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움부터 어떻게해서.. 왜..미국 진주만이 기습폭격을 받아야 했으며...
그리고 일명 2차대전의 하나인 태평양전쟁이 왜 무엇땀시 발발했는지 알리는 차원에서..
자주 자세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먼저....
일본의 중국침략
1923년에 발생한 대지진에다 일본 국가경제의 파탄으로인해 야기된
은행들의 파산은 예금모두를 날려 버린 시민들을 대거 양산했다.
일본자국의 대공황 속에서 수출도 부진하여 경제는마비되었고
몇 년후에는 공장파산으로 생겨난 실업자가 300만명 이상을 웃돌았다.
이당시 일본은 수 년간 이어진 흉년 때문에 일부상류층을제외한
대다수가 복지정책이 전무한 상황에서 아주 비참한 삶을 겪어야했다.
쌀은 식민지인 한국과 대만에서 헐값에 수입해왔기 때문에
본토의 벼농사는 활발하지 못하여 곡물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거기에다 미국도 대공황에 내몰리자 일본의 수출은 그 판로가 막혔으며
굶주림과 각종 질병때문에 엄청난 수의 국민들이 죽어나갔고 대규모시위가
일어나는등 민심은 갈수록악화되었다.
무능한정치와 경제불안 속에서 공산주의자가 세력을확장하자
국수주의자인 우익은 기득권계층을 등에업고 공산주의자를 제거하려했다.
마침내 국회는 치안유지법을 발효시켜 무자비한 탄압을허용했다.
그 결과로 일본내 공산주의세력은 괴멸되고 극우 국수주의자들이 득세하게된다.
혼란기의 독일에서 나찌가,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가 득세했던 것과흡사했다.
1922년, 미국 위싱턴에서의 군축조약에서 주력전함의 보유 비율을
미국과영국은 5, 일본 3,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각각 1.67로 합의하여
미국과 영국은 135000톤,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60000톤,
일본이 81000톤으로하여 합의하고 비율을 초과한 함정은
즉각 폐기처분하기로 합의를했었던 일본은 1930년,
다시 영국런던에서열린 해군군축조약에 조인하였다.
이에 격분한극우주의자들은 회의를마치고 귀국한 오사찌 수상을 저격살해했으며
이어 국제협약 준수를 촉구하며 자국의 팽창주의를 비판하던 인사들을
암살하고 비협조적인 언론사를공격하기시작하였다.
극우 군 장교들은 이들의 행동을 영웅적행위로 찬양하였고,
암살자들은 가벼운 처벌만받았다.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에 워싱턴에서 개최된 군축회의.
1927년, 도쿄의 외상관저에서는 동방회의가 개최되어
정부와 군부의 중국에 관련된 모든 관계자가 모였다.
여기에서 중국 정복에 관한 음모들이 준비되었다.
일본은 내란에 휩쓸려있던 중국내의 일본인을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만주에주둔하던 관동군으로 하여금 침략을위한 치밀한 자작극을 준비하고있었다.
(1932년당시 만주에는 24만 명의 일본인이 살았으며
1939년에는 83만 7천 명으로 불어나게된다).
중국주둔 일본군인 관동군은 1931년 9월 18일에 열차를
중국군주둔지 (중국군벌 정치가 장학량의 군대)부근에 세워두고 철로에
폭탄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중국군의 짓이라 주장하며 그들을공격하였고,
다음날 아침에는 봉천을 거의 다 점령해 버렸다.
일본군 수뇌부는 내친김에 만주전체를 점령하도록명령했다.
그리하여 요령, 길림 두 성(省)의 30개 도시를 점령하고,
11월에는 하얼빈, 1932년 2월에는 만주 전역을 점령했다.
침략을 주도하여 대좌(대령)로진급한 이시하라 간지는 군대를진격시켜
중국 동북부지역을 장악하고는 1932년, 만주에괴뢰정부를세워
만주국이라는 일본지배하의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버렸다.
일본의 출병구실 마련을위한 자작극은 결국 만주사변으로 비화되었다.
철로폭파사건을 취재하는 일본기자들.
일본은 중국의 소행이라며 폭약과 철로의 파편을 증거물로 내놓았지만
이 발표를 믿는 나라는 거의 없었다.
