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장진호 포위망 돌파 ... (8부)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08.06 20:3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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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7일 중공군의 첫 공격을 받은 다음,  장진호 동안에서 버티고 있던 페이스특수임무부대는 12월 1일 새벽, 중공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았다.

 

지휘부의 안일한 판단으로 월동장비와 방한피복이 몹시 부족했고 탄약, 식량도 넉넉하게 준비하지 못했던 육군으로서는 그야말로 재앙을 만났다.

다음날, 돈 페이스(Don C. Faith)중령은 부하 장교들과 의논끝에 자력으로 해병대가 있는 하갈우리방어진지를 향해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해병대로부터 철수를 지원하기위한 근접항공지원이 약속되었다.

 

부상자를 실은 트럭들을 정렬시키며 철수 준비를 하는 미군의 모습을 지켜보던 중공군은 박격포로 공격했다.
이 때 발생한 부상자를 트럭에태운 부대는 출발하자마자 바로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다.

 

페이스 부대에 항공통제관으로 배속되어있던 스탬포드(Edward P. Stamford)해병대위는 무전기가 장치된 찦차에 탑승하고 있었다.

스탬포드 대위는 상공에 대기 중이던 코르세어 전폭기 편대에 근접항공지원을 요청했다.

 

코르세어 기는 네이팜탄과 로켓탄을 중공군에게 퍼 부었는데 아군에게도

그 불똥이 튀어 선두의 병사들이 불에 타 숨졌다. 이 모습을 목격한 육군병사들은

질서를 흐트린 채 우왕좌왕하며 도망치기 시작하여 부대가 뒤 섞여버리는 등

일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겨우 종대를 수습한 부대는 다시 출발하기 시작했고, 중공군 진지에는 코르세어 기들의

공격이 가해졌지만 종대는 가다가 멈추기를 반복하였다. 어두워지기 전에 하갈우리에

도달해야 했으나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사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중공군에게

대항하여 싸우고자하는 병사가 없었다. 병사들은 싸울 의지를 잃어 버렸고

극심한 공황 상태에 놓여졌다. 중공군에 의해 폭파된 다리를 우회한 차량들이

얼어붙은 늪지를 건너는동안 귀중한 시간이 흘렀다.

 

날이 어두어지기 시작하자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페이스 중령을 비롯한 몇몇 장교와 하사관들이 권총을 휘두르며 전투를 독려했으나

명령에 응하는 병사가 거의 없었다. 중공군의 공격으로 스탬포드 대위의 항공통제반

해병대원 모두가 전사했다.

 

밤이되자 더 이상의 항공지원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있는 중공군은

멈춰선 트럭 주변까지 진출하여 아무런 방해도 받지않고 부상자와 병사들을

사살하기 시작했다. 처참한 학살이 벌어지는 가운데 오합지졸이된 병사들은

그저 도망가기에만 바빴다. 마침내 선두에서 전투를 독려하던 페이스 중령이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지휘관인 페이스 중령이 부상을 당하여 트럭에 실려졌는데,

장교들 중 그 어느누구도 지휘권을 넘겨받아 부대를 지휘하려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 난관을 타개하고자 선두에서 지휘하는 사람은 육군도 아닌

타군 장교인 스탬포드 대위 뿐 이었다.

 

전술항공통제장교로서 파견되어 그동안 고난에 빠진 페이스특수임무부대를

구원해왔던 스탬포드 대위는 이러한 육군의 행동에 비참할 정도로 실망했다.

그러나 중상을 당한 페이스 중령은 계속 전진하여 하갈우리에 도달하길 갈망했기 때문에

스탬포드 대위는 자포자기한 육군 병사들을 위협하며 전진을 강요했다.

그러는 동안 페이스 중령은 전사하였고 이미 전의와 군기를 상실하여 통제불능의  

오합지졸 부대가 지휘관없이 전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지휘관이 살아있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말이다.

