공군형 f-111a 아드바크
2편 해석중입니다 ㅡ,.ㅡ;; 영문자료라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