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발발직 후, 히틀러는 미국이 50여척의 자국 구축함을 영국에 제공하여
u-보트를 위협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대해 아무런 불만도 표시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미 제 1차 세계대전에서 거대한 미국의 힘을 처절하게 맛보았던 때문이었으며
그리하여 다시는 그 무시무시한 거인같은 미국의 참전을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무렵의 미국 갤럽조사에서는 국민의 88%가 수 많은 목숨을 앗아간 제1차 세계대전의
아픔 때문에 다시금 유럽의전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지지도가 약했던 루즈벨트로서는 국민에게
"다시는 당신의 자식들을 낯선 전장에 결코내보내지 않겠습니다" 라고 맹세하였다.
그러한 루즈벨트는 대외적으로는 무기대여법을 근거로
유럽전장에 무기를 보냈으며 일본에 대해서는 강경책으로 일관하여왔다.
루즈벨트가 침략을 멈추지 않는 일본에게 던지는 경고장으로서 샌디에이고 주둔
태평양함대를 진주만으로 전진배치하자 함대사령관 리차드슨(james o. richardson)
제독은 워싱턴으로달려가 항공기를 이용한 공격에취약한 진주만의 상황을설명하였다.
항공전투 병력도 모자라며 특히 하와이는 함대가 사용하기에 충분한 수리시설과
연료 저장시설이 부족함을 지적했다. 그는 이전부터 미국의 이러한 조치는 일본을
자극할 것이라면서 함대의 이동을 반대하였었다.
그러나 오랜기간을 끌어오며 벌어진 격렬한 논쟁끝에 리차드슨은 결국 해임당하게 되고
허스번드 킴멜(husband e. kimmel)해군대장이 그 후임으로 임명되는 것이다
해임된 태평양 함대 사령관 리차드슨(좌)과 스타아크 미해군성 작전부장
리차드슨은 해임되기직전, 스타아크(harold r. stark) 해군작전부장에게
공문을 보냈는데 내용은 다음과같았다.
첫째, 일본은 경고없이 모든 방식을 다 동원하여 공격해 올지도 모른다.
독일또는 이탈리아 국기를 게양한 일본의 위장함선 또는
잠수함에 의한 공격도 포함된다.
둘째, 일본의 공격은 미국선박이나 미국 본토로부터 멀리 떨어진 영토,
또는 해군병력에 대해서 기습을 가할지도 모른다.
진주만 기습이나 또는 진주만의 수로를 폐쇄할 수도 있다는 경고성 발언이었다.
리차드슨은 미국이 유럽을 제쳐두고 태평양 전쟁에 휩쓸려들어가는 것은
전략상 잘못된 것이라 판단하였다.
태평양 함대는 일본 함대에비해 열세이며 인적으로나 물적으로도 아직
전쟁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이런 함대를 샌디에이고에서 진주만으로 옮긴다고 해서
과연일본의 행동을 견재할 수 있겠느냐며 그 효과를 의심하였다.
그래서 함대의 정비, 보급 및 훈련등에 편리하고 유리한
미국 서해안으로 함대를 복귀시키자 주장했던 것이다.
결국에는 이 것이 해임의 가장 주된 원인이되어
그는 1941년 2월 1일에 킴멜 제독과 교체되게된다.
킴멜 제독 자신의 최대 영예인 태평양 함대 사령관이되는 이날은 마침 일요일 이었는데
이로부터 10개월 후에 찾아오게되는 일요일에는 생애 최악의
함대 사령관이 되어버리는 운명을 맞게된다.
미국은 거의 일년반 동안 도쿄의 외무성과 대사관, 공사관,영사관사이를 오가는 통신을
감청하고 해독해냈다. 그러나 매직 암호 작전에서 얻어진 진주만에 관한 정보들이
어떻게된 까닭인지 하와이 주둔 태평양 함대에는 제대로 전달되지않고있었다.
따라서 킴멜 제독과 하와이 방어를책임진 월터 쇼트(walter c. short) 육군중장은
주요한 정보를 제대로 접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이 전쟁을 준비 중임이
분명한 데도 도쿄와 호놀루루 총영사관사이를 오고간 의심스러운 통신들을
킴멜 제독과 쇼트 중장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된다.
