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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출처 : 대한민국 해군 홈페이지
1999년 북한은 자신들의 꽃게잡이 어선들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6월7일 경비정 1척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이래
해상교전이 발발한 6월15일까지 9일간 총 11여회에 걸쳐 우리 관할해역을 침범하였다.
6월7일 오전 9시 10분경 북한 경비정 1척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이래,
8일까지 양일간 북한어선 15척이 NLL을 4~7㎞까지 침범하고 북한 경비정이 3~4회 침범과 철수를 반복하였다.
이에 우리 해군은 국제법에 의거 고속정 2개 편대의 신호로 철수를 요구하다가,
북한 함정의 행위가 의도적이라고 분석 판단하여 고속정들로 하여금 진입차단 기동작전을 펼쳤다.
9일부터는 북한이 경비정을 10척으로 증강하는 한편, 경비정ㆍ어뢰정 편대를 구성하여 NLL을 7~13.7㎞까지 침범하며
도발의 수위를 높이자, 우리 해군은 초계함 2척, 고속정 5개 편대를 현장에 투입하여 북한 전력대비 우위전력을 유지하고,
적의 도발에 대비하여 만반의 대비태세를 갖추었다.
6월 9일 0600시부터 10일 0400시까지 북한 경비정 8척 중 7척이 NLL을 13.7㎞까지 침범하였으며,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우리 고속정에 대해 북한 경비정이 충돌기동을 시도하여 양측 함정 간에 경미한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이어 6월 11일 0336시부터 1340시까지는 북한 경비정 4척이 NLL을 13.9㎞를 침범하고
우리 고속정에 충돌을 시도하자 우리 고속정은 이에 맞대응 충돌하여 북한 중형 경비정 2척을 대파하고,
2척은 손상을 입혔으며 우리 고속정은 4척이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
교전이 일어난 15일에는 0845시 북한경비정 4척이 NLL을 침범하여 우리 고속정에 충돌을 시도,
0904분 어뢰정 3척을 포함하여 7척의 북한 함정이 우리 관할해역을 침범하여 우리 초계함에고속 접근하자
0907시 우리 고속정 6척이 맞대응하여 역충돌을 시도하였다. 우리 고속정이 북한 어뢰정을 대상으로 충돌을 시도하자
북한 함정에서는 수류탄 4~5발을 던지고 인근에 있던 북한의 경비정과 합세하여
소총사격과 25mm 기관포를 발사하기 시작하였고 추가로 증원된 3척의 경비정을 포함하여 총 10척의 북한함정들이
우리 측 함정을 향해 공격해왔다.
북한 함정의 선제 기습공격에도 불구하고 우리 해군은 북한 함정들을 향해 돌진하며 40mm와 76mm 기관포로 응사하여
교전이 일어난 지 14분 여 만에 북한 함정을 격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교전이 발발한지 14분만에 10척의 북한함정들 중 어뢰정 1척을 침몰시키고 대형 경비정 대파,
중형 경비정 2척 반파(기동불능상태로 예인), 소형 경비정 2척 파손 등 최소 30여명 이상의 사망과 70여명을 부상시키는
큰 전과를 기록했다. 이에 반해 우리 해군의 피해는 4척의 고속정과 1척의 초계함만이 기관실 및 선체 일부가 파손되고
9명의 장병들이 비교적 가벼운 부상을 입는데 그쳤다.
그리고...........................
<연평해전 이긴뒤 대기발령 끝에 옷 벗어>
<해군 예비역 소장 박정석>
(전략)
(당시)해군 2함대 사령관으로 연평해전을 승리로 이끈 박 전 제독에게
당시 전과(戰果)는 자랑스럽고 명예로운 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가 겪은 현실은 달랐다.
그는 연평해전 넉 달 후인 1999년 11월 느닷없이 해군본부 대기로 인사발령됐다.
통상 1년에서 1년 반 정도인 함대 사령관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자리에서 물러난 것.
더욱이 해군참모총장 특별보좌관이라는 직책이 주어졌지만 아무 할 일도 없는 한직(閑職)이었다.
부관과 비서 한 명만 둔 방에서 찾아오는 사람도 없이 썰렁하게 지냈다.
