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조이 재팬에서 한.일 학생간의 역사논쟁 중에서...
우리나라 역사에 전혀 무지하더라도 광개토호태왕이라고 하면 애 어른 할 것없이 다안다. 동시에 광개토대왕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속이 시원해지는 청량감을 느끼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광개토대왕비가 연상이 된다. 광개토대왕비속엔 고구려가 최전성기를 누릴 당시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몽골쪽의 염수(鹽水)근처의 비려(거란)를 치고 신라를 공격한 왜를 물리치고 신라를 구원한 역사가 6미터 높이의 광개토대왕비 4면에 빼곡히 적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인 광개토대왕비는 애석하게도 현재까지도 그 해석을 놓고 한 중 일 3국의 역사학자 사이에서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 핵심은 바로 임나일본부이다. 우리 학자는 당연히 일본의 주장은 틀렸다고 주장하면서 해석상의 차이를 논하기도 하고 비문변조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여기까지가 대충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파고들면 어느부분에서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고 있는지, 그리고 비문변조설의 내용은 무엇인지 그것까지 알고 있는 일반인은 드물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최소한 광개토대왕비문의 내용이 대충이라도 무엇인지 그리고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의 근거는 어디에 기인하는지에 대해서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약 2년여전에 한일학생들간에 역사논쟁이 붙었는데 한국학생들이 일본학생들에게 사실관계나 논리전개부분에서 거의 참패당하는 것을 지켜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논쟁의 핵심엔 광개토대왕비가 있었고 고대 백제와 왜, 신라의 관계가 논쟁의 핵심이었다. 필자가 충격을 받은 사항은 일본학생이 광개토대왕비문의 내용은 물론이고 삼국사기 내용을 꿰뚫고 있었던 반면에 한국학생은 매우 단편적인 내용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토론이 진행될 수록 한국학생이 밀리는 것을 봤었다.
그 논쟁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한국학생의 주장은 우리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든면에서 일본보다 앞섰다. 불교도 전해주고 한문도 전해주고 고금문물을 가르쳐 주었다. 한마디로 고대에 일본은 우리나라 하수였다. 라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서 일본 학생이 반박을 하면서 광개토대왕비문 내용과 삼국사기를 거론하면서 조목조목 따졌는데, 특히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 전지왕이 일본에 볼모로 와 있었고 그 외에도 많은 백제 왕자가 일본에서 볼모생활을 하다가 백제왕이 죽으면 백제로 돌아갔다는 논지로서 백제가 고대 일본보다 상위였다는 것에 대해서 반박을 하였다.
이에 한국학생은 전혀 그런 내용을 몰랐던지 말도 안되는 말이다. 그런일 없었는데 너희들 일본서기에서 조작해서 지어낸 것이다 라고 반박을 하였다. 그러자 일본학생이 웃음표시로서 (웃음)이라고 한다음에 이내용은 일본서기내용이 아니라 너희 한국의 삼국사기에 나온내용이다라고 응수를 하였다. 그러자 삼국사기에 이런내용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던지 한국 학생은 약간 뜸을 들이더니(댓글다는데 시간이 지체됨) 한다는 말이 "삼국사기는 믿을 수 없다 사대주의적으로 쓴것이라서 왜곡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일본 학생은 "웃으면서 (웃음 표시) 그러면 당신은 당신네 나라 역사서자체를 부정하는 건가라고 반문하면서 그러면 삼국사기를 제외하고서 백제에 대해서 무엇으로 이야기 하고자 하는가?"라고 질문을 하였다. 그 댓글 논쟁을 보는 순간 내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다. 우리의 역사서인 삼국사기를 한번도 읽어보지 않은 한국학생의 급소를 일본학생이 찔렀던 것이다.
그 다음 한국학생 대응은 이랬다. "환단고기라는 책도 있고 삼국유사도 있다. 그것이 더 정확하다. 그리고 일본 너희들이 일제시대때 일본에 불리한 책들은 모두 불살라서 그렇다" 라고 하자 일본 학생은 그 환단고기라는 책이 검증된 것인가? 또 조선총독부에서 불태웠다고 하는데 그 목록을 확인 해 봤는가? 라고 질문을 하자 한국학생의 대응은 일본 너희 역사도 믿을 수 없다.
일본서기도 다 왜곡된 것이다.라고 응수하면서 일본 너희에게 문자를 가르쳐 준사람은 백제 왕인이었다. 그리고 백제 아직기도 일본에 한문을 가르쳐 주었다고 응수를 하자 일본 학생이 즉각 반응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랬다 " 당신이 방금 한 이야기는 일본서기에 적혀 있는 이야기다. 보아하니 당신네 역사도 제대로 모르면서 무조건 일본이 나쁘다라는 생각이 앞서는 것처럼 보여서 대화하기가 좀 그렇다' 라고 대응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어진 임나일본부설과 광개토대왕비문 이야기로 넘어가자 한국학생은 일본학생에게 광개토대왕비문을 너희가 석회칠로 조작한 것이기 때문에 임나일본부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라고 집중 공격하였다. 그러자 일본학생은 임나일본부설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광개토대왕비문에도 나와있듯이 신라를 놓고 고구려하고 일본하고 쟁패를 겨눈것은 사실이다라고 응수를 하자 한국학생은 일본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백제가 주도했고 일본은 용병으로 참여한 것이다라고 역공을 폈다.
