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 사건3일간 120명 해안 상륙…주민 무참히 살해 ‘을종사태’ 선포…공비 113명 사살 7명 생포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1일까지 3일에 걸쳐 울진·삼척 지구에 북한이 내려 보낸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했다.1·21 청와대 기습 실패로 북한 군부가 의기소침해 있던 차에 김일성이 68년 9월 9일, 북한 정권 창건 20주년 기념식에서 “남한 혁명은 주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며, 이 주권 쟁취 방법은 무력만이 있을 뿐”이라고 강조함으로써 사실상 대남 폭력 혁명을 지령했다.
이에 고무된 북한의 강경파들은 남한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면서 지하조직과 불순 세력을 선동, 민중봉기를 획책해 재침 구실과 기회를 모색하고자 광분했다. 그리고 무자비한 테러와 파괴 활동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전후방 동시 전장화라는 모택동식 전술을 구사, 우리 군경부대의 전투력 분산과 피로를 촉진시킴과 동시에 위조지폐 유통 등을 통해 남한의 경제 질서를 혼란시키려는 음계를 획책했다. 이 일련의 대남 전략이 1·21과 울진·삼척 지구 무장특공대 침입으로 구체화됐다.
이때 울진·삼척 지구로 침투한 무장공비들은 3일 동안 네 차례에 걸쳐 각 30명씩 특수정을 이용, 해안에 상륙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해안 초소 분대장이 인근 동네 혼인 잔치에 초청받아 초소를 이탈하는 등 경계를 소홀히 해 아무런 징후도 포착하지 못했다.해안 침투에 성공한 무장공비들은 곧바로 산간 마을로 들어가 11월 3일 새벽, 주민들을 모아놓고 김일성을 찬양 선전하면서 남자는 남로당에, 여자는 여맹에 가입하라고 총검으로 위협했다.
그들은 주민들이 겁에 질려 머뭇거리자 대검으로 찌르는 등 만행을 저질렀고 심지어는 늦게 도착한 주민을 돌로 머리를 쳐 무참히 살해하기도 했다.또 무장공비들은 주민들에게 불온 책자와 위조지폐를 나눠 주고 군부대·경찰에 신고하면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주민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릴레이식으로 신고함으로써 늦게나마 소탕작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
11월 4일 14시30분, 상황을 보고받은 대간첩대책본부는 강원 정선·영월·삼척 지구에 ‘을종사태를 선포하고 군경과 예비군을 동원해 공비들의 퇴로를 차단, 포위망을 구축하고 본격적인 작전에 돌입했다.‘을종사태’란 대통령훈령 제18호에 근거한 것으로 일부 지역에서 무장간첩 행위가 질적·양적으로 증가해 경찰 병력만으로는 치안 확보가 곤란할 것으로 판단될 때 군 병력을 해당 지역에 상당 기간 투입, 대간첩작전을 수행하게 되는 사태를 말한다.
우리 군경과 예비군의 강력한 소탕작전에 지리멸렬한 무장공비들은 육로를 통해 북상을 기도했고, 그 과정에서 잔당 5명이 12월 9일 강원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 계방산 중턱 산간 마을로 들이닥쳤다. 한 초가로 잠입한 공비들은 밥을 해 달라고 위협하면서 북한을 찬양하는 사상교육을 했는데 이때 평창군 속사초등학교 계방분교 2학년이었던 이승복 어린이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하자 공비들은 잔인하게 이군의 입을 찢고 밖으로 끌고 나가 절굿공이로 머리를 쳐 죽이고 함께 있던 가족 세 명도 무참히 살해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군의 형 학관씨는 36곳이나 칼에 찔리고도 거름더미에서 살아남아 당시의 참혹함과 공비들의 만행을 생생히 증언했다. 아버지 석우씨는 이웃집 이사를 돕다가 늦게 돌아와 공비들에게 붙잡혔으나 다리에 칼을 맞고도 필사적으로 도주해 목숨을 건졌으며 이웃집에 마실 갔던 할머니도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결국 우리 군경과 예비군이 12월 26일까지 공비 113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함으로써 약 2개월간의 소탕작전은 종료됐다. 우리 측도 전사 82명, 전상 67명이라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계속된 무장공비 침입과 천인공노할 만행에 분노, 대북 경각심과 반공의식을 새롭게 가다듬었을 뿐만 아니라 정부도 이를 대간첩작전 체계의 미비점을 보완하는 긴요한 계기로 삼을 수 있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사진이 달랑 한장 뿐이네요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