일본 관동군은 모략으로 사건을 조작해서 만주 전역을 군사적으로 제압하기는 했지만
이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문제는 처음부터 확실한 방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만주라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로 작당하여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로서
퇴위한 후에도 계속 황제라는 칭호를 유지하면서 자금성에 살다 천진으로 쫓겨간
부의를 이용하기로 했다.
부의는 일본의 유혹에 넘어가 1931년 11월 천진을 탈출하여 만주로 들어갔다.
1932년 2월말, 관동군 제4과의 연출에 의해서 전만주회의(全滿洲會議)가 개최되어,
동북(만주)의 독립과 부의를 집정으로 할 것을 결의했다.
일본은 청조의 부흥을 원하는 자들을 모아 3월 1일 만주국 건국 선언을 발표하고,
3월 8일에는 드디어 일본의 괴뢰국가가 강제로 탄생했다.
그후 1934년 3월 제정(帝政)을 선포하여 집정 부의는 만주국의 황제가 되었다.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
여기에 겐지 도이하라라는 일본인이 있었다.
겐지 도이하라는
43살이되기까지 소령계급을 단 출세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나
11개국 언어를 구사할 줄알았고 특히 방언이많은 중국어에 능통했다.
그러다 자신의 사촌 여동생의 아름다운 나체사진을찍어 일본왕가의
한 왕자에게 보냄으로서 비로소 출세가도를 달리게된다.
왕자와 사귀게된 사촌여동생이 왕자에게 천거하여
그는 일본육군 무관보자격으로 중국 베이징에파견된다.
중국에서 물만난 고기가된 그는 중국고위층에 접근하여
여기서 얻은 고급정보를 바탕으로 온갖 공작을펼치게된다.
암살과 폭동선동 등으로 중국내 질서를 어지럽혔고
그 재능을인정받아 1928년에 대령으로 승진하였다.
그당시 일본군은 호시탐탐 만주를 손에넣으려는 흑심을품고 있었고
겐지 도이하라에게 만주를 손에넣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슨 짓을해도 좋다며
그를 만주지역 정보책임자로 임명하게된다.
만주지역에 광대한 첩보조직을 심는데 성공한 겐지는 결핵환자들에게
마약을 결핵약이라속여 공짜로 공급해 대규모의 마약중독자를 만들어낸다.
거기에다 일본정부에 수출용담배를 생산하자고 건의하였는데
그것은 마약이 함유된 담배였다.
담배는 아주 싼 가격으로 중국인에게 판매되었고
그 결과 마약중독자들이 대거 양산되었던 것이다.
중독자들은 일본인 마약조직에게서 마약을 구입하였고
만주는 서서히 병들어가기 시작했다.
일본은 중국인 마약행상들을 고용하여 조직적으로 만주를 병들게하고 있었다.
일본 외상관저에서 열린 동방회의에서 만주지역을 혼란 속에 빠뜨릴
음모가 꾸며졌던 것이다.
일본에게 있어서 만주는 아주 중요한 지역이었다.
중국대륙 침략의 다음단계로 넘어갈 때 만주는 일본과 가장 가까운위치에
있기때문에 침략의교두보로서 병력과물자를 빨리 보충할 수 있게될 것이었다.
만주를 장악한 일본군은 여러가지 공작을 펼친 끝에
결국 자국민 보호명분을 내세워 만주로 무력진주해들어갔다.
1931년 9월, 대규모의 병력이 만주를 침략하였고
일본군은 이것을 만주사변이라 이름붙여 침략이 아님을 변명했다.
1931년 9월 19일에 봉천을 점령하고 1932년 2월 5일에 하얼빈이 함락되었다.
그로부터 2주후, 일본이 만주의 독립을 선언하자 전세계에서 비난이 빗발쳤다.
당황한 일본은 침략이 아니라는 구실을 마련하기로하였다.
도이하라는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청조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를
이용하여 세계의 비난을 잠재우려는 계획을세웠다.
겐지 도이하라는 다시 계략을꾸며 베이징으로가서
중국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를만나 그를 만주국 황제로 앉히려했다.
도이하라는 수많은 공작과 협박, 회유로 부의를 건드렸지만
그는 끝내 황제자리를 거부하고있었다.
만주국 황제자리를 거부하며 아직 마음의결정을하지 못하고있던
부의에게 일본이 공작용으로만든 과일 바구니 하나가 전달되었다.