중공군의 학살이 계속되는 가운데  스탬포드 대위는 중공군에게 포위당했다가

간신히 탈출하여 어둠을 뚫고 하갈우리진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후, 전사한 페이스 중령에게는 명예훈장이 수여되었고,

스탬포드 대위는 은성 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만약 근접항공지원을 유도했던 스탬포드 대위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육군은 초기에 거의 전멸당했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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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미군 차량과 전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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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 중령                                              스탬포드 대위

 

제1해병사단 주력철수

 

전위부대

 

전위대대인 제5해병연대 3대대는, 12월 1일 오후3시,

제7해병연대 3대대를 초월하여 도로를 따라서 남쪽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로버트 태플릿(Robert Donald Taplet)중령이 지휘하는 이 대대는

인천상륙작전의 선발대로서 인천 항구를 움켜 쥐고 있는 월미도를 점령하여

사단주력의 상륙작전을 엄호했는데, 이번에도 전위부대로 선두에서 전진하기로 되었다.

M4A3전차 1대를 선두로하여 그 뒤에 만약의 사태시 전차를 도로 바깥으로

밀어내기위한 불도저 2대가, 제5해병연대 H중대의 1개 소대, A공병중대의 1개 소대,

H중대주력에 이어 대대주력의 순으로 도로를 따라 전진했다.

도로양측의 감제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중공군에 대해서,

2개 중대를 각각 도로 좌우에 전개시켜 공격하면서 밤새도록 전진했다.

심야에 중공군은 박격포의 지원하에 명렬한 공격을 가하여 왔기 때문에 대대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대대는 많은 피해가 있었는데 특히 I중대가 심했다.

 

대대는 2일 아침, 다시 제7해병연대 2대대의 D/E중대를 배속받았다.

이 중대는 유담리 서북방의 1282고지와 1240고지의 전투에서 피해를 입은

제7해병연대의 D중대와 E중대의 생존자를 합해서 1개 중대를 재편성하여

그 명칭을 D/E라 하였다.

대대는 도로를 따라 D/E중대, 그 좌측(동쪽)에 G중대,

그 우측(서쪽)에 H중대의 대형으로 전진했다.

D/E중대의 뒤를 전차와 공병소대가 따랐다. 도로 좌측의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중공군의 진지를 공격하면서 전진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전진속도는 느렸다.

그리고 파괴된 교량에는 공병소대가 우회로를 개설하면서 전진했다.

 

3일 새벽 2시, 바어버중대진지 서방 약 1km지점에 도착했다.

도로를 따라 전진하던 D/E중대도 이무렵에는 장교, 하사관의 대부분을 잃었기 때문에

그 전력은 상당히 악화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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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력

 

12월 1일 밤, 유담리에서 철수하는 제5, 제7해병연대의 주력은

도로상의 차량종대를 둘러싸고 서쪽으로부터 제7해병연대 3대대(H중대 감편),

제5해병연대 2대대, 1대대의 순으로, 북쪽으로부터 가해올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차량종대가 전진함에 따라서 제7해병연대 3대대는 우측을, 제5해병연대 1대대는

그 좌측을, 제2대대는 후방을 엄호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중공군은 12월 1일 심야부터 새벽까지 이들 부대와 전위부대인 제5해병연대 3연대에

대하여 맹렬한 공격을 가해왔다. 노상에 노출된 채로 길게 뻗은 차량종대와

아직 한발의 사격도 해보지 못한 105mm포병부대, 탄약은 이미 떨어져서 없고

포신에는 전사자의 시체를 붙들어 맨 18문의 155mm포병종대, 부상자를 가득 실은

차량대열, 하루종일 전투에서 개인 엄체호 구축을 막 끝내고 지쳐있는 보병부대 등이

줄지어 있었다. 게다가 어둠 때문에 해병대는, 항공기의 지원은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이와같은 상황은 야간전투에 능숙한 중공군으로서는 그야말로 해병사단의 주력인

2개 연대를 일거에 격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어떠한 전투에 있어서도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사방으로부터

적을 포위하고 단 한명도 놓치지 않도록 완전히 섬멸토록 한다"라는

모택동의 교시를 실현할 수 있는 호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중공군이 선두의 제5해병연대 3대대를 공격하여 I중대의 병력이

20명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주력을 공격하는 중공 제79사단은 235연대의 4개 대대로써 12월 1일 초반부터

새벽에 걸쳐서 1542고지의 동쪽 경사면의 제7해병연대 3대대에 대하여 공격을 가했다.

중공 235연대의 임무는 '날이 밝을 무렵까지 1542고지의 해병대를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맞선 제7해병연대 3대대의 전투병력은 G 및 I의 2개 소총중대에 불과했다.

