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유시첸코는 대선 1차 투표를 앞둔 2004년 9월 5일 우크라이나 국가보안국 국장 일행과 키예프 교외의 별장에서 저녁식사를 한 뒤 극심한 복통과 함께 얼굴 피부가 심하게 손상되는 증상을 보였다. 즉각 현지 병원에서 1차 검진을 받았으나 식중독 진단이 나왔고 다시 오스트리아 병원에서 검진을 받은 결과 다이옥신 중독으로 확인돼 파문이 일었다.
알렉산더 리트비넨코는 런던 피카디리 광장에서 이탈리아인 마리오 스카라멜라를 만났다. 2006년 10월 7일 체첸에서 러시아 당국의 만행을 폭로하려다 살해당한 러시아 여기자 안나 폴리콥스카야 사건과 관련한 서류를 넘겨받기 위해서였다. 리트비넨코는 폴리콥스카야를 살해한 범인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스카라멜라로부터 폴릿콥스카야 사건의 용의자들로 FSB 요원의 이름이 적힌 서류를 전달받았다. 둘은 인근 초밥 식당에서 점심 겸 저녁을 먹었으며, 통증을 느낀 것은 집으로 돌아와 몇 시간이 흐른 뒤였다. 리트비넨코는 곧바로 병원에 달려갔지만 상태는 점점 심각해졌고, 17일 대학병원으로 옮겼으나 5일 만인 23일 그는 결국 사망했다.
2006년 10월, 러시아 일간지 노바야가제타의 안나 폴릿콥스카야 기자(48)가 모스크바에 위치한 자신의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총에 맞은 시체로 발견됐다. 폴릿콥스카야 기자는 당시 러시아군이 체첸에서 자행한 고문과 인권 유린을 폭로하는 기사를 준비 중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수사는 2007년 8월 러시아 검찰이 그녀의 사망과 연루된 러시아 정부기관 및 내무부 요원 10명을 체포하면서 진전을 보이는 듯했으나, 이들 용의자가 증거 부족으로 풀려나면서 다시 미궁에 빠져들고 있다. 안나는 푸틴 집권 이후 13번째로 청부 살해당한 러시아 언론인이기도 하다.
군 당국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써 왔던 러시아의 군사전문 기자의 추락사에 살해 의혹이 제기됐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러시아의 유력 경제지 코메르산트의 이반 사프로노프 기자는 2007년 3월 2일 모스크바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 5층 계단 창문 아래로 떨어져 숨진 채 발견됐다. 코메르산트는 5일 기사에서 사프로노프 기자가 평소 군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써 온 보복으로 살해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코메르산트는 “수사 결과가 자살로 결론지어질 가능성이 높지만 그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이를 부인한다”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나라에서는 당국이 싫어하는 기자들이 속속 죽어나간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우주군 대령 출신인 사프로노프 기자는 1997년 입사 이후 군 당국을 비판하는 기사를 여러 건 써서 연방보안국(FSB)에서 국가기밀 누설 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했다.
특히 지난해 말에는 신형 블라바 대륙간탄도미사일이 3차례 연속 발사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처음 보도해 정부를 당혹하게 했다. 이 미사일 발사 계획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 핵전력의 주축”이라고 추켜세웠던 것이다.
1967년 영국에 망명하려고 했던 소련인 물리학자 블라디미르 토카첸코. 망명직전에 그는 소련대사관으로 끌려와서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태워졌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독물이 체내에 퍼져 있었다. 영국인 의사단이 최선을 다했으나 해독시킬 수 없는 심한 독물이었다. 그에게 투입된 독물에는 방사능이 끼어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영국정부는 할수없이 소련대사관과 협상에 들어갔다. 소련측은 만일 그가 소련측에 인도되기만 하면 생명을 살려낼수 있다는 약속을 영국측에 했다. 인명을 제일로 삼고있는 영국정부는 그들의 약속을 믿고 토카첸코를 소련대사관에 인도했다. 그후 토카첸코의 소식은 오리무중에 빠져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1941년 2월10일 공산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한 후 워싱턴에서 숨진 채 발견된 월터 크리비츠키. 그는 사인이 밝혀지지 않아 결국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그 진상은 여전히 수수께끼다.
1937년 9월. 옛 KGB 공작원 이그나세 라이스가 공산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한 후 스위스 로잔에서 무장괴한들의 자동소총 세례를 받고 사망했다.
볼셰비키 혁명가이며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스탈린과의 타협을 거부했던 레온 트로츠키는, 1936년부터 시작된 스탈린의 대대적인 숙청으로 가족과 거의 모든 측근을 차례로 잃고 해외로 도피와 망명을 거듭했으나 1940년 8월 20일 망명지 멕시코에서 스탈린이 보낸 암살 공작원에 의해 등산용 송곳으로 무참히 살해당했다.