과일 바구니에는 독사가 한마리 들어있었으며 이에 놀란 부의에게
겐지는 당신을 노리는 세력들이 있다며 거짓 정보를 전해 겁을주었다.
실제로 폭력을 행사하려는 자도 있었기때문에 신변에 위협을느낀 부의는
어쩌면 평민으로서 죽기보다는 황제로서 죽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결국 부의는 반 강제로 일본의 괴뢰 만주국 황제가되었다.
이렇게되자 세계적인 비난을 받고있던 일본군령은 감격하여
도이하라의 성공을 중장으로서의 진급으로 보답하였다.
그후 미국과 전쟁이 일어나자 겐지 도이하라는 말레이반도에서 활동하다
패전 직전에 일본으로 복귀하여 본토방어전선을 구축하던 중 패망을맞이하게된다.
미군에 체포된 겐지 도이하라는 1948년 11월 처형당했다.
만주국의 집정으로 취임한 부의
중기관총을 거치한 모터사이클(陸王호)을타고 만주로 진입하는 일본군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자 세계연맹이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사에나섰고,
일본의 침략을비난하며 다시 물러날 것을권고했으나
물러날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었던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해버렸다.
일본 육군장관 아라키 사다오는 아시아의 평화를 염원하는 일본을
세계연맹이 인정하지않는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언젠가는 전세계가 일본을 우러러보게 될 것이다라고 공언하였다.
일본극우주의자들은 여러나라가 식민지에서 석유와 고무, 텅스텐등의
천연자원을 착취하여 부를축적해오는 것을 부러워하고있었다.
국수주의자들은 세계제일의 인구밀도로서 넘쳐나는 인구를 분산시키고,
천연자원과 식량을 얻기위해서라도 자신들도 식민지를가져야한다고 주장해왔다.
일찌기 러시아함대를 격파하여 오만해진 일본은 자신들이 아시아를 지배할 충분한
자격을가졌다며 이른바 아시아생활권 즉,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었다.
한편 중국전쟁에 너무나 많은 군비가 들어간다며 침략을반대해오던 온건파
정치인들에대한 극우군인들의 공격이시도되었다.
1936년 2월에 약 1400명의 극우군인들이 쿠데타를일으켜 재무대신을 비롯한
여러명의 관료들을 칼로 죽였으며 온건파였던 육군검찰총장도 살해하였다.
이어 수상을 죽이기위해 수상관저로 침입했으나 오카다 수상은 몸을숨겨
화를면하고 그의 처남이 수상으로오인되어 죽음을맞았다.
쿠데타군은 군이봉기하여 일어나 일본에 반대하는 나라와
대항해야한다는 포고문을발표하였고, 군 상부에서는 이들을 진압해야할지
말아야할지를 결정하지못하고있었다.
급기야 천황이 복귀명령을 내리자 쿠데타군은 하는 수 없이 해산하여 부대로돌아갔다.
가벼운 처벌을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유죄판결을받아
군인17명과 2명의 민간인이 사형당하고 쿠데타는 실패하고말았다.
그러나 1937년들어 군부가 수상에게 국회권한통제에관한 법안을제출하라고
요구하여다시 정쟁에휘말려들어갔으나 결국 내각은 와해되고
국수주의자들이 승리하고말았다.
국회는 허수아비가되었고 사실상 군부가 국정의 모든 것을 관장하게되었다.
온건파와 팽창주의 반대자들은 항상 암살의위협 속에서 살았으며
군부는 내각을 마음대로 조종했다.
국제연맹조사단. 일본이 봉천을 점령하자 중국은 국제연맹에 제소했고, 미국은 스팀슨 독트린을 발표하여 일본을 비판했다.조사단은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았다.
1937년 7월 7일밤.
일단의 일본군 분견대가 북경근교 유구한 역사의 성벽도시인
완평현성(城)의 노구교 부근에서 훈련 중이었다.
그들은 행방불명된 병사하나를 찾으러 성으로 들어가려했으나
중국군이 입성을거부하며 막아서자 발포를 개시하여 전투가벌어졌다.
일본군이 지나사변이라부르는 이 전투에서 10여명의 병사가 죽게되었다.
그무렵, 북경지방 일대는 기찰 정무위원회라고 하는 일종의 자치정부의 지배밑에 있었다.
그것은 하부성과 차하얼성을 포함한 광범한 완충지대를 설정하자는
일본측의 요구에 의해서. 친일파인 송철원을 위원장으로 구성된 자치정부였다.