G 및 I(전위대대인 제5해병연대 3대대의 G 및 I와는 다르다)중대는 1542고지의 정상을

점령하지 못하고 그 동쪽 경사면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공 제79사단은 경사면을 내려와 야음을 이용하여 해병진지에 접근하여

전방 25m 거리에서 박격포의 지원하에 돌격을 개시했다.

G, I두 중대는 날이 샐 무렵까지 경사면에서 약간 철수하였으나 대대 본부중대의

증원을 받아, 1142 고지와 도로와의 중간 지점에 반원형으로 방어선을 편성했다.

이 때 G와I중대의 병력은 모두 다 합쳐도 200명에 불과했다.

 

중공군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서 100명을 사살했다라고 되어 있지만,

미군은 사상자 모두 합해서 30명이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제7해병연대 3대대의 임무는 도로상의 주력부대가 1542고지의 동쪽을

통과완료할 때까지 엄호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대대는 고지의 동쪽 경사면의

진지를 결사적으로 고수하여 중공군이 도로에 대하여 효과적인 소화기 사격을

할 수 없도록 했다. 날이 밝자 중공군의 압력은 다소 누그러졌으나

그래도 계속해서 소규모의 병력으로 공격을 되풀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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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격포로 미군을 공격하는 중공군

 

후위

 

제7해병연대 3대대의 북방에는 제5해병연대 2대대가 위치하여

중요지역인 1276고지를 중심으로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는데

주력이 통과한 후에는 그 후위가 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 대대는 무평리 공격시에는 그 선봉이었으나 이번에는 주공의 후위로써

후방 경계를 담당하게 되었다.

 

12월 2일 0시경부터 중공군은 1276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기관총, 소총을 사용하여 기동을 잘 연결시키면서 접근하여 돌격해 들어왔다.

포위를 기도하는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좌측의 1개 소대는

셋방향으로부터 포위되어 끝내 능선의 일부를 점령당하고 말았다.

 

미군은 전투기의 야간 근접지원을 요청했다.

60mm박격포의 황색 연막탄의 신호와 전방항공통제관의 유도로 5대의 전투기가

해병대의 제1선으로부터 200m 이내에 로켓탄 지원사격을 실시했다.

대대는 해가 뜰 무렵부터 정오까지 중공군과 능선 쟁탈전을 되풀이하면서

차량종대의 통과를 엄호했다.

이어서 대대는 코르세어 전폭기의 엄호를 받으면서 후위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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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해병연대

측위

 

제5해병연대 2대대의 동북방에는 같은 연대의 1대대가 북쪽을 향해 진지를 점령하고

유담리분지와 장진호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 진지는 지형상 북쪽으로는 양호한 시계와 사계(射界)를 가지고 있었다.

12월 1일 밤9시경,

얼어붙은 호수 위를 건너 약 100명의 중공군부대가 공격해 왔으나, 박격포와

포병사격으로 새벽1시경에는 모두 격퇴시켰다. 그러나 소수병력에 의한 침투는

밤새도록 지속되었다. 이 사이에 중공군의 피해는 막대하여 C중대 정면에는

시체 51구를 헤아릴 정도였다. 대대는 2일 정오가 지나서 진지를 철수하여

주력종대의 좌측방을 엄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차량종대의 전진

 

도로상을 이동하는 차량종대의 부대 구분과 병력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제5, 제7해병연대 차량의 대부분은, 27일 밤에 이미 하갈우리를 향해 출발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은 차량은 40~50대였다.

 

포병은 제1, 제3대대(1개 포대 감편, 105mm곡사포 30문),

그리고제4대대(155mm곡사포 18문)로서 합계 48문, 차량 400~500대였다.

 

공병은 A중대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전위부대에 배속된 것으로 파악된다.

 

선두에는 전위부대를 지원하는 포병 H포대(105mm)가 전진하고

그 뒤에 제5, 제해병연대의 지휘부, 연대본부 및 직할대, 각종 보급정비부대,

포병 제3대대(H중대 감편), 포병 제1, 제4대대의 차량들이 뒤를 이었다.

 

전위인 제5해병연대 3대대가 도로 양측의 감제고지를 점령한 후,

부상병을 가득 실은 차량이 서서히 전진했다.

