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또하나의 인천상륙작전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10.28 18: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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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T - 수륙양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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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진격하는 진격로의 큰 장애물인 한강을 인천에서부터

가져온 상륙용 주정 [LVT]으로 상륙 작전 하듯이 도강해버린

행주 도강 작전을 보기로 한다.


북한군이 도강 작전을 저지하고자 했으나 LVT가 동원 될 줄은

몰랐던지 도강을 막지 못했다 .


또 행주의 도강작전에서 북한군이 500년 전 권율 장군이 일본군과

사활을 건 전투를 벌였던 행주산성을 방어거점으로 사용 했었다.


1950년 9월15일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한 한미 해병대는 서울로

진격을 개시했다.

부평에서 북한군의 저항을 격퇴하고 전진한 미 해병대는

9월 17일 김포 비행장을 점령했다.


9월 19일에는 일본에서 날아온 미 해병대 전투기 3개 편대가 탈환한

김포 비행장에 착륙했다.

공대지 지원이 가능한 전투기와 수송기가 바로 비행장에 착륙하기

시작해서 해병 작전을 도왔다.


김포 공항을 점령 한 뒤 해병의 일대는 영등포로 향하고 일대는

행주 쪽에서 도강하여 서울 서쪽 방향을 공격해 들어가기로 한

작전계획에 따라 행주 도강 작전을 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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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 나루 작전도 푸른 산이 개화산 .
노란 부분이 행주산성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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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도강 작전에 특징이 있었다.


인천 상륙 작전 때 블루 비치로 불리던 인천시 해안으로 해병들을

태우고 상륙했던 수륙 양용차가 작전하던 해병들을 지원하면서

김포까지 따라왔던 것이다.

행주도강 작전을 앞두고 이들 수륙 양용 차[LVT]와
수륙 양용 트럭[DUKW]들과 50톤의 탱크와 차량 운반용
문교[門橋]등, 여러 도강 장비들과 함께

김포 공항 인근 한강 가에 있던 개화산 밑의 집결지에 모아 두었었다.


18일 밤 저녁 8시.

행주 도강 작전을 앞두고 연대 수색중대 호튼 대위 지휘하에

장교 두 명과 사병 10명, 그리고 정훈 장교와 통역 장교가 동행한

14명의 정찰대가 야음을 이용하여 남쪽 김포 쪽 행주 나루터에서

건너 북쪽  행주 나루 쪽으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두 개의 고무 보트에 공용화기와 갈아 입을 옷들을 싣고

밀면서 조용히 한강을 헤엄쳐 건넜다.

이 중의 한 명이 한국에서 태어나고 한국에서 자라서 한국어가

유창한 언더우드 대위였다.

그는 원일한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원일한 씨는 연세대학교 창립자 원두우 선교사의 손자로서 한국에서

태어나고 한국에서 자라서 한국어가 유창한  해군 대위였지만

북한군 침공시 떠나온 연세 대학교를 보고 싶어서 통역 장교로서
해병대 파견 근무를 자원했다.


이들이 행주 쪽 북쪽 강안에 도착한 시간은 20;40분쯤 되었다.

그들은 상륙과 동시 조용히 근처를 수색하다가 야간인데도

부근을 배회중인 두 명의 수상한 한국인을 발견했다.


검문 당한 한국인은 자신들이 서울에서 피난 나온 사람들이라고

말했지만 아무래도 수상한 점이 많아서 정찰대는 그들을 억류했다.

이들은 전후 사정으로 보아 해당 지방 공산당 조직이 북한군 지원차

내 보낸 강변 감시원 인 듯하다.


호튼 대위는 자신은 강안에서 일대를 수색하면서 행주 나루 동편의

언덕형의 작은 산에 캐숀 소위가 지휘하는 네 명의 정찰조를 파괴했다.


정찰조가 정찰을 나간 산은 바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행주산성이었다.


미 정찰조가 접근한 곳은 임진왜란 때 서울 쪽에서 공격해온

일본의 우키다 히데이에가 공격했던 전면이 아니라 반대 방향의

후면 지점이었다.


