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연대 반란사건이후의 한국군의 숙군작업과 폐해.

미연시다운족 작성일 09.01.02 00:3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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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4연대 반란사건이후 여수에서의 진압군과 진압군에 항복하는 시민인지 반란군 협조자인지 모르는 부녀자들 입니다.

 

숙군.. 소위말하면 군에서 있는 숙청을 이야기합니다. 한국군에서의 숙군은 14연대의 좌익들의 여수반란사건이후 에 명령불복종및 사상문제에서의 대두가 되면서의 숙군작업이 진행됩니다. 물론 그 숙군작업에서  글에서 나타나겠지만.. 김창룡이라는 아주 미친놈이 발광을 해대서..  지휘관 인재들 죄다 참살하는 경우로 나가게 됩니다. 암튼 관련글이니 참고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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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군의 배경>

 

숙군의 주요 목표는 군부내의 좌익세력들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숙군을 초래하게 된, 원인은 미군정의 오판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미군정은 한국인들이 현 정부보다는 그들 개개인이 밑고 있는 각 정당들에 대한 충성심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이유로 미군정은 한국인들이 단결하여 강력한조직을 만들기 힘들다는 이유를 들어서 군인들을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평가나 제약을 두지 않았다. 군사국 고문인 이응준이 이러한 것에 제동을 걸고, 신원조회와 조사를 통하여 군인들을 받아들이고자고 주장하였으나,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미군정에 의해 거부된다.

 

그 결과, 좌익군사 사설단체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대규모로 군에 입대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국군준비대 부산지대 부위원장인 오덕준이 장교로 임관할 당시에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병들이 함께 입대했으며, 국군준비대 경북지부 간부였던 하재팔이 창설요원으로 입대하자 그를 따르는 수많은 무리가 또다시 군에 입대한 사실이다. 이밖에도 좌익반란 혐의를 띈채, 국군과 경찰로 부터 수배를 받던 수많은 사람들이 국군의 근간이 되는 국방경비대에 입대하게 된다.


이렇듯, 자신들의 입지를 마련한 이들 좌익세력들은 군부내에 점조직화하며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1947년 미소공회가 결렬된 후, 미군정은 산하의 방첩대에게 명령을 하달하여, 국군내에 있는 남로당 세력들의 활동을 감시하도록 했다. 그 이유는 국방경비대내의 좌익세력들이 확장하게 되면, 좌익에 의한 혁명적 상황이 발생했을 때, 자칫 국방경비대를 동원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숙군의 전개>

 

1948년 11월, 제주도에 있던 제 11연대의 연대장 박진경 대령의 암살사건이 군부내 좌익세력의 숙청에 대한 시발점이 된다. 우선 전군을 상대로 하여 구체적이고 대규모적인 사상검열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부산지역에 있던 11명의 장교들이 조사끝에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며, 제 10연대에서는 총 68명이 체포되었고, 제 1연대에서는 총 89명이 체포되었다. 뿐만 아니라 제 15연대에서는 총 102명을 체포하였으며, 제 4연대 소속의 하사관들이 대거 검거되었다.

 

당시 이범석 국방장관은 군인들의 사상에 매우 큰 관심을 가졌으며,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 끝까지 항거하는 자세를 가진 군대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당시 군부내에서 이루어진 대규모의 숙군은 당시 출범한지 얼마되지 않은 정부의 가장 큰 과제 중 하나였기 때문에 숙군은 신속하게 전개되었다. 1948년 9월까지, 총 1,600여명의 군부내 공산주의자들과 좌익세력들이 검거되었다.

 

이렇듯 대규모의 숙군이 점차 확대되자 미 군사고문단은 서한을 통해, 혐의를 받은 이들에 대해서, 경찰이 아닌 군이 직접 조사, 처리하라고 제안한다. 그러면서 주한미군방첩대를 이양하기 위해서 국군방첩대의 창설을 권고한다. 이러한 이유로 1948년 9월 부터, 국군의 장교들과 사관후보생들을 상대로 1개월 간의 특무교육을 실시하였으며, 그 결과 총 40여명의 인원이 교육을 수료한 뒤, 각 부대로 돌아가 부대내에서 방첩대를 창설하게 된다.

 

또한 원활한 신원 조회를 위해 1948년 8월 부터, 경찰의 협조를 받아 지문 채취를 실시하였으며, 근 한달만에 전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에 대한 지문채취를 끝내게 된다.

 

제주도에서 있었던 제 11연대장의 암살사건이 숙군의 시발점이었다면, 1948년에 있었던 여수 10 . 19 사건은 숙군이 대규모로 확대된 전환점이었다.