양측의 감제고지 사이를 차량종대가 통과하는 동안, 계속 보병부대만으로

점령시키기에는 보병의 병력이 부족했다. 한번 점령을 했어도 보병이 이동하면

바로 중공군이 침투해 왔다. 그러나 중공군은 강력한 미군의 공중공격때문에

병력을 집결시켜 대규모의 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소규모의 공격을 실시하는데 그쳤다.

그런데도 미군의 차량종대의 전진은 수차 중단 되었고 부상병이나 포병도

자체방위를 위해서는 전투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2일 밤에도 부진한 행군이 계속 되었다.

파괴된 교량에 우회로를 건설하는동안 차량종대는 정지하고 기다려야했다.

중공군은 보병부대의 간격을 뚫고 이들 차량종대에 접근하여 포병 제3대대를 공격하여

105mm포 1문과 차량 여러 대를 파괴했다. 이에 미군 포병은 직접조준사격으로 응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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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해병연대 3대대와 제7해병연대 1대대와의 연결

 

12월 3일 아침, 전선에는 13cm가량의 강설이 덮여 아름다운 은세계로 변해 있었다.

전위인 로버트 태플릿(Robert Donald Taplet)중령의 제5해병연대 3대대는

전차 1대를 선두로 하고 공병 중사가 지휘하는 공병소대가 뒤를 이어 행군을 하였다.
이 공병소대는 당초 48명이었는데 지금까지 보병과 똑같이 전투를 하였고,

또 공병으로서 장애물 제거 등의 작전임무를 수행해왔기 때문에 점차 병력이 감소되어

겨우 17명만이 남아 있었다. 이 공병소대 뒤에는 G중대가 따르고 있었다.

 

전날 밤, 도로를 따라 전진하고 있던 D/E중대는 그 전력이 극도로 저하되었기 때문에

좌측으로 전진하던 G중대가 교대하여 도로상으로 전진했던 것이다.

G중대는 중대장의 부상으로 선임장교인 중위가 대리로 중대 지휘를 맡았고,

D/E중대는 2개 소대로 재편성하여 G중대에 편입 시켰다.

또한 도로의 우측(남쪽) 고지로는 H중대가 진출했다.

이와 같은 대형으로 제5해병연대 3대대는 덕동고개 가까이까지 다가가고 있었다.

 

한편, 레이몬드 데이비스(Ramond Gilbert Davis)중령이 지휘하는  

제7해병연대 1대대의 A, B, C, F, H중대는  덕동부근의 요지에 전면방어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블로그 "장진호 포위망 7" 참조)

 

F중대는 일부러 불을 피워서 중공군의 사격을 유도하여 그 위치를 알아냈다. 그 결과,

A, B중대의 남쪽과 덕동고개의 동쪽 고지에 중공군이 진지를 점령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3일 아침, 제1대대는 이 두 방향에 대해서 공격을 개시했다.

즉 대대장 데이비스 중령은 C중대와 H중대를 지휘하여 하갈우리로 향하는

전진로를 저지하고 있는 덕동고개 동쪽의 중공군진지를 공격했다.

또 대대의 작전장교 토마스 타이(Thomas Tighe) 소령은 A중대와 B중대를 지휘하여

덕동고개 남쪽의 중공군을 공격했다. 타이 소령의 공격으로 기습을 받은 중공군은

진지를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서남쪽으로 도주 했다. 그런데 그 도주 방향에는

제5해병연대 3대대의 H중대가 북쪽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타이 소령으로부터 중공군부대의 패주를 보고받은 제7해병연대장 리첸버그 대령은

동행중인 제5해병연대장 머레이 중령에게 중공군의 일부병력이

태플릿 중령의 제5해병연대 3대대 방향으로 패주중이라고 연락했다.

태플릿 중령은 약 1개 소대의 중공군이 그의 정면에 기어 들어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러나 해뜰 무렵, 도로 남쪽의 고지 위에서 중공군부대를 발견했다.

태플릿 중령은 하갈우리로부터의 포병사격으로는 사거리상 충분한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공중공격을 요청했다.

그 후 코르세어 기가 나타났을 때 마침 구름이 걷혀 조종사에게 좋은 조건이 되었다.

중공군을 발견한 코르세어 기는 네이팜탄과 로켓탄으로 공격을 가했다.

 

 

한편 제5해병연대 3대대와 타이 소령의 부대는 이 적에 대해서

서쪽과 동쪽으로부터 81mm박격포, 중기관총 등 모든 화력을 집중 시켰다.

