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장진호 포위망 돌파 ... (7부)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07.25 21:4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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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군과 미 제10군단으로 하여금 북한군을 포위,

격멸하여 전쟁을 승리로 종결지으려던 유엔군의 크리스마스공세는

중공군의 전면개입이라는 예기치 않았던 사태 발생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이미 공격준비를 완료한 중공 제4야전군의 18개 사단은 25일 밤부터

서쪽의 제8군에 대해서 공격을 개시하여 그 주공을 덕천지역으로 지향함으로써

제8군의 우측방을 위협했다. 그리고 중공 제3야전군 예하 12개 사단은 27일 밤부터

제1해병사단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긴 애로(隘路:좁고 험한 길)상에서

진지 사이를 차단하고 포위했다.

여기서 유엔군은 작전방침을 공격에서 방어로 전환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무렵의 장진호부근의 전황에 관해서 북한군 史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서부전선의 반격과 더불어 동부전선 장진호지역의 인민군과 중공군의

반격이 11월 27일에 개시되었다.

장진호 반격은 처음부터 어렵고 치열했던 것이 특징이었다.

인민군 장병은 혹한과 풍설을 헤치고 해발 1000m의 험준한 산을 돌파하면서

작전을 해야했다. 11월 27일 밤, 장진호 서쪽과 서남지역에서 공세로 전환한

인민군과 중공군의 연합부대는 유담리와 사웅령의 유엔군에 대해서 강력한 타격을

가함과 동시에 양쪽에서 하갈우리의 유엔군을 압박했다...

중공군부대는 하갈우리 남방지역에서 유엔군을 공격함과 동시에

장진-함흥간의 도로를 여러 곳에서 차단하여 유엔군의 증원과 철수를 저지했다.

이리하여 장진호 일대에서 미 제10군단 예하의 주력부대는 우리에게 포위되었다."

 

 

전세계의 이목이 장진호에 집중되었다.

일본 아사히 신문은 1950년 12월 1일 "미 해병 고립되다"라는 제목으로

미 해병대는 30일 장진호지역에서 중공군에 포위 고립되었다고 보도했다.

미국 신문들은 일제히 장진호 포위 기사를 내보냈고, 급기야  "해병대원 전멸"이라는

뜬금없는 소문마저 퍼지자 해병대 사령부에는 해병대원의 가족들로부터

문의 전화가 쇄도하여 교환대는 마비될 지경이었다.

 

맥아더 원수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최악의 경우 원자폭탄의 사용을 고려해보라는,

이에 트루먼이 원자폭탄의 사용도 검토대상이라 말하자 전세계가 3차대전 발발을

염려하게 되었다. 이렇게되자 12월4일 영국 애틀리 수상이 미국으로 날아가 핵폭탄

사용을 만류하고 나서는 등  전세계가 한반도를 지켜보고 있었다.

 

 

제1해병사단은 1개의 도로상에 분산되어 모두 중공군의 포위망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당초의 목표인 무평리로 전진하는 일은 이제 가망이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미 제10군단의 전선은 동서 400km 가까이 늘어져있었기 때문에 주공인

해병사단이 서부전선의 중공군 배후로 우회한다는 미 제10군단의 최초의 구상은

실현되기 어려웠다. 사태를 중시한 맥아더 원수는 긴급히 주한 제8군 사령관과

제10군단장을 일본 동경으로 불러 28일 밤부터 아침까지 밤을 새워 정세를 검토했다.

회의를 마친 맥아더는 다음과같은 보고서를 본국의 국방장관에게 제출했다.

 

1. 공격에서 방어로 전환한다.

2. 전혀 새로운 형태의 전쟁에 직면했다.

3. 사태는 일개 전선 지휘관의 결정 범위를 넘어 전세계 여론을 고려해야 한다.

4. 유엔군 사령부는 능력의 범위 내에서 모든 노력을 다했으나

    이제는 그 한계점에 이르렀다.

 

이 보고는 중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것은  전쟁 양상이 국지전에서 중공과 미국과의 전면전쟁으로 확산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미국이 동원할 수 있는 예비병력은 본토에 있는

제82공수사단 뿐이었으며 소집된 지 얼마 안되는 주 방위부대도 바로 사용할 수

없었던 실정이었기 때문에 사실은 미국이 군사적인 곤경에 처해 있던 때였다.

 

그리고 극동지역 해군(사령관 터너 조이 중장)은 전반적인 정세,

특히 미 제10군단의 상황으로보아 아무래도 해상철수가 필요할 것으로 예견하고

유엔군 사령부가  결정하기 전에 이미 실무자들에게 구체적인

흥남 철수계획을 수립하도록 명령하고 있었다.