(피격에 사용된 브라우닝 권총과 사건현장 / 성형수술 전과후)
1996. 2. 13 김정일 본처 성혜림 일행 서방 방문 보도
1997. 2. 15 경기도 분당 서현동 아파트에서 괴한에 권총 피격
1997. 2. 16 국무총리 긴급 안보 치안 관계장관회의 개최, 이한영 피격사건 수사본부
(본부장 경기경찰청장 김덕순)설치
2. 25 피격 11일만인 오후 9시 이한영 사망
10. 27 부부간첩 진술토대 이한영 피격사건 북한 사회문화부 소속 특수 공작조
‘순호조’ 소행, 성형수술을 하고 내려와 임무수행후 입북 확인 수사발표
1988년 중앙일보 자매지였던 중앙경제신문 오홍근 사회부장이 OOO요원에 테러를 당한 뒤 병원에 입원해 누워있다.
88년 8월 6일 오전 7시30분 서울 강남구 청담동 S아파트 입구. 당시 오홍근 중앙경제신문(당시 중앙일보의 자매지) 사회부장이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서자 대기하고 있던 OOO요원 4명이 오 부장의 팔을 잡고 "대공에서 조사할 것이 있으나 같이 가자"고 끌고 가려 했다. 이들은 오 부장이 저항하자 얼굴을 때려 넘어뜨린 뒤 작전용 특수칼로 오 부장의 왼쪽 허벅지를 찌르고 달아났다. 수사 결과 테러 사건에 가담했던 이OO 등 3명이 구속 기속되고, 이OO 등 5명은 불구속 기소됐다. 이OO은 월간중앙 88년 8월호에 게재된 '청산해야 할 군사문화'라는 제목의 오홍근 칼럼이 군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있다며 부하인 박OO에게 오 부장 테러를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유럽 거점 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가 의문사한
고(故)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 사건 일지
1973년 10월 16일 최교수 중앙정보부에 출석
10월 18일 최교수 의문사, 중앙정보부, ‘간첩활동 자백하고 투신했다’고 발표
2005년 2월 14일 2심법원, 국가는 유족에게 18억 4천 8백만원 손해배상 판결
4일 오전 계동 현대사옥에서 투신자살한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의 시신을 경찰들이 수습하고 있다.
전 국정원직원 김기삼씨는 5월 3일, 워싱턴 D.C 내셔널 프레스센터' 에서 "노벨상 수상 공작 전모"를 밝혔다. 김기삼씨의 폭로 전문은 다음과 같다.
<(1)~(6)...생략>
“(7). 정몽헌 회장을 시켜 김정일에게 15억 달러(1조 5천억원)를 전달하였고 이러한 비밀을 끝까지 숨기기 위해 정몽헌 회장을 살해하지 않았나 의심된다.”
우리는 여자 일행이 탄 차가 대기하는 순간 모셔다 드리겠다며 기다리라고 한 뒤 카지노에서 나와 막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려는 김형욱 앞에 서서 “밖에 여자 손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안내했다. 김형욱은 약간 술이 올라 있었다. 여배우가 타고 있던 캐딜락 문을 열자마자 “저희가 모시겠습니다”하면서 팔을 잡고 부축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동시에 즉시 코에 마취제를 스쳤다. 타고 있던 여배우 일행에게는 “많이 취하셨으니 오늘은 저희가 호텔로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차에서 내리도록 했다.
--여배우 일행이 보는데 그게 가능한가?
첫 만남이기 때문에 김형욱은 우리를 여배우의 보디가드로 알고 있었다.
그녀가 당시 한국 정계에 대단한 파워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보디가드를 붙였다고 해도 김형욱은 의심하지 않았다. 여배우는 거꾸로 우리가 김형욱의 보디가드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축하고 앉히고 하는 과정에 특수 기술을 썼다. 그런 기술을 쓰면 사람은 어리어리한 상태로 잠시 말을 못하고 술취한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김형욱을 앉히자마자 여자 손님에게 “오늘은 너무 취하셨으니 저희가 호텔로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한순간에 그렇게 납치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김형욱 제거는 우리 팀이 이미 1년 전부터 준비했다. 1978년 11월부터 일본을 경유해 이스라엘 텔아비브에 본부를 둔 비밀 정보기관 모사드에 파견되어 특수 훈련을 받았다. 암살 현장답사와 실행 지휘는 내가 담당했다.
이스라엘 정보 및 특수공작 연구소 관할로 모사드 내의 모사드라 불리는 전투 공작원 관리담당 극비부서 코메미우트 소속 살인 납치 전담기구 키돈.
이들이 받는 정식 교육은 다양하고 전문적인 내용이다.