이렇게 하여 중공군 약 1개 대대는 오전 10시 30분까지 완전히 격멸되었고,

제5해병연대 3대대 H중대는 남쪽의 고지를 점령했다.

 

 

한편 제7해병연대 1대대도 덕동고개 동북방의 중공군을 돌파하는데 성공하였다.
12월3일 오후1시, 제5해병연대 3대대는 덕동고개에 도착하여 제7해병연대 1대대와

마침내 합류했다. 이와같이 주력도 최대 요충지인 덕동고개 부근에 도착함으로써

이번 돌파작전은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이 4일간의 작전중 전위대대의 병력 손실은 약 56%에 달했다.
그 손실병력 현황은 12월 1일 437명, 2일 394명, 3일 256명, 4일에는 194명이었다.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전진하는 동안 이토록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4일의 G, H, I중대의 병력은 각각 80명, 73명, 41명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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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동고개로부터 하갈우리로!


차량종대는 덕동고개에 도착하여, 제5해병연대, 제7해병연대 1대대,

제7해병연대 F중대의 중상자를 탑승시켰다. 이미 차량에는 부상병들을

가득 싣고 있었기 때문에 경상자는 하차시켜 중상자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하차한 부상자는 하갈우리까지 차에 의지하면서 차량종대와 함께 행군해야 했다.

자동차의 본네트, 견인차의 휀다 등에도 부상자로 가득했고

심지어는 2대의 연대장 찦차에도 부상자를 가득 싣고 있었다.

 

덕동고개로부터는 전차를 선두로 하여 제7해병연대 1대대의 A, B, H, C중대의 순으로

전진했다. 이어서 제5해병연대 1대대가  같은연대의 3대대를 초월하여 전진했다.

우선 제7해병연대 1대대가 도로를 엄호하기 위하여

도로 좌우의 요충지에 진지를 점령할 예정이었다.

 

제5해병연대 3대대는 밤0시가 지나도록 덕동고개에 잔류하여 선두 가까이에서

이동하고 있는 제5, 제7해병연대장과 후위대대와의 무전을 중계했다.

0시경, 제5해병연대 3대대장은 G, H중대를 전진시켜 포병의 차량종대를 엄호하였고

약 1시간 후에는 대대의 나머지 부대가 종대에 합류했다.

그 뒤에는 제7해병연대 3대대를 앞질러 달려간 제5해병연대 2대대가 따르고

제7해병연대 3대대가 후위가 되어 제일 후미에서 전진했다.

보병대열 속에 포병과 보급정비부대 차량이 섞여서 행군했는데

정지할 때마다 대열은 더욱 혼잡해졌다.

 

종대의 상공에는 항상 정찰기 2대가 떠서 적 부대의 동태를 통보해 주었다.

종대의 전방과 양측면에 대해서는 코르세어 전폭기가 종대를 엄호했다.

12월 3일, 6개 해병 전투비행대(2개 중대는 야간전투비행대)가 145회나 출격을 했는데,

그 대부분이 이 종대를 지원하기 위해서 출격한 것이었다.

종대의 차량들이 연료가 떨어지면 공중을 통해서 보급을 받았다.

 

전위부대는 주간의 강력한 항공지원으로 적의 저항을 받지 않았으며

예하 4개 중대를 하갈우리까지 약 4km 구간의 중요지점에 배치했다.

오후 4시 30분, 스미드 제1해병사단장은 그 철수상황을 확인하기 위하여

영국 해병 제41코만도(1개 전차 소대 배속)부대를 하갈우리로부터 출동시켜

철수부대 방향을 향해 역으로 전진시켜 중간에 있을지도 모를 중공군을 소탕하도록했다.

이것은 치열하게 전투를 치르며 많은 희생을 당했던 철수부대가 목적지인

하갈우리방어진지 근처에 도달해서까지 희생자를 추가적으로 발생시키는 것을

막게하려는 조치였다.

 

 

3일 저녁 7시 50분, 선두부대인 제7해병연대 1대대는 하갈우리진지 입구로부터

약500m지점에서 정지했다. 여기서 대대는 전열을 가다듬고 질서정연하게 보조를

맞추어 하갈우리진지로 들어갔다. 대대장 데이비스 중령이 해병대답게 진지

내로 들어가야한다고 모든 병사들에게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수염이 덥수룩한채 때에 절어 더럽고 지칠대로 지친 병사들이었지만

한명의 하사관이 절도있게 내뱉는 해병대 구령에 보조를 맞추어 가슴을 딱 펴고 행진했다.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제1해병사단 작전참모 바우저(Alpha L. Bowser)대령이

스미드 사단장에게 보고했고, 사단장도 이 모습을 뿌듯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 뒤에는 보행이 가능한 부상병과 부상병을 가득채운 차량들이 뒤 따랐다.