훗날 킴멜 제독은 책임을 추궁당하는 자리에서 만약 일본의 공격징후들에대한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었더라면 진주만 내의 함선의 배치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정보기관은 정보를 모으기만 했을뿐 이것을 공유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의 첩보기관과 상층부는 일본이 자신들의 암호가 해독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 때문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일본의 공격을 알면서도 참전을위해
은폐했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어오는 것이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 킴멜제독(좌)과 하와이 주둔 육군 사령관 쇼트 중장
진주만 기습 이후 두사람은 근무태만과 방어태세를 소홀히하였다는 이유로
참기어려운 치욕을 당했다. 부하들을 죽게만든 패장으로서의 죄책감이 이 두사람을
괴롭혔다. 사실상 하와이제도의 안전유지는 육군의 주 임무였으나 킴멜도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어 문책당하였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져
사태의 전말이 밝혀지길 원했지만 결국 그럴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지휘계통에서 제거되는 수치를 견뎌내어야했던 그들은 상부의 압력에의해 오명을
뒤집어쓴 채 1942년 2월 16일과 17일에 각각 군복을 벗게되었다.
그 동안 미국국민의 관심의 중심이되어 노여움과 비난을 한몸에 받아오던 두 사람은
이렇게 비참하게 군을 떠나게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사 위원회는 매직 작전에서 얻어진 정보들을 이 두사람에게
전달하지 않은 것에 대해선 그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모든 책임을 이 두사람에게 전가하여 처벌했지만
진주만 기습의 의혹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미국민이 알고 싶어하는
"우리가 당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왜 그렇게 당하였는가"
라는 의문은 수 십년이지난 오늘날까지도 확실히 규명되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전문을 방수하고 해독하는 매직작전을 빗대어 내용을 알려주지 않고는
이 매직 작전은 무의미하다고 해군 고위층의 누군가가 말했듯이
정보가 최대의 효과를 올리려면 필요한 부서와 사람에게 적시에 공급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를 널리 배분하면 할수록 새어나갈 가능성도 커지게 마련인 것이다.
특히 암호분야에 있어서는 적이 해독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면
그동안의 고생은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일본이 자신들의 암호가 해독되고 있다는 사실을 허버트 야들리가 쓴 책을보고서야
알게되었다. 그들은 기겁을하여 새로운 암호를 개발하고, 또다시 그것을 깨기위해
윌리엄 프리드먼이 근 10년 간을 고생하여 퍼플기계를 만들어 매직작전으로서
일본의 암호를 해독하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941년 1월 23일,
미국은 육해군 정보부장관의 협정을 통해 매직작전의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사람을 10명으로 한정했다.
대통령, 육군장관, 해군장관, 국무장관, 참모총장, 해군작전부장, 참모본부 전쟁계획부장,
작전부 전쟁계획부장, 육군 정보부장, 해군 정보부장 이렇게 10명이었다.
이밖에 육해군 통신부장과 해독자, 번역자들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러다 약 2달 후에는 몇 사람 더 늘어나게되는데 해군 작전 부차장,
루즈벨트 대통령의 최측근인 해리 홉킨즈 고문과 백악관 육해군 보좌관이었다.
이 같은 소수들만이 매직정보를 공유하였을 뿐 가장 그 정보를 필요로하는
일선 육해군 사령관이나 일선 지휘관들은 매직작전의 존재조차도 몰랐던 것이다.
가끔 일부 정보는 필요에따라 극히 신뢰할 만한 정보원의 첩보로서...라는 단서를 달아
일선 지휘관에 보내는등 매직작전 자체는 극비밀로하였다.
그 예로 1941년 7월 8일 하와이의 육군 사령관 월터 쇼트중장은 매직작전에서
얻어진 정보를 워싱턴으로부터 이렇게 전달받았다.
극히 신뢰할 만한 정보원의 정보에의하면 일본은 선박출항이 정지되어있고
새로운 상선의 징용이 명령되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킴멜 제독의 정보참모 레이튼은 매직정보에관해 어디선가 들은 적이있어서
1941년 3월2일 해군 정보부장 앞으로 서한을보내 하와이의 사령부에도
매직정보를 알려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하였던 것이다.
4월 22일 해군 정보부는 이를 거부하는 답장을 띄웠다.
