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대 점보기- 보잉 314 수륙양용 비행정
1930년대 점보 여객기는
수륙 양용 비행정
60년대에 우리에게 친숙한 보잉 747기를 개발했던
미 보잉사는 훨씬 그 이전인 1936년 그 시대의 점보기라
할만한 초대형 여객기를 개발했었다.
그런데 놀랄 일은 이 30년대 점보가 물에서 뜨고 내렸다는 것이다.
바퀴도 있어 육상에서도 뜨고 내릴 수있는 수륙양용이었다.
1927년 미국의 젊은 찰스 린드버그가 단발기를 몰고 뉴욕에서
파리까지 대서양 비행에 성공 한 뒤에 미국과 유럽 항공업계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섬유로 싸고 목제로 만든 복엽기는 역사의 유물로
사려졌고 전 금속제의 쌍발기에서 4 발기까지 등장했다.
단발기로 우편이나 나르던 상업 항공 산업은 4발 여객기의 등장으로
드디어 대양을 넘나들기 시작하는 장족의 발전을 했다.
뉴욕에서 파리까지 무착륙 비행한 찰스 린드버그의
스피릿 어브 센트 루이스.
비행정으로 대양을 넘어 다니는 상업 여객 비행을 시작한 것은
미국의 최대 국제선 항공사의 하나였던 팬암이었다.
1934년 5월 팬암은 대양을 건너는 클리퍼 시리즈의
상업 비행을 시작했다.
첫 비행정이 1934년 5월 브라질 노선에 취역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상식으로서 잘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최초로 승객을 싣고
대양을 넘어 다니던 여객기는 물에서 뜨고 내리는
수륙 양용 비행정이었다.
비행정이 국제선 여객기가 된 것은 그 무렵 극소수에 지나지 않던
포장 활주로 비행장의 사정을 감안해서였다.
큰 4발 비행정은 크고 단단하게 포장 된 비행장을 이용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비행장은 그 무렵 극소수였다.
비행정은 지금 제트 여객기가 무착륙으로 대양을 왕래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 중간에 기착해야 했기 때문에 바다를 활주로로
이용하는 것이 타당한 생각이었다.
큰 포장 활주로 비행장이 드문 미지의 신항로를 개척할 때
이 점은 더욱 중요하였다.
팬암 회장 후안 트립은 대양을 건너다니는 최초의 대형 비행정인
시콜스키 비행정이 취역할 때 비행정에 클리퍼(CLIPPER)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비행기마다 노선의 특성에 따라 차이나 클리퍼,
호노루루 클리퍼, 버뮤다 클리퍼라고 다시 고유 명칭을 추가하는
마케팅 전략을 썼다.
타임지 커버에 나온 팬암 회장 후안 트립- 항공계의 거목으로
대형 비행정 개발, 제트 여객기 조기 도입, 점보기등의
개발등으로 항공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1981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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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서 매스 미디어에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이미지로 자주
등장해서 가장 잘 알려진 클리퍼는 최대 장거리 노선을 비행하던
샌 프란시스코- 홍콩노선을 비행하던 마틴 비행정의 차이나 클리퍼다.
팬암의 여객기에 클리퍼라는 이름을 붙이는 전통은 팬암이 도산을
향하여 급속하게 기울던 1980년도까지 계속되었다.
클리퍼란 19세기 출현한 범선 시대의 최후 걸작 쾌속선이었다.
배를 좁게 만든 대신 작은 돛을 많이 달아 최대의 속도를 내게 했다.
이 배들은 증기선에게 밀려 날 때까지 5대양을 누리는 특급 범선이었다.
팬암 회장 후안 트립의 할아버지는 이 클리퍼 상선대를 운영해서
큰 재산을 모았으니 자신도 할아버지의 재운(財運)을 물려받고
싶어 이런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19세기 쾌속선 클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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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로는 먼저 대서양쪽 남미 노선부터 열었지만 점차 확대해 나갔다.
비행정이 바다에서 이착수(離着水)했기 때문에 항로는
여객선 항로와 꼭 같이 개설이 되어갔다.
보잉 비행정과 전용 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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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정은 항구에 특별히 만들어진 비행정 전용 부두에서
이착수를 했다.
팬암은 이 비행정을 완전힌 오성(五星)급 호텔 같은 인테리어와
서비스로 승객들을 극진하게 대접했다
최초 대양 횡단 여객기 시콜스키 비행정 S-42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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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급 사롱에서 볼 수 있듯 나비넥타이를 맨 스튜아드가
긴 비행 중에 마치 궁중의 시종처럼 고객을 모셨다.
처음 투입한 국제선 비행정 여객기는 지금은 헬리콥터만
만드는 시콜스키 사 것이었다.
시콜스키 S-42 팬암 최초 장거리 대양 횡단 비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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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콜스키는 현재 헬리 콥터 전문기업이지만
기업설립 초기에는 고정익도 만들었었다.