이곳에 도착하고서야 비로소 부상자들은 치료를 받을 수 있었고, 장병 전원이

난방이 된 천막에서 8일만에 처음으로 따뜻한 식사를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긴 종대는 아직도 저편 뒤에서 작전을 해가며 전진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제7해병연대 1대대에 이어서 포병과 제5해병연대 3대대 등이 도착했다.

맨 후위인 제7해병연대 3대대가 하갈우리진지에 도착 완료한 것은

12월 4일 오후 2시경이었다.

 

유담리 - 하갈우리간은 노상거리로서는 22km이지만 도로상태가 나쁜데다가

치열하게 전투를 치르면서 전진해야 했기 때문에 의외로 많은 연료가 소비되었다.

 

부족량은 공중보급을 받고 전진을 계속할 수 있었으나

그 중에는 다음과 같은 부대도 있었다.

예를 들면 포병 제4대대의 견인차 8대는 신흥리에서 경유 약 600리터의 공중투하를

요청했었다. 그러나 부대의 도착도 늦은데다 투하장소도 적당치 못하여 보급을 받지 못해

차량을 남겨두고 오지 않을 수 없었다. 대대는 어떻게해서든지 그 차량들을 끌고오려는

노력을 되풀이했으나 그때마다 중공군의 사격으로 피해만 늘어날 뿐이었다.

결국 이 8대의 견인차량과 길에서 굴러 떨어진 1대를 합쳐 모두 9대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것이 이작전중의 장비손실로서는 가장 큰 것이었다.
그 후 이들 장비는 중공군이 사용할 수 없도록 미군 항공기에의해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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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해병사단의 유담리 - 하갈우리로의 전진의 정리.

 

해병대가 유담리에서 하갈우리까지 약 22km를  돌파하는데 선두는 59시간,

최후미는 77시간이 소요되었다.

한 시간에 약 286m 내지 370m, 즉 1km를 전진하는데 평균 2시간 40분에서

3시간 30분이 걸린 셈이 된다.

 

부상자는 약 1500명(이중 약 600명은 들것에 실려야하는 중상자였다)이었는데 한명도

남기지 않고 전원 후송했으며 그 중 3분의 1은 비전투 손실로서 주로 동상환자였다.

 

155mm야포 9문과 골짜기에 굴러 떨어진 찦차 몇 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장비를 철수 시킬 수 있었다.

 

하갈우리에 가서 현장을 취재한 뉴욕 해럴드 트리뷴 지의 마가렛 허킨스 기자는

그의 저서 "한국전쟁"에서 제5해병연대장 머레이 중령의 말을 인용하여

"악몽과 같은 곳에서 혈로(血路)를 개척하고 나온 이 5일간의 낮과 밤은 지금까지

해병대가 겪어본 일이 없는 최악의 사태였다. 특히 유담리부근에서는 매일 밤

다시는 햇볕을 못 보게 되리라고 생각했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작전이 성공한 요인에 관해서 제1해병사단장 스미드 소장은

"부대가 넓은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통합지휘는 물론

그 행동을 통제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각급 지휘관은

폭넓은 독단활용이 필요했었다.  혹한과 험준한 지형에서의 장병들의 정신력과

군기가 이 작전에서 성공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었다."라고

미 해병 史에 기술되어 있는데 이것은 너무나 지당한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음에는 전술적으로 그 요인을 고찰해 볼때,

그 하나는 최대의 요충지인 덕동고개를 조기에 확보했다는 사실이다.

즉 바아버 대위의 F중대는 덕동고개의 진지를 5일간이나 밤낮으로 확보함으로써

중공군 2개 연대를 끌어 들였다.

