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비밀무기 풍선폭탄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11.30 12: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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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봄, 지미 둘리틀 장군이 B-25 폭격기들을 이끌고 일본을 폭격했을 때,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벌어진 더욱 기상천외한 이야기 중 하나가 입안 중에 있었다. 즉, 일본인들이 태평양 전체를 가로질러 떠다니게 될 ‘폭탄을 운반하는 풍선’으로 미국 전체를 공격하려고 기획한 것이 그것이다.

1944년 늦가을에서부터 1945년 초봄까지, 일본인들은 (미국 내에서만도 무려 300여개 가량이 발견되거나 관측된 바 있는) ‘화염 풍선들’을 무려 9000개 이상 발사했다. 일부 추측에 따르면 그중 약 1000개 정도가 미국까지 도달했을 것이라 보고 있다. 일본인 설계자들의 높은 희망에도 불구하고, 그 풍선들은 무기로서의 효과가 별로 없었으며, 단지 ‘아주 독창적이면서도 비웃음이 터져 나오는 진기한 생각’ 정도로 기억될 따름이었다.

이 문서는 미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화염 풍선 공격’에 대한 짤막한 역사를 제공하고 있다.



기원

일본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실제로 미국 본토에 대해 몇 차례의 공격을 실시한 바 있다. 1942년 2월, 일본 잠수함 I-17은 산타 바바라의 해안에 떠올라 유전지대에 포격을 가하여 유정油井 펌프 하나를 파괴한 바 있다. 같은 해 6월에는, 잠수함 I-25가 오레곤 해안 부대를 포격하여 야구장의 백네트를 파괴하였고, 9월에는 잠수함 승무원들이 조립하여 날리는 소형 수상기 한대가 소이탄 몇 개를 투하하여 아주 작은 규모의 산불을 일으켰다.
(뭐, 아마도 이 이야기들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눈에서 피눈물 나게 만든 영화 ‘1941’의 모티브를 제공했겠습니다만. 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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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필버그가 1979년에 만든 영화 <1941>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해안지역을 급습한 일본 잠수함과 관련해서 벌어지는... 말 그대로 해프닝 성 소동 이야기인데...

결국 미국인들끼리 전과도 하나 못 올리고 다~ 말아먹고,

일본 잠수함은 미군포로(포스터 아래에서 오른쪽의 전투기 조종사)까지 얻어 "무사히" 귀국한다는 내용... =_=;

전에 "토요명화"에서도 몇 번 방송했다.

첫 시작부터 수영하던 금발머리 여인의 아래에서 일본 잠수함의 함교가 솟아오르고, 그러자 그 여인이 잠수함의 잠망경 꼭대기에 매달려 깍~꺅~ 거리는 가운데, 그 아래에서 함교의 해치를 열고 일본 수병이 "헐리우드~! 헐리우드~!" 하고 외치던 모습이... -_- ...

 


소이탄을 운반하는 풍선들을 사용한 4번째이자 마지막 공격은 전반적으로 가장 중대했다. 그러한 발상은 수에요시 쿠사바 소장 휘하의 기술 장교 테이지 타카다 소령과 그의 동료들 및 부하들로 구성된 일본 육군 제9군 기술 연구소의 작품이었다. 그 풍선들은 겨울 공기의 대단히 강력한 흐름(바람)을 사용하도록 고안되었는데, 일본인들은 그러한 바람이 그네들 나라의 높은 고도에서 대단한 속도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으며, 그 바람은 오늘날 ‘제트기류’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제트기류는 태평양 상공 9.15킬로미터(30,000 피트) 정도에서 불고 있었으며 8000킬로미터(5000마일) 이상의 거리를 3일 만에 돌파하여 커다란 풍선을 운반할 수 있었다. 이러한 풍선들은 미국까지 폭탄을 운반할 수 있었으며, 투하되기만 하면 사람들을 죽이거나 건물들을 파괴하고 또한 산림지대에 불을 낼 수 있을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1942년에 도쿄 및 일본의 여타 도시들에 대한 둘리틀 장군의 폭격 덕에 기고만장해진 미국인들에게 화끈한 교훈을 줄 수 있을 것이라 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후센 바쿠단’이라는 이름을 그 무기에 붙였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화염 폭탄’이라는 뜻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실제로는 ‘화염 풍선’이라는 의미로 번역되어 왔다.