 

당시 이범석 국방장관은 10월 22일 연설에서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선동과 반동을 일삼는 무리들에 대해서 정부는 엄격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라고 밝힌다. 이어서 10월 24일 이승만 대통령도 "공사주의자들이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만큼, 강력하게 대응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11월에는 채병덕 총참모장이 "군부내의 사상이 불순한 장병은 물론, 물질적으로 좌우되는 장병과 장교들도 적발할 것이다"라고 밝히며, 곧 있을 대규모의 숙군을 천명한다.

 

이렇듯 정부가 군부의 숙군을 주장하던 당시, 정부와 대립하고 있던 국회도 숙군의 문제에 있어서는 한목소리를 내어 정부의 숙군에 대해서 힘을 실어주었다. 당시 국회에서는 국군이 공산주의자들과 좌익반란 혐의자들의 피난처가 되고 있다고 성토했다.

 

여수 10 . 19 사건에서 토벌에 회의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를 가진 자들이 대규모로 포착되고, 심지어 광주에 주둔하고 있던 제 4연대의 병력들 중 반란군에 합류하는 자들이 나타나자 곧 육군 정보국 산하의 조사반이 숙군을 위한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총 1천여명이 조사를 받아 이 가운데 150여명에 달하는 남로당 인원을 적발하였다. 또한 제 1여단에서도 대규모의 숙군이 실시되어 불순분자 600여명이 검거되었으며, 그 외에도 100여명의 장교와 1천여명의 병사들이 조사를 받았다.

 

1949년 3월 채병덕 총참모장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건전한 사상과 우수한 장비이다. 과거 3년간 미군정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군부내의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잠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10 . 19사건을 계기로 대규모의 숙군을 실시한 결과, 반란에 참가한 이들을 제외한 총 326명의 장교와 병사 1,170명을 처벌하였으며, 이중 이재복, 이용수, 김영식, 김종석, 최남근, 오일균 등을 체포하여 그 조직이 완전하게 드러나, 숙군은 완벽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발표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지속적인 숙군은 전쟁발발 전까지 계속되었다.

 

 

 

<숙군의 결과와 평가>

 

대대적인 숙군사업은 1949년 7월에 표면적으로 종결되었다. 이 숙군 기간동안 총 4,000여명에 달하는 장교와 장병들이 처벌을 받았으며, 이들 병력은 당시 전체 군병력의 5%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였다.

 

숙군의 대상자 중에서 반란주모자와 적극적인 가담자, 폭력. 파괴 혐의자는 엄중한 처벌에 처해 졌으며, 소극적 가담자나 과거 좌익경력이 있는 자들은 정상을 참작하였다. 그 결과 전체 숙군 대상자의 90%는 불명예 제대하는 차원에서 일단락 되었으며, 나머지 10%는 사형과 징역형 등에 처해졌다.

 

공산좌익세력들은 전군에 대해서 점조직화된 세포망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사과정에는 난관이 많았다. 하지만 꾸준히 계속 되어진 숙군결과 이들 군부내의 공산좌익세력들이 모습을 감추게 되었으며, 이후 벌어진 전쟁에서 국군 부대들의 성공적인 전투수행과 전쟁 과정에서 북한에 귀순한 부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숙군의 의의는 크다고 볼 수 있다.

 

출처: Daum 카페  THIS IS TOTAL WAR - [유틸의 한국전쟁사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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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헌병사령관이었던 신상철은 숙군 과정이 무리했음을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당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급히 숙군을 끝마쳐야 한다는 점이었다. 결국 명백한 물증이 없었던 만큼

자백이 증거의 대부분이었다. 반대로 '누가 누가 보장하면 빼준다'는 것이 하나의 원칙처럼 돼 있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다'고 보증해 풀려난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박정희 소령이 대표적인 예).

국방부 발행의 《한국전쟁사》1에서도 "조사 방법이 증거주의가 아니고, 심문하여 자백하지 않으면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문의 결과 동기생이나 또는 술친구들의 자백에 말려

끌려 들어간 무고한 장병들이 고생을 해야 하는 실례가 있었다"

"사형을 당한 사람들이 처형장 마당에서도 애국가를 부르는가 하면, 대한민국 만세,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부르고 총살을 당했다"고 언급함으로써 숙군 과정에 무리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렇듯 엄청난 문제가 있었던 숙군 과정에서 김창룡이 보인 병적인 행동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김창룡은 당시 창립 준비 중인 공군을 40명이나 체포했는데 이는 당시 공군의 거의 전원을 의미했다.

