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왜 한성옛땅을 신라에 넘겨줄 수 밖에 없었나?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10.26 09:5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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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백제는 한성고토를 신라에게 넘겨줄 수 밖에 없었나?

군사의 신속한 동원과 집중에 실패한 백제

 

 

실제 기록을 봐도 알 수 있는데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새롭게 차지한 지역에 대해서 새로운 군주(軍主)를 임명하고 당시 흡수한 가야인들에 대한 대규모 사민(私民)정책으로 영토에 대한 장악력을 공고히 하였다. 이런 중앙집권적인 정치군사체제로 말미암아 신라는 유사시 특정지역에 군사동원을 집중할 수 있었는데 비하여 백제는 지방 귀족세력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등 군사력의 집중도에 있어서 열세를 보였다.

 

 

구당서에 보면 백제의 인구는 76만호로서 고구려나 신라보다 많게 기록되어 있다. 당연히 지형지세에서 백제지역은 많은 평야를 가지고 있고 그 땅에서 산물이 풍부하기 때문에 보다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었슴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백제의 인적자원은 지방분권적인 체제로 말미암아 유사시 군사력의 집중에 효율적으로 이용되지 못했다.

 

 

성왕 28년 백제가 달솔 달기에게 1만의 군사를 보내서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나 고구려의 역습으로 금현성을 내주는 등 서로 공방하다가 지친틈에 신라가 두 성을 차지했다고 하는 의미는 달리 말해서 백제나 고구려 두나라 모두 전투가 장기화 됨에 따라서 병력손실분에 대한 보충이 이루어 지지 않았슴을 의미한다.

 

 

그리고 관산성 전투에서도 초기 승기를 잡았던 백제가 신라의 반격에 결국 무릎을 꿇게 되는 과정에서도 보면 신라는 신주의 김무력군과 그 휘하의 보은 삼년산성의 군, 그리고 상주의 군등 삼개방면의 지원군이 옥천 관산성으로 집결하는 것을 보여주는 반면에 백제는 그런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군사력의 집중도에서 백제가 신라에 밀린 결과이다.

이에 대해서 백제성왕은 그 보완책으로서 전통적인 백제의 우방인 왜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고 신라의 압박에 시달리는 가야세력을 응원세력으로 확보하였다고 봄이 사실적 관계 추론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한다. 실제로도 일본서기 흠명천황 15년

 

 

조 기록에 보면 이런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창이 신라정벌을 계획하자 기로가

 

 

“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사옵니다.”라고 간하였다.

그러자 여창이

 

 

“늙었구려, 어찌 겁내시오? 우리는 대국(大國)을 섬기고 있으니 어찌 겁을 낼 것이 있겠소? ”라고 하고 드디어 신라국에 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에 보루를 쌓았다.

 

 

기로라 함은 원로신하들인데 대체로 백제의 귀족세력이다. 태자 여창의 군사계획에 적극 동조하기 보다는 반대의 입장을 표하는 것을 볼때 그만큼 백제는 군사력 동원이 쉽지 않았을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비해서 신라기록은 왕이 명해서 어느 장군이 가서 싸웠다고 하는 것과 비교하면 군사력 동원에 있어서의 양국간의 차이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군사 기동력의 차이

무릇 군사력의 집중은 기동력에 달려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동력 있는 군대는 승리하게 될 확률이 높다. 이 기동력이라는 부분에서 신라가 월등히 앞서 있었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한강을 내륙운하처럼 군사물자의 이동수단으로 이용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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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설명 : 요즘 세간에 관심이 되는 낙동강과 한강의 물줄기를 잇는 운하그림이다.  공교롭게도신라가 이용한 물길과 100% 똑같다. 신라는 바로 이 물줄기를 이용해서  군수물자 및 병력의 이동등에 적극 이용하였다. 그리고 이 한강은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당나라를 몰아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방어막이자 보급로이였다. 

 

 

신라가 총력을 기울여서 죽령넘어 남한강 상류를 차지하고 국운을 걸고 한강하류를 차지한 것에 대해서 대부분의 견해는 중국과의 통교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한강은 신속한 군사 보급물자 이동의 핵심적 자원이 된다. 지금처럼 도로나 철도가 나있지 않은 상태에서 험한 산길을 넘어 군사이동한다는 것은 엄청난 인내와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신라는 남한강 일대를 차지함으로써 보다 빠르고 안전하게 한강하류에 도달할 수 있었다. 또한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도살성과 금현성을 차지함으로써 신라의 주둔지였던 소백산맥인근지역에서 한강하류까지 가는데 중간기착지로서의 교두보까지 마련하게 되었다. 즉 가지역의 성간에 유기적인 지원 연결체제를 구비한 것이 기동력 확보에 근간으로 작용하였다.