행주산성의 서울 쪽인 동쪽 면이 급경사인 반면 반대 방향은

긴 꼬리와 같이 낮은 사면으로 이어지다가 언덕만한 작은 산을 만들고

끝이 나는 동서로 긴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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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 125고지 또는 덕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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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찰을 나간 케숀 소위가 지금 정자가 서 있는 123고지 정상

끝까지 가보지를 않고 긴 언덕꼬리 부분의 작은 언덕 일대만

정찰하고 돌아와 적정 없음을 보고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강변 정찰 결과와 캐숀 소위의 잘못 된 정찰 결과로

행주나루 일대에 아무런 적정이 없다고 판단하고

본대에 무선 보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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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숀 소위가 잘못 정찰했던 행주산성 후면 꼬리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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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 5 연대장은 호튼 대위의 정보 보고를 듣고서

밤이 깊어 가는데도 LVT를 동원한 도강 작전을 강행하기로 했다.


빨리 건너가서 교두보를 확보해놓고 다음날 새벽부터 본대인

미 해병대 5연대 병력과 한국 해병대를 여유 있게 도강 시킬
작정이었다.

해병대의 서울 공략은 그만큼 시간을 다투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행주산성에는 정상일대에는 북한군이 이미 배치되어있었다.

북한군은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 후 서울로 진격하는 것을

막아 보고자 여러 번 시도했지만 실패했었다.


그들은 미 해병대가 영등포 쪽으로만 진격할 것으로 예상하고
대비하고 있다가 김포 비행장이 탈환되고 김포 비행장 입구와
행주 나루 사이에 적정이 분주한 것을 발견하고 부랴부랴
행주산성과 난지도에 병력을 배치하기 시작한 것이 미 해병대
정찰대가 강을 건너 정찰을 하던 그날 오후였다.


9량의 LVT에 분승한 수색중대의 본대가 한강 남쪽 개화선 뒤의

집결지에서 출발하여 행주 나루로 와서 종대로 도강을 시작했다.


해병대를 싣고 도강하던 LVT와 승무원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과는 달리 해병대 소속이 아니라 미국 육군의 소속이었다. 


미 해병대의 수륙 양용차 대대의 대대원들중 상당수가 급히 한반도로

파견되는 해병 1전차대대 M26 전차 승무원으로 증원되어서
대대가 텅빈 상태였다.

전차대대의 사정이 더 다급했던 터라 그런 억지 조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륙 양용차 승무원들의 충원 완료 계획은 인천 상륙
작전까지 완료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육군 소속 수륙 양용차를

사용하기로 하고 대대 전체를 일본 고베에 두고 왔었다.

2차 세계 대전중에는 미 육군도 상륙작전을 했었기 때문에

수륙양용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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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나루를 향하여 발진하는 LVT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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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조종수가 조종하던 LVT가 강의 중간쯤에 왔을 때였다

이를 지켜보던 행주산성의 북한군의 기관총과 박격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선두의 LVT가 기습적인 적의 화력을 뒤집어 쓰고 당황하다가

행주나루 아래 쪽 한강에 걸쳐있던 모래톱에 걸려 좌초하고 말았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때만 해도 행주나루에 앞 한강 중간에 노출된

모래톱 들이 있었다.


앞차가 걸려 버리고 이를 모르고 뒤따르던 후속차량

3량도 연달아 모래톱에 걸려 좌초되고 말았다.

나머지 5량은 긴급한 지휘부의 지시에 따라 김포로 철수해버렸다.


적의 사격을 받은 미 해병들은 도하중이던 LVT종대만이 아니었다.


행주 나루 쪽에 있던 정찰대에서는 돌발적인 상황을 틈타

도주하던 민간복 차림의 거동 수상자 2명을 부득이 사살했는데

이로 인하여 정찰대의 위치도 폭로되고 말았다.


은폐물도 없이 강변에 산개해 있던 그들에게 사격이 집중되었다.

위기를 느낀 지휘관 호튼 대위는 모두 장비를  실은 화기와
장비를 풀숲에 숨기거나 더러는 물속으로 던져 놓고  모두
물속으로 뛰어 들어 대피하도록 지시했다.


호튼 대위는 모래톱에 좌초된 LVT들을 유도하여 김포쪽으로 다시

기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일단은 모래톱에 걸려있던 LVT로

헤엄쳐 갔다.


그러나 바로 옆 수면에 떨어진 박격포탄에 의하여 파상[波狀]

충격과 파편에 중상을 입었다.

그는 옆에서 헤엄치던 다른 대원들에 의해서 좌초된 한 LVT에

운반되었는데 LVT안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좌초되었던 LVT들 중 두 량은 포격 속에서도 몸부림쳐서 모래톱에서

빠져 나와 출발점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나머지 두 량에 탔던

해병들과 승무원들은 헤엄을 쳐서 돌아와야 했다.