동경에서 돌아온 미 제10군단장 알몬드는 제1해병사단에게 방어로 전환할 것을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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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원수와 워커 중장

 

11월29일 저녁, 제1해병사단장 스미드 소장은 10군단으로부터

"한 개 연대를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이동시켜 장진호 동안에 고립되어있는

육군부대(페이스 부대)를 구출하고 하갈우리-고토리간의 도로를 개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동시에 장진호지역의 군단병력을 모두 제1해병사단장

스미드 소장의 지휘하에 들어가도록한다는 통보도 받았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29일 아침) 제1해병사단은 이미 공격을 중지하고,

유담리로 가는 보급로 개통에 노력하고 있었다. 즉 유담리의 제7해병연대는

사단명령에 따라 제5해병연대 A중대, 제7해병연대 B, G중대를 합쳐 1개 혼성대대로

편성하여 덕동고개의 제7연대 F중대(바아버 대위)를 구출하고

하갈우리-유담리간의 도로를 개통하려고 했다.

그러나 강력한 중공군에 저지되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단장은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지 않고서는

유담리 - 하갈우리간의 도로 개통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오후 3시 45분에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제5해병연대는 유담리지역을 확보하라. 필요하다면 현재의 배치를 수정해도 좋다.

제7해병연대는 전력을 다해서 신속히 하갈우리 도로를 개통하라."

이러한 사단명령에따라 제5, 제7해병연대는 긴밀히 협력하여

합동작전계획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앞서 말한 군단명령은 그 이후인 저녁 때 사단 사령부에 도착 했는데,

이에 관해 미해병대 史에는 "이미 하달한 사단명령이 군단명령과 일치했기 때문에

하등의 변동사항이 없었다"라고 기술되어있다.

그러니까 상급부대인 군단에서 "방어로 전환하라"는 명령이 있기도 전에 해병사단이

먼저 공격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어차피 동일한 명령이었다는 말이된다.

미 제10군단장은 맥아더 원수와 회담 후, 철수가 확정된 다음 명령을 하달했을 것이다.

맥아더 원수가 철수결심을 한 것은 29일 아침이었는데, 그 무렵 해병사단은 이미

공격을 중지하고 유담리로 가는 보급로 개통에 힘쓰고 있었던 것이다.

"제5해병연대는 유담리지역을 확보하라"는 사단명령은 군단의 철수명령이 있기 전에

해병사단이 상황을 판단해서 독단으로 내린 명령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또한 스미드 사단장은 알몬드 군단장이 1개 연대를 보내어 장진호 동안으로 보내어

고립된 육군부대를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중공군 3개 사단에 포위 고립된 제5, 제7연대중 하나를 유담리에서

빼낸다는 것 자체가 말이안되며 두 연대가 유담리에서 포위망을 돌파해 하갈우리에

들어오지 않는 한 고토리까지의 주보급로를 개통할 병력이 하갈우리에는 없었다.

거기에다 28일 밤부터 공격을 받아 근 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다시 사단급 공격이 예상되는 마당에 병력을 빼내어 페이스 부대를 구출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알몬드는 자신의 군단이 처한 참담한  상황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 육군 제7보병사단장인 데이비드 바 소장도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해병대가 제공한 헬기를 타고 직접 페이스 부대를 방문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다음날인 30일 아침,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해병대 담당 고급참모이자 상륙전 전문가인 

에드워드 포니 해병대령은 고토리로부터 함흥으로 돌아와 장진호지역의 상황을

자세하게 군단장인 알몬드에게 설명했다. 포니 대령의 상세한 보고에 충격을 받은

알몬드는 즉시 경비행기를 타고 하갈우리로 날아갔다. 이날 오후,

알몬드 제10군단장은 스미드 제1해병사단장, 데이비스 바 미 육군 제7보병사단장 및

부사단장을 불러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 석상에서 알몬드는,

1. 장진호지역을 포기하고 함흥으로 철수한다.

2. 함흥으로의 철수는 신속하게 진행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제1해병사단장에게는 철수에 장애가되는 모든 장비를 파기하는 권한을

부여하고 필요한 것은 나중에 공중보급으로 지원한다고 약속했다.

 

알몬드 군단장은 장애가되는 모든 장비들을 버린 채 철수하고 필요할 때

항공기로 다시 공중보급을 해준다하였지만

스미드 사단장은 장비들을 고스란히 버리고 간다는 것에 어이가 없었다.

 

이에 대해 스미드 사단장은

1. 철수 속도는 부상자를 후송하는 능력에 달려있다.

2. 편제장비와 화기를 사용하여 해안까지 전투를 지속하며 포위망을 돌파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버릴 이유가 없으니 장비의 대부분을 그대로 가지고 가겠다고 말했다.