또한 제7해병연대 1대대는 불굴의 투지로 중공군의 의표를 찔러 야음에 추위와 적설을

무릅쓰고 험준한 산악을 은밀히 돌파하여 바아버중대와 더불어 덕동고개의 요충지를

확보했다. 또한 주력의 전진에 있어서는 애로(隘路) 좌우측의 요충지를 확보하여

도로상의 차량종대를 엄호하면서 전진한 착실한 전법도 성공의 한 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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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이와 같은 전법을 구사할 수 있었던 첫째 요인은

지휘관의 왕성한 책임감, 체력, 그리고 적절한 지휘와 병사들의 감투정신이었다.
또한 항공기에 의한 근접지원과 공중보급에 힘 입은 바도 적지 않았으나

다음과 같은 사실 또한 주효했다.

 

11월 27일 해질무렵, 보급 후 귀환하는 빈 차량을 이용해서 유담리의 부상자 전원을

하갈우리로 후송했기 때문에 부상자에 대한 부담을 덜 수가 있었고,

이때 충분한 보급품을 확보하기 위해서 되도록 많은 차량을 하갈우리로 보냈다.

그러나 이들 차량은 중공군에 의해 도로가 차단되어

다시는 유담리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보급품의 확보량도 감소되었고 부상자의 수송력도 줄어들게 되었지만

차량종대의 행군길이가 단축되어, 부대 행동이 기민해졌을 뿐만 아니라

보병에 의한 엄호도 용이해졌다.

 

 

그 외에 두 개의 연대가 시종 긴밀하게 협조하여 철수계획을 작성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는 모르지만 혹한으로 인한 복잡성, 곤란한 전장이탈과

여러 겹의 포위망 속에서의 철수라고 하는 전투상황하에서는 자칫 부대간의 협조가

잘 안되기가 쉽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사실은 충분히 중시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중공 제59, 제79 및 제89사단은 긴 애로상에 뻗어 있는 해병대의 전정면에 걸쳐서

공격을 개시했다. 참으로 각개격파를 하기에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병력에 있어서는 중공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지만

화력면에서는 미군측이 훨씬 우세했다.

 

중공군은 "결단을 내리고 희생을 무릅쓰고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여 승리를 쟁취한다"는

모택동어록의 교시에 따라 돌격을 되풀이 했다. 정신력의 우세를 자부하면서 돌격을

했으나, 미 해병대도 그 전통과 명예를 걸고 용감하게 싸웠던 것이다.

전투의지와 정신력이 백중지세일 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역시

화력을 위시한 각종 전력을 조직적으로 운용하는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다.

 

화력, 통신, 보급 등이 우세한 해병대는 중공군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치면서

하갈우리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작전기간중 거의 잠도 못 자고 쉬지도 못했지만

체력의 한계에 도달하기 직전에 다음 거점인 하갈우리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즉 적당한 거리에 다음 거점이 확보되어 있었다는 것이 해병대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중공군이 이때까지 하갈우리를 점령하고 있었더라면 미군의 2개 연대가

전투력을 유지하면서 유달리에서 하갈우리에 도착한다는 것은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하갈우리의 보급품은 중공군에게 긴요한 보급원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볼때, 중공군은 전투력을 집중하여 하갈우리를 공격하지 못했다.

이는 송시륜 장군이 하갈우리의 전술적인 중요성과 취약성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하기보다는 하갈우리에 대한 공격을 위해서 전력을 집중시키기가 곤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비록 중공군이라 할지라도 험준한 산길을 따라 신속하게 전력을

추진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라고 판단하여 가장 가까운 유담리부터

축차적으로 공격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중공 제27군은 장진호부근 작전에 관해서 전술적으로 다음과 같이 반성하고 있다.

"우리의 전술은 경직되어 있었다.

미군을 과소평가하여 병력을 분산시켰다. 상급부대는 과도하게 분산되었고,

소부대는 과도하게 집중 되었다. 이동중에는 선두의 3개 사단간의 거리가 크게 벌어졌고

대대나 중대와 같은 소부대는 밀집되었기 때문에 병력의 전개가 불가능했다.

 더욱이 정찰을 주도면밀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적의 화망 속으로 뛰어들게 되어

많은 손실이 있었다." - 미군이 노획한 중공군 문서 내용

 

즉, 한국전쟁 초기나 중공군의 제1차 개입 시의 미군의 전투양상을 보고

미군을 과소평가하여 충분한 정찰도 하지 않고 부질없이 병력을 분산시켜

공격을 되풀이했을 뿐, 최대의 호기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해서 유담리의 2개 연대는 비록 어려운 전투이긴 했지만 다행히 생각보다는

피해가 적어, 12월 4일 오후, 하갈우리 진지로 철수를 완료했다.