이와 관련하여 박원석 중위(1965년 공군 참모총장)의 경우, 박 중위를 잘 알던 김정렬 대령이 나서

그 검거 경위를 묻게 되었다. 김 대령의 회고에 따르면, 김창룡은 박 중위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없으나

앞으로 접촉할 가망성이 있는 것 같아서 우선 잡아둔 것이라고 대답했다 한다.

이 정도면 그는 정신과 상담치료를 받아야 하는 좌익 강박증 환자였지,

차가운 이성과 냉정함을 갖춰야할 수사관은 아니었던 것 같다.


김 창룡이 주도한 숙군이 전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가장 결정적인 반증은

다음해 한국전쟁 발발 시 국군의 행태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개전 당시 국군의 어처구니없는 행태 속에는 군내 일부의 교묘한 사보타지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개전이 임박한 상황에서 주요 야전지휘관을 교체한 것도 모자라

최전선 부대의 배치마저 바꾸는 상식이하의 행동을 기획한 자가 누구인지를 이제는

밝혀내야 하지 않을까? 왜 하필 비상경계령이 개전 하루 전에 갑자기 해제되고 장병들의 외박과

휴가마저 허락되었을까? 24일의 육본 파티는 누가 계획했던 걸까? 

이 형근장군등 상당수의 야전지휘관들이 의심했던 군내 제5열의 흔적이 이렇게 곳곳에서

묻어났다는 것은 군내의 숙군이 정작 잡아야 할 좌익프락치가 아니라 숙군대상자 거의 대부분이

무고했던 사람들만 잡아다 처벌했기 때문이었다.

 

숙군은 좌익을 색출한 것이 아니라 친일매국세력들이 자신들의 눈에 거슬렸던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솎아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당시 숙군과정에서 처형된 사람들 중에는 미군에서조차 ‘설마 그 사람이 공산주의자일까‘라고

의구심을 드러내며 아쉬워하던 인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유능한 인재들이

없어진 상황에서의 한국군이 전투에서 곤혹을 치룬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김창룡의 최대 업적인 숙군의 가장 큰 혜택을 입은 것은 역설적으로 인민군이 아니었을까?

숙군에도 불구하고 군내에는 여전히 제5열이 존재했다는 방증이 너무 여러 곳에서 보인다.

 

출처:네이버 밀리커리 군사카페 andie0712님의 -다시 쓰는 한국 전쟁사(40)/인물평전(3) 이승만의 수족 김 창룡-글 일부 발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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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군 과정에서 떨친 악명


그러나 군 내부에서 진행된 숙군에는 많은 무리가 따랐다. 당시 헌병사령관이었던 신상철은 숙군 과정이 무리했음을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당시 가장 중용한 것은 시급히 숙군을 끝마쳐야 한다는 점이었다. 결국 명백한 물증이 없었던 만큼 자백이 증거의 대부분이었다. 반대로 "누가 누가 보장하면 빼준다"는 것이 하나의 원칙처럼 돼 있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다"고 보증해 풀려난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군대좌익 조직의 비밀 명단이 입수된 뒤에 암호를 풀어 해당자를 잡아오는 식으로 진행됐는데, 동명이인으로 엉뚱한 사람이 걸려 들어오는 예도 있었다. 또 한 명을 잡으면 "아는 놈 이름을 대라"고 때려가며 조사를 했는데 급한 김에 마구 불다보니 엉뚱한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다.