 

부상자는 반드시 구출한다는 것이 미 해병대의 전통이었기 때문에 사단장의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부상자의 후송문제였다. 그리고 알몬드는 스미드 사단장에게

장진호 동안에 고립되어 있는 육군 3개 대대(페이스 부대)의 구출을 명령했으나

다시 검토한 결과, 유담리의 병력이 하갈우리로 철수해 오기 전까지는 페이스 부대에

대해서 충분한 조치를 취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되었다.

이제 페이스 부대는 그 누구로부터의 도움도 기대하지 못한 채 스스로 포위망을

빠져나와야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스미드 사단장은 유담리의 해병연대들이 모두

하갈우리에 도달할 때 까지도 페이스 부대가 탈출하지 못한다면 1개 해병연대를 보내

그들을 구출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회의중 다음과 같은 군단명령이 하달되었다.

군단은 적과 최대한의 접촉을 유지하면서 그주력을 함흥-흥남지역으로 집결한다...
제1해병사단은 먼저 하갈우리-수동간의 도로를 확보하면서 하갈우리로 집결시켜라.

이러한 군단의 명령에따라 해병사단은 30일 저녁 7시 20분, 제5, 제7해병연대에게

전보로써 "합동작전명령 제1-50호를 조속히 시행하고 두 연대는 상호 협력하여

신속히 하갈우리로 철수하고 그후의 철수를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합동작전명령 제1-50은 29일 오후의 사단명령에 따라 제5, 제7해병연대가 서로

협력해서 작성한 명령인데, "유담리진지를 축소시켜서 제5해병연대가 이를

확보함으로써, 제7해병연대가 하갈우리 공격을 개시하는데 유리한 태세를 갖춘다"는

것을 결정한 것이었다.

양연대가 하갈우리로 철수하는 첫 단계는 이 명령을 실행하면 되는 것이었다.
즉 제5해병연대가 유담리 방어진지 모두를 책임지고, 그동안 제7해병연대는

하갈우리까지의 도로를 개통시키는 작전을 신속히 개시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래서 제1해병사단의 100km에 달하는 고난의 철수작전은 유담리의 2개 해병연대가

하갈우리로 향하는 작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때 하갈우리 지휘소에서 작전을

지휘하던 스미드 사단장은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약 100km에 달하는 도로를

어떻게 철수할 것인가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한번도 겪어 보지 못한 고통스러운 작전이었다.

유담리에 있는 2개 연대를 먼저 하갈우리로 집결시켜야 했다.

많은 부상자를 수용하고 항공기로 후송하기 위해서는 병상과 활주로를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제5, 제7해병연대가 긴 애로지역을 돌파하면서 이동하기 위해서는

인적, 물적 전력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병력 보충과 각종 보급품의 공수도

필요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갈우리의 진지를 확

보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했다.

 

사단장은 긴 애로상의 하갈우리진지의 필요성을 일찍이 깨닫고 확보를 위해 노력해 왔다.

활주로 건설의 굴착작업과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증원부대(드라이스데일)를 보낸

것도 최악의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스미드 사단장의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스미드 장군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하갈우리에 충분한 양의 탄약과 보급품을

비축하고 야전 활주로 건설을 독려했으며, 알몬드 군단장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자신 휘하의 연대들을 뿔뿔이 흩트리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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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해병연대장 호머 리첸버그(Homer Laurence Litzenberg)대령(좌)

제5해병연대장 레이몬드 머레이(Raymond L. Murray)중령(우)

 

 

유담리에는 제5해병연대장 레이몬드 머레이(Raymond L. Murray)중령과

제7해병연대장 호머 리첸버그(Homer Laurence Litzenberg)대령이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역전의 지휘관으로 다음해

1월에는 각각 대령과 준장으로 진급될 예정이었다.

 

유담리와 하갈우리의 사단지휘소 사이가 중공군에 의해서 차단되었기 때문에

유선전화는 불통이었고, 무선통신도 지형상의 장애 때문에 거의 불통이었다.

사단병력의 절대다수에 해당되는 2개 연대가 고립되어 있었고, 더구나

사단 사령부와의 통신 연락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하에서는 부사단장이

현장에가서 지휘하는 것이 정상적이었으나 당시 부사단장은 긴급한 용무 때문에

본국으로 귀국중이었다. 그렇다면 선임연대장을 통합지휘관으로 임명하여

지휘하게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으나 통합지휘관은 임명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리첸버그 준장은 당시를 회고하여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제5, 제7해병연대는 각각 별도의 사단명령에 의해서 행동했다.

타연대로 가는 명령은 이쪽 연대에도 통보되었다.

