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서 사망한 中 주석 아들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09.04 19: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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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전사한 모택동의 큰 아들



이 글은 한국 전쟁에서 전사한 모택동의 큰 아들

모안영(毛岸英)의 이야기를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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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의 장남 -모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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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는 일주일 전에 다 써놨었다.


썼던 동기는 현재 국회에서 추진되는 법안인 특권 집단에 대한

더 강화된 병역관리를 위한 법안이 일부 비토세력에 의해서

반대 되고 있다는 말을 들고 한국전 이래 일부 지도층에게

체질화되어 버린 국방의 의무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에 대해서

한 마디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유엔군 사령관을 했던 밴프리트 대장의 아들이 미 공군
폭격기 조종사로서 출격을 했다가 전사했고 북쪽의 중공군의
최고 사령관인 모택동의 아들이 폭격에 전사를 하고 북한 땅에 묻혔다.


나는 이중에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모택동 아들의 전사를 소개하여 한국 일부 특권층의

노블레스 오브리제에 대한 몰이해를 지적하고 싶었었다.

※노블리시 오브리제(noblesse oblige) -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인

  솔선수범의 사회적 책임감


그래서 다 써놓고 보니 너무 모택동을 미화한 듯했다.

그가 중국 통일 전까지 해 놓은 기적 같은 업적들은 나도 감탄해

마지않지만 그가 한국 전쟁 때 개입하여 통일을 방해한 것과 그 뒤

대약진 운동이나 문화혁명의 대 실수, 그리고 그의 문란한 사생활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그대로 포스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힘들여 쓴 글을  버리기도 아까워 대신 모택동의

두 번째 부인 양개혜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들의 일화를

바꿔서 글을 다시 꾸며서 포스팅하기로 한다.


풍운아 모택동은 결혼을 여러 번 했었다.

중국 호남성 상담현 소산 촌에서 그가 열네 살 때 부모가 시킨

첫 결혼은 그가 신부 꼴을 보려고 하지를 않아서 자연히 깨졌다.

이 첫 결혼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장사(長沙)사범학교 재학 중에 존경했던 스승 양창제 교수의

딸 양개혜(楊開慧)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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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개혜와 안영 안청 두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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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다시 결혼한 하자진(賀士珍)이나 강청(江?)등과의 결혼 생활에서 생긴 자식들도 있었지만 양개혜와의 사이에 낳은 기구한 운명의

세 아들들을 삶이 이 글의 주제가 된다.


그는 양개혜와의 사이에서 아들 셋을 둔다.

첫째가 모안영(毛岸英), 둘째가 모안영(毛岸靑),

셋째가 모안룡(毛岸龍)이다.

특기 할 것은 미국과 그렇게 치열하게 대결했던 모택동의

큰 아들 모안영이 장사에 있는 미국 선교사가 세운

기독교 병원에서 탄생했었다는 사실이다.


모택동은 1927년 장사 폭동에 주도하러 집을 떠남으로서

양개혜와 영원한 이별을 한다.

초대 극소수의 여자 중국 공산당원이었던 양개혜는

결혼 10년 뒤인 1930년 호남성 군벌 하건에게 체포되었다.


양개혜는 교도소에서 어린 모안영을 데리고 수감 생활을 했다.

그 녀는 모진 고문을 받고 전향을 강요받다가

1930년 11월 14일 처형되고 모안영은 석방되었다.


아들 세 명은 양개혜의 어머니, 즉 외할머니가 보육했다.

그 때 모택동은 정강산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아들 삼형제는 상해로 보내져 그곳 공산당 비밀 조직에서
기르게 되었다.

그러나 공산당 조직이 발각되어 박살나자 그들 형제는 동건오라는

가난한 당원에게 맡겨졌다.

더구나 연안으로 부터의 송금도 장기간 끊겨

삼형제는 몇년간을 거지보다 나을 것 없이 고생하게 되었다.


이 기간 네 살짜리 셋째 아들 모안룡이 병에 걸려 죽었다.

더해서 둘째 모안청이 거리에서 구타당하여 정신 이상이 되었다.

1937년에야 이들은 겨우 연락이 되어져 소련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겨우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과 교육같은 받게 된다.


어머니를 잃은 지 7년만의 일이었다.