따라서 그 정권은 관동군의 영향 밑에서 이 지방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권의 군사적 기초를 이루고 있는 송철원이 지휘하는 제29군(4개 사단)의
내부에는 강한 항일의식이 조성되고 있었다.
그 제29군의 한 부대로부터 사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일본군은 곧 응전했으며, 쌍방이 대치한 가운데 이틑날부터 정전교섭에 들어가,
11일 다음과 같은 정전협정을 맺었다.
1. 제29군 대표는 일본군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고, 책임자를 처벌할 것.
2. 중국측 군대는 원평성 마을로부터 철수할 것.
3. 항일단체에 대한 단속을 철저히 할 것.
그런데 같은날 동경에서는,
화북의 일본인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병력을 증파할 필요가 있다는
참모본부의 정세판단에 따라, 그 출병 제안을 각의에서 통과시켰다.
그리고 고노에 수상은 각계 인사를 수상관저로 초대하여
정부의 단호한 결의를 발표하면서 각계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와같은 일본정부의 언동은 중국측을 몹시 자극하였으므로 남경의 장개석은
중앙군을 동원해서 북상시키고, 17일 유명한 생사관두(生死關頭)의 연설을 통해서,
중국은 이제야 생사의 관두에나갈 결심을 표시했다.
또한, 중국 공산당도 그보다 먼저 일본의 노구교사건에 관한 선언을 발표하여
민족적 항전을 호소했다. 7월 28일, 일본군은 중국군에 대해서 총공격을 실시했다.
8월 13일에는 상해에서도 교전이 벌어져 드디어 전중국대륙으로 전화가 확대되었다.
중일전쟁 발발의 불씨가된 노구교 사건.
그림은 천진으로 진입하는 일본군으로서 1937년 7월 23일 완전 점령 당했다
불타는 상하이 상공을 비행하는 일본군 92식 공격기(b3y1)
6년전부터 지지부진하게 이어져오던 중국과의 대치상태에 염증을느낀 일본은
중국군이 자국의 병사를 살상한 것은 천황군대의 존엄성에대한 도전이라하여
북경부근의 중국군에게 보복공격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전면전으로 이어져 하늘에서는 일본군 항공기가,
땅에서는 전차와 보병이 거침없이 진격했다.
일본군은 북부의 10개 사단중 5개 사단을 상하이방면으로 진격시켰다.
일본군은 북경, 천진, 상하이를 점령하였고 장개석이 지휘하는 중국군은 후퇴하였다.
8월 14일, 5월에 중국에 부임한 센놀트휘하의 중국군이 항공기를 이용하여
상하이의 일본군 함선들을 공격하는등 반격을가했지만 무력했다.
1937년 11월. 상하이의 중국군포대를 점령한 일본군이 일장기를 휘날리며 반자이를 외치고 있는모습
1937년 12월. 남경으로 진입하는 일본군. 이 후 끔찍한 학살이자행된다
중국군 게릴라를 체포한 일본군
중국군이 도망가자 뒤에 남은 민간인은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버렸다.
1937년 12월 13일, 중국 동부의 남경을 함락한 일본군은 무방비로 놓인
민간인들을 닥치는대로 찔러죽이고 *하고 불태워죽였다.
수 십년이 지난 오늘날 일본이 그학살규모가 확대과장 되었다며
어거지를 부리는 4만 명이상이 학살된 남경대학살 사건이었다.
일본군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끔찍한 만행을저질렀다.
산 채로 불태워죽이고, 조직적으로 여성을 *하였으며 임신한 여성을 *하고
배를갈라 태아를 집어냈다. 그들에게 학살은 재미있는 전쟁게임에 다름없었다
불심검문에서 군인이라 의심되면 곧바로 총살되거나 총검에 찔려 살해당했다
중국인을 묶어놓고 총검술 연습을하고 있는 일본군
무방비상태의 중국인을 총검으로 찔러 죽이고 있다
고인의 머리를 들고 웃고있는 일본군..
완전 개념상실..... 천한의 개,쌍,놈,들~~~~ 말이 안나온다
일본신문에실린 학살 경쟁기사. 이 두명의 일본군 소위는 각각 105명과 106명의 중국인을 죽였으며 누가 더 많이 죽이느냐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많은 중국인을 학살한 자는다나카 대위로서 혼자 300명의 중국인을 학살했다
일본은 극도의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장개석으로하여금 화평회담에 나서도록
압박했으나 장개석은 이를거부하고 천적인 공산당수 모택동과 공동전선을
펼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소련과도 중소불가침조약을 맺어 일본군에 대항했다.