태평양을 횡단하는 여행에서 살아남게 해야 할 뿐만 아니라 폭탄을 자동적으로 투하하도록 하기 위한 풍선의 제작은 기술적인 모험이었다. 수소가스로 부풀린 풍선은 대낮에 태양광선에 의해서 따뜻해졌을 때 부풀어나는 데다 필요이상 상승하게 되며, 그런 다음에는 밤이 되어 시원해졌을 때는 쪼그라들면서 위험할 정도로 하강하기까지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기술자들은 풍선을 적당한 고도에 있도록 안정시켜주는 고도계에 의해서 운행되는 조종 시스템을 고안해 내었다.

(군대 다녀오신 분들이시라면, 북한군이 운용하는 이러한 종류의 풍선 관련 어떻게 생겨먹은 장치인지 이미 그림으로 보신 일이 있으실 듯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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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801521723729.jpg풍선이 고도 9킬로미터 아래로 내려가게 되었을 때, 풍선의 전기장치가 불을 뿜어 모래주머니들을 잘라내어 풍선을 가볍게 만든다. 모래주머니들은 주조된 알루미늄으로 된 4개의 바퀴모양 휠로 운반되었으며, 휠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한번에 두개가 버려지도록 되어있었다. 비슷한 모양으로, 풍선이 약 11.6킬로미터(38,000피트) 이상의 필요 이상으로 높은 고동에 이르게 되었을 때, 고도계는 밸브를 열어 수소가스를 새어나가도록 알아서 움직이게 된다.

그러한 조종 시스템은 3일간의 비행 동안 풍선을 조종하게 된다. 드디어 미국 상공에 도착하게 되면, 수소가스는 모두 소비된 상태가 된다. 화약에 의한 최종 섬광이 모래주머니와 함께 휠 위에 적제 되어 운반되어 온 폭탄들을 투하하게 되며, 그리고 풍선의 중간부분에 매달린 19.5미터(64피트) 길이의 퓨즈에 불이 붙게 된다. 84분 뒤에, 퓨즈는 풍선을 파괴하기 위한 섬광폭탄을 점화하게 된다.

(아마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본토에서의 유일한 민간인 피해자들로 알려진 그 일가족 5명도 실은 이 풍선 소각장치가 작동되지 않은 풍선에 의해서 당한 듯 합니다. 알고 보면 수소가스가 든 주머니도 대단히 위험하니 말입니다. =_=; 뭐, 물론 이 당시 일본인들도 영화 ‘진주만’에서 잠깐 나오던 식으로 적국 민간인들의 안전을 고려했기라기보다 가급적 미국인들이 자신들이 뭐에 당했는지 모르게 하고자 했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만. =_=;)

이는 결국 지름이 약 10미터(33피트)나 되는 수소가스로 가득 찬 풍선으로 약 900킬로그램(1,000파운드) 가량의 장비를 운반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초의 풍선들은 재래식으로 고무가 입혀진 비단으로 만들어졌으나, 나중에는 수소가스가 새는 구멍까지 줄어든 봉투를 만드는 더욱 혁신적인 방법이 생겨났다. 그 다른 방법에 의해서 1만개에 이르는 풍선들이 만들어졌는데, 그 재료는 ‘와시’(일본식 한지 =_=?)라고 불리는 뽕나무 가지를 원료로 한 종이로서 이는 습기가 스며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우 질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종이는 오직 도로 지도 크기 정도의 네모난 모양으로밖에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일본인들이 ‘악마의 혀’라는 이름으로 부르던 감자 같은 식물(아마도 ‘곤약’이겠죠. =_=;)에서 채취한 풀을 사용하여 세 장이나 네 장씩 겹쳐서 붙여야 했다.