그리고 제11포병연대 4대대(155mm곡사포)는 일반지원 포병으로서

어느 연대의 지휘하에 들어가지 않았다. 우리 두 연대장은 제5연대나 제7연대

지휘하에 함께 위치하며 협조했다. 필요하면 포병 제4대대장을 불러서 토의했다.

이와 같이 협조는 매우 원만하게 이루어졌고  의견의 불일치라든가 하는 난점은 없었다."

 

훗날, 스미드 사단장도 선임지휘관을 임명할까도 생각했었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까지 있겠나 싶어 임명하지 않았다한다. 이것은 두 연대장의 인격이 훌륭하고

해병대가 가족적이며, 평소에 서로 잘 알고 단결력이 강하여, 미국인들이 말하는

개인의 체면보다는 합리성과 팀웍을 존중한다는 좋은 본보기 였다.

 

제7해병연대가 유담리 - 하갈우리간의 도로를 돌파하여 하갈우리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먼저 방어진지 남쪽 출구의 요충지를 확보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7연대장은 1246고지에 배치했던 3대대를 차출하기로 했다.

이를 위하여 5연대장도 그 배치를 변경해야 했다.

 

30일 아침, 해롤드 로이스(Harold Sigward Roise)중령의 제5해병연대 2대대가

먼저 그 배치를 변경했다. 대대의 우측방은 3대대와 인접된 상태로 그대로 두고

좌측방을 철수시켜 1249고지에 진지를 구축했다.

 

윌리엄 해리스(William Haris)중령이 지휘하는 제7해병연대 3대대는 종래의

진지로부터 이탈하여 유담리 남방 약 4km지점에 새로운 진지를 구축할 예정이었다.

한편 사단장의 지침에 따라 부상자를 후송하기 위하여 30일 오전 9시부터 유담리에

경비행기용 활주로 건설을 시작했다. 이것은 사단장이 얼마나 부상자 후송에 마음을

쓰고 있었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155mm곡사포대대의 TD-18형 도우저를 사용하여

작업을했으나 활주로도 12월 1일에는 중공군의 포 사정권 안에 들어가

불과 한두 번만 사용되었을 뿐이었다.

 

중공군은 로버트 태플릿(Robert Donald Taplet)중령의 제5해병연대 3대대에

대하여 30일 이른아침부터 공격을 해왔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같은날 오후, 군단은 사단에 대해 종래의 계획을 변경하여 유담리의 2개 연대를

동시에 하갈우리로 신속히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그래서
사단은, 저녁 7시 20분, 두 연대에게 동시철수를 명령했다. 두 연대는 다시 합동계획을

작성하여 12월 1일 아침, 명령을 하달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5, 제7해병연대는 유담리 - 하갈우리간의 도로를 경유하여 신속하게 하갈우리로

전진한다. 먼저 보병이 도로 양측의 요충지를 점령하고, 야음을 이용하여 일부병력이

적의 간격을 돌파해 산길을 따라 은밀히 덕동고개로 진출하여, 바아버중대(F중대)를

구출함과 동시에 고개의 요충지를 점령하여 주공의 돌파를 엄호한다.

 

전위대대는 제5해병연대 3대대로, 산길을 기동하는 부대는

레이몬드 데이비스(Raymond Gilbert Davis)중령의 제7해병연대 1대대로 하고,

남쪽으로 공격하기 전에 제7해병연대 3대대의 주력을 가지고 1542고지를,

별도의 1개 중대를 가지고 1419고지를 탈취하여 주력이 공격개시할 발판을 마련한다.

철수개시는 12월 1일 오전 8시, 제7해병연대 1대대는 1일 저녁에 출발한다.

 

제5해병연대 3대대는 오전 8시에 철수를 개시하고 제7해병연대 3대대를 추월하여

전위부대가 되어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전진한다.

제5해병연대 1대대는 9시 30분에 철수하여 1100고지-장진호 서남단에 진지를

점령하여 주력의 북쪽을 엄호하고 주력이 통과한 후에는 좌측을 엄호한다.

제5해병연대 2대대는 당초 1294고지를 확보하여 제5연대 3대대와 1대대의 철수를

엄호하고 1276고지에서 제7해병연대 1대대와 교대한 후 주력의 서북방면을 엄호한다.

주력이 통과한 후에는 후위가 된다.

제7해병연대 1대대는 제5해병연대 2대대와 교대한 후, 1일 저녁에는 1419고지의

제7해병연대 3대대 H중대를 초월하여 야지기동으로 중공군의 간격을 돌파하여

바아버중대진지로 전진, 이 중대와 협조하여 고지의 요충지점을 확보한다.