한편 국방부 발행의 《한국전쟁사》1에서도 "조사 방법이 증거주의가 아니고, 신문하여 자백하지 않으면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문의 결과 동기생이나 또는 술친구들의 자백에 말려 끌려 들어간 무고한 장병들이 고생을 해야 하는 실례가 있었다" "사형을 당한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는 마당에서도 애국가를 부르는가 하면, 대한민국 만세,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부르고 총살을 당했다"고 언급함으로써 숙군 과정에 무리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렇듯 문제가 있었던 숙군 과정에서 김창룡이 보인 병적인 행동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건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김창룡은 당시 창립 준비중인 공군을 40명이나 체포했는데 이는 당시 공군의 거의 전원을 의미했다. 이와 관련하여 박원석 주위(1965년 공군 참모총장)의 경우, 박 중위를 잘 알던 김정렬(金貞烈) 대령이 나서 그 검거 경위를 묻게 되었다. 김정렬 대령의 회고에 따르면, 김창룡은 박 중위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없으나 앞으로 접촉할 가망성이 있는 것 같아서 우선 잡아둔 것이라고 대답했다 한다. 백선엽 회고록 《실록 지리산》에 쓰여진 또 하나의 사건 또한 당시 김창룡의 다소 어처구니없는 행태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한번은 김창룡이 잡아들인 수백 명의 영등포 특별부대 장병들이 재판에 회부됐다 . 사건을 담당한 이운기(李雲起) 법무관은 이들의 진술서가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아 이상하다고 내게 문의해 왔다. 알아보니 김창룡이 부평을 순찰하는데 술집에서 인민군 노래가 울려 퍼져 즉각 술집을 포위해 잡아들이고 보니 특별부대 장병들이었다. 중대장인지가 무조건 한 곡씩 노래를 하라고 시켰는데 한 병사가 노래를 못한다고 극구 사양하면서 "아는 노래는 월남하기 전 이북에서 배운 노래밖에 없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하라"고 해 생긴 소란이었다. 김창룡은 이들을 잡아들여 "친한 놈 이름을 대라"고 족쳤는데 그래서 수백 명이 검거됐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책임질 테니 무조건 무죄로 상신하라"고 했는데 이 일로 이운기 법무관은 김창룡으로부터 "너도 빨갱이다. 꼭 잡아넣겠다"는 위협을 받았고 나와도 몇 달간 신경전을 폈다.

이 시절 무리한 조사로 인해 세간에 이야깃거리가 되었던 사건도 발생했었다. 1949년 9월 하순, 동대문 일대의 권력가인 고희두(高羲斗, 당시 47세)가 방첩대에서 고문 치사된 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으로 취조자 도진희(都晉熙)는 9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복역 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석방되었고, 방척대장인 김창룡은 전속 명령을 받았다. 당시 방첩대는 빨갱이를 조작하는 곳이라는 일반의 혹평을 받고 있었을 정도였다. 이 문제를 계기로 항의와 변명이 오가는 사이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반공은 더욱 강고(强固)해졌고, 나아가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의 이름으로 자신의 독재를 강화시켰다. 전쟁의 발발과 이를 통한 이승만 독재의 강화는 김창룡의 활동 여지를 보다 넓혔고 이에 그는 다시 한 번 물을 만난 듯했다. 그러나 그의 남용된 권력 행사는 점차 곳곳에서 적을 만들기 시작했다.

 

출처:디펜스코리아 hero님 -악질중의 악질 김창룡..- 글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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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볼수 있듯이 악질친일파였던 김창룡이 숙군작업을 하면서 다수 피해를 보게 만든건 독립군 출신들 특히 광복군 출신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이범석 장군마저도 국방장관에서 실각하게된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그래도 숙군작업을 거쳤어도 영관급에서나 위관급에서는 다수의 광복군 출신도 볼수 있었습니다) 이 숙군의 무리한 문제로 다수의 억울한 군에 필요한 지휘관 인재들이 증거도 없이 희생당했고 미군에서조차도 이사람은 아니다 싶은 사람조차도 죽여댄 일자무식의 악질친일파 김창룡의 숙군작업덕에 한국전쟁에서 우리군의 일부 지휘관의 무능력도 한몫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잊혀질수 없게된 사실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숙군작업을 했어도 위 글에 있듯이 진짜 간첩을 제대로 잡지 못한 것이 바로 한국전쟁 직전인 육군본부 하달에 있어서의 모습이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김창룡의 무식함 덕에 큰 혜택을 본건 인민군이니까요.

 

김창용 사후에 있었던 한가지 후일담을 소개합니다. 60년대의 어느 해인가의 육사 입학 시험에 김창용의 아들이 응시를 하여 면접 시험까지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들의 용모가 죽은 김창용을 너무도 빼어 닮아, 육사 교장을 포함한 면접관들이 혼비백산하였다는 이야기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비화 제1공화국에 나옵니다. 이 일화만 보아도 김창용의 무자비했던 숙군 작업에 장교들이 얼마나 공포심에 시달렸고 치를 떨었는지 엿볼수 있습니다. 김창용의 아들은 당시 육사 시험에 최종 낙방 하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의 숙군의 악행이 심각했는지를 알수 있고 지금도 군에서 기무사하면 장교들이 두려워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으로 압니다. 배우지도 못한 무식한놈이 헌병되어서 아부로 특진해서 숙군작업해서 국군을 망친 장본인입니다.

 

p.s 참고로 김창룡이 암살당했을때 이승만 대통령이 국장에 현재 국립묘지에 묘소되었다고합니다. 당장 끌어내야할 존재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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