큰 아들 모안영은 이런 어려운 악조건에서 제대로 자라

2차 세계 대전 때는 소련의 프룬제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소련 군에 입대하여 전차 소대장으로 베를린까지 진격하였다.


그와 동생 모안청은 1949년 중국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고 

귀국해서 아버지 모택동과 실로 20년 만에 해후하게 되었다.


모안영은 북경의 한 기계 공장의 당 부서기로 일하면서

유사제(劉思濟)라는 처녀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데 신혼

일 년 만에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다시 입대하여 한국 전선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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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안영과 유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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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안영이 죽고 나서 모택동은 자기 친구에게 모안영이
한국 전선에서 전사한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녀석(아들 모안영)을 파병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나 명색이 중국 공산당 중앙 주석인 내게 자식이 있었다는
 처지를 생각해보게. 

 만약에 내 아들을 조선의 전선에 파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자식들만을 전선에 파병했더라면, 내가 어떻게 중국 인민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모안영은 중공군이 본격적으로 한국전에 개입하기 시작한
1950년 중공군 총사령관 팽덕회의 사령부에서 러시아어 통역과 

행정일을 했었다.


팽덕회는 항미 원조 의용군(抗美 援朝 義勇軍)이라는 이름 아래

한국 전선으로 파견한 중공군 주력이 압록강을 도강하던 날인

1950년 10월 19일 야간에 압록강 대교를 짚차를 타고 넘어와

그 날로 평북 운산 대유동에 비밀리에 미리 설치한 사령부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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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일성과 팽덕회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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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모안영도 같이 사령부 요원들과 함께 동행해서 북한에

들어 온 듯하다.

대유동의 금광에는 미리 파견한 선견대가 설치한 사령부에
도착해서 자리를 미리 잡아 놓았었다.


이 금광은 구 한 말에 미국인이 개발했던 금광이고

노다지- No Touch- 라는 말이 생긴 곳이다.


광산 갱(坑)이 두 곳이 있고 광산 사무실들과 창고
같은 곳이 있는 곳이다.

여차하면 터널로 피난 할 수도 있고 근처 대동이라는 마을에
평양에서 도주해온 김일성 일당도 있어서 위치적으로 괜찮다고
생각한 곳이었다.


미군과 대결하는 중공군의 최초 사령부가 자리 잡았으니 아이러니한

생각도 들고 미국인이 세운 병원에서 태어난 모안영이 미국인이

운영했던 운산 금광에서 미국인에 의해서 삶을 마감하는 이상한

운명을 가진 것이 기이하다. 


이곳에서 팽덕회는 북진하던 한미군의 전위에 한방 먹이는

그해 10월의 1차 작전을 기획하고 지휘했었다. 

한 달 간 바삐 지나간 1950년 11월 24일,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팽덕회 군의 작전 참모 정감여가 회상하는 바는 이 날 저녁을 먹은 후

사령부 상공으로 미군 F-80 슈팅 스타(SHOOTING STAR) 전투기

12기가 지나갔다. 122052293595650.jpg
F-80 shooting 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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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을 끝내고 귀환하는 미 공군 편대겠지 했는데 그 중 한 기가

갑자기 뒤돌아와 사령부 상공을 어두워 질 때까지 한 시간이나

선회하며 살펴보다가 돌아갔다는 것이다.


나중에 확인 해보니 그 몇 십 분 전에 12기의 미군
제트 전투기에 의한 수풍 발전소에 폭격이 있었는데 그 편대가
폭격을 하고 귀환하다가 의심스러운 사령부를 발견하고
정찰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감여가 무엇을 잘못 보았거나 오해한 듯하다.

수풍 발전소는 이 때 폭격되지 않았었다.

그곳은 압록강 철교와 같이 조중(朝中)국경에 위치해있는

민감한 곳이기 때문에 초기에는 폭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수풍  발전소는 작은 수의 전투기로는 엄두도 나지 않는
거대 표적이었다.

수풍 발전소는 폭격대상에서 제외 되다가 1952년 6월에야
수백기의 미 공군 해군 해병대 항공대 공습으로 파괴가 되었다. 122052295855358.jpg

수풍 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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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작전을 끝낸 제트 전투기는 연료 소모가 많아서 한 시간이나
체공하며 한 목표를 정찰하지 못한다.