일본은 1936년 11월에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반 공산당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중국을 도우고있는 소련을 직접 겨냥한 것이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유럽은 전쟁의 폭풍앞에 놓여지게 되었고
그들 지배하의 동남아시아 식민지를 노리던 일본은 1940년 9월 27일에
독일, 이탈리아와 3국동맹을 체결하였다. 일본은 추축국의 일원이되면 독
일은 아시아를 자신들의 영향하에 두는 것을 지원할 것이라 선전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미국을 견재하는 수단으로서 일본을 활용,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지못하고 계속 중립을 유지하도록 만들어 놓을 속셈이었다.
1940년 9월 27일. 독일, 일본, 이탈리아 3국동맹을 축하하는 건배
미국은 일본군이 남경으로 밀고들어오자 자국민들을 대피시켰으며
미국대사관 직원들은 미해군 포함 uss panay 에 승선해있었다.
1937년 12월 12일.
3척의 유조선과함께 남경상류지점인 양쯔강에 정박해있던 함선에
일본기들이 급습하여 18발의 폭탄을 투하했다.
미해군은 응사하였으나 퍼네이는 피탄되어 결국 침몰하고말았으며
유조선도 2척이 피해를당했다.
침몰하는 함선에서 퇴함하여 강변으로 탈출하는 보트에도 총탄이날아왔다.
이 사건으로 2명의 미해군 수병과 1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11명이 심각한 중상을 입었다.
일본은 즉각 미국에 사과와함께 배상을 약속하였고
미국도 이 사건을 크게 확대시키지는 않았다.
사건 조사위원들은 미국 성조기가 게양되어 있었는 데도 공격하였으니
명백한 계획적 공격이라 보고했으나 전쟁에 말려들길 원하지 않았던 미국은
사과와 배상을받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시켜 버렸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내 여론은 좋지않았으며
의회도 미국정부를 비판하고나섰다.
미국여론은 퍼네이격침사건 이전에는 중국보다는 일본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일본의 야만적 침략근성이 드러나자 이때부터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일본의 침략행위를 지켜보던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 국내에서
고립주의의 경향이 가장 강한 시카고에 가서 유명한 격리연설(隔離演說)을 시도했다.
"질병이 유행하기 시작하면, 사회는 사람들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그 환자를 격리시킬 것을 인정하여, 그 일에 협력한다.
전쟁은 곧 전염병과 같다. 우리는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을 결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의 비참이 우리에게는 미치지 않는다든지,
어쩌면 우리는 전쟁에 휩쓸릴 위험이 없다든지 하는 것은 보장할 수 없다."
이 연설은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을 비난한 것이며,
세계의 혼란을 일으키는 침략행위를 억제하기 위해 경우에 따라서는
미국도 전쟁을 무릅쓸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서양, 태평양 함대 증강을위해 20% 증액된 예산을 요구하여
의회의 승인을 받아냈으며 이어서 일본의 전쟁수행에 쓰일 수 있는 모든 자원들과
무기의 수출을 금지하도록 권고하며 서서히 일본에대한 경제봉쇄에 들어가려했다.
루즈벨트 미 대통령은 샌디에이고의 해군함대를 태평양으로 전진배치하기로 결정하였고
하와이 제도의 오아후섬 진주만에 미국함대를 배치하여 일본에 무언의경고를 한 셈이었다.
그러다 일본이 3국동맹을맺고 이미 독일에 점령당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강점하려하자 미국은 이것이 말레이반도와 더 나아가서는 싱가폴의
영국해군기지에대한 공격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의도라 의심하였다.
그리고 결국 1941년 7월, 일본이 인도차이나 남부지역에 병력을배치하자
루즈벨트는 일본에대한 전면적인 석유금수조치를 취해버렸다.
이에 동조하여 영국과 네덜란드도 석유 금수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자국 내 일본자산동결과 함께 모든 교역을 중지시킴으로서
일본을 압박해들어갔다.
이들 나라들은 석유 금수조치를 해제하는 조건으로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일본군의 공격을받고 격침된 uss panay
2편으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