귀하가 이러한 정보를 가지고 싶어함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기밀유지를위해 여러 가지 곤란한 문제가있다.
(중략)귀하가 요청한 정보는 정부의 정치적 결정을 둘러싼 영역이지
함대가 필요로하는 정보는 아니다. 바꿔 말하자면 귀하와 함대는
정치적 사항에 과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판단되며 이 점에
관한한 귀하가 할 수 있는 일은 전연없음을 단언한다.
해군 정보부장은 이런 아리송한 답장을 레이튼에게 보내왔던 것이다.
이것은 매직작전을 일선에도 숨기고 싶어하는 것과,
한편으로는 퍼플기계를 언젠가는 일선에 공급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기계를 제작하고 있는데서 빚어진 최고위층의 갈등이 표현된 답장이기도 하였다.
육군통신정보국 sis(signal inteligence service)의 책임자 윌리엄 프리드먼이
오랜세월 피나는 각고끝에 성공시킨 일본 암호해독기 퍼플 제 1호는
1940년 8월에 제작되었다.
프리드먼은 그동안의 고생 때문에 정신과 육체가 무너져내려 1940년 3월에 쓰러져
약 3개월 반동안 육군병원 정신병동에 입원해야만 했다.
그리고 2호기는 해군에, 제3호기는 1941년 1월 영국전함 킹 조지 5세에 태워져
영국으로 보내졌다. 이때 미해군과 육군에서 각각 2명씩의 암호 전문가가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독일 암호에관한 정보를 얻은다음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 3호기는 그후 싱가폴의 영국 해독반이 조작하다가
일본의 말레이작전이 본격화되자 인도로 옮겨지게된다.
제4호기는 필리핀, 제5호기는 sis의 예비용으로, 하와이로 보낼 예정이었던
제6호기는 진주만 기습 당시까지도 미 완성인 상태였던 것이다.
이 퍼플은 미국에있어서 같은 무게의 금 보다도 더 값이 나가는 보배같은 물건이었다.
프리드먼은 이 진짜 암호기를 보지도 않고 상상 만으로 똑 같이 제작해냈다.
윌리엄 프리드먼과 그의 부인 엘리자베스 스미스
프리드먼과 결혼한 부인 역시 암호해독가로서 연안경비대가 케치한
주류 밀수업자들의 암호를 해독하였다. 프리드먼은 암호해독기술 교과서를 저술하고
그후 sis의 책임자로 발탁되었다. 그의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퍼플의 제작이었다.
자신들의 암호가 해독되었음을 알게된 일본이 새로운 암호기를 제작하여
암호를 전면적으로 바꾸어 버리자 프리드먼은 이 기계와 똑같은 기계를 만드는 작업에
매달리게되었다. 그의 팀은 수 년간 수 많은 시행착오와 좌절을 이겨내어 마침내
퍼플이라 명명된 일본의 기계를 보지도 않고 추리와 상상력만으로 그 모조품을 연필로
그려내는데 성공한다. 이같이 만들어낸 모조품은 잡음이 일어나고 모양이 너무나도
꼴불견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후 실물과 대조해 본 결과 외형뿐만 아니라
그 기능도 빈틈없이 동일한 것으로 드러났다.
퍼플기계가 완성되자 미국은 매직작전을 통해
일본의 최상층부를 오가는 전문의 90%를 해독해낼 수 있었다.
1941년 10월. 일본의 제 3차 내각이 무너지고 천황은 도죠 히데키 육군대장에게
새로운 내각을 꾸미도록 하명을 내렸다. 그리하여 외상에 도고가 취임하게 되었는데
그는 취임하자마자 맨먼저 가메야마 전신과장을 호출하였다.
도고는 허버트 야들리가 펴내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블램 쳄버를 읽은일이 있으며
1920년 일본의 외교암호가 여지없이 깨진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고는 전신과장에게 현재 사용 중인 외교암호는 안전하느냐고 물었다.
가메야마 과장은 확신하는 어조로 자신만만하게 대답 하였다.