굶주린 직공들이 그 곤약으로 만든 풀을 훔쳐 먹기도 했다. (앞서 소개한 ‘전쟁동화집’에서 이 내용은 안나왔지만, 그래도 옥수수와 소금물로 버텨야 하던 한창 자랄 때의 아이들이었기에 이는 아마도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_=^) 노동자들의 대부분이 십대 소녀들이었으며, 그들의 손가락들은 그 어떤 계층의 사람들의 손가락보다 민첩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장갑을 착용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그들의 손톱은 반드시 짧게 유지되어야 했고, 머리핀 같은 것은 절대 사용되어서는 안 되었다. (당연히 조그마한 구멍이 나도 애써 만든 풍선이 태평양을 건너기 위한 무려 3일간의 여행을 버텨낼 수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_=;) 그들은 일본의 여러 지역에서 그 종이들을 조립했다. 예컨대 ‘스모 경기장’, ‘가수들의 공연장’, 그리고 극장 같은 닫혀져 있으면서도 거대한 공간에서 그 종이 봉투들을 조립할 것이 요구되었다.

그 일에 동원된 노동자들은 그들이 하는 일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다. 나돌아 다니던 소문들이 그들에게 진실을 알렸을 때, 즉 그들이 미국으로 날아가서 불을 지르게 될 ‘후센 바쿠단’(풍선 폭탄 =_=?)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알려주었을 때, 그들 모두가 킬킬 웃어대었다. 이러구러, 풍선폭탄에 대한 비밀은 지켜진 셈이었다.



풍선 공격

최초의 테스트가 1944년 9월에 실시되었고, 그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기도 전에 B-29 폭격기들이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그 공격은 초반에 별로 대단치 않았었지만, 그러나 둘리틀 장군의 폭격에 의해 조성된 일본인들의 범국민적 복수심에 기름을 붓는 역할은 충분히 해주었다.

최초의 풍선 폭탄이 1944년 11월 초에 발진했다. 타카다 소령은 그 풍선이 떠올라 바다 저 멀리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풍선의 모습은 대낮에 뜬 별처럼 파란 하늘 위의 한 개의 점처럼 될 때까지 그것이 발진한 뒤 몇 분 동안 보였을 뿐이었습니다.”

1945년 초까지, 미국인들은 ‘어쩐지 이상한 것’이 날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풍선들은 캘리포니아에서부터 알라스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여기서는 안나왔지만 실은 서부 캐나다 지역에서도 물론 =_=;) 목격되었으며 또한 그 폭발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와이오밍 주 서모폴리스 상공에서는 낙하산이 내려오는 것 같은 상황이 목격되기도 했다. 풍선에서 떨어져나간 폭탄 하나가 폭발했고, 파편이 구덩이에서 발견되었다. 캘리포니아의 산타 로사 근처에서는 P-38 라이트닝 전투기 한대가 풍선 하나를 격추하기도 했다. (이 경우 스코어는 어떻게 되는지? *^^; V-1 미사일의 경우 격추하면 비행기 격추 스코어로 올랐던 것으로 들었는데?) 다른 하나는 산타 모니카 상공에서 목격되었으며, ‘일본식 한지(漢紙) 조각들’이 로스앤젤레스 시가지 이곳저곳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두개의 종이로 만든 풍선들이 샤스타 산 동쪽 머독 국립공원에서 어느 날 발견되어 회수되기도 했다. 오래곤의 메드포드 근처에서는 풍선 폭탄이 불꽃을 쏟아내며 폭발했다. 해군은 바다에서 풍선들을 발견했다. 풍선이 되었던 봉투들과 거기에 달렸던 기계장치들이 몬태나 주, 애리조나 주, 그리고 캐나다의 사스카치완 주 등의 서북부 지역들 및 또한 캐나다의 유콘 주에서 발견되었다. 결국, 육군항공대 소속 전투기 한대가 공중에 떠있던 풍선들 중 하나를 용케 밀어붙여 별다른 손상 없이 땅 위에 내려앉게 만듦으로서, 조사 및 연구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뉴스위크지(紙)는 1945년 신년호에 “풍선의 미스터리”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으며, 또한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다음날 신문에 나타나기도 했다. 정부의 검열기관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각 언론사들과 라디오 방송국들에 ‘풍선들’ 그리고 ‘풍선폭탄 사고들’에 대해서 그 어떠한 언급도 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는데, 이는 일본군이 ‘아주 괜찮은 선물을 미국인들에게 보내주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끔 하기 위함이었다.