(시콜스키는 원래 러시아 키에프 출신 항공 기술자였으나
러시아 적색 혁명 뒤에 미국으로 망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1942년도에 성공적인 헬리콥터를 개발해낸 뒤 헬리콥터에만
집중해서 미국 유수의 헬리콥터 회사로 키워냈다. )
시콜스키 비행정의 크기와 성능은 아래와 같다.
탑승 승객 수는 주간 비행 시 34명 야간 비행시 좌석을
뒤로 젖혀서 침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40명이었다.
최고 속도 188마일, 순항 속도 150마일,
엔진 660마력짜리 4 기가 장비되어있었다
시콜스키 S-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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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한 세 기의 비행정도 아시아를 연결하는 국제선에 뒤이어
취항했다
유명한 차이나 클리퍼 -팬암이 보유한 세기의 마틴 기중 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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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샌프란시스코와 홍콩을
비행하는 시콜스키의 운항 모습을 그대로 찍은 모습이다.
샌 프란시스코 출발 - 하와이 도착 -미드웨이 섬
-웨이크 섬 - 괌섬 - 마닐라 - 홍콩을 연결하는 징검다리 운행을 했다.
비행거리가 짧고 느려서 중간에 급유를 위한 잦은 기착을 했었고
두 중간 기착지에서 이틀을 쉬었기 때문에
샌프란 시스코에서 홍콩까지 무려 사흘이 걸렸다
(알림: 추가 동영상이 있는대 올리는 방법을 모르겠음 난중에 헬로TV잡다구리에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꾸벅 ㅡ,.ㅡ;;)
샌프란시스코와 홍콩 노선을 비행하는 시콜스키 비행정
창문에 보이는 중국인은 아무래도 중국 국민들에게
원성 높았던 거부 송 자문, 송미령 오빠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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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간 대양 횡단 비행정을 운영 해보고 장래 국제선의
유망한 미래를 내다본 팬암의 후안 트립은 그 때까지의
작은 비행정이 아닌 초대형 비행정을 이 사업에 투입하기로 하고
보잉에 대형 비행정 제작을 의뢰했다.
그 때까지 여객기로서는 볼 수없는 초대형이었으며 60년대
점보기가 처음 출연했을 때 항공업계에 주었던 충격만큼이나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보잉은 미 공군에서 채택하지는 않았으나 XB-15라는 최초 대형
4발 폭격기를 개발 해보아서 대형기 4발기에 대한 전문 기술이
축적된 상태였다.
( 보잉은 시험기 바로 뒤에 명 폭격기 B-17을 만들어 냈다.)
XB-15기- B-17기와 보잉 비행정의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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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잉은 불발로 끝났지만 가능성을 보인 XB-15기의 날개와
엔진 부분 시스템을 비행정에게 그대로 적용시켜 개발 기간을
단축시켰다. 엔진만은 두배의 마력이 높은 대형으로 교체했다.
이 보잉 비행정은 무게가 무려 40톤이나 나갔다.
시콜스키 비행정 보다 두 배나 컸으며 마틴 비행정보다
15톤이나 무게가 더 나갔다.
가히 30년대 점보라 할 만하다.
기체에 부착한 부주는 독일 항공 기술자 크라우드 도르니에
설계한 것으로서 무거운 기체를 물에서 균형을 잡고 잘 뜨도록 했다.
원래 설계에는 수직미익 (꼬리 날개)이 한 개였지만 비행의 안정성이
부족해서 세 개로 늘렸다.
보잉 314 비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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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승 승객 수는 주간 비행시 74명 야간 비행시 좌석을 뒤로
젖혀서 침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40명이었다.
최고 속도로 199마일 순항 속도가 183마일이다.
엔진은 라이트사 사이크론 엔진의 14시린더의 1600 마력 짜리
4 기가 장비 되어 있었다.
팬암은 1936년 보잉사에 비행정 6기를 주문했다.
2년 뒤 1938년 보잉이 모델번호 314를 붙인 비행정이 첫 비행에
성공 했고 더 손질이 되어 보잉사에 인도되었다.
대당 가격이 그 때로서는 파격적인 55만 달라나 되었다.
팬암에 인도된 첫 보잉 314기는 1939년 5월 20일 우편물을
싣고 포트 와싱턴에서 이수하여 아조레스 군도와 리스본을 거친
29시간의 비행 끝에 프랑스 마르세이유에 도착했다.
일종의 시험 비행인 우편 운송 비행을 만족하게 끝낸 보잉 비행정은
딕시 클리퍼라는 이름이 주어졌고 뉴욕을 출발해서 캐나다의
뉴 파운드 랜드를 거쳐 영국 사우스탬튼 항까지 정규 여객 비행
서비스를 시작했다.
첫 승객은 스물 두 명이었다.
(부언하자면 이 항구는 1912년 유명한 타이타닉이 출항했던 항구다.)
육지로 올라온 보잉 비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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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편도에 무려 375불, 왕복에 675불을 지불했다.
이것은 지금 금액으로 환산하면 왕복 비행에 8백 만 원 정도를
여객운임으로 지불했다는 이야기다.