 

제7해병연대 3대대는 1542고지, 1419고지를 확보하고 제7해병연대 1대대와

제5해병연대 3대대의 초월을 지원하며, 그 후 주력의 우측을 엄호한다."

 

그리고 선두에는 76.2mm주포를 장비한 유일한 전차인 M4A3셔먼 전차를 첨병부대와

같이 전진시키기로 했다. 그 승무원은 이미 하갈우리로부터 헬리콥터로 도착되어 있었다.

계속적인 화력지원을 위하여 105mm곡사포부대는 축차적으로 전진하기로 했다.

즉 행군종대 선두에서 가까운 곳에 곡사포 1개 포대를 추진시킨다.

이 포병은 이동 구간의 중간지점인 신흥리 부근에다 포를 방렬하여 후속부대를

위한 엄호사격을 실시하고, 다른 포병부대의 이동중에 엄호사격이 중단되지 않도록 한다.

제11포병연대 3대대(1개 중대 감편)는 가급적이면 신속하게 전진하여 신흥리부근의

사격진지를 점령한다.

제11포병연대 1대대는 최초 지원사격 임무를 담당한 후 후방에서 전진한다.

121698925196515.jpgM4A3E8셔먼 전차와 BAR사수 (미 육군 195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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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mm곡사포는 너무 무겁고 너무 커서 민첩한 행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출발전에 탄약을 다 발사해 버리고, 거대한 대포나 견인차가 도로를 폐쇄하지 않도록

차량종대의 최후미에서 전진하기로 했다.

이 작전을 위하여 소총부대의 병력을 가급적 많이 확보해야 했는데,

이 병력은 주로 포병부대에서 차출하여 26개의 소총소대를 임시로 편성하였으며,

소대장은 대부분 포병장교로 임명되었다.

특히 제11포병연대 4대대(155mm곡사포대대)에서는 9개의 소총소대를 편성하여

그 중 3개 소대를 제5해병연대에, 2개 소대를 제7해병연대에 배속하고 4개 소대를

제11포병연대 4대대장으로 하여금 지휘토록하여 차량종대를 엄호하도록 명령했다.

 

도중에서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부상자와 덕동고개의 바아버중대의 부상자를

후송하기 위하여 미리 차량의 여분을 준비해 두어야 했다.

그래서 차량에는 부상이나 동상에 의해서 보행이 불가능한 병사만을 탑승시키기로 했다.

이 때문에 제5, 제7연대장 두 사람은 걸어서 이동했다.

보행이 가능한 부상자는 차량종대의 양측에서 행군하면서 엄호임무를 수행토록 했다.

그리고 승차하고 있는 부상자에게는 화기를 휴대시켜 릴요시는 사격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전사자의 시체는 부득이 유담리에 남겨 두기로 하고 85명의 장병에 대한

영결식을 치른 다음 매장했다. 사상자를 방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미 해병대의 귀중한

전통이었다. 이 전투에서도 소대장과 분대장이 위험을 무릅쓰고 사상자를 후송하려고

하다가 자신이 사상된 예는 무수히 많았다. 사상되더라도 반드시 후송된다는

신뢰감, 서로 전우의 뼈를 묻어 준다는 뜨거운 전우애는 미 해병대의 사기와 단결력의

큰 지주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정말로 부득이한 예외였다.

그리고 유담리에 매장된 시체는 휴전 후 회수하여 본국으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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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륜장군  

중공군은 27일 밤 유담리진지를, 28일과 30일 밤에는 하갈우리를 공격했으나 어느 것도 성공하지 못하고 많은 손실을 입은 후로는 전력회복과 차기 작전준비를 하고 있었다.

 

미 해병사단을 분산시켜 포위는 했으나 각개 진지의 저항이 의외로 완강하였기 때문에 중공군은 마치 밤송이를 안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유담리에서 병력, 장비, 차량 등의 부산한 움직임과 보급품의 공중투하와 헬리콥터에 의한 부상자 후송 등은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해병대가 탈출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바라보면서 작전을 지휘하고 있던 송 시륜은 상황판단 결과 다음과 같은 구상을 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1. 미 해병사단의 주력은 포위망에서 탈출하려 하고 있다.

 

2. 우리 집단군은 이것을 황초령 이북에서 포착, 섬멸한다.

 

3. 주공격목표는 하갈우리 해병대로 한다. 이를 위하여 주도면밀한

작전준비를 갖추고 조기에 협조된 공격을 한다.

 

4. 유담리의 해병대에 대해서는 미군이 철수를 개시한 다음,

긴 애로상에서 공격을 가하여 포착, 섬멸한다.

 

5. 황초령에서 해병사단의 도로를 완전히 차단한다.