일본인들이 풍선들을 가을날부터 발사해왔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협을 감소시켰다. 풍선에 달린 소이탄들이 산불의 원인이 될 수는 있었지만, 그 해의 그 시기까지 미국의 숲들은 조그마한 소이탄 정도에 불이 붙기에는 습기를 너무 가득 머금은 상태였다.

하지만, 정부 당국자들은 그 풍선들이 어떤 식으로든지 일본 측에 아주 유용할 것이라는 사실을 걱정했다. 그 미국 정부 당국자들은 자신들이 행운을 잡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더 나쁜 상황은, 일본인들이 만주의 ‘핑판’이라는 곳에 그 악명 높은 731 부대를 차려놓고 아주 특수한 생물 무기들을 개발 중이며 또한 그 풍선으로 운반되는 생물무기들은 미국 본토에 대한 새로운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미국인들이 다소나마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근데 혹시 설마-, 만화 ‘지팡쿠’에서 풍선을 이용해서 쿠사카가 만들게 하고 있는 핵무기가 운반되는 사태가? =_=;;; 아니면, 잠수함 발진 수상기? 하긴, 알류산 열도에서의 철수 작전에서 잠깐 등장했던 그 조종사 다시 나올 듯? =_=;;;)

아무도 그 풍선들이 일본으로부터 곧장 왔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그 풍선들이 미국 해안지역으로부터 왔을 것이 틀림없으며, 잠수함에 의해 상륙한 병력들이 그것을 발진시켰을 것이라 보았다.

(물론, 꼭 미국 서해안에 상륙할 필요 없이 잠수함 함교나 갑판 같은 데서 발진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생각했겠죠. 그런데, 실제로 만약 그랬다가는… 당시 세계에서 군함과 비행기를 마구 찍어내던 나라의 장병들에게 잠수함 격침 스코어나 올려주는 결과만 나왔겠지요. 먼~산)

풍선 폭탄에 의해 투하된 모래주머니들의 일부가 미국 지질(地質) 측량국(測量局) 휘하에서 조사 작업을 진행 중이던 군 지질탐사 관련 부대에 의해 포획되었다. 이 조사팀은 진주만 기습 6개월만인 1942년 6월에 설립된 부서였다. 지질 측량국에서 나온 사람들은 애국심이나 명예 혹은 그 둘 다를 위해서 당시 전쟁 수행을 위한 노력에 깊이 관여하기를 원하였고, 그로인해서 예컨대 닥치는 대로 선택한 나라인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 같은 나라의 지질학 정보에 대한 보고서를 제공하기도 했다. (=_=; 왜 만화 ‘심~슨’이 생각나는 건지? =_=???)

그 보고서는 지형, 물을 확보할 수 있는 지역들 및 도로건설용 자재로 쓸만한 재료들이 나오는 지역들, 그리고 두드러질 정도로 유용한 정보들을 나타내어주고 있었다. 미국 군대는 그들의 아이디어를 채택했고 그래서 군 지질탐사 관련 부대가 구성되었으며, 처음에 6명으로 시작한 부대는 급속하게 커졌던 것이다. (뭐, 이쯤 되면 만화 ‘시마 과장’이 생각나게 되는군요. *^^;)

미 육군 정보국의 시드만 풀 대령이 그들과 함께 일하는 가운데, 군 지질탐사 관련 부대의 조사반원들은 발견된 모래주머니로부터 얻은 모래들을 현미경과 화학물질 등으로 조사하기 시작하였고, 해변 식물들 및 여타 바다에서 채취된 아주 조그마한 것들의 분포 상태 등을 파악한 다음, 그것의 미네랄 구성 상태 등을 연구했다. (말 그대로, ‘과학수사대 CSI’의 그리샴 반장 팀처럼 일했다는 뜻이죠. *^^;) 그 결과, 그 풍선에 달려있던 것으로 보이는 모래주머니들에 들어있던 모래가 미국 해안은 물론이거니와 중부 태평양지역의 섬들에서 온 것도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즉, 그 모래는 ‘일본으로부터’ 왔던 것이었다.