 

 

12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는 중공 제9집단군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유담리의 미 해병대 2개 연대쯤은 식은 죽 먹기로 생각했을 것이다.

도로를 차단하고 단 한번에 섬멸하려고 포위공격을 했으나,

뜻밖의 완강한 미 해병대의 공격으로 끝내 탈출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애로를 통하여 철수하는 미군의 약점을 이용 재차 공격을 했지만

또 실패하고 말았다. 중공군은 12개 사단 중에서 유담리와 덕동고개 일대에는

중공 제59, 제79, 제89사단을, 장진호 동안의 신흥리에는 제80사단을,

하갈우리 공격에는 제58사단을 투입했으나 거기서도 모두 상당한 피해가 있었다.

그리고 하갈우리의 평지를 감제하는 동쪽 고지만은 중공 제58사단이 점령 확보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하갈우리에대한 공격구상은 미 해병史  및 북한군史를 근거로 하여

분석해보면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1. 하갈우리의 미 해병대는 이제야말로 고토리 - 진흥리를 거쳐 함흥으로

철수할 준비를 하고 있다. 중공 제9집단군은 주공을 하갈우리의 미 해병대로

지향하여 이를 섬멸한다. 공격개시는 미 해병대가 하갈우리로부터 철수를

개시하여 병력이 분산되었을 때로한다. 그 시기는 대략 12월 6일 밤이 될 것이다.

 

 

2. 강력한 중공군부대(제58사단 등)로 하여금 하갈우리진지의 미 해병대를 공격한다.

 

 

3. 중공 제26군(제76, 제77, 제88사단)은 하갈우리 - 고토리간의 도로상에서 철수를

기도하는 미 해병대를 포착, 섬멸한다.

 

 

4. 중공 제20군은, 제60사단을 황초령으로, 제89사단을 마전동부근으로 남하시켜,

교량을 파괴하고 도로를 차단함으로써 고토리 북방 미군의 남하를 차단하고,

 아울러 남쪽으로부터의 증원을 저지함과 동시에 철수를 기도하는 미군을 황

초령에서 포착, 격멸한다.

 

5. 일부병력으로 사창리 - 흑수리를 경유, 함흥을 점령한다.

 

제1해병사단은 포로 심문을 통해서 사단지역 내에

중공 제58, 제59, 제60, 제76, 제79, 제80, 제89사단 등 7개의 중공군 사단을 식별하였고,

또한 제77, 제78사단이 증원거리 내로 접근 중에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또한 하갈우리 - 고토리에는 제58, 제60사단 등의 부대가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도 판명되었다.

 

중공군은 하갈우리 - 고토리 - 진흥리도로상의 모든 교량을 폭파하고

도로상에 장애물을 설치하고 있었다. 고토리 남쪽의 도로상에 가설되어 있던

중요한 교량이 이미 폭파되었다는 사실이 4일 오후에 가서야 판명되었다.

유담리로부터의 철수와는 달리 많은 차량을 동반한 해병대에게는

이들 교량의 파괴는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은 철수를 계속하고 있었으나 중공군의 급속한 공격 때문에

평양 - 원산간의 방어선 형성이 불가능하였고, 5일에는 끝내 평양을 포기하고 말았다.

당시 미국의 증원 가능한 병력으로서는 본토의 제82공수사단 뿐이었다.

또한 당시 유럽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은 1개 보병사단과 3개 기갑연대뿐이었다.

한편 공산측의 병력으로는 1백만명 이상이 중공군 외에

극동에만 약 30개 사단의 소련군이 있었다.

또한 유럽정면에는 수백만명의 소련군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프랑스, 영국 등에 주둔하고 있는 미 지상군은 극히 미약했다.

미 합참의장 브래들리 대장은 일본에 와서 맥아더 원수와 회의를 가졌다.

트루먼 대통령의 원폭 사용도 불가 하다는 말에

영국 수상 애틀리가 급히 워싱턴을 방문했던 것도 이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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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편으로 이여집니다....

 

 

우리 짱밀리 가족여러분들 더위먹지 마시고..

 

조금만 참자구요 ^^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ㅎㅎㅎ

 

건강하시고 언제나 밝은미소 잊지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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