" 이번만은 완전무결 합니다. 마음을 놓으셔도 됩니다"
전문을 수집하는 해군 정보부 병사들과 초기 미 육군이 사용한 m-209 암호기
미국은 위싱턴과 도쿄사이를 오가는 전문들을 다루는 매직작전에만 집중하였기 때문에
그를제외한 다른정보들은 해독되지도못한 채 책상에 쌓여있기만 하였다.
거기에다 호놀루루 일본 총영사가 본국으로보낸 전문들도 해독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있었다. 1941년 1월 27일, 도쿄 미국 대사관에 중대한 정보가 전달되었다.
일본 상류층과 가까이지내온 일본 주재 페루 공사인 쉬리버가 자신이 들어 아는바로는
만약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벌인다면 모든 군사력을 집중하여 진주만을 공격할 것이라
말해주었다. 이 정보는 야마모토가 해군대신에게 전달한 최초의 하와이 기습작전
구상이었는데 야마모토는 이 계획서를 읽어본 다음엔 반드시 소각할 것을
부탁하였는데도 이것이 밖으로 새어나왔던 것이다.
그루 대사는 위싱턴에 이 정보를 극비로 알렸다.
그리고 진주만 기습공격을 예상한 해군 항공대 지휘관
패트릭 베린저 해군 소장의 보고서등 진주만 공격을
우려하는 여러보고서가 제출되었지만 자만심에 빠진미국은
일본의 능력을 무시하였고 하와이는 안전지대라는 환상에 빠져있었다.
하와이 방어를책임진 쇼트 중장은 우리는 성채와도같은 강력한 요새화된 섬에
살고있다고 말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히컴 기지의 폭격기와 호일러 기지의 전투기들이
하와이 상공을 지킬 것이고 바다에는 태평양 함대가 포진해 있었다.
해안에는 강력한 화포들이 터널 속에 설치되어있었으며 2만5천명의 육군 병력이
훈련을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신문은 하와이는 어떠한 공격에도
맞서 싸울 수 있는 장병과 최강의 함대가있다고 자랑스럽게 보도하였다
하와이 제도를 지키는 거대한 해안포. 터널 속에는 6인치 포가 해안을 향하고 있었다.
총검술훈련 중인 미 육군병사.
군복은 초기형 hbt타입이며 흰색 내의를 착용한 모습.
발목에는 m1938각반을 착용했으며 m1소총에는 m1905 대검을 착검했다.
총검술 훈련 중인 병사들 속에서 청색군복을 착용한 병사가 보인다.
미군의 군복색깔은 1943년까지 모두 짙은 국방색으로 변경된다.
사격장에서 앉아 쏴 자세로 사격하고 있다.
미군은 전쟁 전까지 볼트 액션식 m1903 스프링필드 소총을 재식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미일 양국의 긴장상태 하에서 1941년 4월, 해군 작전 부장 스타아크는
특히 토, 일요일에는 특별한 주의를 요하며 보급 임무를제외한 모든 함선은
임전 태세에 임하라는 지시를내렸다. 그 후 미일관계가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상황이되어 전쟁이 코앞에 닥쳐왔음을 감지한 미국은 필리핀, 괌, 웨이크, 파나마를
비롯한 태평양의 모든 미군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켰다.
1941년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일본해군은 통상 6개월에 한번정도 변경하던
무선호출신호를 15일에 한번 씩 변경하기 시작했다.
이렇게되자 미군 정보당국은 긴장하기 시작하였다.
거기에다 11월 들어서는 일본 항모에서 발신되는
정보들을 제대로 탐지해낼 수 없게되었다.
11월 27일, 해군 작전부장 스타아크 제독은 워싱턴에서 태평양의 모든 제독들에게
긴급전문을 발신하였다. 그는 이것은 전쟁 경고로 받아들이라면서 일본이
앞으로 2~3일내에 공격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했다.
또한 필리핀, 태국, 보르* 가운데 어느 한 곳을 육해공 합동으로 공격할 것이라
추측되는 증거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긴급전문 속에는 하와이에대한
언급은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일본이 하와이는 아니라 할지라도 아시아 지역의 어느 곳을 공격하리라는 것은
이미 예견되어 왔던 것이지만 그 곳이 어디인가를 알아내지 못하고있었던
미국으로서는 불안하기 짝이없었다. 12월들어서도 이같은 상황이 계속되어
일본군 항모의 위치파악을 하지못하자 태평양 함대 사령관 킴멜 제독은
더 더욱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만에 하나라도 일본이 하와이를 공격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12월들어 방수한 일본군의 첫번째 전문을 해독한 해군 정보부는
연합함대의 기함에서 항모에 여러통의 전문을 보냈고,
잠수함부대는 마샬군도 방면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보고서를 상부에 올렸다.