그 동안, 풍선들은 계속해서 오래건 주, 캔자스 주, 아이오와 주, (캐나다) 매니토바 주, (캐나다) 앨버타 주, 북미 서북부 지역, 워싱턴 주, 아이다호 주, 사우스다코타 주, 네바다 주, 콜로라도 주, 텍사스 주, 멕시코 북부, 미시간 주, 심지어 디트로이트 교외에까지 나타났다. (말 그대로, 북미 전역에 나타났다는 의미죠. =_=;;;) 전투기들이 그 풍선들로부터 하늘을 초계하기 위해 출격했으나, 그들 또한 아주 적은 성과만을 올렸을 따름이었다. 그 일본제 풍선들은 매우 높이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빨리 날아다녔고, 전투기들은 그 중 20개 이하만을 파괴했을 따름이었다. (이거 웃어야 할지, 먼~산 봐야 할지~. =_=;;;)

122801525661879.jpg미국과 멕시코에서 풍선폭탄이 발견된 지역들

122801529086659.jpg캐나다 내에서 풍선폭탄이 발견된 지역들



그 지질탐사 관련 부대의 지질학자 양반들은 그들의 연구를 계속하였고, 그 모래가 채취된 일본 해안의 정확한 위치를 마침내 파악해내었다. (근데, 다른 데서 모래 퍼다가 모래주머니 만들어왔던 것이면 대략 낭패. +_+;;;) 하지만, 이 즈음에 초봄서부터 풍선 폭탄 공격이 거즘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언론 통제의 효과가 잘 먹혀든 탓이었죠. =_=^) 이러한 연구도 결국 별로 쓸모없는 것이 된 셈이었다. (결국, 이래저래 낭패. +_+;;;)

그 풍선들은 오직 ‘6명의 미국인들’을 죽였다. 어느 목사와 그의 아내가 아이들 몇 명을 데리고 케스케이드스 동쪽, 오래건 주 남쪽으로 낚시 여행을 갔었다. 그 때 그들은 풍선 폭탄 하나를 발견하였고, 그들이 그 풍선 주변에 모여들었을 때 그 풍선이 폭발하면서 목사 부인과 아이들 다섯이 사망했다. (결국 유부녀였구려. 먼~산 *ㅠㅠ*) 일본정부의 선전방송은 ‘(풍선폭탄에 의해)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아주 거대한 화재사건들과 그로인해 공포에 질린 미국 국민들의 모습 그리고 만여 명 이상의 미국 시민들이 그로인해 사망했다는 내용 등을 자기 국민들을 향해 보도하고 있었으나, 결국 오래건 주에서 사망한 그 목사 부인과 다섯 명의 아이들만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 본토에서 적에 의해 사망한 유일한 민간인들이었던 셈이다.

풍선 폭탄에 대한 언론 보도의 통제는 일반 시민들을 떨게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그 앞서 목사 부인 및 아이들이 사망한 사건이 벌어진 이후 그 수위가 높아졌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언론 보도 통제조치는 그렇게 필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본인들 스스로가 그들이 이러한 풍선 폭탄을 계속 날려 보내도 될 정도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확신할만한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쿠사바 장군의 부하들은 9천개 이상의 풍선 폭탄들을 발사했지만, 그 중 오직 약 300개 정도만이 미국에 나타난 것으로 보고 되었다. 일본인들은 약 10%의 풍선들이 미국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 추정했으며, 이는 기실 일 천개 정도의 풍선 폭탄이 임무를 성공리에 완수할 것이라 보아야 하는 셈이었다. 풍선들 중 두개가 일본으로 ‘돌아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피해가 벌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이 작전에 사용되어진 금액은 어마어마하였고, 그 시점에는 심지어 무시무시한 B-29 폭격기들이 그 작전에 필요한 수소가스 생산 공장 세 개 중 두 개를 박살낸 상태였다. 그 어떠한 확실한 증거가 남아있지는 않지만, 쿠사바 장군은 1945년 4월에 풍선 폭탄 발사 작전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정식으로 받았다.

1945년 3월 10일, 종이로 된 마지막 풍선 폭탄들 중 하나가 워싱턴 주 핸포드의 ‘맨하탄 프로젝트에 따라 핵무기를 만들고 있던 지역’ 근처에 나타났다. 그 풍선 폭탄은 나가사키에 투하 될 폭탄을 제조하기 위한 플루토늄을 생산하던 반응장치를 수납한 건물에 전기를 공급하던 전선 위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반응장치가 멈춰 섰다.

 

 

 

 

자료제공 : MBC서프라이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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