더해서 대편대로 출격에서 귀환 길에 한 기만 떨어져 나와 정찰하는

행위는 돌발 상황이 있지 않은 이상 극히 드문 일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도 한 기가 아니라 두 기가 같이 행동한다.


나의 생각에 앞에서 출격한 전투기의 폭격 성과를

확인하고 돌아오던 정찰기가 평소 수상하게 보이던 이곳을

집중 정찰을 한 듯하다.


아니면 우연의 일치로 따로 정찰 임무를 띄고 출격한 정찰기와
폭격을 끝내고 귀환하는 전투기가 서로 이 지역에서 교차했는지도
모른다.


이곳 사령부에는 북경의 모택동과 직접 교신 할 수 있는 강력한

무전기가 장비 되어 있었다.

중공군은 일본군을 패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던 미군의

전자 정보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는지 몰랐던 지도 모른다.


이런 전파를 쏘는 무전기는 위치 파악이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전파를 쏘는 위치를 이 지역으로 파악하고 범위를 축소하며

수색하다가 사령부가 발견 한 것 같다.


상공에 오랫동안 배회 했다는 말은 시각적 정찰보다 지상의 무전기가

다시 한 번 전파를 발신하는 것을 기다렸는다는 말인지도 모른다.


미 정찰기가 오랫동안 체공하며 정찰하는 것을 본 사령부
요원들은 불안했다.

그런 정찰기의 출현 뒤에는 반드시 폭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부사령관 홍학지(洪學智)의 주제로 대피 회의를 하고
만단의 준비를 했다가 다음날 새벽 4시부터 시작하여 사령부

전 부서가 전부 금광 갱 안과 주변의 방공호로 대피했다.


대범했던 팽덕회가 공습 가능성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피를 하려고 하지 않아 사령부 요원들이 애를 먹었던 기록이 있다.


대피를 다 완료하고 나서 동이 떴고 이들 사령부 요원은 갱 안과
방공호에서 일을 계속했다.


과연 그날 1950년 11월 25일 오전 10시쯤 미 공군의
F80 12기가 저공으로 내습했다.

전투기들은 은색으로 반짝거리는 네이팜탄들을 사령부로 쓰던
건물들에 투하하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네이팜 탄은 팽덕회가 집무실과 작전실을 모두 명중하여 굉음과
함께 엄청난 불길을 쏟아냈다.


사령부 요원들이 대피하고 그대로 있었으면 모두 전멸했을 것이다.

네이팜 탄의 극단적인 고열을 내는 소이제가 담긴 액체 폭탄이다.


그 고열은 멀리서도 뜨거움을 느낄 정도로 높고 옷에 그 불붙은 액체가

붙으면 고무처럼 붙어서 떨어지지 않고 태우는 독성적인 위력이 있다.

미 공군은 B-29 폭격기를 수 백 기를 동원하여 이 네이팜 폭탄들만

일본 도시들에 투하해서 엄청난 화재로 도시를 다 쓸어내다시피 하는

파괴 작전을 전개했었다.


사령부로 쓰던 목조 건물이 무섭게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사령부 요원들이 살아났다는 안도의 느낌으로 가슴을 쓸 여유도 없이 

그 엄청난 불길 속에서 누가 몸에 불이 붙은 채로 튀어나왔다.


작전실 근무 작전 부부장 성보(成普)였다.

그는 불붙은 옷을 벗어 던지고 비명같이 고함을 질렀다.

“빨리 구출해 주세요. 모안영과 고서흔(高瑞欣)을 살려 주세요!"

사람들이 놀라서 불붙은 건물로 달려들었지만 너무 온도가 뜨거워서

감히 접근조차 할 수도 없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다혈질인 팽덕회가 거의 발광하다시피하며

불속에 뛰어들려고 해서 주위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말렸다한다. 122052298895253.jpg

네이팜 폭격 - 보시다시피 다른 폭격과 달리 불붙은 기름을 지상에
퍼부어 놓은 것 같은 특징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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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덕회는 50년 대 말에 숙청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모택동이 아들을 죽게 만든 팽덕회에 대한 감정을

내심 감추고 있다가 표출했다고 했지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불이 다 타고 나서야 두 사람의 유해를 수습 할 수 없었다.