그러나 여전히 항모의 행방은 오리무중 이었다.
킴멜 제독은 에드윈 레이튼 정보 참모를 불러 이에대해 추궁을 하였다.
킴멜은 레이튼 대령이 올린보고서에서 일본 제1항공전대와 제2항공전대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점을 추궁했던 것이다. 1항공전대는 항모 아카기와 가가,
제2항공전대의 항모 소류와 히류는 침묵을지키며 이미 하와이를 향해 출항한 상태였다.
정보장교들은 항모가 너무 먼 곳, 즉 일본근해에있기 때문에
무선이 캐치되지않을 수도있다는안일한 생각에 빠져있었다.
레이튼은 항모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했으나 자신의 추정으로는 아마도
구레 항에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대답했다.
화가난 킴멜 제독이 그 항모들이 호놀루루 남동쪽의 다이아몬드 헤드를 향해
올라올 수도 있는 일인데 뻔뻔스럽게 그걸 모른다니 말이되느냐고 호통쳤다.
레이튼 대령은 자신도 이들 항모들이 빨리 발견되어지길 바랄 뿐이라는 대답만 해야했다.
킴멜이 그토록 궁금해하던 항공모함의 소재는 일본이 2만개에 해당하는
호출부호를 일 순간에 변경시켜버렸고 또한 야마모토가 지시한 엄격한
보안조치때문에 알려지지 않고있었던 것이다.
히토카프 만을 출발하여 거친 북태평양을 가르며 달려오고있는 일본 기동부대는
상호간의 무선이 엄격히 통제 되어있었던 것이다.
한 예로 전함 히에이의 통신장 고우찌 중령은 무선기의 발신부분을 해체하여
그 중요부품을 나무상자에 넣고는 베개 대신 삼아 잠을 자곤했던 것이다.
오아후 섬 남쪽 다이아몬드 헤드. 항모 즈이가쿠에서 발함한 일본군 조종사들은 북쪽을
통하여 오하우 섬으로 들어와 다이아몬드 헤드를 호놀루루의 이정표로 이용하였다.
이들 조종사들은 이곳을 깃점으로 히컴 비행장과 진주만을 찾아들어가 기습하였다.
항모 아카기를따라 진주만으로 향하고있는 기동부대
1941년 11월 29일 일본 외무성은 런던, 홍콩, 싱가포르, 마닐라 주재 일본공관에
암호기계의 사용을 중지하고 이를 처분하라는 훈령을내렸다.
이 전문의 해독문을 읽은 미국 고위층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내용으로보아 일본은 동남아시아의 영국령이나 네덜란드 령의 식민지를
먼저 점령하고 미국에 대한 공격은 다음 시기로 연기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어 다음날인 30일에는 독일 주재 대사에게
일미 양국교섭은 이제 결렬상태에 도달하였음.
일본과 미국, 영국 사이에는 전쟁 돌발의 극히 위험한 상태에있으며
개전의 시기는 상상하는 것보다 의외로 빨라질 수도 있음을
히틀러에게 극비밀리에 전해주길바란다 는 내용의 전문을 발송하였다.
이 전문을 방수하여 해독한 미국은 사태가 급박해졌음을 절실히 느꼈으나
일본의 공격이 미국에 가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른바 헐 노트라 불리우는, 미 국무장관 헐이 만주를 포함한 중국에서의 철수와
인도차이나에서의 철수, 3군동맹 철회등을 요구하자 일본의 노무라 대사와
구루스 특파대사도 헐 국무장관을 방문하여 일본의 최종적 요구안을 제출했던 것이다.
요구사항은 미국이 종래의 정책을 변경하여 미국이 일본이 필요한 만큼의 석유를
공급하고 중국에의 간섭을 중지하라는 것이었다.
이 요구는 일본도 미국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잘알고 있었다.
