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군의 낙동강방어전투였던 굴산성전투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09.25 09:4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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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의 지류인 보청천이 흐르는 청성면 일대는 옥천 일대에서 가장 넓은 벌판을 가지고 있고  군량미 조달의 핵심인 너른 벌판까지 갖고 있다.  굴산성은  토성인데  옥천일대에선  옥천읍의 삼양리 토성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토성으로 학계에선 추정하고 있다. 신라가 이곳까지 확대되기 전에는 백제나 마한세력이  축조한 토성으로 보인다.  굴산리토성 배후의 저점산성이 신라가 이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쌓은 석성이다.  아무튼 굴산성은  삼년산성이든 영동으로든 가는데는 꼭 거쳐야 하는 목지점이다.  현재도 굴산성 인근으로는 19번 국도가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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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설명 : 굴산성의 위치 (빨간타켓모양이 신라군의 거점이고 노란 세모꼴은 백제군의 주요 거점산성)

당시 백제군의 눈으로 본다면 바로 이런 풍광이었을 것이다.  바로 앞엔 굴산성이 버티고 있고 뒤쪽 높은 봉우리엔
신라의 증원군이    속속 도착하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포장도로로 되어 있지만  그 당시에도 이 방향으로 백제는 신라를 공격했을 것이다

 

122230328537554.jpg사진 : 보청천 평야에서 본 굴산성전경과  저점산성. 굴산성을 지나 멀리 보이는 산을 지나면 삼년산성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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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 굴산성 전경 파노라마 사진(앞 오른쪽 건물뒤 언덕베기가 굴산성) 굴산성은 옥천인근지역에서  삼양리토성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토성으로서 초기엔 마한 또는 백제지방세력의 치소(治所)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후 삼국사기 기록엔 신라 자비마립간시절  삼년산성을 축성하면서  굴산성을  보강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굴산성은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나즈막한 야산에 흙으로 빚은 토성이었으나 현재는 거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굴산성 안으로 들어가보면  중규모의 포곡형 산성으로서 군 주둔 지휘형 토성임을 금방 알수 있다.  동에서 서로 흐르는 보청천일대의 평야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지휘 관측 및 주둔형 성곽으로는 삼박자를 고루 갖춘 토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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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굴산성 평면도

 

필자의 생각은  산성에 대해서 고찰할때는  그 구조도 구조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공격과 방어측면에서의 고찰이라 본다.  그래서 구조적 특성에 대한 설명은 가급적 줄이고자 한다.  물론 고고학적으로는 유물이라든가  구조적 측면이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지리적 측면이 군사적 관점에선 더 중요하다.

특히 고대 삼국시대의 전투는 독립된 산성만의 전투가 아니라 인근 산성과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그런 지리적 연결관계는 삼국시대 전투뿐만 아니라 고려와 조선시대의 전투를 파악하는데에도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아닌가 싶다.  

이런 산성간의 시스템적 지원관계는  삼국시대가 가장 원할 하였고  반대로 시대가 내려오면서는 그 연결성이 떨어지다가 조선 중기이후엔  유명무실화되어서 외침에 제대로 대항조차 못하였다.

 

그런의미에서 굴산성전투 당시  지리적 위치와 군기동로의 연결성을 구글지도를 통해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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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설명 : 굴산성을 중심으로 보청천을 흐르는 평야 주변에서 백제와 신라의 전투 상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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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사진은  굴산성 동쪽 망대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보청천과 평야지대를 한눈에 조망하는 굴산성의 가치를
    엿볼 수 있다.      윗 상황도에서 보면 굴산성에서 보청천 방향으로  화살표 방향으로 보는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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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설명 : 망대지에서 남쪽 굴산성 입구쪽으로 내려다 본 모습이다.  보청천일대 평야와 강 건너 영동군의 궁촌리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마 관산성 전투 당시 마주보이는 산에선 백제의 주력군이 진을 치고 있고  바로 아래 들판

            에선 신라와 백제의 밀릴 수 없는 한판 승부가 벌어졌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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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흔적조차 없는 굴산성 입구를 들어서기 되면 소로에 접어들자 마자 우물터가 있다.   주둔형 산성의 핵심은 식수해결이다.  그 규모로 볼때  관산성이라 일컬어지는 삼성산의 간이우물터와는 비교되지 않는다. 수천년을 이어 내려온 우물이라 생각하면  그 초라한 모습과는 달리 수천년의 시대가 연결되는 그무엇의 느낌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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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산성이 보은과 영동 옥천으로 연결되는 삼각꼭지점에 위치하고 있슴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교통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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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신라 진영쪽에서 본 보청천의 모습이다.  아마도 그 당시엔 강건너 백제군이 포진하고 있었으리라)

 

 

 

현재도 유유히 흐르는 보청천 .  이 보청천을 사이에 두고 554년 신라와 백제는 서로 밀고 밀리는 전투를 벌였다. 보청천이 피로 물들었다고 하니 그 치열했던 전투전개과정은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굴산성이 백제군에 점령당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굴산성에서 배후의 저점산성으로 연결되는 신라의 방어선을 백제가 넘지 못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저점 산성 넘어 삼년산성으로 이어지는 루트상에 신라가 방어진지를 많이 구축하여 지금까지 곳곳에 산성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백제와의 전투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아 저점산성과 굴산성에서 백제 태자 여창의 진군은 멈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6.25 한국전에서도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던 북괴군은 낙동강전투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의 치열한 반격에 발이 묶였고  그 정점의 전투는 백선엽장군이 지휘하였던 다부동 전투였다. 그와 거의 비슷한 양상이 서기 554년 보청천의 굴산성전투였다. 여기서 백제군이 보청천의 굴산성과 저점산성을 못 넘은 이유는 무엇일까?

 

앞서 언급한 바대로 백제 공격군의 병참보급의 문제도 있었을 것이지만 이 지역은 신라의 주력군의 지휘본부인 삼년산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곳이다. 또한 삼년산성의 배후로는 거칠부장군의 지휘하에 있는  충주산성의 신라군이 포진하고 있었기에 거칠부장군의 신라군도 이곳 굴산성 전투지역으로 급파되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거칠부장군의 휘하 병력은 신라군 중에서도 가장 정예병력이다. 그들은 고구려군과 전투로 단련된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거칠부휘하의 신라군이 합세함에 따라서 백제 주력군은 진격이 멈추고 보청천을 사이에 두고 고착화 되었을 것으로 군사적 판단을 해 본다.  그 근거로는  이 전투이후 거칠부장군은 승승장구하고  병부령 이사부의 뒤를 이어서 병부령에 오르고 진지왕때는 실권자로서 군국정사를 모두 보는 상대등에 오른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 본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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