중공군은 병력을 하갈우리. 고토리, 황초령을 향하여 추진시키고

유담리 - 하갈우리간의 도로 연변의 진지를 강화하여 유담리에서

해병대가 탈출을 시작하면 즉시 이를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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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1일 아침,

제5해병연대 제1, 제3대대는 북쪽으로부터의 중공 제79사단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5해병연대 2대대는 유담리 남서의 1294고지를 점령하여 서쪽으로부터

중공군 공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제7해병연대 1대대는 1276고지부근을 점령하여 서쪽을

엄호함과 동시에 1일 밤으로 예정된 덕동고개로 전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7해병연대 3대대는 1252고지와 1419고지를 공격하기 위하여 공격준비에 들어갔다.

두 연대의 근무지원부대와 포병들은 차량의 행군준비에 바빴다.

 

아침 8시,

제5해병연대 3대대에 이어 9시 30분에는 1대대가 예정대로 철수를 시작했다.

3대대는 G중대 엄호하에 질서정연하게 이탈했다.

최후에 남은 1282고지상의 G중대는 중공군과 수류탄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탈이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항공기의 위협비행(실탄은 사용하지 않았다)으로

중공군이 주춤하는 사이에 중대가 이탈하여 안전한 위치까지 철수했을 때,

전방항공통제관의 요청에 따라 실탄을 사용한 지상공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포병 관측장교는 항공기와 협조하여 G중대에 접근하려는 중공군에게

105mm포 사격을 가하고 또한 대대의 81mm박격포로 중대의 철수를 지원했다.

그리고 중공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두고 온 탄약 더미에 점화를 했기 때문에

1282 고지 전체가 폭발하는 것같았다.

이렇게 하여 G중대는 한사람의 부상자도 없이 멋지게 철수에 성공했다.

제5해병연대 1대대도 B중대의 엄호하에 질서정연히 이탈했다.

B중대는 최후의 엄호부대로서 1240고지로 철수하여, 동 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제7해병연대 1대대와 교대함으로써 동 대대의 덕동고개에 대한 공격준비를 가능하게 했다.

 

한편, 제7해병연대 3대대는, 9시, H중대로 도로의 동쪽 1419고지를, 대대주력으로

도로 서쪽의 1542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 고지들은 도로를 동, 서로부터

감제하는 중요지점이기 때문에 이를 확보하면 제5해병연대 3대대가 전위대대가 되어

 제7해병연대 3대대의 엄호하에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공격할 예정이었다.

또한 제7해병연대 1대대는 이날 저녁때 1419고지의 간격을 은밀히 돌파하여

덕동고개를 점령할 예정 이었다. 그런데 중공군이 이 두 고지를 구축하고 완강히

저항했기 때문에 공격은 종일토록 진전되지 않았다.

 

이탈을 끝낸 제5해병연대는 1대대를 장진호의 동부 하구 연변으로부터 1100고지

사이를 점령케 하고, 2대대는 1276고지를 점령케 함으로써 북쪽과 서북쪽에 대한

진지 점령이 끝난 셈이었다.

이 무렵, 제7해병연대 3대대 주력은 남쪽의 1542고지를 공격중이었으며,

이 고지를 점령하여 제5해병연대 진지와 연결해 서측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는

방어진지를 편성할 예정이었다.

 

전위부대인 제5해병연대 3대대는  제7해병연대 3대대가 공격목표인 1542, 1419고지를

탈취하면 이 것을 넘어서 공격을 개시할 예정이었으나 공격이 제대로 진전되지 않자,

두 대대장은 협의 끝에 1542고지와 1419고지 탈취와는 관계없이 공격을 개시하기로

하고, 제7해병연대 3대대는 오후 3시에 도로를 따라 남쪽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야지횡단으로 덕동고개를 향해 전진할 예정이었던 제7해병연대 1대대의

출발예정지점인 1419고지의 중공군진지는 의외로 완강했다.

그래서 연대장 리첸버그 대령은 H중대 만으로는 탈취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정오경에는 1대대 A중대에 이어서 오후에는 B중대도 이 공격에 투입했다.

이 고지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기 때문에 효과적인 화력지원을

제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험하고 미끄러지기 쉬운 경사면을 등반하고 있는

미군으로서는 오히려 그 잡초들이 손잡이가 되어 편리했다.

잠시 후에는 항공기, 곡사포, 박격포 등의 지원이 점차 효과를 나타내

저녁 7시경 30분에는 이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이 공격으로 제7해병연대 1대대는

많은 피해가 있었기 때문에, 연대장은 H중대를 이 대대에 배속했다.