모 안영의 유해는 까맣게 타서 숯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전투기의 폭음이 들리자 성보는 재빨리 건물 밖으로 튀어나왔지만

경험 없던 모안영과 고서흔은 책상 밑으로 대피했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들만 왜 대피하지 않았나 하는 것은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모안영의 유해는 대유동에 임시 가매장 되었다가 모택동의 지시로

북한 땅에 매장되었다.


그는 북한이 평남 부령군이라는 곳에 만든

‘지원군 혁명 열사 능원,이라는 곳에 안치되어있다. 122052302042789.jpg
북한의 지원군 혁명 열사능원에 안장된 모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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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혁명 때 북한과 중국의 사이가 매우 나빴는데 김일성은

속 좁은 짓을 했었다. 

홍위병이 김일성 욕을 해대자 격분한 그는 지원군 열사능원을

훼손하고 모안영 묘 앞에 만든 큰 기념비를 파괴했었다.

(나중에 대중 관계가 회복되자 다시 원상회복하기는 했다.)

지금 이곳은 북한 방문 중국 VIP들의 주요 방문 장소가 되어있다.


모택동은 며느리에게 신혼 일 년 만에 전선에 나간 아들의 죽음을

비밀로 지키다가 삼 년 만에 며느리에게 알려 주었다.

그로서도 괴로웠을 것이다.

그 뒤에 며느리가 수차 남편의 유해를 중국으로 환국시키자고

말을 했지만  모택동이 거절했다고 한다. 122052305024642.jpg

남편 모안영의 전사지를 돌아보는 말년의 유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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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모안영의 죽음은 통치자 모택동의 도덕성을 크게 높여주는데

일조를 했다.


그러나 모택동에게도 적이 많았듯 그의 사후에 중국내에 모안영의

전사를 평가 절하하는 말도 많이 떠돌았었다.


최전선에서 죽은 것도 아니고 안전한 후방 총사령부에서 근무하다가

재수가 없어서 폭격으로 죽었는데 그게 대단한 것인가 하는 말이다. 122052307114126.jpg
하사진 -    양개혜의 다음 부인. 대장정의 어려운
고비를 넘겼지만 모에게 버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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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상류층의 노블리시 오브리제의 시각으로 내막을 보면 모안영의

한국전 참전과 죽음은 높이 평가해줄 값어치가 있다.


먼저 그가 아버지가 참전하라고 하기 전 자신이 먼저 적극적인
참전 의사를 보인 것이다.

팽덕회가 한국 전선으로 떠나기 전에 모택동은 장행회(壯行會)를
열어주었는데 이때 강청이 없어서 모안영이 참석했었고 그가
팽덕회에게 한국 전선에 데려가 주기를 강청하자 모택동이
승낙하여 이루어졌다고 했다. 122052309666543.jpg

하사정을 모스코바로 내쫓고 모의 아내 자리를 차지한 강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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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보면 사령부에 근무하면서도 모 안영은 항상 전선으로
갈 기회를 찾고 있었다.


한국 전쟁초기 서부 전선에서 주공을 담당한 중공군 38군의
사령관 양홍초에게 자신에게 최전선의 중대장 직을 맡겨주기를

간청하기도 했었다.


그가 최전선이 아닌 안전한 후방의 총사령부에 근무했다고 하는 지적은

모안영의 죽음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무언으로 지적하고 있다.


완전 제공권을 쥐고 있었던 미 공군과 해군의 항공력은 북한 전체를

주야로 폭격했다.

전쟁 말기에는 북한 전체 60개 도시에 성한 건물이 없을 정도였다.

북한에서 공습에 관한한 전방과 후방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모안영의 죽음은 적어도 한국전에서 적군 수장 아들의

전사이기는 해도 한국에서도 크게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택동은 여러 처에서 본 자손이 많은 편이었지만 모 안영만큼

사랑한 자식은 없었다.

더해서 그 뒤 다른 독재자들이 흔히 한대로, 예로서 북의 김일성처럼

자식을 측근에 두고 큰 권력을 나누어 준 일도 없었다. 


양개혜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삼형제중 남은 아들인 모안청은

정신 이상으로 정신 병원과 요양원을 출입하며 그래도 여든 네 살까지

살다가 작년(2007) 3월 사망했다.


모안청은 형수(劉思濟)의 동생인 소화(小華)와 1960년 늦은
결혼을 했다.
( 여기에 대해서 이설이 있다는 것을 미리 이야기 해둔다.)122052312644166.jpg
모안청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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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녀는 중국 공산당 소장의 계급에 있다가 올 6월 사망했다.