야간 도강 작전이 실패로 끝나고 나서 강의 중간에 걸린 두량의
LVT와 강북으로 파견했던 정찰대의 한 사병이 실종한 것으로
끝을 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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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 나루터 - 지금은 다리밑이 되어 트럭 주차장으로 사용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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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작전에서 두 LVT를 무사히 구난했고 실종 사병도 귀환했으며

 정찰대가 유기했던 장비들도 모두 회수 했었다.]


엉성한 정찰과 야간에 무리하게 진행했던 무리한 작전수행에
문제가 있었다고 본 제 5 해병 연대 지휘부는 작전 계획을
다시 짜고 준비를 단단했다.

공격 임무는 월미도에 상륙했던 제 3 대대에 다시 주어졌다.


다음날 새벽 9월 20일 06;45분 남쪽 제방을 출발한 제 1파의

LVT 6량은 적의 치열한 사격을 받으면서 종대로 전진하였다 .


도강 지점은 앞의 작전 요도에서처럼 개화산 동쪽, 행주산성

맞은편이 아니라 지금 신 행주 대교가 있는 지점이다.


LVT들은 개화산 남쪽 집결지에서 나와서  지금 김포 공항
정문에서 행주 대교로 가는 길을 따라가서 한강 나루터에서
도착하여 강을 건넌 것으로 보인다.


김포쪽  나루터  약간 하류 쪽에서 도강하여
역시 건너 행주 나루터 아래쪽에 도착한 것으로 짐작된다.

달리 이야기 하여 지금의 행주대교가 나있는 직선을
따라 갔다고 보면 될 듯하다.'

행주나루 양쪽으로 긴 제방이 설치되어 있어서

이 나루터가 아닌 곳은 도강이 힘들다.


다음 날 아침 06;50.

공격에 앞서 공격 준비사격이 약 15분간 실시되었으나 서둘러서

실시했기 때문에 포탄은 목표물에 제대로 떨어지지 못하고
강에 떨어졌다.


제1파로 대안에 상륙한 3대대 제 1중대는 즉시 우측으로

방향을 돌려 행주산성의 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중대는 3소대가 능선 우측 강변 쪽을 따라 공격했고  2소대가

LVT를 탄 채 그대로 강을 건너 내륙으로 들어가서 지금은

요식업소가 즐비한 능선 좌측을 따라 산성 정상으로 공격했다.

두 소대가 전개하는 동안 그들이 지원 받는 것은  LVT의 50구경

기관총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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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소대를 태운 LVT들이 저 다리 아래에서 카메라 방향으로 돌진해서
해병들을 하차 시키고 cal 50으로 화력지원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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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저항은 극히 격렬하였다.

민둥산이었던 그 무렵의 행주산성 능선 사면에서는

은폐 엄폐 할 곳도 없었다.


특히 야간에 적이 방어진지 공사를 해 놓은 능선 우측 강변 쪽을

공격하던 해병대는 극심한 화력의 세례를 받아서 사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마침 해병 콜세어 기 4기가 상공에 나타나 공중 지원을 개시하였다.

중대장 맥멀린 대위는 즉시 예비대로 대기했던 1소대를 직접 지휘하여

저항이 컸던 우측의 3 소대 쪽으로 증원 공격에 나섰다.

그래서 행주산성 5부 능선까지 확보했으나 맥멀린 대위는
부상을 입었고 중대의 피해도 극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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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소대의 공격로 강변 일대 -  지금은 유원지와 밭들이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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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이 돈좌 되는가 싶었는데 좌 전방으로 공격해 들어갔던

2소대장으로부터 적들이 행주산성 북동쪽, 다시 말해서 지금

인천 공항으로 들어가는 인터체인지 쪽 저지대로 뛰어들어

도주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맥밀런 대위는 즉시 자기의 부상을 잊고 산 정상으로의 돌격을

감행해서 무난히 고지를 점령할 수가 있었다.


이날 해병대의 공격을 강 건너 남쪽의 개화산에서 수많은 보도진과

군 수뇌부가 지켜보았다.