이들이 실제 활동에서 애용하는 것들 중 스틸레토 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칼끝으로 가면서 넓어졌다가 끝에 가서는 다시 좁아지는 칼날이 달린 예리한 단검이다. 이 칼은 찔렀다가 뽑아도 피가 밖으로 흐르지 않는다. 뽑을때도 살이 도로 붙게 된다. 이 칼의 특징은 갈빗대 사이로 깊숙이 찔러서 비틀면 안에 있는 것이 다 찢어진다는데 있다. 그런 다음에 그냥 뽑기만 하면 된다.
또 다른 것으로 엄지와 검지에 칼날이 하나씩 달려 있는 특수장갑과 갈고랑쇠가 함께 사용되는 야르멜커가 있다. 장갑을 끼고 두 개의 칼날(하나는 스위스 군대에서 쓰는 칼같이 접히게 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융단칼처럼 생겼다)을 붙인다음 다시 갈고랑쇠를 붙이는 형태이다. 이것은 상대방의 목을 쥐고는 손만 오므리면 된다. 마치 가위의 용도와 같다. 뭐든지 자를 수 있으나 금방 끝나지 않는다. 죽이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이것을 사용하려면 힘이 좀 세야 한다. 주위의 이목을 끌게될 염려를 없애기 위해 머리꼭지 뒷부분을 밀고 거기에 머리카락으로 만든 야르멜커를 엮어 넣은 가발을 사용하기도 한다.
언제인가는 차속의 요인을 암살하는 과정에서 차 뒷유리로 걸어가 9밀리 피스톨의 연장된 탄창을 사용 두 사람의 머리를 잽싸게 번갈아가며 열한발을 쏘고 확인하기 위해 운전석 옆으로 가서 보니 두 사람의 머리부분이 아예 없어져 버렸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구소련의 KGB가운데서도 가장 극비부문으로 알려진 제1국의 V과는 암살, 유괴, 파괴공작 등 특별지령공작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부문으로, 그 존재와 활동내용 등은 다른 과의 멤버에게조차 밝혀지지 않는다.
제1국은 해외에 있어서의 극비활동을 한손에 맡고 있는 기관인데 그 중에서도 V과는 초극비성이 요구되는 가장 위급성을 지니는바, 매우 어려운 공작들을 내용으로 하는 일들이다. V과는 “최종적 해결책”의 실천을 주로 하는 기관이다.
훈련의 시작은 심리전에서부터이다. V과의 멤버는 한마디로 전문암살자이고 테러리스트의 지도자가 되어야만 한다. 여기에는 온갖 폭력과 피비린내 나는 장면에 대한 정신적인 면역 상태를 지녀야 하는 것을 절대로 필요로 한다.
훈련생은 캄캄한 방속에서 의자에 앉혀진다. 그리고 양팔과 몸의 둘레는 벨트로 꽁꽁 묶여서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얼굴은 정면으로 향해진 채 움직일 수 없도록 고정되고 두 눈을 깜박거릴 수 없도록 특별한 장치가 되어있다. 그리고 그러한데서 오는 반응을 재기 위해 뇌파, 심장의 고동, 호흡, 페이스 등을 탐지하는 기구가 몸에 채워진다. 정면에는 영화용 스크린이 걸려진다. 훈련생은 모든 정력을 한곳으로 집중시켜 스크린을 보도록 지시받는다.
처음에는 매우 부드러운 필름에서 시작된다. 예를들면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성인식에서 한 소년이 마취하지 않은 채로 할례를 받는 장면이라든가, 기혼여성의 바람기를 막기위해 생식기의 일부를 잘라내는 장면, 제왕절개 수술이나 양족절단수술 등인 것이다.
필름은 점점 그 강도를 더해간다. 루비앙카 형무소 안에서의 고문, 시베리아에서의 처형, 나찌의 유대인 대량학살 등. 이러한 필름은 KGB기록 보존소에 산처럼 쌓여 있으므로 부족함이 없다.
대부분의 훈련생은 처음 두 세 개의 필름을 보는 시점에서 구토증을 일으킨다. 그리고 제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듯이 위장을 해도 부착된 탐지기를 속이지는 못한다. 특히, 헝가리 동란때의 것으로서 다섯 살 가량의 어린이가 소련군전차에 돌을 던졌는데 전차 뒷뚜껑이 열리면서 소련병사가 기관총의 조준을 맞춘다. 다음 순간 어린이의 몸체는 박살이 나고 두개골과 내장은 주위에 산산이 흩어지는 장면처럼, 훈련생이 강한 반응을 보인 필름은 몇 번이고 되풀이되어 스크린에 비춰진다. 며칠이고 계속해서 보는 동안에 저절로 그 반응도가 희미해진다. 3개월 후에, 반응이 제로이든가 그에 가까운 상태에 있으면 성공으로 간주된다.
이 일이 끝난 다음에는 암살과 테러에 관한 실천적인 연수의 단계에 들어간다.