따라서 대대장 데이비스 중령은 A, B, C, H의 4개의 소총중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대대장 데이비스 중령은 1419 고지를 점령한 후 곧 재편성을 실시하여

급편방어진지를 편성했다. 그리고 사상자를 도로로 끌어내 제5해병연대 3대대의

구호소로 후송했다. 대대가 재편성을 완료하고 출발한 것은 밤 9시 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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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된 장비를 보유하고 화력을 중시하는 미군이 야간에 도로가 아닌 다른 곳으로

진격하여 적의 간격을 돌파하는 전법을 택했던 전례는 비교적 적었다.

유담리 - 하갈우리간의 전투에서 제7해병연대 1대대가 취한 행동은

극히 드문 전례 중의 하나일 것이다.

 

연대장 리첸버그 대령이 일부러 이런 전술을 택한 동기에 대해서

"중공군은, '미군은 반드시 도로를 따라서 공격한다' 라고 생각 하였다. 

더구나 항공기가 포병 그리고 박격포의 지원이 별로 유효하지 못한 야간에 도로가

아닌 지형으로 미군이 기동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따라서 적의 허를 찌르기 위해서 야간에 도로가 없는 곳으로 기동하여

적의 간격을 돌파했던 것이다"라고 술회했다.

한국전쟁 초기에 미 육군은 많은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로가 아닌 지역에서의 도로의 기동은 제한을 받았고 가끔 도로변에서의

적의 매복에 걸리면 꼼짝하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는 일이 많았다.

 

제7해병연대 1대대장 레이몬드 데이비스(Ramond Gilbert Davis)중령은

조지아 공과대학을 졸업한 후, 해병대에 입대하여 제2차세계대전 때에는

제1해병사단 1연대 대대장으로서 펠릴류 섬 등지에서 용감하게 싸운 역전의 장교이며,

한국전쟁 후에는 소장까지 진급하여 해병대 사령부 인사참모를 역임하게되는

우수한 인물이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35세의 젊은 대대장이었다.

1대대의 장병 대부분이 7월에 소집되기 전까지는 농장이나 사무실 등에서 근무하던

사람들로서 제1해병사단 내의 어느 부대보다도 예비역에서 소집된 장병의 비율이 높았다.

 

대대는 적 진지로 침투, 돌파하기 위해서 우선 다음과 같은 준비작업을 진행했다.

휴대용 무전기(SCR-300)로는 유담리 연대본부와 연락이 두절될 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에 대비하여 보병은 통달거리가  좀 더 길고, 등에 메고 다니는 AN/GRC-9를 휴대하고,

포병 연락장교는 포병통신용 SCR-610을 휴대했다. 항공연락장교는 연대본부가 있는

위치에 잔류하여 찦차에 장치된 무전기로 지원 항공기와 연락을 취하는 한편,

대대와 동행하고 있는 전방항공 통제관에게 무전으로 연락하여 지원항공기를

대대정면으로 유도하여 근접항공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대대 공용화기는 편제장비의 반수인 81mm박격포 2문과 중기관총 6정을 준비하였으며

사수는 평상시보다 2배를 할당하였고 탄약도 충분히 휴대하였다.

식량은 각자 기호에 맞는 것으로 선택하여 네 끼분을 휴대했다.

들것도 예비로 휴대했는데 이것으로 박격포 탄약과 기관총 탄약을 운반했다.

전원이 각자 침낭을 휴대했는데, 이는 부상자의 구호용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대가 산중에 고립되어 수일간 야영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 대비한 것이다.

또한 전원이 소화기 탄입대 하나씩을 여분으로 휴대하였고, 예비 중대원과

대대본부 요원에게는 각각 1발씩의 81mm박격포탄을 휴대 시켰다.

야간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위한 표지, 유도, 엄호를 위해

포병은 황색 연막탄 사격을 준비했다.

 

대대는 12월 1일 밤 9시, B중대, 대대 지휘부, A중대, C중대, 대대 본부중대, H중대

순으로 야음을 이용하여 1419고지를 출발했다. 야간 전투로 지쳐있던 부대원들은

무거운 장비를 지고 은밀히 험한 산속으로 전진해 나갔다.

 

방향 유지방법으로는 나침반과 하늘의 별, 산봉우리의 생김새, 포병의 신호탄 등을

준비했었지만, 깊은 계곡에 들어서서는 별은 볼 수가 없고 산봉우리의 모양은

모두가 비슷해서 구별할 수가 없었으며, 황색 연막탄 또한 눈 속에 파묻혀

잘 보이지 않아 어느 방법도 별 효과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판쵸 우의를 덮어쓰고,

그 속에서 전등기를 켜 남침반을 보고 방향을 유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위에 더욱 전진을 어렵게 한 것은 추위(포병의 기록에 의하면 영하 31도였다)와

적설과 험준한 지형이었다. 종대의 선두는 무릎까지 빠지는 적설 때문에 뜻대로

전진할 수가 없었고 후속부대는 눈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병사가 많았다.