그러자 일본 학생은 비문의 구체적 내용을 언급하면서 광개토대왕비에서 문제가 되는 "來渡海破"부분에 대해서 일본만이 아니라 중국의 학자도 1984년도에 광개토대왕비문을 다시 조사해서 일본의 해석이 맞다고 발표하였다라고 응수하였다. 그러면서 학교에서 광개토대왕비 원문(한자) 그대로 배운다고 덪붙였다. 그런데 이렇게 광개토대왕비문의 구체적 사항으로 들어가자 한국학생은 완전히 수세에 밀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아마도 그 학생은 세부사항은 전혀 몰랐던 모양이다.
또한 이유중에 하나는 한문실력이 딸리는 한국학생이 한문을 잘 아는 일본학생에게 밀리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학생들은 광개토대왕비문의 한문까지는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학생이 한발 물러나는 것을 보고 나 자신이 이 광개토대왕비문에 대해서 좀 쉽게 학생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글을 한번 써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이제서야 오늘 첫 문장을 올린다.
그래서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일반적 사항을 간략히 설명하고 광개토대왕비의 핵심인 광개토대왕의 전쟁의 기록을 추적하고자 한다. 특히 광개토대왕비문의 전체 원문내용을 살펴보고 문제가 되는 부분은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그러면서 광개토대왕이 치룬 전쟁을 군사적 관점에서 재구성하고자 한다.
사진설명 :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광개토대왕비문 탁본(석회탁본,복제본)
1. 광개토대왕비의 대략적 내용부터 알고 넘어가자.
다음의 사진속에 나오는 탁본은 국립중앙박물관 금석문 자료실에 전시되어 있는 광개토대왕비 탁본이다. 애석하게도 원석탁본이 아니라 석회탁본 복제품이다. 우리나라엔 국립중앙박물관 외에도 국립중앙도서관, 동아대도서관 등 여러군데에 광개토대왕비 석회탁본이 있다. 그런데 중요부분에서 글자의 모양새가 약간씩 차이가 있다
사진설명 :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탁본 비문 내용 . 고구려 건국신화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추모왕(주몽왕)의 건국신화가 적혀 있고 능묘를 지키는 규정이라고 하는 부분은 "수묘인제도"라고 하는 것으로서 당시 고구려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비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일본학자들이 삼국사기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으나 비가 발견되고 그 내용을 해독하게 되자 오히려 삼국사기가 매우 정확하게 기술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도 되었다
사진설명 : 국립중앙도서관(왼쪽)과 국립중앙박물관(오른쪽)의 광개토대왕비의 탁본비교로서 석회탁본은 탁본마다 약간씩의 차이가 있슴을 알수 있다. 한일간의 역사논쟁의 중심부분인 래도해파(來渡海破)글자에 대한 탁본비교이다. 원석탁본에서 도해파(來渡海) 세글자는 거의 알아볼 수 없다. 국립중앙박물관 탁본에서도 문제의 해(海)자는 판독불가이다. 그러나 일본이 갖고 있는 사코가케노부가 갖고 있는 탁본(쌍구가묵본)의 경우엔 래도해파(來渡海破)부분이 선명하다. 그래서 비문변조논란이 일고 있다. 그런데 1984년 중국학자 왕건군이 발표한 광개토대왕비문 연구논문에선 일본편을 들어주어서 래도해파(來渡海破)가 맞다고 발표해서 이 내용이 1984년 일본 아사이신문에 대서특필된 바 있다.
사진설명 : 일본군 포병 중위 사코가게노부(酒均景信)의 묵수곽전본(쌍구가묵본)
사진설명 : 1984년 7월 아사이 신문에 보도된 중국학자 왕건군의 광개토대왕연구논문
2. 탁본의 종류
먼저 탁본의 종류부터 알아보자. 역사 기록물로서 가장 가치가 높은 탁본은 원석탁본이다. 그 다음으로는 석회탁본인데 석회를 바르는 이유는 탁본을 용이하게 하기 움푹파인 부분에 석회로 메우고 불분명한 글자를 좀더 확실하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광개토대왕비의 대부분의 탁본은 석회탁본이다. 그러다 보니 탁본마다 특정글자가 약간씩 차이가 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쌍구가묵본이 있다.
이 탁본은 묵수곽전본이라고도 하는데 원석탁본이나 석회탁본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원석탁본이나 석회탁본은 비문에 먹물을 뭍혀서 종이로 찍어내는 것인데 비하여 쌍구가묵본은 종이로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붓으로 글씨의 윤곽을 본떠 그린다음에 가장자리 부분에 까맣게 붓칠을 하는 것이다. 현재 한,중,일 학자간에 논란의 핵심인 쌍구가묵본으로 유명한 탁본이 일본 육군 중위 사꼬가게노부가 만든 탁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