12월 1일에는 주미 대사관으로 암호기계의 처분이 필요할 때는
해군무관실에 보관한 특수화학약품을 사용하라는 내용의 전문을 보낸다.
일본 해군 무관실에는 만일의 경우에대비해 기밀금고를 처분하는 도구를
비밀리에 보관하고 있었다. 해군 기술 연구소에서 제작한 이 도구는
금속을 용해하는 성분을지닌 직경 20cm, 높이 30cm의 도가니로서
기밀을 요하는 금고나 기계를넣고 불을 붙여 용해시켜 버릴 수 있었다.
바로 이날, 일본 육군과 해군 참모총장은 작전 개시일을
12월 8일로 정했으니 허가해줄 것을 천황에게 간청하여 그 재가를 얻어내게된다.
재가를 얻은 군령부는 오후 5시경에 히로시마만에 정박중인 일본연합함대사령장관
야마모토에게 전문을 보냈다.
" 대해령(大海令) 제 3호를 개봉하라!"
5시 30분, 전문을 접수한 야마모토 사령관은 히토카프 만을 은밀히 출발하여
안개와 강풍의 거친 바다를 6일 째 항해 중인 기동함대에
- 니히다까야마 노보레 - "니다카 산(薪高山)에 오르라! 1208" 이라는 비밀 전문을 띄웠다.
이것은 공격지시 음어로서 개전일은 예정대로 12월 8일로
확정되었으니 행동을 개시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명령이 떨어짐으로해서 이제 미국과의 전쟁은 다시 돌이킬 수 없이 시위를 떠난
화살이 되었으며 기동함대는 진주만 기습을 기필코 성공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쯤에서 일본은 진주만 기습을 은폐하기위한 또 하나의 공작을 펼치게된다.
12월 2일 오후 1시, 이미 한차례 미국에서 일본인들을 고국으로 실어왔던
호화 여객선 다스다 호가 요코하마를 출발하여 로스엔젤레스를 향했다.
그리고 이날 석간 아사히신문은
"태평양 높은 파도를 헤치고 제 2차 미국행 여객선 다스다 호 출항하다" 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다스다 호는 원래 11월 중순에 출항할 예정이었으나
출항일이 거듭 연기되어오다가 11월 27일에와서야 12월 2일로 확정되었던 것이다.
연기되는 동안 아사히 신문은 연일 다스다 호에대한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다 11월 27일에 출항 날짜가 정해지자 아사히 신문은
외무부와 체신부 담화에서 다스다 호 3월 2일 요코하마 출발,
14일 로스엔젤레스 도착, 16일 로스엔젤레스 출발...
이렇게 다스다 호의 운항일정에 대한 상세한 기사를 내보냈다.
미국에도 이러한 소식이전해졌다.
다스다 호는 진주만 기습부대가 북 태평양을 달리는 동안 미국으로
달려가게 되는 셈인데 이것은 미국을 안심시키기위한 술책이었다.
대본영 해군부는 미국으로 하여금 전쟁이 곧 일어나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생각을
갖게할 목적으로 아사히에 이러한 기사를 내보내도록 요구하였고
다스다 호의 출항을 진주만 기습이 코앞에 닥친 순간까지 미뤄왔던 것이다.
선장 기무라 쇼오헤이는 출항 전날, 해군성에 호출되었다.
그는 오사키 중령으로부터 상자하나를 받았는데 그 속에는 16정의 권총이 들어있었다.
실상 다스다 호 는 진주만이 기습당하고 자동으로 개전이 되었을 때 진로를 일본으로
되돌리게되어있었다. 이과정에서 혹 발생할지도 모르는 불미스러운 사고를 대비해
무기가 전달됐던 것이다. 그리고 선장은 선원과 승객들이 방송을 듣지못하도록
라디오의 진공관도 제거 시키고 일체의 무선발신도 금지하도록 지시받았다.
예정대로 12월 2일 다스다 호는 미국을향해 출항하였다.
이렇게 일본은 진주만 기습을 성공시키기위하여 할 수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였다.
8문의 41cm 주포를 장비한 전함 나가토. 야마모토 연합함대사령장관의 기함으로 사용되었다
도라! 도라! 도라!
호랑이! 호랑이! 호랑이!
드디어 그날이.....
7편에서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