굴러떨어진 병사는 중장비를 지닌 채 눈이 깊이 쌓인 비탈진 언덕을 기어 올라와야 했다.

연대장이 예견한 대로 중공군은 미군이 설마 야간에 산악으로 진격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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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두가 두 번째 계곡을 통과할 때 방향을 잘못 잡아 남서쪽으로 치우치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 가면 중공군이 확보하고 있는 유담리 - 하갈우리간의 도로로 나가게 되고,

또 이 도로상에는 포병의 요란사격과 저지사격 화망이 계획되어 있어서

아군 포병의 사격을 받을 염려가 있었다.

 

대대장은 B중대장에게 방향을 수정하도록 명령하려 했으나 무전기는 불통 이었고

두꺼운 귀덮개를 하고 있어서 구두로는 전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대장은

직접 무선통신병과 전령을 데리고 선두로 달려가려고 하였으나 통신병과 전령이

미처 뒤따르지 못해서 대대장은 혼자 선두까지 달려갔다.

마침 부대의 선두가 다음의 급경사면을 오르기 시작한 때여서 겨우 방향을

수정할 수가 있었다. 이때가 바로 중공군의 저지선으로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도로를 수정하여 얼마동안 전진하다보니 1520고지 기슭에 도착했다.

이 고지의 동과 서에는 중공군이 진지를 구축해놓고 있었다.

대대는 81mm박격포 및 중기관총의 지원사격하에 공격을 실시하여

동쪽 경사면의 중공군 약 1개 소대를 격멸하고 이를 점령했다.

 

대대장은 부대를 정지시킨 후, 재편성을 명령했다.

부대를 정지 시키자마자 피로에 지친 병사들은 그대로 눈 위에 쓰러져

추위도 적탄도 아랑곳 없이 잠을 자려고 했다.

또한 동남방으로부터는 간단없이 중공군의 원거리 사격이 실시되고 있었다.

당시 장교와 하사관들은 병사들을 두드려 깨우기도 하고, 고함을 지르기도 하면서

잠들지 않게 하기 위해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너무나 추운 탓인지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대대장도 자신이 정상적인 명령을 내리고 있는지 아닌지, 때때로 중대장에게

확인할 정도였다. 피로에 지친 병사들을 수습해서 겨우 전면방어진지를

편성했을 때에는 이미 12월 2일 새벽 3시가 되어 있었다.

여기서 대대는 날이 밝을 때까지 휴식에 들어갔는데,

각 중대는 순찰조를 편성하는 한편, 25%의 병력으로 경계태세를 취했다.

이때 AN/GRC-9무전기로 처음 연대와 교신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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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일 새벽6시경, 대대는 1653고지(덕동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지형이 험준하여 공격은 몹시 곤란했다. 항공기와의 교신이 되지 않아 충분한 항공지원은 받을 수 없었다. 또한 동측방의 바아버중대(F중대)진지와도 교신이 불통이어서 바아버 중대의 81mm박격포 사격을 받을 염려도 있었다. 중간목표를 점령했을 무렵, 바아버 중대와 교신이되어 바아버 중대에서 유도를 위해 척후조를 내보겠다고 제안해 온 것이 이 무렵이었다.   바아버 중대는 항공지원을 유도하면서 동시에 81mm박격포 사격으로 대대의 공격을 지원하였다. 그 엄호하에 대대는 가까스로 1653고지를 점령하고 계속 전진하여 11시 25분에는 바아버 중대의 방어진지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대대는 22명의 부상자를 들것으로 후송했는데 그 중 전사자는 중공군 저격수에게 당한 군의관 한 명뿐이었다. 이 외에 2명의 병사는 추위와 피로와 긴장 때문에 정신이상을 일으켜서 들것에 묶어 놓았으나 곧 동사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F중대 증원임무를 완수한 후 제7해병연대 1대대는 바아버 대위의 F중대를 그 지휘하에 넣고 덕동고개 일대에 전면방어진지를 편성하고 2일 밤을 맞이 했다.   유담리의 해병대가 하갈우리로 철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지점이 바로 이 덕동고개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7해병연대 1대대의 용감한 공격과 F중대의 5일간에 걸친 끈질긴 방어는 곤란한 철수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제1보였다.   데이비스 제7해병연대 1대대장과 바아버 F중대장에게는 이 전공으로 명예훈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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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훈장을 수여받은 제7해병연대 1대대장 레이몬드 데이비스(Ramond Gilbert Davis)중령

    8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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