그는 당시의 좌천성 인사 배경에 대해 “인사권자의 고유권한에 대해 가타부타하는 것은 군인으로서 적절치 않다”면서도
“연평해전 이후 남북 군사회담에서 북한 측이 ‘연평해전의 남조선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했다는 것을
회담에 참석한 후배들로부터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북한의 책임자 처벌 요구가 당시 김대중 정권에 먹혀 들어갔다는 의미였다.
그에 대한 좌천성 인사는 당시 국회에서도 논란거리가 됐다.
군 출신인 한나라당 박세환 의원이 2000년 국회에서 이 문제를 따진 것.
그래서인지 그는 6개월간 허송세월을 하다 해군본부 군수참모부장으로 보직 발령을 받았고
이후 정보작전 참모부장을 거쳐 해군 군수사령관을 끝으로 2004년 4월 전역했다.
(중략)
1998년 11월 2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한 후 6개월간 적의 도발에 대비한 교육과 훈련을 시킨 뒤였다.
당시 남북한 함정의 포가 불을 뿜기까지는 숨가쁜 기동전이 이어졌다.
덩치가 크고 속도가 늦은 북한 함정이 충돌해오면 우리 해군은 재빨리 회피하는 작전을 폈다.
경고사격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엔진이 낡은 북한 함정을 무리하게 움직이게 만들어 장비 고장을 유도하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NLL을 고수할 수 없어 결국 우리 고속정이 취약한 북한 함정 선미(船尾)를 들이박아 피해를 입혔고
양측의 긴장은 고조돼 갔다. 남북한 함정 20여척이 서로 꼬리를 무는 기동 공방전은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열흘간 이어졌다.
“컵라면으로 식사를 대신하며 하루 종일 포를 붙잡고 있는 우리 장병들의 얼굴에
처음엔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역력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장병들이 체격도 좋고 영리하지 않습니까.
스쳐 지나가는 북한군의 까맣고 야윈 얼굴을 보면서 ‘붙으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더군요.
사탕이나 껌으로 공포감을 이겨낸다기에 사재를 털어 사탕, 껌 등을 800만원어치 사서 각 함정에 나눠줬습니다.”
6월 13일 서해안 사곶 기지에서 3척의 어뢰정을 출동시키며 공격 의지를 가다듬던 북한군은
6월 15일 아침 9시28분 공격을 개시했다. 그날 아침 북한 함정이 평소와는 달리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박 전 제독은 바로 응전 준비를 지시했다. “적의 공격이 시작됐다는 걸 직감했습니다.
전 함정에 포별로 타깃을 정한 뒤 록온(lock on : 자동추적장치 가동)시키도록 명령했습니다.
적의 함포는 수동인 데 반해 우리 함포는 함정이 어떻게 움직이든 목표를 자동으로 추적합니다.
명령을 내린 지 1분 뒤에 적의 사격이 시작되더군요.”
(중략)
우리는 한 명의 전사자도 없이 적을 완파했다.
76㎜, 40㎜ 함포와 20㎜ 발칸포가 14분 동안 비처럼 포탄을 퍼부은 현장은 처참했다.
갑판에 있던 북한군은 거의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함포의 위력 때문에 형체도 없이 찢긴 사체들이 즐비했다. 적의 함정 4~5척이 침몰, 대파됐고 5~6척이 손상을 입었다.
목격한 전사자만 수십 명이었다. 반면 우리 함정은 고속정 1척이 경미한 손상을 입었고 장병 11명이 부상을 당한 정도였다.
14분간의 전투 끝에 ‘이겼다’고 판단한 박 전 제독은 우리 함대를 후퇴시켰다.
그는 “확전 금지 지침도 있었지만 적이 괜한 복수심을 불태우지 않도록 사체를 수습할 시간을 주었다”며
“적의 육지 기지에서 보복공격을 할 우려도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 북한군의 서해안 기지에서는 당시 지대함 미사일이 발사 준비를 했지만 우리 함정이 물러서자 발사를 포기했다고 한다.
(하략)
근데 이새퀴는 뭥미....ㅉ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