다른 보잉기인 양키 클리퍼는 1939년 7월 8일 17명의 승객을
태우고 영국으로 출발해서 첫 비행을 시작하였다.
허나 비행정이 열었던 북 대서양 횡단 노선의 황금시대는 1939년도
9월에 유럽에 발발한 대전으로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대서양 노선은 단지 3 개월만 운행되고 1939년 10월 3일
중단하고 말았고 팬암은 중요한 북 대서양 노선을 포기해야 했다
이륙하는 보잉 314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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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보잉 314의 입증된 성능을 본 팬암은 다른 6기를
추가로 주문했다.
더 확장되고 증설되는 노선으로 투입하기 위해서였다.
전쟁은 팬암의 계획을 또 틀어버렸다.
주문한 6기중 3기만 인도되고 나머지 3기는 더 다급한 전쟁의
와중에 있던 영국의 국영 항공사 BOAC에 인도되었다.
북대서양 노선을 포기한 보잉 비행정은 주로 아직 전쟁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중부 대서양이나 브라질을 통해 대서양
노선 비행을 계속하였다.
홍콩과 마니라를 운항하던 보잉 314, 호노루루 클리퍼.-
하와이 근해에서 엔진 고장으로 착수, 미 해군에 전원 구조
되었으나 기체는 하와이로 예인중에 거친 파도와 예인함
충돌로 유실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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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급증하는 군사 요청을 수행하는 비행을 많이 했다.
카사브랑카 회의에 참석하는 영국 처칠 수상을 태우고 간
영국 보잉 비행정의 비행은 유명하다.
2차 세계 대전 중 팬암이 보유했던 보잉 비행정은 5기가
미 공군과 해군에게 팔려 활약했다
보잉 314 조종실. 두 조종사와 항법사, 무선사,
그리고 기관사가 일하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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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특기할만한 패시픽 클리퍼라는 비행정의
초 장거리 귀환 비행의 모험이 있다.
12월2일 미국을 출발해서 7곳의 중간 기착지를 거치며
뉴질랜드로 가던 보잉 비행정 패시픽 클리퍼는 뉴칼레도니아에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으며 하와이가 기습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와이는 중요한 중간 기착지였다.
일본 해군 항모 부대가 주변 해역에서 언제까지 작전할지
모르는 판에 그대로 같은 길을 따라서 되 돌아 갈 수는 없었다.
패시픽 클리퍼 기장 로버트 포드는 결단을 내려
지구 반대편으로 돌아 구국하기로 했다.
그는 호주에 급히 뉴질랜드 손님을 내려놓고 긴긴 귀국길에 올랐다.
그 항로가 무려 한 달이나 걸리는 거리였다.
오스트라리아 - 자바- 실론 - 카라치 -바레인- 수단 -콩고
- 브라질 -트리니다드 토바고-뉴욕의 아찔하게 먼 31,500마일의
귀환을 마치고 보니 세월이 무려 한 달이나 흘러
1942년 1월 6일이 되었다.
그 때의 상용 여객기로 감히 상상할 수도없는 초장거리 비행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보잉 비행정은 1946년 팬암에서 완전 퇴역했다.
전쟁 중 지상에 포장 활주로를 가진 대형 비행장이 대폭 늘어나서
굳이 바다에서 뜨고 내릴 필요가 없었다.
여기에 더해서 전쟁 중에 등장한 우수한 성능의 C-54같은
수송기가 여객기로 전용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칼하게도 C-54는 보잉 비행정과 같은 날에
시험 비행을 했었다.)
DC-4기, 군용기 제식명 C-54,
같은 형이 한국의 대통령이 전용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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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훨씬 성능이 좋은 C-54기는 전후 DC-4의 이름으로
상용 시장에 등장하여 큰 평가를 받았다.
팬암에서는 퇴역했으나 불하받은 중고 항공사들이 소수의
보잉 비행정을 여러 상업적으로 운용했지만 몇 년 안 되어
다 퇴역했다.
유감스럽게도 항공 산업계에 큰 획을 그은 이 30년대
점보기는 지금 한 기도 남아 있지 않다.
1960년대에 팬암 회장 후안 트립과 보잉은 다시 손잡고
보잉 747점보기를 개발했다.
최초로 출고된 점보 기와 주문한 세계 항공사 여 승무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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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정 때와 같이 보잉은 만들고 팬암은 사는 역할을 했다.
추측컨대 보잉 - 팬암 양사가 앞날의 대량 수송 시대를 예견하고
서로 개발과 사용에 협력에 손을 잡았던 것은 양 기업 간에 이미
30년대에 남들이 안 만들고 감히 안 써보던 초대형 비행정을 과감히
개발해서 굳어진 유대와 축적하며 공유했던 제작과 사용의
풍부한 경험,다시 말하면 초대형기에 대한 자신과
미래에 대한 안목이 있었던 것 같다.
끝 까지 봐주신 여러분들에게 쌩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