 

해병대 제 1 사단장인 스미스 소장, 미 태평양 해병대 사령관
세퍼드 중장, 제 7기동함대 사령관 스트러블 중장,
그리고 미 육군 아몬드 중장이 새벽부터 이들의 작전을
근심스럽게 지켜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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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레드비치[ 부두] 에 상륙하던 상륙정들은 두개의 일본제
알루미늄 사다리가 설치돼있어 표시가 난다. 
해병들은 이 사다리를 타고 부두로 상륙했었다.
제분공장이 있는 블루비치 상륙 작전은 LVT를 탄 해병들이
실행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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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 3대대 해병들은  9월 15일 인천 월미도에서  발휘하였던
용맹한 모습을 행주 산성에서 보여주어 관전자들을 감탄사를
나오게 하였다.
이날 미 해병대는  약 200명의 적병을 사살했지만 해병대도
43명 전사의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다. 인명 손실은 대부분
행주산성을 공격했던 1중대에서 발생했었고 적병 사살도 대부분도
행주산성을 공격했었던 제 1중대가 거둔 전과였다.


제 3대대가 행주산성을 교두보를 확보 한 뒤 제 2대대가 10시에

후속 도강을 개시하였다.

2대대 해병들은 LVT를 타고 내륙으로 진격하여 능곡 의 앞산인

목표 B와 강매리의 목표 C도 손쉽게 접수했다.


그러고 문교[門橋]로 행주 나루를 건넌 탱크들이 후속해서
제 2대대를 지원해주자 해병대는 더욱 진격해서 창릉천을 건너
수색역이 환히 보이는 경의선 양쪽에 위치한  대덕산[목표D]과
망월산[목표E]까지도 점령하고 그날 오후 15;40분의 공격을
마무리했다.

LVT는 이곳 수색까지 수송과 화력을 지원해주고 내륙 깊숙하게
수행했던  임무를 종결했다.


LVT가 행주 도강작전에서만 사용 된 것이 아니다.


미 해병대는 세 지점에서 한강을 도강했는데

한 곳이 지금의 절두산 성당 근처이다.


다른 한 곳은 대병력이 도강한 동작진 나루이다.

이 동작진 나루의 도강 작전을 은폐하기 위해서 LVT들은

영등포에서 북괴군이 격퇴 된 뒤 한강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으로 우회하여 사당동으로 나왔다.

그리고 사당로를 따라 내려와 동작진에서 갑자기 한강에 나타나는

기습 도강을 했다.


LVT들은 한강 북안의 서빙고 백사장과 보광동 쪽으로 도강을 완료했다.


이 기습적인 도강에 북한군은 미처 손을 쓰지를 못해

행주산성에서와 같은 조직전인 저항을 할 수가 없었다.


이 동작진 도강이 아마도 LVT가 바다를 떠나 가장 내륙 깊숙이까지

진출해서 작전했던 세계 유래가 없는 기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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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산성 입구의 해병 상륙작전 기념비에 전시된 수륙 양용차.
후기 모델이  작전에 쓰였다고 설명한 것이 조금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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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해병대는 인천 상륙 때 화려한 선두에 서지를 못했었다.

그러나 행주나루 도강 작전과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김포 비행장이 있던 김포 반도 전투에서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전과를 거두었다.

전진하는 미 해병대 후방의 잔적들을 소탕하며 후속하던

한국 해병대는 김포 반도의 잔적들 소탕 임무를 받았다.


그러나 김포 반도에는 도주하지 못했던 패잔병들이 아니라

새로운 적들이 우글우글했다.


그들은 임진강과 한강 하구를 경비하던 북한 정규군
107연대 병력이었다.

미 해병대가 점령한 김포 비행장을 야간 기습 공격해서
완전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고 김포반도

북단을 통하여 비밀리에 김포 반도에 침투했었다.


그들이 만약 일본군 가미가제 특공대식으로 김포비행장을

기습했더라면 큰 피해를 입을 뻔 했으나 한국 해병대의 분전으로

전부 소탕되었다.

초기에 침투한 북한군은 김포읍의 빈 식당에 설치된 한국 해병대

중대본부를 기습해서 타격을 주는 피해를 주었으나 그들 연대장이
한국 해병대에 잡혀 죽고난 뒤 나머지는 문자 그대로 지리멸렬,

전부 한국 해병대에 의해서 소탕되고 한 트럭 가까이 되는
무기가 노획되었다. 포로만 해도 300명이 넘게 잡혔다.

확실한 한국 해병대의 대승인데도 대중에 잘 알려져
있지 않는 사실이 유감스럽다.

김포의 북한군을 소탕한 한국군은  행주산성이 점령된
다음날 LVT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앞에서 말한 개화산에서 맥아더 원수가 한국 해병대와

미 해병대의 행주나루 도강 작전을 관전했었다.

강북으로 건너간 한국 해병대는 연희 고지와 중앙청

탈환 작전에서 활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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