몇 년 전 동포로서 중국군 최고위 계급인 상장 조남기 장군(퇴역)이

고향(한국 청원군)을 방문 했을 때 그녀가 수행하고 한국에 온 일이 있었다.
122052314898424.jpg
손자 모신우,
   증손 동동,  뒷사진은 작년
   작고한 모택동 아들 모안청

 

두 사람 사이에 모 신우(毛 信宇)라는 아들이 있다.

현재 중국군 장교로 근무하고 있다.

얼마 전 그에게서 동동이라는 아들이 생기자  해외 언론에
모택동의 증손자가 태어났다는 뉴스를 타기도 했었다.

 
나는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한국 전쟁 중 적군이었던 중공군이나

모택동을 주도적으로 찬양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는 우리 국군은 적어도 신성한 국방의 의무에
대해서는 한국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잘 결속된 지도층을 가진
힘든 적군과 싸워야 했다는 냉엄한 역사적 사실은 직시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 길은 훨씬 강한 미래 한국, 훨씬 강한 미래 국군을 만드는
길의 토대이기도 하다.


전쟁 중 한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연안까지 밀렸을 때
부산 부두에 믿지 못할 일이 있었다.


부산 부두 한적한 곳에 정박해놓은 일본 밀항 직전 밀선에서
여러 사회의 유지들과 함께 초대 한국군 포병사령관을 지낸
장모 대령이 발견되었다.


군의 최고위층이 국가가 위험해졌다고 군을 탈영해서 일본으로

밀항하려던 순간이었다.

그는 체포되어 총살형에 처해졌다

영웅적인 전투끝에  동작동 국군 묘지에 잠들게 된 수많은
호국영령들의 상부에는 이런 썪은 군의 지도층 부패가 있었던 것이다.


그 뿐인가,오늘날 한국 굴지의 재벌인 모 재벌 창업주는 전쟁이

치열한 중에 군에 입대할 나이의 큰 아들을 일본으로 밀항시켰다.


그리고 일본인 현지처의 집에서 일본 학교에 다니게 했고 나머지

두 아들도 꼭 같은 방법으로 보내 일본 유학을 시켰다.

수많은 서민들의 자제가 전선에서 죽어갈때 그들 형제들에게
병역이란 모기가 우는 정도의 귀찮은 소리였을 뿐이다.


상류층의 병역 도덕성이 이 정도니 일반인의 병역에 대한

인식인들 어떻겠는가?


6.25 전쟁 때 국내에 만연된 병역 비리는 정말 우리나라의

역사에 오점으로 남겨 질것이다.

사실 전선에서 적의 포화에 호국의 원념을 안고 전사한
국군 장병들은 사실 돈 없고 빽 없는 일반 서민의 자식들이
대부분이었다.

오죽했으면 적탄에 전사할 때 “ 빽!”하고 죽었다는 말이
일선에서 떠돌았을까? 


그 때 국가가 부르면 응당 가야했던 병역의 의무를

교묘히 피하고 아리송한 단체에 있었다거나 두리뭉실한

근무를 했던 사람들이 그 것으로 병역의 의무를 대신 했다는

논리를 내놓고 대통령들을 했으니 ---


병역 빠지기는 그 뒤 한국 사회의 능력있는 자의 기술로까지
여겨져 요즈음도 재벌 자식들의 병역 면제율이 일반인의
두 어 배나 된다 한다.


나의 직장생활시 회장이라는 분은 병역 면제자였는데 아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어떻게 하나 보았더니 역시 그 아들도 군대를
가지 않았었다.

그 회장님은 돈도 많이 모았지만 수완이 좋아서 국가 단체의
장까지 맡으면서 TV에 나와 애국에 대해 여러 번지르르한
소리를 많이 했었다


병역면제가 한국 특권층에서 대물림하고 있으니

정말 우려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해마지 않는다.


인권 좋고 평등 좋은 말이다.

그러나 병역에 대해서,아니 노브레스 오브리제라는 시각에서
보는 한국 근대사는 문제가 많았다.


이번 국회에 제출되는 법안이 이런 대물림 인식이 완전히

불식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자료가 넘 길어서 죄송합니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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