이에 비해서 백제는 수도 사비에서 한강하류까지 이동하려면 순전히 육로로만 이동해야 하고 중간중간에 적에게 보급로가 노출되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지방분권적인 정치군사체제에서 각 지역의 성(城)간에 유기적인 결합력이 신라보다 상대적으로 열세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런 이유에서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할 때 백제가 곧바로 반격하지 못한 실질적 이유로 산정할 수 있겠다.

 

 

신라 진흥왕이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되찿은 옛 백제 땅에 신주를 설치하고 김무력을 군주로 임명하였다고 비정하는 곳이 지금의 하남시 일대의 이성산성이다. 이성산성에서 보면 옛 백제의 수도엿던 위례성인 풍납토성이 바로 눈 아래 보이고 한강 건너 구리시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전략적 요충지를 신라에 빼앗긴 백제로서는 얼마나 뼈아팠을지는 가늠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게 중요한 지역이라면 신라의 공격에 맞서 격전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도 없다.

 

 

이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정상적이라면 백제가 오매불망 되찿은 옛고토라면 또 그곳을 신라가 공격하였다면 응당 격전을 벌였어야 이치상 맞고 또 빼앗겼다 하더라도 되찿기 위한 공격을 백제가 했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때의 상황을 일본서기엔 이렇게 적고 있다.

 

"백제가 한성을 버렸다. 그래서 신라가 그곳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즉 신라의 공격이 먼저가 아니라 백제가 한성을 포기하고 난 다음에 신라가 한성땅을 차지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왜 백제는 한성 옛땅을 버려야만 했을지 역사적 추론을 해 보자.

 

 

백제 성왕의 사비천도의 영향

옛나 지금이나 한나라의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이만저만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제적 관점에서 수도를 옮길 수도 있겠으나 대체로 보면 정치군사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수도를 옮기는 목적이 더 크다.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백제는 수도를 한성위례

 

 

성에서 웅진성으로 그리고 부여사비성으로 천도를 하였다.

한성위례성에서 웅진성으로 옮길때는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한성백제의 개로왕이 참수되고 고구려에 점령당함으로써 부득불 문주왕때는 수도를 공주 웅진성으로 옮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성왕때는 상황이 다르다. 성왕의 선대왕인 무녕왕은 정치적으로 어지러웠던 웅진시대를 재정립한 왕이었고 그 토대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따라서 성왕이 웅진에서 부여사비로 옮기는 것은 군사적 관점이 아닌 정치사회적 관점에서 봐야 하는데 이 배경엔 정치적 영향력 확대가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좁은 웅진성에서 보다 넒은 사비성으로 옮겼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사비성으로 옮김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 더 크다 할 수 있다. 고구려 장수왕도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할 때 그에 반대하는 귀족 약 2000여명을 참살하는 우여곡절을 겪었었다.

 

 

어떻든 수도천도 과정에서 백제성왕은 기존의 정치세력을 자신중심으로 재편하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과정에서 소외된 귀족계층이 생겼음은 자명할 것이다. 그런데 한성을 탈환하기 위해선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소외된 귀족이나 호족들에게선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병력수급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백제와 신라의 점령지에 대한 처리 차이

 

 

이런 측면에서 신라와 백제의 병력운용에서의 차이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는데 신라는 새로운 땅을 차지하게 되면 그곳에 지방관을 파견하고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실질적인 지배를 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한성에 신주를 설치하고 김무력을 그곳 군주로 임명한 예이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가야인을 새로 획득한 땅에 이주시키는 사민정책까지 쓸 수 있었다.

 

 

그러나 백제는 지방분권적 국가였기 때문에 사민정책은 물론이거니와 새로점령한 땅에 대해서 군대를 장기적으로 주둔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왜냐하면 지방귀족휘하의 병력은 전투가 끝나면 다시 지방귀족소속으로 복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부연한다면 신라는 점령지에 대해서 국가직할로 편입시키는 데 비하여 백제는 편입이 아닌 부용세력화 정책이었기에 신라처럼 항구적인 자기영토화가 힘들었다. 이것은 백제가 멸망할때까지 백제가 전라도 전지역에 대한 완벽한 지배권을 가지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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